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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바로크 미술: 니콜라 푸생 1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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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슬리 댓글 0건 조회 9,271회 작성일 11-10-15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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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미술 17 세기 6th hour: Baroque Art in France and England 
 


 
 
France and England in the 17th C
 
 
1600년에 이태리 메디치가의 딸 Marie de Medici 가 프랑스 앙리 Henry 4세의 부인이 되자 프랑스는 이태리와 교류를 가지고 국왕의 후원 아래 미술가, 예술가를 로마에 보내 공부를 시킨다. 앙리 4세는 1598년에 낭트칙령 Edit of Nantes을 발표하여 신, 구교가 같이 공존하는 방향으로 나가 위그노 종교 전쟁을 종식시킨다. 낭트칙령은 17세기 유럽에서 프랑스가 대국이 되는 계기가 되고 루이 14세 때 프랑스 국력이 바로크 미술과 더불어 절정을 이룬다. 루이 15세는 국력을 바탕으로 나라를 말아먹고 귀족의 사치와 향락이 극에 달하여 루이 16세에 이르러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1685년 루이 14세(1661-1715)가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프랑스는 다시 로마 가톨릭 중심 국가로 되돌아가 불안한 상황이 된다.  이 무렵에 왕 중심으로 큰 사업을 벌여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새로 짓는다. 프랑스 혁명  전 까지 정치무대의 중심은 파리가 아닌 베르사이유가 된다.
 
 
Jacques Callot, Hangman’s Tree, Great Miseries of War 1633
1648년 신교를 인정하는 웨스터 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조약이 체결 되기 까지 신, 구교는 싸우면서 사람을 파리 떼처럼 죽여서 나무에 매단다. 또한 죄를 지은 사람의 몸에 체벌을 가하는 잔인한 풍습이 있었다.
 
 
George de La Tour, Joseph the Carpenter 1642
 
조르주 드 라 투어는 French Baroque painter로 궁정화가로 일했다. 위의 그림은 이제 껏 보아온 종교화의  주제 Nativity, Annunciation 과는 좀 다르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mystery 로 가려져 있어 보기 드문 주제였는데 조르주 드 라 투어는 어린 예수가 아버지 죠셉과 목수 일을 하는 장면을 그린다. 카라바지오의 영향으로 빛의 원천인 촛불이 꺼질 듯 어둡고 humble 한 복장의 죠셉이 drill 로 구멍을 뚫어 십자가를 만들고 있어 다가올 crucifixion 을 예고하는 듯 하다. 혹은 포도주를 짜는 도구인 듯도 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따른 피와 성혈의 전례Eucharist 를 암시한다. 무엇이 다가올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소년은 촛불을 들고 아버지를 돕고 있다.  17세기 프랑스 미술은 드라마 속의 gesture 같은 화려함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Nicolas Poussin (1594-1665), Self-Portrait 1650
 
 
니콜라 푸생은 프랑스 미술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작가이다. 1630년 정도에 푸생이 화가로서 자리를 잡고 프랑스가 회화의 강대국이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는 1660 년대에  French Royal Academy 를 설립하여 프랑스 미술의 규범 토대를 마련한다. 푸생은 노력형 천재로서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하는 독특한 성격으로 그림 한 장을 그리기 위해 drawing 을 수십 장 한다. 그림의 주제는 classical literature history 로서 거창한 역사화 수준으로 프랑스 국왕과 정부가 필요한 그림을 그린다. 동네 도시의 수요를 만족시키는 그림을 그리는 네덜란드 화가들과는 다르게 거창한 주제를 그리며 루벤스와 비슷한 화가이다. 역사에 나오는 영웅적인 주제 grand manner of classicism 를 주로 그리며 색이 튀면 절대로 안 되고 하는 식으로 Academy 의 규범을 만든다. 위의 자화상은 화가로서의 전성기 50대에 그린 것으로 stylish 한 반지도 하나 끼고 멋져 보이려고 노력을 한 분위기이다. 당대 화가들의 꿈은 로마에 가서 바티칸의 고대 조각 및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는 것이었는데 푸생은 국왕의 명령으로 로마에 가서 오래 머물며 활동을 한다. 벨라스케스처럼 왕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푸생은 그렇게 총애를 받지는 못했다.
 
