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hour: 고대 그리스 시대 이전의 건축 9/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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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7,530회 작성일 13-09-15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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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 History of Architecture: Ancient to Contemporary
1st hour: 고대 그리스 시대 이전의 건축 Introduction & Architecture before Greece
이번 학기의 주제는 건축사 이다. 서양 미술사는 전통적으로 장르에 위계질서가 있었다. 가장 으뜸이 되는 장르는 건축으로 고대 그리스 및 르네상스 시기에는 건축가가 가장 많은 존경을 받았고, 조각가, 화가 순으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동아시아권에서는 서예가 최고로서, 장인들이 제작한 그림, 건축, 조각은 격이 떨어진다고 여겨왔다.
건축은 스케일이 크고 어렵기 때문에 많은 후원이 필요했고 동시에 명성을 누려왔다. 중세 교회 및 르네상스 궁전을 지을 때는 펀딩이 없어 몇 십년 동안 끌기도 했다. 또한 전근대 시기에는 사람들이 단명했다. 건축가의 주제 하에 작업을 하다가 그가 죽으면 다른 건축가를 찾아서 인수 인계를 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퀠른 대성당은 150년 동안 지었고, 노르트담 성당 역시 각고의 노력으로 지었지만 결국 첨탑을 완성하지 못 하였다. 중세인의 견해로는 미완성인 채로 두는 것이 완성일 수도 있었다.
로마시대에 가면 이름을 아는 건축가 비투루비우스 등이 등장하지만, 중세의 장인, 기술공들은 거의 익명으로 남아 있다. 르네상스 시기에 유명한 부루넬리스키, 미켈란젤로 등 천재가 등장한다. 19말-20 세기의 모더니즘에 이르면 시대를 앞서가는 비젼을 가진 건축가들이 나와서 전통을 깨고 기괴하게 생긴 집을 세상에 내 놓았다. 또한 유명한 건축가의 성격 및 사생활 등이 기록으로 전한다.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커미션을 받아 집을 지을 때마다 커미션한 사람의 부인과 연애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20 세기 건축가 루이 칸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아들이 있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1. 구석기 시대의 동굴 유적지
Paleolithic Cave Painting: Chauvet, Altamira, Lascuax, and Pech-Merle (구석기 동굴 벽화:쇼베, 알타미라, 라스코, 페슈 메를 )
구석기 시대에는 날씨가 춥고, 도구도 거의 없었기에 자연 상태로 퍼져 있는 동굴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프랑스 피레네 산맥으로 넘어가는 산악 지역에 구석기 유적이 남아있다.
Site of Chauvet Cave, Vallon-Pont-d'Arc, Ardeche. France, ca 30,000-28,000 or 15,000-13,000 BCE (쇼베 동굴 발견 장소, 발론 퐁 다크 아르데슈, 프랑스)

위험한 동물을 견제할 수도 있고, 비도 피할 수가 있어서 지대가 높으면서, 물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굴에서 살았다.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잎과 풀을 깔고 잠자리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Discoever of site, Jean-Marie Chauvet, who found the cave in December of 1994 (쇼베 동굴을 발견한 쟝 마리 쇼베)
동굴 유적지는 벽화로 인해 많이 발견되었다. 벽에 그린 동물 그림들은 구석기인들이 조형 활동을 한 증거로 생각된다.
Plans of Pech-Merle and Alta Mira Caves (페슈 메를과 알타미라 동굴 플랜)

Footprints Le Tuc d'Audoubert, Ariege, France, ca. 15,000-10,000 BCE ( 프랑스, 아리에쥬, 르 튁 도드베르, 동굴에서 발견된 고대인의 발자국)
진흙이 부드러운 상태였을 때 고대인이 밟은 발자국이 남아있다. 기원전 만년에서 만 오천년 정도로 추정된다.
Schematic Plan of Lascaux 라스코 동굴 플랜

