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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황제, 송휘종 10/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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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7,573회 작성일 10-10-28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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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회화사 12th hour : A Painter-Emperor, Huizong and Imperial Patronage 송휘종, 그림 그리는 황제




Emperor of Huizong 1082-1135/1100-1126                                 태호석 

                                                          

휘종은 북송을 망하게 한 황제이지만, 시, 서, 화에 능했다. 휘종은 신종의 11째 아들이며 형 철종이 25 살에 후사 없이 급사를 한다. 휘종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아악이라는 음악 장르를 시작하고, 편경이라는 악기가 고려에 전파가 된다. 다도에 조예가 깊고, 여러 분야의 책을 집필하고, 왕이라는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만 제외하면 예술과 문화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Suzhou 수저후 

           

북송의 수도 개봉의 궁궐 안에 황제가 사랑하는 그림, 글씨가 꽉 찼으며, 돌을 또한 사랑하여 정원을 꾸밀 거대한 암석이 필요한데, 난징 옆의 수저후에서 나는 거무튀튀하고 구멍이 뻥뻥 뚤린 태호석이 유명하다 하여 (개봉과 수저후는 기차로 12시간 걸리는 거리인데) 백성들에게 돌을 날라오게 한다. 외교적으로는 요, 금에게 조공을 계속 바치며,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상황이지만, 요와 금 사이의 삼각구도에서 송나라는 그런대로 버티고 있었다. 변방의 사람들은 거란족과 여진족이 노리고 있는 것이 불안했고, 황제의 돌을 실어 나르는 백성들의 민심은 날로 흉흉해지다가, 마침내 수저후에서 방랍의 난 (1120년)이 일어나고, 7년 후에 북송은 망하고 남송이 열린다.



방랍의 난이 터질 무렵, 송나라는 금과 손을 잡고, 요의 멸망을 획책하고 있었다. 왕조가 망할 때는 항상 간신이 있게 마련인데, 채경이라는 재상과 동관이라는 내시가 있었다. 동관은 휘종의 입안의 혀가 되어 그림, 돌을 계속 구해다 주고, 자신의 환관정치를 폈고, 무능한 동관은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계략을 짠다. 금은 송나라가 잘 싸워서 요의 땅을 탈환하면, 변방의 연운16주 (베이찡 주변) 를 송나라에게 준다고 약속을 하였다. 그런데 내부적으로 방랍의 난이 터지고, 방랍이 거의 왕이 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휘종은 15만 군사를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지만, 민심은 방랍에게 기울고, 군사들은 회군하는 길에 방랍의 난 주변 사람 300만명을 죽이는 대학살을 벌인다. 힘이 쇄진된 송의 군대는 요와의 전쟁에서 역활을 못 하지만, 금나라는 요를 멸망시킨다. 송은 연운 16주를 갖지 옷한다. 

6년 후, 1126년에 정강의 변 Jingkang Incident 이 일어난다. 망한 요나라의 잔당과 손을 잡은 것을 괘씸하게 여긴 금나라가 개봉에 와서 휘종과 아들 흠종을 최북단 하얼삔으로 납치, 감금한다. 휘종은 거기서 죽고 흠종의 동생이 남으로 도망을 쳐서 남송을 세우고,  해상도시 황저우를 수도로 정한다. 금나라는 징기스칸이 나타나 원을 세우기 전까지 중국의 중원을 다스린다. 소설 수호지는 무능한 왕 휘종과 방랍의 난을 주제로 쓰여진 소설이며, 실제 인물인 탐관오리 채경, 동관이 등장하며, 양산박 지역을 중심으로 한 민중 봉기의 이야기이다.

Song Dynasty 960-1279   Southern Song Dynasty 1127-1279, 황저우 (임안 Linan)

 


육화탑 Liuhe Pagoda 970/1121/1165, Hangzhou

 
황저우의 육화탑이 방납의 난 때 없어지고, 1121년에 재건된다.

악비 Yue Fei 1103-1142                                                                    진회 Qin Hui 부부 동상

            
                                      


악비의 어머니가 악비의 등에 나라에 충성하라는 의미의 타투를 새기고 있다.

악비는 남송의 장군으로 금나라에 투항을 주장했으며. 후세인들은 악비를 나라 보호의 symbol 로 여긴다. 악비는 국토를 되찾기 위해 금과 싸워야 한다는 개혁파이고, 진회는 현 상황에 맞추어 살자는 온건파이다. 악비가 진회의 모함에 의해 죽고, 무신인 관우와 악비는 거의 신격화 된다. 진회는 20세기에 중국 공산당에서 매국노 (한지엔) 계보에 1위로 올랐으며, 중국인은 이름에 ‘회’ 자를 쓰지 않는다. 악비의 묘 옆에 진회의 동상을 놓은 이유는 사람들이 침뱉고 욕하라는 의도이다. 