 
Nicolas Poussin, Death of Germanicus 1627-28
 
언뜻 보면 티션의 그림 같은 색채감이 있으며 빨강색이 그림 중심의 축에 있다. 게르마니커스 장군의 죽음을 비통해 하는 부인과 가족들, 동료들이 조의를 표하는 영웅적인 모습, 앞의 사람은 하늘을 가르키며 ‘저기서 만나자’ 하고 있다. Detail 에 치밀하여 영감의 원천이 되는 소스를 다 찾을 수가 있다. 푸생이 20 대에 그린 그림으로 로마의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 미켈란젤로 풍의 웅장한 몸 등이 나타난다.
 
 
Nicolas Poussin, The Abduction of the Sabine Women 1633-34

 
고대 로마 설립 신화에 나오는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Romulues & Remues)가 테베 강에 버려지는데 늑대가 구해서 젓을 먹이면서 키운다. 형이 동생을 죽이고 자신의 이름Romulues를 따서 로마를 설립 한다. 그런데 여자가 없어서 로마 밖의 사빈 지역에 가서 여자들을 훔쳐와서 인구가 시작되고 로마가 번창 했다는 신화적 이야기이다. 그림에서 제일 위에 빨강 옷을 입은 로물루스가 서 있는데 지도자로서 적절한 때에 결단을 잘 내려서 일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메세지를 준다. 각 그룹의 인물의 자세를 연구해서 그린 듯 시스틴 채플의 벽화 수준 이다. 죽기 살기로 딸을 못 가게 붙잡고 늘어지는 아버지, 엎어진 할머니와 애기, 칼로 내리치는 장면 등, 바로크 미술의 특징인 긴장감이 느껴진다. 요새와 성은 바로크 당시의 건물에 가깝고 튀는 색이 없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잘 흘러간다.
 
Giovanni Bologna, Rape Sabine Women 1583                Nicolas Poussin, The Abduction of the Sabine Women, detail
  
            
 
지오반니 볼로냐는 매너리즘 시대의 조각가이며 미켈란젤로의 영향으로 몸이 꼬였다. 푸생은 이 조각의 자세를 보고 ‘사빈 여자의 납치’ 중의 한 장면을 그린다. 실제로 무대를 만들어 건물 모형과 점토 인형을 세워보고 drawing 을 수십장 씩 하였기에 원 그림에서 완벽한 원급법이 나온다. 노력형 완벽주의자 푸생은 그림 속에 강렬한 운동감 보다는 조각 처럼 정지된 동작 frozen in action 을 보존 하고자 했다. 질서 정연한 건물과 치밀하게 계산된 인물을 그림에 집어넣는 푸생은  카라바지오의 그림 ‘매튜의 소명Calling of Matthew’이 조야crude하고 천하vulgar다고 아주 싫어했다.
 
 
Pietro de Corpora, Allegory of Divine Providence 1633-39
 
푸생은 바로코의 회호리 치는 듯한 움직임의 구도를 싫어했다.
 
 
Annibale Carracci, Landscape Flight into Egypt 1603
 
안니발레 카라치 풍의 조용하고 정돈 및 정지된 그림을 좋아하는 푸생은  카라바지오를 싫어하여 ‘Caravaggio came into the world to destroy the painting’ 이라고 악평 했다. 푸생이 Royal Academy 에서 정립한 미술 이론은 19세기 에코 데 보좌르 까지 전통이 내려간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의 구도를 중요하게 가르치고 색깔과 구도 쓰는 법을 훈련시킨다. 19세기에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 법칙의 엄격한 준수에 반기를 들고 에코 데 보좌르에서 탈퇴를 한다.
 
 
Nicolas Poussin, Landscape with John at Patmos 1640
 
로마의 오벨리스크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 푸생의 뛰어난 기량이 나타난다. 하지만 너무 규격적인 그림을 계속 그리다 보니 사람들이 나중에는 식상한다.
 
 
Claude Lorrain, A Pastoral Landscape 1648
 
푸생의 제자 클로드 로랭은 베니스 풍경화의 영향을 받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린다. 네덜란드 풍경화에서 땅이 차지하는 부분은 1/3 인데 프랑스 풍경화는 땅이 ½ 에 가까운 비율을 차지한다.
 
Claude Lorrain, The Tempest 1635
 
클로드 로랭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균형 잡힌 상태를 그리려고 했으며 수평선이 네덜란드 풍경화 보다 좀더 높게 위치한다.
 