조개껍데기 및 쓰레기 등 생활 유물이 라스코 동굴에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주거용 집은 아닐거라고 추측된다. 구석기에 자신이 사는 집을 벽화로 장식을 할 정도로 시간과 노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학자들은 의례용의 신성한 공간 및 부족들의 회의, 교육 등 특별한 용도로 동굴 유적지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둔다.
Hall of the Bulls, Lascaux Cave, Dordogne, France, ca, 15,000-10,000BCE ( 황소 홀, 라스코 동굴, 도르도뉴, 프랑스)
라스코 동굴 안쪽에 장식이 있으므로 의례용으로 쓰였을 것 이라고 추측한다. 당시에 가능한 유일한 도구인 돌도끼를 이용하여 심미적인 장식을 하였다.
2. 서유럽의 신석기 문화 Neolithic culture in Western Europe
Menhir alignments at Menec, France, ca, 4250-3750 BCE (멘히르, 메넥, 프랑스)
신석기로 넘어간다. 신석기에는 사회계급이 분화되면서 대규모 프로잭트가 가능해진다. 구석기는 도구도 제한적이고 자연 그대로의 환경에서 몇명씩 나누어서 살았다. 하지만 신석기에 와서는 강이 있는 평원으로 주거지를 옮겨서 사람들이 인구 집약적으로 모여 살았다. 중요 유적지에는 몇 만명 까지 살았다고 한다.
Menhir 멘히르
세워져 있는 고인돌을 멘히르 라고 부른다. 신석기에 사회가 분화되고 일사분란한 조직 속에서 분업이 이루어지면서, 이런 거성 문화가 나타났다. 산에서 사람 크기의 몇배가 되는 돌을 발견하여, 지렛대, 원목 등의 도구를 사용해 끌어 와서 건축물을 지었다.
Menhir alignments at Menec, France, ca, 4250-3750 BCE (멘히르, 메넥, 프랑스)
신석기에 몇 만명이 모여 살게 되자 힘이 센자가 지도자가 되고 계층의 이루어졌다. 조직의 구조 및 명령체계를 갖추어 집약적인 노동력이 가능하여 건축의 규모가 커졌다. 영국의 스톤헨지, 북부 프랑스 메넥에 거성문화가 남아있다.
Menhir Alignment at Menec, Carnac, ca 4250-3750 BCE (멘히르, 메넥, 카낙)
멘히르는 바둑판처럼 줄을 지어 들판에 흩어져 있는 고대인의 공동체community 이다. 몇 백년 동안 게획하여 지은 성소 및 상징적 의미의 공간으로 생각된다. 영웅적인 부족장 혹은 일찍 죽은 귀한 집 자제의 무덤을 commemoration 하는 고대인의 장례문화이다. 신석기시대의 장례문화는 건축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있다.
Aerial view of Stonehenge, Salisbury Plain, Wiltshire, England, ca. 2550-1600 BCE (스톤헨지, 살리스베리 평야, 윌셔, 영국)
스톤헨지 이다. 거성문화( 메가리딕컬쳐 megalithic culture, 메가리스 megaliths)로서 한반도의 고인돌의 개념으로 북부 프랑스와 영국의 스톤헨지에 약간 남아있다. 주거하기 좋은 평원 지역인 세느 강변도 메가리딕컬쳐가 있었을 텐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Cromlech or henge, Stonehenge, Salisbury Plain, Wiltshire, England, ca. 2550-1600 BCE (스톤헨지, 살리스베리 평야, 윌셔, 영국)
신석기 및 청동기인들은 집이나 뚝을 쌓을 때 스톤 헨지에 남아 있는 깍은 돌을 가져다 사용하였으므로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한국에서도 구한말 후에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중요했으므로 문화재 훼손이라는 생각이 없이 유적지의 돌을 가져다 썼다.
Dolmen 돌멘
돌멘이라고 하는 고인돌이다. 수직 위에 수평이 들어가는 구조로서, 이것을 기본 단위로 하여 옆으로 늘이고 위로도 높혔다. 돌멘에서 서양 건축의 기본 단위인 Post(기둥) and Lintel(상인방) System 이 유래한다.
Dolmen 돌멘
신석기 시대에 인공으로 만든 최초의 주거 문화가 생겨났다. 강주변의 부드러운 땅을 파서 터를 잡고, 돌로 기둥을 만들고, 나무로 지지대(상인방)를 올리고, 갈대 등을 이용하여 지붕을 덮었다. 집터 주변에는 토기조각, 조개 껍질 등 쓰레기가 많이 발견되었다. 조개는 물물 교환의 매개물로 화폐의 역활을 했으며, 동물뼈, 생선뼈를 갈아서 바느질도 하였다. 신석기에 발달된 주거 문화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Post and Lintel System 포스트 린텔 시스템
기둥과 상인방의 구조이다. 상인방은 기둥보다 가벼워야 하므로 정교하게 잘 깍은 돌을 올려 놓는다. 고대 그리스 신전, 르네상스 건물도 포스트 린텔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이 시스템은 큰 돌이 있어야 하므로 재료를 구하기 힘들고 노동력이 많이 든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벽돌을 만들어 썼다. 진흙을 판으로 찍어서 햇볕에 말리기만 하면 단단한 벽돌이 만들어진다. 인류의 지혜가 발달하여 더 합리적인 시스템이 나온다.

