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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st hour: 19 세기 독일(신고전주의)과 프랑스(보좌르) 건축 1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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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5,511회 작성일 14-01-05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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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 21st hour: 19 세기 독일과 프랑스  건축
 
 
 
 
 
 
19th Century Germany
 
독일은 프랑스가 겪은 민중 혁명도 없었고, 영국과 같은 산업 혁명도 격지 않았다. 하지만 1848 년에 통일을 한 후에 산업화를 따라 잡고 순식간에 다른 유럽 국가와 비슷하게 발전을 했다. 건축적으로는 빙켈만의 조국 답게 신고전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빙켈만이 주창한 이론을 German Hellenism 이라고 부른다. 19 세기에 산업혁명과 더불어 유럽 각국이 민족주의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국의 역사를 돌아보는 뮤지엄들을 많이 지었다. 대부분의 뮤지엄들을 당시에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다. 19세기 말에 지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뉴욕 퍼블릭 라이브러리, 워싱턴의 내이셔널 갤러리도 신고전주의 양식 이다. Noble 한 정신의 신고전주의가 사람들을 교화시킨다고 생각했다. 
 
 
 
 
 
칼 프레드리 슁켈 Karl Friedrich Schinkel (1781-1841)
 
슁켈은 신고전주의 대표적인 건축가 이다. 고대 그리스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자고 주창했다. 제자도 많이 키워서 그가 죽은 후에도 신고전주의 양식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샤우슈필 하우스 Schauspielhaus, 베를린Berlin, 1819-21, Karl Friedrich Schinkel 칼 프레드리 슁켈
 

르네상스 팔라디안 건축를 연상시키는 극장으로 그리스식 페디먼트에 위에 조각상이 있다. 뒤에 더 높은 페디먼트가 있고 좌우대칭의 경건한 공간 이다.
 
 
 
 
 
알테 내이셔널 갤러리Altes Museum, Berlin, Germany, 1825-28, Karl Friedrich Schinkel
 
 
베를린에 있는 공공 건물은 거의 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고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비율을 재현했다. 높은 계단 위에  있는 입구에 올라가면 칼럼들이 늘어서 있고 가운데 페디먼트가 있다. 
 
 
 
 
 
뮤지엄 아일랜드, 베를린, 독일 Museum Island, Berlin, Germany
 

슁켈은 뮤지엄 및 공공 건물이 모여 있는 섬을 디자인 했다. 고대 그리스 신전들이 모여있는 성소 아크로폴리스같은 개념 이다. 알테스 뮤지엄, 알테 내이셔널 갤러리, 노이에스  뮤지엄, 페르가몬 뮤지엄 등이 있다. 뮤지엄은 object 들이 많이 있고, 갤러리는 그림들이 걸려있다. 터키의 페르가몬이 발굴된 후에 그곳의 유적들을 가져와서 페르가몬 뮤지엄에 전시했다. 보데 뮤지엄에는 비잔틴 제국의 유물을 모아 놓았다.
 
 
 
 
 
알테 내이셔널 갤러리Altes Museum, Berlin, Germany, 1825-28, Karl Friedrich Schinkel
 

제일 오래된 알테스 뮤지엄이다. 페디먼트도 없이 일자형으로 무척 고졸하다. 그리스 고졸기archaic period 스타일로서 초창기 도리아식으로 지었다. 고대 그리스 모티프를 가져와서 더욱 고전적으로 지었다.
 
 
 
 
 
플랜, 알테 내이셔널 갤러리 Plan, Altes Museum
 

계단을 올라가서 열주가 또 있다. 들어가는 입구도 여러개 있다.
 
 
 
 
 
로툰다 Central Rotunda, 알테 내이셔널 갤러리Altes Museum, Berlin, Germany, 1825-28, Karl Friedrich Schinkel
 
 
들어가면 양쪽으로 계단이 있고 가운데 로톤다가 있다. 주변에 코트야드와 방이 있다.  정사각형 혹은 직사각형 unit을 반복한 신고전주의 양식은 전시장으로 효율적이고,  동선을 따라 이동하기도 쉬웠다.
 
 
 
 
 
로툰다 Central Rotunda, 알테 내이셔널 갤러리 Altes Museum, 베를린 Berlin
 
 
슁켈이 디자인한 미술관은 독일의 미술관의 원형으로 채택 되었다. 뮤닉에 있는 알테 피나코텍Alte Pinakothek과 노에 피나코텍도 똑같이 생겼다. 같은 unit 의 방이 반복되어 통일감을  준다. 공간의 쓰임이 좋고 창문으로 빛이 들어와 밝았다.  
 