유조 Youtiao
 
기름에 튀겨 죽인다는 팽형의 시작이 진회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밀가루 두 가닥을 꼬아서 진회부부를 만들어 기름에 튀겨 먹는다. 항저우의 유조나 북경의 꽈지는 극악무도한 죄를 의미하는데, 근원은 진회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의 인물을 평할 때는 현재의 역사에 투영시켜서 평가한다. 송시대에는 요나라, 금나라가 중국 땅덩어리의 주인공이었고 북송은 힘이 약한 변방의 나라였다. 그런데 현재의 시점에서 한족 중심의 역사를 쓰다가 보니까, 북송이 주인공이 되고, 악비가 영웅, 진회가 간신이 된다. 그러나 중국은 2000 년 부터 역사 쓰기의 방법을 바꾼다. 중국 땅 덩어리에 걸쳤던 모든 민족은 중국이라고 주장한다. 금나라도 우리나라 중국인데 금나라를 치자고 했던 악비를 영웅시하면 안되고, 진회에 대한 평가도 현명한 외교가로 탈바꿈한다. 역사는 정치적 흐름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단지 30%가 fact 이고 70% 는 해석이다.

Emperor of Huizong, Song Dynasty, Attributed to Zhang Xuan 장헌 Court Ladies Preparing Newly Woven Silk

 

송나라 때는 master 의 그림을 따라서 모사를 하는 것이 미술 공부를 하는 방법이었다. 휘종의 그림을 주변의 신하가 따라서 그리고, 그림이 잘 되었으면 휘종이 낙관을 찍었다. 그런 이유로 진작, 위작의 구분이 애매하다. 당나라 장훤의 진작이 없어지고, 휘종이 장헌의 그림을 모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휘종은 한림 도화원 Han Lin imperial Painting House 을 세워, 그림을 모으고, 가르치고, 궁중화가를 공부시킨다. 휘종이 사자성어를 화제로 주고 시험도 보며, 독창적으로 잘 해석한 그림에 황제의 도장을 찍어 준다. 역사적으로 나라가 망할 때는 인종말살을 시킨다. 한림도화원은 3000점의 그림을 모았으나, 금나라는 궁궐에 수 많은 사람을 가둬놓고 불질러 죽이니, 휘종이 사랑했던 그림들도 잿더미로 사라진다. 

휘종은 그림 collection 이 많다 보니, 선화화보 Xuanhe Collection of Painting (1110-1120 사이) 라는 도록 catalogue 을 만든다. 선화는 휘종이 다스리는 해의 연호이며, 그림의 품목을 연대순, 작가순으로 나열하고 작가의 전기도 포함시켰다. 송나라 때 많은 그림의 이론들이 정립되었는데, 선화화보는 활원서에서 소개하는 책 중의 하나이다. 타이뻬이 고궁 박물관은 선화화보에 의거하여 그림을 분류했다. 휘종은 선화화보의 제1의 장르는  불가와 도가의 그림을 합친 도석화 Xuanhe huapu 이며, 소경화, 원체화, 화조화는 그 아래 간다고 보았다. 휘종의 열렬한 지지 아래 북송 말기에 도교가 성행하고, 남송을 가로지르는 정치이념인 주자학이 도교의 영향을 받는다.


조영양 1070-1100 Landscapes after Ancient Masters: Level Vista with Trees and Water Buffalo, after Zhao Lingrang

 

강북산수처럼 위에서 떨어지는 족자도 아니고, 옆으로 펼쳐지는 강남산수도 아니다. 세밀하고 채색이 들어가고 아기자기한 그림이 나타난다. 소경화 Xiao Jing 는 산수 중 일부만 뽑아서 그리는 작은 풍경으로, 들판이나 물가의 좁은 경관을 그린다. 남송의 화가 조영양이 소경화를 발전시켰는데, 휘종의 taste 는 조영양에게 배우고 싶었다. 휘종은 꽃과 새를 그리는 화조화가로 유명하다.


왕선 Wang Shen 1037-ca 1093, Fishing Village in Light Snow

 
휘종은 왕선에게 그림을 배우겠다고 옆에 둔다. 산봉우리에 금가루를 뿌렸고 청록산수처럼 청색이 나온다.


휘종, 청금도 Listening to the Lin (고금, 7줄 현악기)

                                  
휘종의 음악 사랑이다. 나무 밑에서의 고금연주를 고관대작이 경청하고 있다.


휘종, Dragon Stone

 
방납의 난을 일으키게 한 휘종의 돌 사랑-- 그림과 글씨도 썼다.


휘종, Five-Colored Parakeet on a Blossoming Apricot Tree, Museum of Fine Arts, Boston

 
중국 회화에는 도교의 중요한 꽃인 살구나무, 복숭아 나무, 복사꽃이 많이 나온다. 도교의 유토피아 무릉도원에도 복숭아가 많다. 도교가 성행하면서 복숭아 이야기는 신격화가 되고, 민간, 무속 신앙의 탈을 쓰고 민중 속으로 들어간다.