신석기 시대에 이런 큰 돌을 깍으려면 오랜 세월이 요구되었다. 더 강한 돌을 도구로 하여 무른 돌을 깍아냈다. 바위에 홈을 내서 물을 흘려 넣고 겨울을 지나면 돌이 깨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가능한 방법을 사용하여 정연된 모습으로 깍아냈다.
Stonehenge, Salisbury Plain, Wiltshir, England, ca 2550-1600 BCE (스톤헨지, 살리스베리 평야, 윌셔, 영국)

기원전 이천 오백년 정도의 영국의 스톤헨지이다. 영국 중북부 살리스베리는 아직도 신석기 이지만, 땅이 비옥하고 날씨가 온화한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는 이 시기에 이미 청동기로 접어들었다. 지역마다 편차가 있다.
Reconstruction Stonehenge, Salisbury Plain, Wiltshir, England (스톤헨지, 살리스베리 평야, 윌셔, 영국)

살리스베리 스톤헨지는 원형으로 나열을 했으며 안에 여러개의 라인이 방향성을 보인다. 강둑처럼 쌓은 뱅크가 있고 골이 있는 기하학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어떤 용도 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고고학은 명확하게 밝혀내기는 불가능하고 가능성 있는 논리적인 가설을 전개한다.
Stonehenge, Salisbury Plain, Wiltshir, England (스톤헨지, 살리스베리 평야, 윌셔, 영국)
거성 문화는 보편적으로 모든 문명에 나타난다. 신성한 특별한 목적을 위해 공동체가 몇 백년 동안 노력하여 만들어 놓은 구조물 이라고 추측된다. 영국의 스톤헨지는 천체 관측용 이라는 가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
Marking the Passage of the Sun? Summer Solstice 하지 때 태양의 움직임 측정