 
Hyacinthe Rigaud, Portrait of Louis XIV 1701

 
18세기에 들어와 태양왕 루이 14세는 바로코 절정에 달한 화려한 스타일을 탄생시키고 ‘국가가 바로 나’ 라는 절대 왕권을 확립했다. 신체적 결함이 많은 65세의 국왕을 그려야 하는 궁정 화가 히야신스 리고는 고충이 많았다. 화려한 붉은 천개canopy를 드리우고 대리석 기둥을 뒤로 하고 비단 옷을 둘둘 말아 무대에 선 장엄한 모습으로 루이 14세를 연출시킨다. 칼도 차고 왕을 상징하는 scepter, 프랑스 왕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을 옷에 무늬로 넣었다. 슬립퍼, 코트 등 장식적 요소에 의지하여 장엄을 강조한다. 니콜라 푸생은 이 시기 프랑스 미술의 장식성을 좋아하지 않아서 로마에 가서 오랫동안 체류한다. 
 
 
Velasquez, Philip IV of Spain 1644
 
벨라스케스는 통찰력 있는 관찰로 스페인 왕 필립 4세의 표정과 인격 까지 잡아낸다. 이에 비하면 히야신스 리고의 루이 14세 초상화는 바로크 풍으로 장엄하기는 하지만 개인의 인격이 보이지 않는다.
 
 Mansart, Vestibule of Chateau of Maisons 1642-1650
 
타원형으로 자른 것 같은 긴 형태, 직사각형에 가까운 타원형 지붕 등 바로크적이다. 미켈란젤로의 양식을 따라서 고전 양식적인 건물을 짓다보니 모양이 강조되고 과장이 되어 바로크 식이 된다.
 
 
Court of the Louvre 1655-1674
 
루브르 궁전 확장 공사가 바로크 시대 1655-1674년 사이에 파리에서 진행된다. 1672년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 거주하기로 결정하고 루브르를 왕실의 수집품을 전시하기 위한 장소로 쓰도록 했다.
 
 
Square Court of the Louvre, Paris, Pierre Lescot, begun 1546
루브르 궁전은 12세기 후반 필립 2세의 명으로 착공되었는데, 그당시만 해도 궁이 아닌 요새였다. 이 요새가 루브르 궁이 되기까지 수차례에 걸친 건물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다. 르네상스 시대 프랑소와 1세가 1546년에 루브르 궁전을 확장시킨다.
 
 
East Front of the Louvre, Louis Le Van, Claude Perron, Charles de Brun 1667-1670
 
루이 14세는 당시에 유명한 이태리 조각가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Bernini를 초대하여 루브르를 디자인 하게 하지만 궁전의 건축에 이탈리아 식이 이미 많이 들어와 있어서 베르니니를 쓰자는 의견이 무시가 된다. 프랑스는 이 시기에 문화 강국의 열망이 생겨서 1648년에 미술 아카데미를 세우고 이 즈음에 과학 아카데미도 설립하여 국학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베르니니 대신에 프랑스 건축가를 이용하여 루브르를 짓는다.
 
 
Bernini’s Design for the Louvre 1665
 
바로크의 일그러진 조개 모양, 곡선, 타원형으로 된 베르니니의 다자인이다. 하지만 베르니니의 디자인은 채택되지 않는다.
 
 
Garden Front of Center Block of Palace of Versailles, Louis Le Vau, Jules Hardouin-Mansart, Charles le Brun 1669-1685

 
당시 프랑스에서 진행된 또 하나의 큰 project 는 1669년에 시작된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는 일이었다. 루이 14세는 파리에 궁전이 있지만 취미 생활을 즐기고자 파리 근교의 전통적인 수렵지 베르사이유 마을 근처의 빈 땅에 바로코 미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궁전을 16년 동안 짓는다.  1층과 지하는 부엌 등의 service area 이며 2층에 왕족이 거주하는 방 및 침실이 있고 3층은 하인들 방이 있다. 
 
Plan of Versailles in 1789
 
베르사이유 궁전을 점차 확장시킨다. 연못에 Neptune 등의 바로코 시대 statue 를 세우고 마리 앙투아넷 왕비도 자신이 좋아하는 별장을 짓는다.
 
