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회화 산수화 김시, 이경윤, 김명국 3/22/11 > 김미연 아트노트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미연 아트노트


 

조선 중기 회화 산수화 김시, 이경윤, 김명국 3/22/11

페이지 정보

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6,624회 작성일 11-03-28 23:17

본문

한국 조선 미술  3rd hour: Mid Joseon, Landscape Painting  조선 중기 회화 산수화 1550-1700



조선 초기에 남송의 문인화의 영향을 받은 강희안의 그림 풍이 절파 학풍으로 이어져 중기에 이르러 김시, 이경윤, 김명국이 절파 학풍을 이어간다. 절파는 사대부를 중심으로 하는 인물 중심의 관념적, 명상적 그림이며 여백을 중시하며 calligraphy 처럼 일필휘지로 힘있게 그리며 먹의 농담으로 형체를 나타난다. 또한 조선 중기에는 한 작가가 여러가지 스타일을 그림에 보여준다. 
 
김시는 김 안루의 아들이며 사대부 작가이다. 1537년에 아버지가 유배를 가서 사약을 받자 관직을 버리고 멀리 시골로 들어가 remote 한 생활을 하며 산수, 인물을 그린다. 문장가 최립, 글씨의 한호, 그림의 김시는 조선 중기의 3절로 불린다. 산수 인물화는 인물을 부각시키고 경치를 작게 그리는 소경 산수화, 경치를 크게 하고 인물을 작게 그리지만 인물이 정확히 보이는 대경산수화의 2 종류가 있다. 초기 강희안 때는 남종화파라는 이름이 있었고 강희안을 통해 무르익으면서 절파라는 이름이 나타났다.

김시 1524-1593 동자견여도
 
김시는 절파계 화풍을 받아들인다. 작은 아이가 꾀를 부리고 있는 말을 끄는 그림이다. 대각선 구도이며 절파학풍의 효시에 속하는 그림이다. 붓질의 강약이 마하파와 비슷하기도 하다.

김시 한림제설도 1584
 
겨울의 산림에 눈이 오는 풍경이다. 인물 묘사는 없지만 그래도 절파라고 한다. 산이 두리뭉실함은 안견의 영향이며 붓으로 지렁이처럼 묘사한 운두준법이다. Line 의 강세로 명암을 주고 마치 drawing 처럼 윤곽선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야망이 컸던 김시의 아버지가 정적에게 몰려죽자 김시는  일평생 그 충격에서 벋어나지 못해 그림 속에 삶의 허망함과 쓸쓸함이 보인다.

이경윤 산수도
 
이경윤은 16세기 말의 사대부화가이며 산수화 영묘화를 잘 그렸으며 절파 학풍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림 안에 다른 두 스타일이 같이 들어가 있는데 앞부분은 북송의 곽희파 계열로 부벽준을 썼으며 입채감이 있으며 뒷부분은 점으로 연결된 듯한 운두준법을 쓴 미법 산수풍이다.
 
이경윤 고사탁족도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이경윤의 고사탁족도는 사대부화 느낌이 나고 부벽준법과 소나무에 점으로 연결한 것같은 미법화풍과 한번에 그려내린 듯한 illustration 같다. 마하파와 절파는 다 사대부적 스타일을 쫒아서 그린다. 조선 초기 화가인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는 남종문인화의 영향을 받고 붓질이 생략이 된 듯 일필휘지로 그린 사대부화이다.  

김명국 달마도
 
김명국은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돌, 물의 묘사에 독특한 화법을 구사했다. 필치에 힘이 있으며 calligraphy에 훈련이 된 화가로서 일필휘지의 그림풍 이다. 화원의 선생으로 1636년 인조 14년에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다. 남송의 불교 선승들이 그리는 선종화 스타일을 도입한다. 김명국의 달마도는 유명하다. 조선 중기의 김시, 이경윤, 김명국은 절파로서 구도가 대각선으로 한쪽으로 몰려 있으며 부벽준을 쓰고 마하파에 비해 후경를 묘사한다.  