태양의 움직임을 살피는 천체 관측용으로 스톤헨지를 지었다는 학설이 현재로 제일 신빙성 있다. 태양의 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그림자를 측정하여 씨 뿌리는 시기를 계산하여 농업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춘분, 동지, 하지에 맞추어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농업용 캘린더를 만들어 그 지식을 후대에 전수했다.
3. The Ancient Near East 근동 지방 (메소포타미아 지방)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몇몇 부족은 벽돌을 만들어서 서양 건축의 근간이 되는 중요 모티브를 제공했다.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가에 위치한 메소포타미아는 문명이 시작된 비옥한 초생달 지역 이다. 날씨가 좋아서 씨만 뿌리면 식물들이 저절로 자랐으며, 신석기 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살기 시작했다. 우기에는 강의 하구에 물이 불어나 홍수가 범람했다. 고대 문명에서 의미하는 홍수는 땅을 비옥하게 하는 좋은 의미로 해석되었다. 강하구에 있는 수메르 지역에서 최초로 문명이 발생했다. 청동기에 들어와서 왕, 신하, 평민 등의 계급이 생기고, 부족 간의 전쟁에서 적을 잡아와 종으로 부렸다.
남쪽 수메르 지역은 처음에는 문명을 이루었지만, 땅이 너무 비옥하여 생활이 편하다 보니 전투력을 상실해 가고, 반면에 강 위쪽 부족은 시간이 지날수록 문명을 발달시켰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역사는 척박한 북쪽 부족들이 내려와 수메르 지역을 정복하려는 전쟁이 2-3천년 동안 계속되는 이야기 이다.
북쪽 엘랑, 바빌론 사람들이 내려오고, 도시도 갈수록 북부로 올라간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최후의 승자는 산악지대에서 무예를 익힌 아시리아인 이다. 아시리아인은 수메르 지역을 초토화 시켜, 자신들의 문화권으로 삼고, 수도를 위로 올려 님라드에 요새같은 궁전을 짓고 문명권을 지키다가 결국 페르시아인에게 망한다. 산악지대에 사는 페르시아인 역시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가지고 싶어했다. 페르시아가 패권을 잡고,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 고대 그리스 시대가 되면 그리스는 무시무시한 페르시아 전쟁을 겪게 된다. 한편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동시에 이집트 문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Summerian Art
Catal Huyuk, Anatolia, ca. 6000BCE (카탈 휴육, 아나톨리아, 터키)
근동인이 만들었던 집터이다.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기원전 이천년 경의 집단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House Interiors, Catal Huyuk (집 구조, 카탈 휴육)
사각형 모양의 집들이있고 오픈 코트가 있고, 지붕으로 다녔다고 한다. 아마도 치안 및 여자들 보호를 위해 입구가 없고 지붕으로 출입을 했을 것 이라고 생각된다. 날씨가 더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옥상 정원이 중요한 주거 문화 였다. 타지방인들은 옥상 위의 정원에 대추 야자 및 과일 열매가 열린 모습을 동경의 눈으로 보았다.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므로 지붕에 정원을 꾸밈은 논리적이고 당연한 해결책 이었다. 화덕 및 서비스 area 도 있었으며, 세련된 수준의 도시 문화가 있었다.
근동지방의 정치 제도는 theocracy (씨오크래쉬, 신정정치) 였다. 신과 정치적 지도자가 동일하다는 개념이다. 왕은 신의 아들이므로 그의 통치를 받는 것은 당연하고 백성으로서는 영광된 일이었다. 신의 아들이므로 왕권의 세습은 정당화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는 신정정치 였지만, 한편 고대 그리스는 인간이 우월하다는 democracy 를 펼쳤다. 그리스도 신화의 세계가 있긴 하지만,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신과는 상관없이 능력으로 추대된 왕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적 제도 theocratic socialism 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은 신전이었다. 근동인들은 사회가 가진 모든 자원과 노동력을 쏟아부어 하늘을 찌를 듯한 오만한 탑 지구라트ziggurats 신전을 지었다.
Babylonian deed of sale, ca, 1750 BCE 바빌로니안 문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문자생활을 하였기에 문명권을 선두로 달릴 수 있었다. Cuneiform(큐네이폼, 쐐기 문자) 이라고 하며, 진흙판에 돌이나 막대를 깍아서 글자를 써서 문서를 만들었다. 청동기에 들어와서 문자를 소유하고 이용하는 권력층과 지배를 받는 층으로 계급이 나누어진다.
Mud brick kasbahs at Ait Ben Haddou Morocco (진흙 벽돌, 카스바스, 엩 벤 하도우, 모로코)
북아프리카 모로코 지방에 가면 지금도 진흙으로 벽돌을 찍고 햇볕에 말려서 집을 짓는다. 언덕의 경사를 이용하여 지은 집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거 환경과 비슷했을 것 이라고 한다. 부족끼리는 지붕을 타고 다니면서 통하지만, 적군이 바다를 타고 올 경우 들어가기 어려운 형태이다. 방어용 요새 목적의 주거 집단이다. 비옥한 수메르 지방으로 적들이 계속 내려오니까 방어 체제를 갖추고 살았다.
Mud brick at Ait Ben Haddou Morocco (진흙 벽돌, 엩 벤 하도우, 모로코)
모로코 지방의 진흙 벽돌로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벽돌과 유사했을 것 이라고 추정한다. 강에 있는 진흙을 구해다가 틀에 넣어서 햇볕에 말리는 방식으로 손쉽게 만들었을 것 이다. 내구성이 강하다.
Plan of the "White Temple" on its ziggurat, Bent axis approach
벽돌을 수만개를 쌓아서 지구라트 계단형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19 세기 말에 영국 고고학자들이 이라크에 들어갔을 때 자신들이 서 있는 땅이 너무 방대하여 언덕 기단이라고 생각했으며, 지구라트인 줄 몰랐다고 한다.
Remains of the "White Temple" on its Ziggurat, Uruk, Iraq, ca. 3500-3000 BCE ( 화이트 템플 유적, 지구라트, 우룩, 이라크)

