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근대미술13 1930년대 모던걸 어디가고 현모양처가 뜨나? 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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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3,542회 작성일 15-04-11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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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근대미술 13 Colonial Expansion of Japan through Expositions and Museums
1930년대 일본이 만든 전통 ‘현모양처’
19세기 동아시아 근대화는 식민과 제국주의, 자본주의를 같이 끌고 간다.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여 박람회, 미술관, 백화점을 다니며 문화를 향유한다. 박람회, 전람회, 올림픽은 국내적 갈등을 해소시키며 국민을 하나로 묶는 프로파간다가 된다. 나라를 잘 포장시켜 국민들로 하여금 위기를 잊게 유도한다.
1920년대 모던 걸은 교육을 받으며 거리를 활보한다. 30년대, 일본이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사회주의를 검열하며 전체주의로 나간다. 20년대 모던걸의 담론이 죽어가고 30년대 현모양처 프로파간다가 부각된다. 장차 군인이 될 아들을 낳고 교육하는 현모양처 개념이 재탄생된다. Micro개념으로 내 목소리 죽임은 가부장제에 익숙함이며, macro 개념으로는 순결 보국, 나라보호하는 야수쿠니의 어머니로 확장된다.
<프랑스의 국전 및 미술전>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
19-20세기에 프랑스에는 살롱전이 있었다. ‘살롱전salon’은 귀족이 모여서 문화를 나누는 사교계 서클에서 시작된다. 프랑스는1725년부터 국가가 주관하는 국전 Paris Salon 을 시작한다. Paris Salon은 에코데보좌르(왕립 미술학교)교수들이 심사위원으로 신화적 역사적 보수적 그림이 주류를 이룬다. 국전의 전통 역시 비너스의 몸을 가지고 내려온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도 여자의 몸을 battlefield 로 도전한다. 마네의 <풀밭에서의 식사> <올림피아>, 피카소의 <아비뇽에서 여자> 가 다 그렇다. 여자는 항상 점령의 대상이고 또한 점령이 되어왔다. 젠더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마네는 파리살롱전에<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출품한다. “신사 양반이 백주 대낮에 창녀와 노는 천박하고 덜 된 그림을 내다니?” 심사위원들은 마네의 그림을 혹평한다. 파리 살롱에서 낙방한 미술가들은 '떨어진 자들의 살롱' Salon des Refusés(1863)을 만든다. 이 말도 안되는 마네의 그림은 ''Salon des Refusés' 에 전시되어 유명해진다.
마티스, 생의 기쁨, 1905-06
국전에 도전을 하는 살롱전이 또 생긴다. 아방가르드 화가들이 독립전 Salon des Independants (1905)을 만든다. 야수파(포비즘)를 시작한 마티스는 여기에 츨품한다. 또한 봄에 열리는 국전을 의식하여 가을전 Salon d'Autumne(1903)이 생기고, 피카소가 작품을 낸다. 근대미술로 향하는 추상화는 도전 미술전에서 시작된다. 기존 체제에 반기들고 시대의 최전선을 여는 전위예술가 들이다.
<일본 미술전람회>
20세기 초 일본은 서구를 바라보며 국가미전을 만든다. 귀족들의 향유물이던 미술은 근대에 들어와 미술관의 개념으로 대중 앞으로 나온다. 1907년에 문부성 전람회(1907-1918), 제국미술전람회에 이어, 45년 패망 후 일본 미술 전람회가 된다. 일본의 문부성미술 전람회(1907년)는 국전으로 파리 살롱과 흡사하다. 하지만 기존 체제를 반대하는 미술전은 생기지 않는다. 문전은 유럽 유학파들이 심사위원으로 처음에는 양화를 부흥했지만, 점차로 유학파와 전통파를 합친다. 동아시아에1910-30년대를 관통하는 주제는 '여자의 몸'이다. 모더니티, 모더니즘이 여자를 통해 표현된다. 문전은 시대의 프로파간다에 발맞추어 집안에 있는 여자들을 주제로 하여 자수, 독서하는 여자 및 모자상 그림이 부상된다.