Aerial View of Versailles

 
베르사이유 궁전의 핵심은 정원이다. 루이 14세는 루브르로 돌아가지 않고 17, 18세기 동안 베르사이유가 정식 궁전이 되어 사신들도 여기로 온다. 왕의 chamber 에는 목욕하는 곳은 있었지만 궁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장실은 후대에 와서 넣었다. 또한 프랑스 귀족들은 가발을 늘 쓰니까 머리를 안 감았다고 한다.
 
 
Hall of Mirrors, Palace of Versailles, begun 1678
 
베르사이유 궁전의 바로크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hall 이다. 비싼 crystal 을 사용하고 금도금을 하고 주도capital 에도 금을 입혔다. 프랑스 미술의 장식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부분으로 촌뜨기 외국 사신이 와서 보고 놀란다. 그런 목적으로 왕실의 주요 행사를 이곳에서 한다.
 
 
Salon de la Guerre, Salon of War, Palace of Versailles, Antoine Coysevox, Jules Hardouin-Mansart, Charles le Brun
 
왕과 독대 할 때 루이 14세가 쓰는 화려하고 장엄한 방이다. 금도금의 국왕 문장이 있고 루이 14세가 말타고 승전하는 조각이 있는 매우 장식적인 방이다.
 
Le Petit Trianon
 
   
 
마리 앙투아넷 왕비가 좋아하던 별장으로 이곳에서 시녀들과 평범한 농민 옷으로 갈아입고 소꿉놀이 하듯 놀았다고 한다.
 
 
Vigée Le Brun, Marie-Antoinette and Her Children, Musée de Versailles 1787
베르사이유 궁전 박물관에 있는 마리 앙투아넷 왕비와 자녀들의 초상이다.
 
 
Gran Trianon
 
루이 14세가 좋아하던 별장으로 마블로 꾸미고 이곳에서 연회를 연다.  
 
 
J.H. Mansart, Church of the Invalides, Paris 1677-1691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나 병약한 사람을 위한 교회로 루이 14세 때 지었다. 쥘 아르두앙 망사르의 디자인으로 그리스 신전 처럼 남성적으로 보이지만 카톨릭 교회이다.
 
 
Pierre-Paul Puget, Milo of Crotone 1671-82
 
고대 그리스의 운동선수wrestler 밀로는 말년에 숲 속에서 나무를  부셔 보려고 하다가 손가락이 박힌다. 빠져 나오려고 애쓰지만 전설의 늑대에게 물어뜯혀 죽어 간다.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은 바로코적 주제이다. 물리치려고 버둥대는 늙은 얼굴과 몸이 극악하고 extreme 극적인 dramatic 상황을 연출하며 사람의 감정을 쥐어 짠다.
 
 
Christopher Wren (1632-1723), St. Paul Cathedral, London 1675-1710
            
바로코 미술이 영국으로 건너간다. 크리스토퍼 렌은 귀족 버금가게 교육을 잘 받고 옥스포드 대학을 다닌 지식인이다. 고전 문학을 좋아하여 Italian Master 인 Vitruvius, Alberti 등을 책으로 공부했다. 런던이 불Great Fire of London(1666)이 나서 도시의 반을 새로 짓는데 그 프로젝트를 맡아서 하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나중에 귀족 작위를 받는다. 크리스토퍼 렌은 고전 미술의 지식을 이용하여 전통을 따른 둥근 원형 교회 플랜을 처음에 제시한다. 하지만 위촉자 런던시가 identity 의 필요성을 느끼고 Greek Orthodox 교회 처럼 보이는 것을 싫어하자 렌은 플랜을 수정 하여 Latin style 로 만든다. 파리의 Church of the Invalides 와 비슷한 양식이다.
 
Blenheim Palace, Woodstock, England, John Vanbrugh and Nicholas Hawksmoor, begun 1705-22
  
 
 
영국 Oxford 에서 북서쪽으로 8 마일의 거리에 위치한 성이다. 1704년에 French and Bavarian troops 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John Churchill 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서 지어서 그에게 하사한다. 18세기에 영국 왕족이 사는 궁전의 모습으로 Buckingham Palace 의 축소판이다. 요즘 영국에는 이런 성을 팔려고 내 놓은 것이 많다. 구매 가격은 싸지만 유지비가 비싸 상당한 경제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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