기원전 3500년 경에 지은 지구라트의 모습으로 함몰되고, 훼손되어 현재는 꼭대기의 몇 층만 남아있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사각형 뿔 모양이지만, 지구라트는 웨딩케익처럼 층이 있다. 문명의 탄생지 이라크는 기원전 3500년 경 이미 청동기로 접어들었는데, 영국은 기원전 2500 년 경에도 아직도 신석기를 지내고 있어 스톤헨지를 만들고 있었다. 문명의 변방은 문명의 핵심 지역을 다소 늦게 따라간다.
Ziggurat of King Urnammu, Ur, Muqaiyir, Iraq, ca. 2100 BCE (지구라트, 우르남무 왕, 우르, 무헤이이르, 이라크)

근동지방의 신은 하늘신 아부Abu 이다. 부족이 가진 가장 pure 한 동물을 죽여 신에게 바치는 제례의 풍습이 있었다. 진흙이 무진장 있으므로 벽돌을 수만장 씩 만들어서 지구라트를 만들었다.
Interior of the cella of the "White Temple" (화이트 템플의 셀라 내부)
일사분란한 지배체계 하에 대단한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벽돌을 만드는 자, 옮기는 자, 쌓는 자 등 분업이 이루어졌으며, 몇 십년 걸리는 프로젝트 였다.
Reconstruction of the Ziggurat ar Ur (우르의 지구라트)

강가에서 발달한 문명은 보편적인universal 논리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뿐만 아니라, 인도의 인더스 문명도 벽돌을 만들었다. 19세기 중엽에 영국인들이 식민지의 윤활한 경영을 위해 산업혁명으로 이룬 철도 기술을 가져다 인도에 철도를 놓았다. 기반 공사를 위해 땅을 파니까 판판한 벽돌이 쫙 깔려 있어서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공사를 다하고 보니까, 토기 조각 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문명권이 있었음을 감지하고, 공사를 중단하고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모헨조다로, 하라파 등의 유적지가 발견되고 인더스 문명이 존재했음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인도의 기차는 지금도 고대의 진흙 벽돌 위에 세워진 철로 위에서 다니고 있다. 1850년 부터 지금까지 기차가 운행되고 있을 정도로 지구라트를 견고하게 지었음을 알 수 있다.
Reconstruction drawing of the Citadel of Sargon II After Charles Altman Dur Sharrukin, Iraq, ca 721-705 BCE (사르곤의 시다텔 드로잉, 챨스 알트맨 듀어 사루킨, 이라크)
모슬 이라크 지역에 가면 요새처럼 보이는 유적이 남아있다. 메소포타미아는 계속 새로운 부족들이 쳐들어 와서 죽고 죽이는 역사의 연속이므로 도시계획 secular architecture 도 방어태세부터 먼저 갖추고, 그 후에 부속 건물들을 만들었다. 궁전 안에 들어가는 작은 지구라트 이다. 의례를 하는 오픈 코트 야드도 있다.
Gate of the Citadel of Sargon II Dur Sharrukin, Iraq, ca. 742-706 BCE (사르곤 II의 시다텔의 문 , 듀르 샤루킨, 아라크)
건축의 장식으로 반인반수의 괴수 라마수 이다. 라마수lamassu는 이집트의 스핑크스와 비슷한 동물로서 수호신 역활을 한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근동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주요 재료는 벽돌이며, 장식으로 돌을 깍아 만든 석조를 사용했다.
Gate of the Citadel of Sargon II Dur Sharrukin, Iraq, ca. 742-706 BCE (사르곤 II의 시다텔의 문 , 듀르 사루킨, 아라크)