 
 
 
 
판테온 로마 Pantheon, Rome
 
알테 내이셔널 갤러리는 로마의 판테온을 모방한 듯 하다. 도움만 조금 차이가 난다. 고전적인 건물에 고전적인 작품이 들어간다.
 
 
 
 
 
알테 피나코텍Alte Pinakothek, 1826, 뮤닉 Munich
 
 
바바리아 뮤닉에 있는 미술관으로  슁켈의 건물처럼 고전적으로 지었다. 이차 대전 중에 폭격을 받은 부분을 색깔이 다른 돌로 복구하여 금방 알아 볼 수 있다. 역사가 준 시간의 단절 rupture 을 후손들에게 보이고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라는 의미 이다. 미켈란젤로의 팔라쬬palazzo처럼 반복 구조가 보인다.
 
 
 
 
 
알테 피나코텍 Alte Pinakothek in 1900 Munich

폭격받기  전 모습이다. 양쪽 가운데에 큰 홀이 있고 중간에는 round arch와 사각형 윈도우 프레임이 반복된다. 근대적이며 엄중한 느낌이다.
 
 
 
 
 
글리코텍Glyptothek, 뮤닉 Munich, 1816-30, Leo Von Klenze
 
고대 그리스 조각을 전시하는 곳이므로 고대 그리스 신전을 그대로 본떴다. 파사드의 감 안에 조각을 전시했다. 
 
 
 
 
 
왈할라 Walhalla, near Regensburg, Germany, 1830-43, Leo Von Klenze, 바바리아, 독일
 
 
바바리아 지방에 있는 왈할라 뮤지엄은 신고전주의 건물이다. 숲속의 언덕을 깎아서 파르테논 신전과 거의 똑같이 만들었다. 루드비고 1세의 명령으로 레오 폰 클렌제가 역사 박물관을 만들었다. 독일의 정신을 대표하는 영웅을 모아 놓은 곳 이다.
 
 
 
 
 
레오 본 클렌제 Leo von Kienze
 
 
루두비히 1 세가 총애하는 궁정 건축가 이다. Greek Revival 스타일을 연구하여  건물들을 지었다.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 온 후에 독일식 신고전주의 양식을 완성했다. 
 
 
 
 
 
왈할라 Walhalla, 1830-42 Germany
 
 
마치 로마시대의 흉상을 상기시키듯 독일인의 역사의 전당을 만들었다. 19 세기 초 독일은 아직 공작령 도시 였지만 산업이 발달했고 세금을 걷었기에 경제력이 있었다. 그래서 이런 뮤지엄을 만들 수가 있었다.
 
 
 
 
 
왈할라 Walhalla, 1830-42 Germany
 
 
1830년 경은 독일의 민족주의가 무르익는 시점이었고 1848년에 비스마르크 재상이 나타나서 독일이 원하던 통일을 이룩한다. 1870 년대 보불 전쟁에서 프랑스를 패배시킨 독일은  자신들이 항상 열등감을 느꼈던 그 옛날의 강한 프랑스가 아님을 느낀다. 이후로 독일은 계속 상승 무드를 타고 일차 이차 세계 대전까지 거침없이 간다.
 
 
 
 
 
 
 
 
 
프랑스 19 세기 후반 건축
 
 
19세기 초 독일은 루두비히 1 세 및 베를린의 공작들이 돈을 모아서 공공 건축을 하지만, 프랑스는 19세기 후반까지  혁명, 정권 교체 및 나폴레옹의 군사 캠페인 등으로 공공 프로젝트를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19 세기 후반에 공화정이 수립되고 나서 비로소 파리의  재정비를 시작했다. 제 3 공화정이 주도가 되어 시민의 뜻을 모아 혁명 때 무너진 부분의 보수에 들어갔다. 부르조아들은  자기 땅이 좀 깍여도 도시의 길이 반반하여 마차도 다니고 하는 것을 원하였다.
 
 
 
 
 
노트르 댐 Notre-Dame, 1860's, 파리 Paris, Edouard Baldus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혁명 동안에 거의 망가져서 파사드의 조각상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화가 난 폭도들은 카톨릭을 대변하는 노트르담 성당 조각을 다 떼내어  ritual killing 을 감행했다. 석조 조각의 목을 쳐서 몸을 묻고 머리는 세느 강변에 버렸다. 혁명 동안 1789년 부터 1793 년 까지 종교를 완전히 부인하고 이성의 종교를 내세우다가, 이후에 다시 카톨릭으로 돌아갔다. 1850년 즈음에  파리 및 시골에  혁명으로 부서진 건물을 복구하는 보수작업이 성행했다.
 
