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근대미술9: 조선 미술사를 최초로 정리한 일본인 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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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3,547회 작성일 15-03-13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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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근대미술9 조선 미술사를 정리한 일본인 3/5/15
17세기까지도 베트남, 조선 및 일본 등은 중국 연경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고, 신문물을 전해 받았다. 하지만 19세기가 되자 일본이 그 역활을 대신한다. 동아시아의 지성인들은 메이지 유신(1876년) 후 근대국가에 성공한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동시에 일본을 통해 굴절된 근대문명이 각 나라에 퍼진다. 동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오캬큐라 텐신(Okakura Tenshin)이 연대순으로 일본 미술사를 정립한다. 일본은 근대국가를 만들면서 일본적 정체성도 확립한다. 18세기에 양화를 쫓아 인상주의로 가는 듯 했지만, 19세기에 미국인 페넬로사(Ernest Fenoosa)와 텐신의 노력으로 일본적 미술 니홍가를 꽃피운다.
조선 미술사는 누가 최초로 정리를 했을까? 합방 후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조선의 현실은 보지 않고 조선의 미에만 주목한 orientalist적 시각으로 식민지를 바라본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미를 재발견하는 책자를 내고 조선의 미술품을 한 곳에 진열하는 박물관을 만든다. 식민지의 문화를 새로 쓴다는 관점에서 일본은 유적지에 박물관 부설 기관도 만든다.
19세기 조선에서 그림 구매는 서화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16-17세기 경에 일본에서 서화회가 시작된다. 시, 글씨, 그림은 시서화로 불리며 하나의 장르였다. 또한 그림은 대대손손 내려오는 것이라 구매할 수가 없었다. 18세기 중반 서화회는 문인 및 화가의 그림, 시 감상 등 계모임 성격을 띈다. 성루에 올라가 초파일 등불 구경하기(4월), 밤비에 더위식히기(5월), 산속 절간에서의 그윽한 약속(9월) 등을 하며 시를 음미한다. 그런데 19 세기에 시가 독립 장르로 분리된다. 서화회는 1905년에 조선에도 들어온다. 일본 강점기 동안에 서화미술회, 조선신궁진좌기념 서화회, 백폭서화회 등이 유행한다. 서화회에서 그림 전시 및 판매를 하자 입장권을 팔기에 이르며 미술 시장으로 발전한다. 당대 유명 화가 조석진, 함중식, 허백련 등이 서화회를 이끈다.
고희동 (1886-1965) 자화상
고희동은 정치가 및 역관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다. 당시 통역관은 시서화에 능한 문인이자 외래 문물의 창구 역활을 했다. 개화된 집안에서 자란 고희동은 한성 법어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운다. 1905년에 조선이 자주권을 박탈당하자 자괴감에 빠져 미술과 주국(술의 세계)에 빠진다. 동양화 화첩을 베끼며 그림을 배우는 조선의 방식에 회의를 품고 정치 공부하러 일본에 간다. 하지만 동경 미술 학교에 들어가 서양화가 구로다세이키의 제자가 된다. 구로다 세이키는 일본 최초의 프랑스 유학파이다. 고희동은 작품이 별로 없어서 최초의 서양화가라고 하지만 과대 평가라는 비판도 있다.
고희동, 자매 1915 일본 동경 미술대 졸업작품
고희동이 일본에서 귀국하자 서양화의 효시, 모델의 선구라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다. 화첩을 베끼는 남종화 북종화가 주류를 이루는 조선에서 고희동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야외에 이젤을 세우고 사생하는 픙경화landscape을 그리며 모델 개념이 없는 조선에 기생을 놓고 그림을 그린다. 튜브에서 닭똥같은 것을 바르고 하는 그를 보고 일본가서 배워온 엿장수 행색이라고 업수히 여기는 보도가 신문에 난다. 1920년부터 일본인 평론가 무네요시에 의해 조선적 미술이 떠오르자 고희동은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해방 후에는 사업가로 변신하고 국회의원도 지낸다.
야나기 무네요시 Yanagi Muneyoshi 잡지 사라키바 1910
무네요시는 일본에 서양 미술을 소개하며 문예지 사라키바를 만든다. 유럽에서 유행하던 art and craft movement을 일본에 들여와 민중적 공예를 작품화하는 새로운 개념인 민예folk arts를 일본에 소개한다. 또한 오타쿠라 텐신이 일본적인 미술을 추구하듯이, 무네요시는 조선적 미술을 발견한다.
