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2제정 (1852-1870) 치하의 시각문화 3/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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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4,541회 작성일 13-04-03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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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 북미 미술 12th hour: French Visual Culture during the Second Empire (1852-1870)
프랑스 제 2 제정은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18년 동안 계속된다. 황금 알을 낳았던 시절로 프랑스가 그리워 하는 시기이다. 산업 혁명으로 인하여 공업이 발전하고, 공공사업•철도 건설•은행 사업 및 농업발전이 이루어진다. 또한 대대적인 도시개혁을 벌여 파리를 근대적으로 재건한다. 또한 대외적으로 팽창 정책을 펴서, 크림 전쟁, 아편전쟁 등에 참전하고, 자국으로 막대한 부를 끌어들인다.
그러나 나폴레온 3세는 1870년에 프로이센 전쟁에서 패하고, 망명을 떠난다. 이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와 독일의 앙숙관계가 시작된다. 1870년에 공산당 정권 파리코뮨이 잠시 들어서고, 이어서 프랑스 제3공화국으로 넘어간다.
Millet, Harvesters, 1849
밀레, 추수하는 사람들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파리는 어수선해지고, 밀레는 퐁텐느블루 숲 옆에 있는 바르비종으로 이사를 간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산업 혁명으로 인해 옛날 것이 그리워진 대중들은 농촌 풍경이 들어간 풍속화(장르 페인팅)를 많이 찾는다. 국가가 커미션을 준 그림이다.
Joan Francois Millet, The Sower 1850, OIl on Canvas, 101.6x82.6cm, Museum of Fine Arts, Boston
밀레, 씨뿌리는 사람
19세기 중엽에는 시골에서 산업도시로 인구가 이동하고 있었는데, 밀레를 위시한 바르비종 학파들은 1849년에 파리에서 시골로 이사를 온다. 밀레의 그림에는 당시에 팽배했던 사회 계급 간의 투쟁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60-70년 전의 프랑스 시골의 평화로운 풍경만 나타난다. 밀레는 쿠루베와는 대조적으로 아카데미 전통을 잘 따르는 그림을 그린다.
Joan Francois Millet, Woman with a Rake, probably 1856-57, 39.7x34.3cm, Metropolitan Museum
밀레, 레이크를 든 여자 씨를 걷어낸 자리를 쓸고있는 농부의 모습이다.
Honore Daumier, The Burden, 1850, OIl on Canvas, 55.5x45.5cm
도미에, 힘든 일
도미에는 당시의 농촌 상황을 잘 보여주는 그림을 그린다. 도시로 남자들이 다 떠나고, 시골에는 여자와 아이만 남아서 일이 힘에 부친다.
Honore Daumier, Fugitives, 1862-78, plaster, 28x66x8.5cm
도미에, 도망가는 사람들 시골 노동자들이 떼지어 도시로 이주하고 있다.
Honore Daumier, The Third-Class Carriage, 1862-64, Oil on Canvas Metropolitan Museum, 65.4x90.2cm

도미에, 3등열차
사람들이 빼곡히 탄 3등 열차에 아버지가 없는 가족 3대가 앉아있다. 지쳐보이는 하층 노동자 계급이지만, 할머니, 젊은 엄마에게 위엄diginity이 나타난다. 처음 기차가 나왔을 때는 무척 신기했지만, 어느새 익숙해진 표정이다. 선으로 그린 드로잉 습작이다.
Honore Daumier, The Third-Class Carriage, 1862, National Gallery in Ottawa
도미에, 3등열차 위의 드로잉 습작을 오일 페인팅으로 완성시킨 것으로 오타와에 있다. 도미에의 사인이 짐꾸러미 상자에 있다.
Honore Daumier, The Omnibus, 1864, crayon and watercolor, Baltimore, Walters Art Gallery
도미에, 합승버스
3등 열차를 그렸다. 어깨에 기대는 남자가 싫어서 여자가 눈짓을 하고 있다. 신문 삽화를 많이 그린 도미에는 관계를 잘 잡아내며, 도시의 하층민을 역사화의 주인공 같이 그린다.