휘종, Pigeon on a Peach Branch, Private collection, Japan



복숭아는 귀하고 영험한 과일로 나타난다. 공자의 시경에서 한창 예쁠 나이의 여자를 복숭아꽃에 비유하며, 연인이 사랑을 나눌 때도 복숭아를 주고 받는다. 귀신을 내쫓는 나무라서 유교의 제사에는 쓸 수가 없다. 복숭아는 도교의 중요 이념인 불로장생을 의미하는데, 동방삭이 3000년에 한 번 꽃 피고, 3000년에 한 번 열매 맺는 복숭아를 훔쳐먹는다. 삼천갑자 동방삭이란 말이 생긴다. 동방삭 신화가 도교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고, 복숭아 나무가 정신병을 치료한다고 믿어 도교의 도사는 도장을 만들어 부적으로 지니고 다닌다.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복숭아 나무 그림을 선물로 준다. 비둘기는 다산의 상징이다. 이 그림은 일본에서 국보급 national treasure 에 들어간다.
 

최백 Cui Bai 1056-1080, Magpies and Hare 1061, 오원유 Wu Yuanyu



까치는 도교에서는 길조의 새, 예언의 새로, 적이 들어옴을 미리 알려준다. 화조화는 단순히 꽃이나 새의 예쁨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꽃, 새에 담긴 의미 전달이 목적으로, 길조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선물로 주고 받는다. 원, 명, 청을 이어가면서 산수화가 큰 자리를 차지하지만, 소경화와 채색에 관심이 있었던 휘종은 다리역활을 했던 이공린처럼 궁정화가의 그림을 이어간다


휘종, Golden Pheasant Cotton on Rose

 


휘종, Plum and Birds

 
소경화, 원체화는 수묵화와 대비되는 개념인데, 한림도화원에서 휘종도 그리고 신하들에게 그리라고 해서 장르를 굳힌다. 휘종은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왕이지만, 회화사에서는 몇 백년 동안 주인공 역활을 한다.

휘종, Two Finches

 

수묵화나 화조화의 원리는 나무가 있으면 반드시 꽃이 있거나 혹은 동물이 같이 있는 조화를 중요시 했다. 바위가 있으면 반드시 대비가 되는 물건이 있어야 한다. 중국에서는 음과 양이 함께 공존하여 평행을 유지함이 세상의 원리, 사물의 이치라고 보았다.

서양사에서 몬드리안은 나은 세상을 향한 사회개혁의 도구로 대비, 조화를 이루어 같이 가야 한다고 보았는데, 동양에서는 인간이 살아야 하는 기본적인 이치로, 그렇게 살지 않으면 병이 나고 잘못 된다고 본다. 성리학의 理 리, Li 를 중심으로 모든 중국 회화를 읽어 낼 수가 있다. 단지 시대적으로 어떤 때는 불교, 도교, 유교에 더 기울어져 있을 뿐이다.

몬드리안의 이론이 한 급 떨어진다. 중국은 이렇게 우수한 이야기를 이미 몇천 년 전에 했는데, 오늘날 왜 그렇게 되었나? 첫째는 여유 있는 소수의 사대부 gentry 계층만 이런 생각을 했다는 점이다. 소수의 사대부들만 사서오경 읽고, 과거 보고, 고위 관료가 되어, 예술 장르를 향유했다. 민중들의 media 가 아닌 elite 예술이었다.

둘째 이유는 송나라는 최초로 화폐를 사용한 capitalism 을 시작했고, 동북아의 무역, 상업의 중심이었는데, 요, 금, 원, 청 등의 비한족이 중원을 호령하다 보니까 capitalism 의 발달의 흐름이 끊기고, 공산주의로 넘어갔다. 

셋째는 송나라의 그림은 철저한 계급 사회를 나타내는 브르조아적 taste 와 맞물려있다는 점이다. 20세기에 불교, 유교 사원을 폭파시키고 부셔뜨리는 분위기에서 마호쩌둥은 브르조아의 그림을 아끼고 소중하게 다룰 수가 없었다. 또한 그림의 운명이 브르조아의 탈을 쓰고 일본과 외국으로 나갔다는 점이다. 중일 전쟁 후에 우리 중국을 배신한 매국노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은 국보급 그림이 일본사람에게 선물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일본 사람은 그림을 너무 좋아해 거의 다 가져갔다.

12세기의 그림을 보면서 20세기의 그림의 역사를 반추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머물러서 하나만 너무 좋아하면 위험한 사랑이 된다. 역사는 주변국과 같이 봐야하며, 20세기 미술 얘기와 더불어 21세기 미술 이야기도 함께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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