야나기 무네요시 부부 Yanagi Muneyoshi
조선민족미술관 1924
조선의 자기에 매료된 무네요시는 조선을 20번도 넘게 여행하며 1922년에 책<조선의 미술>을 쓴다. 총독부는 오카큐라 텐신과 페넬로사가 일본을 돌아다니며 사찰의 미술품을 정리했던 것처럼 조선 물산공진회(1915-22)를 만들어 식민지의 미술품을 조사한다. 총독부는 조선의 미술은 중국과 비슷하다고 발표한지만 무네요시는 조선의 미술은 독자적인 백자의 미, 백의 미, 비애의 미가 있다고 반기를 든다.
무네요시에 의하여 이조자기 및 막사발 등 조선의 미가 재발견된다. 또한 <석굴암에 관함>글을 통해 중국의 문화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현대학자들은 무네요시가 오리엔탈리스트적 시각으로 식민지를 보았다고 평하지만 그는 정치에도 관심을 나타냈다. 1919 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의 폭력을 폄하하는 내용의 <조선인에 관하여>라는 글을 신문에 내고 광화문 철거를 반대하기도 했다.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무네요시, 아사카와 노리타카(1884-1964)
아사카와 형제 역시 조선을 사랑했다. 총독부 산림청 공무원 타쿠미는 조선의 민둥산에 품종을 개량하여 성장이 빠른 잣나무를 심는다. 타쿠미는 한국의 밥상, 쟁반, 광주리를 주제로 <조선의 소반>(1929) 책자를 내며, 자기에 관심이 많은 노리타카는 <조선도자기명고>(1931) 책자를 낸다. 무네야기는 조선에 와서 아사카와 형제들의 도움을 받으며 조선의 미술에 대한 연구를 한다.
조선 총독부박물관 1915
1915년 합방 5 주년 기념 행사로 경복궁 집경당 안에 8도의 우수상품을 진열하는 박람회 조선 물산공진회를 연다. 일본으로 인해 산업적으로 발전한 조선을 보이는 의도이다. 엑스포 후에는 최초의 미술관인 조선 총독부 박물관을 꾸민다. 1920-30년대는 백화점 시대이자 박물관 시대이기도 하다. 일본은 조선의 역사를 새로 쓰려는 의도에서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가야(임나) 시대에 일본이 조선을 통치했으므로 다시 들어온 것 뿐이라고 한일 합방을 정당화 한다. 하지만 무네요시는 이에 맞서서 조선은 다른 나라라고 주장한다.
이왕가 미술관, 박물관 1933
왕실에서 덕수궁 석조전 옆에 박물관을 만든다. 처음에는 왕실의 유물을 일반인에게 공개했지만, 점차로 일본의 유물을 전시한다. '덕수궁 미술관'으로 1938년에 다시 건립한다. 1920-30년대에 이중섭 나혜석 등 조선 화가들이 일본으로 유학가서 동경 미술학교, 무사시노미술학교, 제국 미술학교 등에서 미술을 배운다.
조선 총독부미술관 1939
성전 전람회, 결전미술 전람회를 열어서 종군 화가의 그림을 진열하며 전쟁 참여를 종용한다.
간송 전형필 (1906-1962)
염상섭 (1897-1963)
염상섭은 일본 유학시에 무네요시와 만난다. 동아일보 기자를 하면서 소설<표본실의 청개구리>(1921)을 쓴다. 1920년대 일본 문단의 개성 논의 및 무네요시의 ‘독자적 미’에 영향을 받아 '개성과 예술'(1922) 이라는 문예평론에서 독자적인 미를 주장한다. 1879년에 헨리크 입센이 쓴 <인형의 집>이 나오자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연극으로 상연 된다. 1920년대 조선에서 주인공 노라에 대한 논란이 일어난다. 이광수는 노라는 집으로 돌아가라 라고 하지만 염상섭은 노라처럼 살아라 라고 평한다. 염상섭의 소설<제야>(1922)는 나혜석같은 신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이혼한 남편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이다. 새로운 개념 자유 연애가 조선 반도에서 논란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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