Kuroda Seiki (1866-1924) Morning Toilet 1893
1895년 일본 내국산업박람회에 구로다 세이키의 그림을 걸자 떼라고 난리가 난다. 정치인 집안 구로다는 프랑스에 법학 공부차 갔다가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온다. 양화의 대부가 되며 전통미술을 후원하는 텐신과 척을 진다. 일본 전통 미술은 인체를 노출하지 않지만 구로다는 인체 묘사는 그림의 기본이라고 한다.
Kuroda Seiki, Lakeside 1897
1890년대 유럽에서는 한물갔지만, 구로다의 그림은 일본에서는 나름 아방가르드이다. 1900년 프랑스 박람회에 출품하여 은메달을 받자 일본 사람들은 이런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고 이해한다. 조선에서도 구로다를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모셔온다.
Paul Gauguin Two Taitian Women 1899
1910년대 유럽의 트렌드는 단연 고갱이었다. 후기인상주의 고갱은 금융업을 하다가 망하고 그림으로 전향한다. 도시 문화의 modernity에 질린 고갱은 유토피아를 찾아 프랑스의 식민지 타이티로 간다. 거기서 소녀 부인을 얻고 여인들의 그림을 그린다. 일본 아방가르드 화가들은 고갱의 작품에 영감을 받는다.(미츠타니 쿠니시로, 목욕 1915문전 입상작) 일본의 오지섬에 가서 여자를 그리기도 한다.(츠치다 바쿠센, 섬의 여자 1912, 도쿄문전 입상작)
또한1910년대 피카소의 큐비즘이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이태리에서는 퓨쳐리즘도 일어난다.일본도 발 맞추어 그림에 화면 분활이 나타난다. (도고 세이지, 파라솔을 든 여자 1916)
또한 20년대에 러시아의 구성주의를 본딴 잠수함, 비행기를 배경으로 당시 유행하던 모던 걸이 수영복을 입고 서있다. 유럽풍과 일본의 유행을 결합시킨다.(고가 하루에, 바다 1929) 유럽에서 유토피아의 이국적인 분위기의 여자 그림이 유행하자 일본에서도 중국 옷을 입은 여자를 그린다. 르네상스의 도상인 옆모습 프로파일을 차용하고 일본여자 모델에 중국 의상을 입힌 cosmonpolitan 적 그림이다.(후지시마 다케치, 동양풍 1923) 20년대에 새롭게 나타난 여성의 직업 여급이 뭐하는 여자인가를 실루엣으로 보인다.(나카무라 가쿠료 여성직업도감, 여급 1933)
20-30년대 일본 긴자 거리에 상하이식 칩파오가 나타난다. 일본은 아직 점령하지 못한 중국을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20년대 일본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사상이 활발하고 영국을 위시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국제도시 상해에 많이 살았다. 문화의 근원지인 대국 중국에 가지는 열등감을 점령의 대상인 여자의 몸으로 표현한다.(가카우치 세이요, 주지가이를 가다 1930) 조선의 1930년대는 모가들이 활개치던 시대인데 굳이 쪽지고 고무신 신은 오지의 여자를 찾아내 그린다. 조선의 덜 도시화된 모습이 일본 문전에 어필하여 도쿄에 전시된다. 당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들은 기생이었다. (츠치다 바쿠센 평상 1933)
<조선 미술 전람회>
당시에 조선미술가들이 만든 서화협회가 있었다. 1919년 삼일운동이 터지자 총독부에서 문화정책으로 노선을 바꾼다. 1922년에 ‘무지몽매하고 무취미한 조선인을 위하여 조선미술전람회를 만든다’고 한다. 조선미전에는 조선 주재 일본 작가가 주로 뽑히며, 조선 화가로는 고희동, 나혜석, 김은호가 포함된다.