조선후기는 1700-1850년으로 숙종에 이어 경종이 1720년에 등장하고 영조로 들어가서 나라가 안정이 된다. 탕평책 실시, 당쟁 제거, 신문고가 부활되고 정조가 1776년에 등극한다. 겸재정선이 영조 임금 시기에 활동하는데 진경산수화가 이때 시작되고 25대 철종의 조선 말기에 들어가 중국의 남종화를 선호하면서 중국의 전통을 따르면서 전통 회화인 진경산수화가 사라진다.

겸재 정선이 활동할 시기에 진경 산수와 실경산수가 등장한다. 진경산수는 경치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realism 에 가까운 개념이며 실경산수는 경치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naturalism 이라고 할 수 있다. 실경산수는 한국의 산천을 그대로 그리되 묘사 스타일은 중국의 준법을 따른다. 겸재 이전에는 아무도 실제로 보이는 한국의 산천과 사람을 그리지 않았다. 이에 반해 진경산수는 내용도 한국의 산천이며 묘사도 한국적이고 창의적인 스타일로 한다.  당시에 명나라의 한족이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 만주족이 중국의 중원에 등장한다. 조선에서는 명나라가 없어진 판국에 사대부적 사고가 바뀌어 청나라보다 우리가 낫다는 독립적인 사고를 하게 되고 우리 것을 찾자는 방향으로 사고의 틀이 바뀐다. 실학 정신의 배경이 회화에 나타나 우리의 산천을 직접 보고 그리자는 운동이 일어나며 있는 장면을 그대로 묘사하지만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현실의 이면을 드러낸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고 화가의 관념과 개념이 들어가 현실을 넘어선 풍경 surrealism 이 나온다. 이것을 진경산수라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화가들에 의해 주관적으로 추상화하고 이념화하여 산수화가 그려지며 자의식이 성장하면서 우리나라 고유의 산수를 개성 있게 우리의 스타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후기의 실경산수화를 진경산수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작가는 18세기 초 겸재 정선이 대표 작가이다. 그는  직접 인왕산, 금강산 등에 가서 관찰하고, 이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독자적인 화풍을 시작했고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등이 대표작이다.

겸재정선 인왕제색도
 
겸제 정선은 조선 후기의 화가로서, 종래의 중국회화의 답습의 일변도에서 벗어나 한국적 회화를 수립한 거장이다. 그는 중국의 풍경이 아닌 우리의 산수를 우리의 화법으로 그린 것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와 함께 가장 한국적인 미술이라 평가 받고 있다. 겸재는 사대부 집안의 아들이지만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 가문에서 학자를 만나며 교육을 받는다.
 
겸재 정선 청풍계도

 
겸재는 금강산을 다녀온 후 조선의 정경을 그대로 묘사하고 조선사람들을 그리니까 중국적인 모습을 그리던 사대부들은 겸재의 그림을 보고 놀란다. 우리의 자연을 보다 의식적으로, 사실적으로 다루기 위해 전국각지를 여행하면서 실경, 소위 진경을 사생하였고, 이러한 그의 실경묘사로부터 '동국진경산수'란 말이 쓰여지기 시작했다.

겸재 정선 금강전도
 
〈금강전도〉우리 나라의 산천을 소재로 하여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표현 기법으로 그렸다고 평가된다. 그림 윗부분에는 비로봉이 우뚝 서 있고 거기서 화면의 중심인 만폭동을 지나 아랫부분 끝에는 장안사의 비홍교가 보인다.
 
묘법에서, 그는 소나무를 그릴 때 여러 짧은 횡선과 약간 굽은 비스듬한 사선을 사용하여, 우리나라 특유의 야산의 약간 굽고 가는 소나무를 표현하므로써 새로운 소나무형을 창안했다. 또 수직준을 변화시켜 외금강을 비롯한 금강산 일대의 바위들 생김새의 특징을 잘 살리면 화면전체에 거칠고 강한 선으로 이루어진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렇듯 한국의 산수를 그리기 위해 수직 수평으로 된, 겸재준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유의 화법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 다른 진경산수의 맛은 서울근교를 위시한 바위산을 넓은 먹자국을 사용하여 바위의 볼륨과 생김새를 표현한데서 잘 나타나는데, 즉 인왕산봉과 같이 둥근모양을 한 화강암의 귀가 잘려져나간 형상을 누구의 흉내도 아닌 새 묵법을 써서 나타내었다. 이러한 실경화로는 「인왕제색도」「청풍계도」 등이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