Honore Daumier, Impressions et Compressions de voyage, 1853, drawing
도미에, 마치 화물차를 타고 여행을 가는 듯...
기차에 사람이 너무 붐벼서 마치 화물차에 탄 것 같다. 이웃 끼리만 접촉하고 살던 인간 관계가 점점 넓어진다. 잘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마차를 타지만, 도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도시의 불특정 다수가 형성되면서 근대화modernity 현상이 일어난다.
Honore Daumier, Travelers Appreciating the Third Class Less and Less During the Winter, 1856, lithograph on newsprint
도미에, 겨울에 열차 안이 너무 춥다고 불평하는 여행객들
3등 열차가 처음 나왔을 때는 빨리 간다고 무조건 좋아했는데, 지금은 열차 안이 춥다고 불평도 한다. 공공의 공간public space에익명의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있다. 도시로 와서 행상인에서 출발하여 갑자기 거부가 되기도 하고, 어떻게 흘러서 바걸이 되기도 한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 했던 첨예한 인간 관계, class struggle 이 생긴다.
Napoleon III (1808-1873), emperor 1852-73
나폴레온 3 세
프랑스 민중은 1848년 2월 혁명을 통해 평등한 인간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혁명 주체 세력인 도시 노동자는 이상을 추구할 만한 경제적 기반이 없었다. 이 시기를 틈타, 나폴레온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온 3세가 입헌 군주가 되고, 1852년에 황제 즉위를 한다.
나폴레온 1세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나폴레온 3세는 여러가지 사업을 국내에서 펼치는 한편, 대외 원정도 벌인다. 크림 전쟁Crimean War 1855, 아편 전쟁Second Opium War in China에 뛰어 들며, 멕시코에 꼭둑각시 황제 맥시밀리언을 세우지만 실패한다. 또한 한국에 선교하러 나온 프랑스 신부가 공격을 당하자 강화도를 공격하여 병인양요(1866년)를 일으킨다. 제 2 제정 20년 동안 인기 군주로서 권력도 누린다.
1867 Exposition Universelle in Paris
파리 세계 박람회
산업 혁명의 선두를 달리는 영국이 1850년에 세계 박람회를 최초로 열자, 프랑스도 뒤질세라 파리에서 박람회를 개최한다. 나폴레온의 문장 N 자가 보인다.
Jean Leon Gerome, Reception des ambassadeurs siamois par Napoleon III, 1864

장 레온 제롬, 사이암 대사의 조공
색다른 의상을 입은 타일랜드 앰배세더가 절을 하며 조공을 바친다. 프랑스 문화와는 이질적인 의상 및 부채가 보인다. 나폴레온 3세의 공식화가 제롬은 신고전주의 스타일인 네오 그렉Neo-Grec style 로 제도권의 그림을 그린다.
Jean Baptiste Carpeaux, Bust of Napoleon III, 1873

카르포, 나폴레온 3세 초상
나폴레온 3세가 관에 누운 모습을 스케치를 떠서 만든 초상이다. 1870년에 나폴레온 3세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쓸쓸히 죽어가는데, 부인 유제니Eugenie가 프랑스에 있는 카르포에게 전보를 쳐서 오게한다. 유제니는 이 초상이 맘에 들어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Edouard Baldus, photograph of Notre-Dame, 1860’s, 27.6x21.1cm
복원 작업을 거친 노트르댐 성당
나라의 넘쳐나는 부를 가지고 나폴레온 3세는 민족주의 정책을 편다. 프랑스 역사책을 편찬하며 건축물 보존 사업을 벌인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문화 유산이 3번의 혁명(1789, 1830, 1848년)을 겪는 동안 많은 부분이 파괴된다. 혁명 중에 화가 난 시민들은 성인 조각을 프랑스 왕으로 잘못 알고, 목을 내려쳐서, 땅에 묻거나, 센느강에 던졌다.