이상범, 초동 1926
당시 조선 미전 심사위원은 일본 전통화 니홍가를 그리던 일본인이고 서양화 심사위원은 구로다 세이키이다. 일본화가인 경우에는 문전과 비슷한 그림을 뽑고, 조선화가 경우에는 조선의 황토색local color 이 돋보이는 작품을 뽑았다. 일본 미술사를 정립한 텐신의 이론을 쫒아서 조선미전은 조선색이 나타나는 그림 일색으로 고착화가 된다. 유럽의 거절된 자의 살롱은 아방가르드 그림을 양성화시키려는 의도인데, 조선과 일본에서는 방향이 거꾸러 간다.
러시아 구성주의 포토 몽타주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사회주의 국가의 그림을 그리면 안된다는 가이드 라인이 있었다. 미전에 내면 이런 그림은 다 떨어진다.
김은호 간성
20년대 모던 걸 시대에 조용히 집에 앉아 점치는 여성의 모습, 일본이 원하는 조선의 모습이 조선미전에 뽑힌다. 김은호는 조선색이 드러나는 일본 니홍가 스타일로 그리며 동양화부 채색화를 이끄는 인물이 된다.
나혜석 정원 1931
나혜석도 조선미전에 출품한다. 초기에 그림을 출품하다가 이혼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그리지 못한다.
운보 김기창 정청 1934 조선미전 입상
조선 미전의 스타급 작가 김기창은 김은호의 제자이다. 조선 외지인은 내지 일본에 유학가서 그림을 배우라는 의도였기에 조선에는 미술학교가 없었다. 김기창의 어머니는 농아 아들을 데리고 김은호에게 미술 사사를 부탁한다.
월전 장우성 화실
일본은 조선화가에게 조선색이 나는 모티브를 요구한다. 딸과 함께 음악을 듣는 여인 혹은 정갈한 한복을 입고 책을 읽는 모습 등 주제를 제시한다.
장우성 푸른 전복 1941
Entertainer 기생이 춤추다 쉬고있다.
이유태 여인3부작- 정1943
모자상이다. 집안에 있는 여자나 기생 그림이 조선 미전에 뽑힌다.
김은호 미인도 1935
니홍가 스타일이다. 조선 미전 출품 작가들은 청전 이상범 스타일, 이당 김은호 스타일로 불려진다.
김인승 나부 1936
당시 조선의 서양화가들은 다 일본 유학파들이다. 누드라고 항의가 들어온다.
김인승 독서하는 여인 1942
조선 30-40년대 그림의 모티브는 집 안에 있는 여자로서 거의 다 동일하다.
김은호 금차봉납도 1937
1937년에 김은호는 조선미전 심사위원 겸 작가로 초대되며 그 해에 금차봉납도를 그린다. 30년대 후반이 되면 조선미전은 친일 성격의 협회가 되고, 반도충후미술전, 결전미술전 등 프로파간다 성격의 전람회가 생긴다.
김은호 (1892-1979) 춘향
춘향은 영정조 시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20년대에 자유 연애 모티브를 부각시켜 모던 춘향전으로 스토리 라인이 바뀐다. 조선의 지조를 지키는 민족 운동가에게도 어필이 된다. 30년대에 춘향전이 일본에서 연극으로 상연되자 식민지의 문화로 부각된다. 정조를 지킨 열녀이미지로 새롭게 떠오르는 시대의 여성상이 된다.
김은호 (1892-1979) 춘향의 모델 기생 김명애
1931년에 일제가 보존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남원 권번과 유지들이 남원 사당을 짓고 매해 춘향제를 연다.김은호는1939년에 기생 감명애를 모델로 하여 춘향을 조신한 처녀의 이미지로 그린다. 당시 기생이 입던 옷이 아닌 개량된 한복을 입힌다. 그림이 사당에 걸리지만 타서 없어진다.
김은호 아랑 1965
30년대 열녀 모티프가 리바이벌된다. 60년대에 육영수여사가 밀양에 사당에 ‘아랑’을 그리라고 한다. 소설 속의 인물에게 사당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일이 벌어진다.
일제 시대 조선 미전 화가들은 해방 후 교수가 되고 국전 심사위원이 된다. 그들의 제자들은 선생님 스타일을 그려서 뽑히며 기득권으로 내려온다. 한국미술은 식민지 때부터 틀안에 갇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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