 
 
 
 
비올레 르 딕 Eugene Viollet-Le-Duc (1814-1879)
 
 
비올레 르 딕은 진보적인 공화주의자이다. 건축을 정식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중세부터 내려오는 폐허가 된 건축들을 보존restoration을 하라는 커미션을 받았다. 그는 옛날 문헌들을 들추어가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했고 이로 인해 당시 19세기 중엽에 고딕 리바이벌gothic revial 붐이 일었다.
 
중세의 모든 건물들은 funding이 모자라서 짓다가 말다가 한 상태였으며, 오랜 시간 동안 지었기에 여러 양식이 합쳐진 절충식eclectic 이었다. 노트르담 성당 역시 첨탑이 없이  미완성으로 끝났었다. 하지만 비올레르딕의 vision은  부서진 상태보다는 건물의 완성된 모습를 보여주는 것 이었다. 노트르담 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끼우고, 첨탑도 세워서 깔끔한 모습이 당시에는 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비올레르딕은 실제보다 더 많이 고쳤다고 후대에 평가된다. 19 세기 말에 고증학적인 연구가 활발해지자 영국의 존 러스킨John Ruskin 은 비올레르 딕이 역사적인 정확성 보다는 자기 생각대로 13 세기 교회를 고쳤다고 했다. 중세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비올레르 딕의 보수작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오스망의 오페라 거리 Avenue de l'Opera of Haussmann's, Paris, 1850
 
 
파리 오페라에서 쭉 나오면 상가들이 모여있는 거리 휘드 휘볼리가 있다. 오스망 스타일 파사드라고 부른다. 신고전주의와 프랑스의 절충적인 보자르Beaux-Arts 데코레이션을 합한 스타일이다. 원래는 건물들이 들쑥날쑥 했는데,  앞의 일정 부분을 깍아서 블럭의 파사트facade 라인을 맞추었다. 하지만 건물 뒤는 여전히 불규칙적으로 쪼개져 있다.
 
 
 
 
 
오스망 블레바드 Boulevard Haussmann, Paris
 
 
19 세기 중엽 제 3 공화정 시절에 도시개혁을 하면서 새로 지은 파사드이다. 휘드 휘볼리 거리를 중심으로 한 지금의 모습이다. 일층은 가게들이 있고, 위층은 오피스, 삼층은 아파트들이다.
 
 
 
 
 
 
 

 
오스만의 주도 하에 파리의 건물 60% 를 변모시키는 도시개혁이 이루어졌다. 부자들이 지역인 소르본느가 있던 옛날 지역은 고치지 않고 파리 외곽을 중심으로 고쳤다.
 
 
 
 
 
Rue Monge, Classic Three Level House by Haussmann
 
 
장식을 넣어서 페디먼트를 만든 아름다운 파사드 이다.  구역을 맞추어 짓도록 법령을 정하여 스트리트 월Street Wall을 만들었다.  망사르 루프는 각이 45 도가 되게 떨어지고, 맨 위층에는 하인들이 사는 방이 있다.
 
 
 
 
 
오페라 하우스 가르니에 Palais Garnier, 1861-74, Charles Garnier

파리에 오페라 극장를 지었다. 1830년대 까지는 혁명을 극복하느라고 휴유증이 많았지만, 1850 년대 이후는 산업 혁명이 잘 되어서 부유한 중산층이 많이 생겼다.
 
 
 
 
 
Model of the Palais Garnier 오페라 하우스 가르니에
파리 오페라 극장은 신고전주의 양식에 좀 더 장식적인 덴틸 몰딩dentil moulding을 첨가하여 에코데 보좌르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Foundation work for the Palais Garnier, photograph, 1862
 
오페라 하우스 가르니에를 짓고 있는 모습이다. 새로운 공법으로 신속하게 잘 지었다고 한다.
 
 
 
 
 
보좌르 스타일 Beaux-Arts Style

프랑스의 유명한 보자르 스타일이다. 좌우 대칭 평면도를 쓰면서 독일이나 영국의 엄중하고 엄격한 신고전주의 보다는 밖에 장식이 좀 있다. Garland 및 식물 문항, 창문 프레임에 몰딩으로 인해 조금 더 장식적이 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더 좋아하게 된다.
 
 
 
 
 
오페라 하우스The Opera Paris, 샤를르 가르니에Charles Garnier, 1861-74
 

나폴레온 3세 부인 유제니Empress Eugenie 는 비올레드딕 대신 무명의 가르니에가 파리 오페라를 지은 것이 불만이었다. 유제니는  완성된 건물을 보자 ‘루이 14 세 스타일도 아니고 루이 15세 아니고, 로코코도 아니고, 루이 16세 스타일도 아니고 이게 무슨 스타일 이냐’ 하면서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자 가르니에는 ‘나폴레온 3 세 스타일’이라고 대답하여 왕후 유제니의 말문을 막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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