날개가 달린 황소는 앞에서 보면 다리가 두개이지만 옆에서 보면 다리가 4 개이다. 동물 모습의 영원성을 보이기 위하여 옆모습과 앞 모습을 혼합하는 복합 시점 composite view 은 고대 미술의 표현 방법이다. 조형감각이 뛰어나고, 띠와 밴드는 다 총천연색으로 색깔을 칠하였다.
Ishtar Gate, from Babylon, Iraq, ca. 575 BCE (이쉬타르 게이트, 바빌론, 이라크)
바빌로니아 문명권 이라크 지방에서 발굴된 이쉬타르 게이트 이다. 벽돌에 유약을 발라 구어서 색을 내었다. 대단한 계획 하에 지은 엄청난 사이즈의 요새 모양의 문으로 원래의 모습이 잘 보존되었다.
Walls of Babylon, excavated in 1902 ( 바빌론 벽, 1902 년 발굴)
Ishtar Gate, from Babylon, Iraq, ca. 575 BCE (이쉬타르 게이트, 바빌론, 이라크)

Reconstruction of the Ishtar gate and the processional way from Babylon, Iraq (이쉬타르 게이트의 복도, 바빌론, 이라크)
중요한 문에는 문양이 들어간다. 스케일이 아주 큰 건축으로 사자 문양을 반복적으로 넣었다. 규모가 대단한 프로젝트여서 일꾼들이 상주하고 있었을 것 이라고 여겨진다. 이집트 피라미드 옆에도 일꾼들이 상주하는 마을이 있었고 sick day 도 있었으며, 임금이 철저하게 계산되어 지불되었다고 한다.
Lions along the processional way from Babylon, Iraq (복도의 벽 장식에 있는 사자, 바빌론, 이라크)

입벌린 사자는 지배자의 권력을 상징한다. 보색을 써서 멀리서 뚜렷히 보이도록 했다. 이 문양들이 페르시아로 넘어가서 인도에 영향을 주어 불상에 사자가 들어간다. 고대 그리스 문화는 인간 중심의 문화로 동물에 그리 공을 들이지 않지만, 고대 근동의 문화에는 반인반수, 사자 등 동물들이 주로 등장한다.
The Lion Gate, Bogazkoy, Antolia (Turkey), ca. 1400 BCE (라이언 게이트, 보가즈코이, 아나톨리아)
터키에 있는 사자의 문 이다. 문 앞에 동물 조각이 크게 들어간다.
Iranian (Persian) Art
Audience Hall of Darius and Xerxes, Persepolis, Iran, ca. 500 BCE (오디언스 홀,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 퍼르세폴리스, 이란)

페르시아 문화의 기둥은 언뜻 보면 고대 그리스의 기둥과 비슷해보이지만, 틀린 점은 페르시아는 하나의 거대한 원석을 깍아서 건축을 했다는 점이다. 38 개의 거대한 기둥이 들어가는 궁전은 힘의 상징이 된다. 기원전 500 년 경에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패권자가 된 페르시아 제국은 엄청난 재력과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산에서 거대한 돌을 찾아 운반을 해올 정도의 노동력이 있었다. 이에 비해 그리스인들은 산과 섬이 많아 도시 국가를 이루고 있어서, 권력과 자연자원이 나누어져 있었다.
Bull Capital, Persepolis, ca. 500 BCE (황소 캐피털, 퍼르세폴리스, 이란)
사자는 다른 나라를 아우르는 최고의 통치자 페르시아 제국의 모습을 상징한다. 제국에게 조공을 바치고 있는 다른 나라 사신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기원전 500 년경 페르시아는 이집트 문명과 많은 교류를 하여 영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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