나폴레온 3세 시절에 비올레 르 득이 부서진 종교 건축물을 복원한다. 지금 프랑스에 남아있는 생드니 수도원, 노트르댐 성당, 샤르트르 성당, 루안 성당 등은 19세기에 재건 작업을 거친다. 그런데 비올레 르 득의 과도한 재건으로 인하여 중세의 원래 모습과 많이 달라져서, authentic 하지 않다고 본다.
Eugene Viollet-Le-Duc (1814-1879)
유진 비올레 르 득
지식층의 아들로서 태어난 비올레 르 득은 1830년대의 진보주의 사상에 이끌려, 에코 데 보좌르에 다니기를 거부하고, 개인 건축가 밑에서 공부한다. 건축가 비올레 르 득은 자신의 비젼에 맞추어 중세 건축물을 너무 많이 고쳐, 처음의 모습을 거의 사라지게 했다는 평을 듣는다. 중세 성당들은 원래부터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 샤르트르 성당은 전쟁으로 인해 건축이 중단되곤 하여 100년 동안 건축이 진행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지어지므로, 종탑 및 건물의 모양이 원래 달랐다고 한다. 샤르트르 성당에는 중세의 오랜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었는데, 19세기의 복원으로 인하여 이런 모습들이 다 없어졌다고 한다.
19세기 말에 John Ruskin은 '혁명, 계몽주의, 진보주의에 너무 젖어 있던 19세기 시대 정신으로 말미암아 비오레 르 득이 옛날 건물에 너무 손을 댔다' 고 비난한다. 죤 러스킨은 비오레 르 득의 생각대로 고쳐진 옛날 건물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을 나타낸다. 중세건축의 40 % 이상이 비오레딕이 연구하여 새로 지은 것 이다.
Baron Haussmann(1809-91)
오스만 후작
제 2 제정 프랑스는 대외 원정으로 인하여 많은 부가 들어온다. 나폴레온 3세는 국민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젊은 건축가 오스만을 고용하여 파리를 근대 도시로 만든다. 오스만은 일을 잘하여 나중에 후작 작위를 받는다. 하지만 오스망과 나폴레온은 엄청난 돈을 도시 개혁에 쏟아 부어 나중에 비난을 받는다. 1870년 프러시아 전쟁의 패배와 더불어 도시개혁은 나폴레온 3세가 실각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나폴레온 3세 시절 20년 동안 파리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간다. 이 시기에 사방으로 쭉쭉 벋은 대로 boulevard 가 생긴다. 당시에 틴에이져 였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파리의 변모를 눈에 뜨이게 느낀다. 유년 시절의 파리 거리는 지저분했는데, 갑자기 최신식으로 차려 입은 사람들이 블레바드를 거닐기 시작한다.
Boulevard Haussmann

오스망 블레바드
오스망 후작은 파리시내의 큰 도로변의 건물을 동일하게 짓는다. Street wall 개념을 도입하여, 연결된 벽처럼 block 을 만든다.
1층은 가게들, 2층 메자닌은 오피스 공간, 3층 피아노 노빌레는 제일 좋은 층이다. 3층은 장식적인 발코니를 하지만, 꼭대기 층의 발코니는 심플해야 한다. 45도 각도로 종모양으로 잘린 지붕을 망사르 루프라고 하며, 지붕 밑에는 하녀들이 산다. 건물들의 facade (파사드, 입구)라인도 맞추어야 한다. 정해진 규범대로 지어야지 시의회에서 건물을 통과시켰다.
Unknown French, Avenue de l’Opera of Haussmann’s Paris, 1850
오스망은 파리 오페라가 보이는 블레바드를 만든다. 쪼개져 있던 블럭을 연결하여 하나로 보이게 한다. 건물 뒤쪽의 중심 지역은 옛날 집들이 있어서 복잡하지만, 대로변에는 street wall 을 만들어 도시가 정돈이 되어 보인다.
Map of Paris 1850-1870
오스망은 파리의 60% 이상을 고친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파리는 아쉽게도 중세medieval의 모습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오스망은 도시의 동쪽은 많이 고치지만 서쪽은 그냥 두어서, 빈부의 주거지가 확연히 나누어 진다. 젊은 시절 가난한 아티스트 피카소는 도심 외곽 빈민 지역인 몽마르트 언덕에서 살면서, 낮에 세탁일을 하고 밤에 일하러 나가는 여자들을 늘상 본다.
Pont Saint Michel with 'N' of Napoleon III
세인트 마이클 다리 퐁 셍 미셀 블레바드에 나폴레온 이니셜 N 이 보인다.
Camille Pissarro, Opera Garnier Seen from Comedie Francaise, 1898

카밀 피사로, 오페라 가르니에
인상주의 그림에는 파리가 많이 나온다. 확확 변하는 파리 거리에 신분은 알 수 없지만, 최신 유행의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거닌다. 새롭게 등장한 public place 에서 modern life 의 레저를 즐긴다.
Charles Garnier, Opera Garnier, 1861-1874

샤를르 가르니에, 오페라 가르미에
신고전주의 스타일에 장식적 요소를 첨가한 스타일을 보좌르 식Beaux-Arts Style 이라고 한다. 18세기 말의 자크 루이 다비드 시대는 심플하고 엄격한austere 신고전주의식으로 지었지만, 19세기에는 웨딩케익처럼 장식적으로 만든다. 유럽에서 제일 큰 오페라 무대인 오페라 가르니에 공공 공모전에 무명의 건축가 샤를르 가르니에가 뽑힌다. 나폴레온 3세의 부인 유제니는 완성된 건물을 보고 마음에 안들어 '이게 무슨 스타일이냐' 고 불만을 터뜨리고, 가르니에는 '이것은 나폴레온 3세 스타일' 이라고 대답한다. 나폴레온 3세 시대에 보좌르식의 장식적인 건물이 유행하게 된다.
Charles Garnier, The Opera Paris, 1861-74
샤를르 가르니에. 오페라 파리스
파리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 오페라 가르니에의 파사드 이다. 보좌르 건축Beaux-Arts architecture 에는 파사드에 조각이 반드시 들어간다. 건물 윗부분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음악의 신, 아폴로의 뮤즈 조각이 들어갔는데, 아래부분 파사드에 카르포가 조각한 <댄스의 신> 이 문제를 일으킨다.
Charles Garnier, Grand Staircase in the Opera, engraving, 1880
샤를르 가르니에. 오페라 파리스 인테리어
오페라 가르니에의 실내 이다. 미국인은 프랑스로 유학와서 화려한 보좌르 건축을 배운다. 남북 전쟁 후에 보좌르식 스타일 건물들이 미국의 대도시 뉴욕, 디트로이트, 보스톤, 워싱톤 등지에 지어진다. 뉴욕의 카네기 홀, 뉴욕 퍼블릭 라이브러리를 위시해서 1880년 부터 1930년대 까지도 보좌르 식 건물을 선호한다. 당시 미국은 보수적인 취향을 유지하여 유행을 늦게 따라간다.
Jean Baptiste Carpeaux, The Dance, 1867-68, Plaster, 4.6 m
카르포, 댄스
댄스의 신을 의인화 한 조각이다. 남자의 몸은 운동감이 없다. 여자들은 통속적인 웃음을 흘리며, 남자의 genital 을 중심으로 빙빙 돌고있다. 흥겨운 장면을 만들려고 한 카르포의 조각에 대한 비평문이 연일 신문에 실린다.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라 만들었으면 그리스 여자들의 우아한 미가 있었을 텐데, 저 처지는 다리와 헤벌레한 웃음 등이 과연 오늘의 파리의 모습인가'
Marcello, Pythian Sibyl, 1869-70, bronze, 80cm
마르셀로, 예언자 시빌 비평가들이 찬사를 보내는 19세기 신고전주의 식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던 보좌르 스타일이다. 예언자 시빌이 칼럼 위에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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