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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근대미술8: 두 얼굴의 오리엔탈리즘 2/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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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3,053회 작성일 15-03-0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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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근대미술8 Modern Artists in East Asia 
 
두 얼굴의 오리엔탈리즘
 
 
19세기 중반 유럽은 근대 국가 출범 후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부르주아의 출현, 도시의 팽창, 빈부의 격차 등 자본주의의 피곤함을 느끼던 중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성공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이념으로 여겨져 전세계로 퍼진다. 한편 일본은1912년에 메이지천황이 죽자 다이쇼천황의 치세에서 짧은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쇼와천황이 1987년까지 군림한다.
 
1920년대 조선은 사회주의 영향을 받는 동시에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1919년에 삼일운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독립 운동단체 (신간회) 와 사회주의 문인단체(KAFF)는 해체되고, 사상 불순  및 언론 매체를 검열하는 시대가  시작된다.  1930년대에 경성에 백화점이 세워지고 소비적인 모던걸이 등장한다. 이상을 위시한 작가들은 만연한 자본주의적 문화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쳐다본다.
 
 
일본 미츠코시 백화점이 주도한 미술 문화
 
 
미츠코시 백화점, 도쿄 신바시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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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는 일찌기 없었던 근대적 개념이자 낯선 단어들 (자유, 평등, 민주주의, 신문,사진 등등)이1870년대에 일본을 통해 번역이 되어 중국, 한국으로 들어온다. '미술'이란 학문적 단어 역시 독일어 번역에서 따오며,  ‘미술사’라는 개념도 일본이 최초로 도입한다. 애도시대에 고급 기모노를 파는 오복점으로 출발한 미츠코시 백화점은 1908년에 런던 해럴드 백화점을 모델로 하여 신고전주의 건물로 변신한다. 백화점 광고문에 일본 미술을 정의하는 핵심 내용이 담겨있다.
 
 
쯔가이다나, 도코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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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츠코스 백화점은 미술부를 설치하고 1910년에 특별 전시회를 통해 미술품 판매를 시작한다, 백화점에 다다미방을 꾸미고 벽장식(도코노마)에 그림을 걸고 선반(쯔가이다나)위에 꽃병을 진열한다. 갤러리가 없었던 시절이므로 신흥 엘리트들이 백화점으로 그림을 사러 온다. 집에 그림을 진열하고 손님을 불러 다도를 즐기며 나의 문화적 취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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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메이지 유신 전, 도쿠가와 쇼군(막부)시기는 봉건시대였다. 전통적으로 그림은 후원자 단독 소유로서 대대손손 내려왔고 시중에 유통되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후 다이노(영주), 사무라이 계급이 붕괴되자 고미술 상인이 몰락한 귀족의 미술품을 사들인다. 고미술상이 미술시장을 독점하는 가운데 일반인은 그림에 대한 감식안이 없고 표구값, 위작 우려 등 미술 시장이 혼란하기 그지 없다. 그런데 미츠코시 백화점이 미술품 정찰제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파라다임을 제시한다. 20세기 초반 새롭게 등장한 야마노테족Yamanote인 대학교수, 의사, 변호사, 고위 군인들은 다도를 즐기며 미술품을 감상한다. 원래 귀족의 문화였지만 다이쇼 시대에는 돈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했다.
 
1909-10년 경 일본 미술의 주제 및 크기는 미츠코시 백화점의 소비주의consumerism전략에 의해 결정되었다. 도코노마 안에 걸릴 반절 사이즈 그림으로 화조, 미인도, 십이지장생 등 주제를 시시철철 바꾸도록 소비자를 교육시킨다.  백화점 미술 판매는 인기가 있었고 항상 완판을 기록했다.
 
1907년에 생긴 일본 문부성 전람회는 미술가들의 등용문이 된다. 역사화, 인물화 등 대작이 주로 출품된다. 미츠코시 백화점은 문전에 입상한 화가들에게 그림을 부탁한다. 위작 시비를 우려하여 생존한 작가의 신작만 판매하는 전략을 슨다. 미술상들은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백화점은 떼돈을 번다.
 
 
 
오에 켄자보로 Oe Kenzaburo (1935-)          Claude Simon(1913-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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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켄자보로는 10대에 원폭을 경험한 전후 시대의 작가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의 지성으로서 천황제 반대 및 일본의 과거에 대한 반성 등을 언급했다. 프랑스에서 켄자보로를 초청하자 그는 프랑스가 하고 있는 핵실험을 이유로 들어 초청에 응하지 않는다. 그의 초청 거부를 프랑스에 대한 공격으로 여긴 프랑스 노벨 수상 작가 클라우데 시몽은 일본의 식민 및 침략을 비판한다. 켄자보로는 단지 핵실험을 반대했을 뿐 프랑스를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을 정치적으로 비판한 시몽은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하여 일본의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의 역사 경제 정치는 다 배제시킨 채 서구의 시각에 바라본 신비화된 아시아의 미를 의미한다.
 
 
Okakura Tenshin(1863-1913)                  윌리엄 비글로우 William Sturgis Bigelow(1850-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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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시대에 요코하마에서 상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오카쿠라 텐신은 격변하는 메이지 유신을 겪으며 살아남기 위해 영어를 배운다. 당시에 일본에 들어온 보스톤 하버드대 의사 비글로우는 텐신에게 통역 도움을 받는다. 비글로우는 엄청난 양의 일본 미술품을 컬렉션하여 보스톤 파인 아트 뮤지엄에 기증한다. 보스톤 뮤지엄은 일본 컬렉션을 관리하기 위하여 비글로우가 추천한 텐신을1904년에 초대 큐레이터로 초대한다. 보스톤 뮤지엄은 세계 최대의 일본 컬렉션을 소유한다.
 
 
어니스트 페놀로사 Ernest Fenollosa (1853-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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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80년대에 양화가 유행하자 메이지 정부는 국가적 정체성 확립을 위한 동경 미술학교 Tokyo Art School(1887-)를 세운다. 텐신은 초대 교장을 지내며 일본화인 채색 수묵담채 니홍가Nihonga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하버드대학의 정치 경제학자 페놀로사는 토코의 제국대학에서 강의를 하는데 텐신이 통역을 한다. 오리엔탈리스트의 시각으로 일본 미술의 아름다움에 심취된 페넬로사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인 양화를 그리지 말고 일본 전통 미술 니홍가를 그리라고 조언한다. 또한 고미술 수집 위원회를 만들어 사찰 미술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일본 정부의 재산으로 만든다. 일본인에게 종교적 대상이었던 부처, 탱화 등이 페넬로사에 의해 감상의 대상으로 변한다.
 
 
Tokyo National Museum (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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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신은 페넬로사의 일본 미술 강의를 통역하며 감화를 받아 일본 미술사를 만든다. 일본 미술이 중국 한국과 비슷함을 느낀 그는 중국 인도를 여행을 하여 그 곳의 미술작품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 하지만 너무 상이함을 발견한 그는 일본 미술사 책 첫머리에 아시아의 미술은 한 줄기로 통하며 불교, 힌두교, 도교, 유교는 아시아 전체가 공유하는 철학이자 종교이며, 단지 히말라야에 의해 지역적으로 나누어져 있을 뿐이라고 쓴다. 일본 미술이 남의 것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일본은 5-6세기 이전에는 소수민족이 홋카이도와 오키나와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미술사는 일본 본토 민족인 야마토가 살기 시작하고 세이코 여자 천왕이 다스리는 5-6세기부터 시작한다. 메이지 천황과 관련된 야마토적 일본적 정체성에 중점을 둔다. 이러한 텐신의 생각이 정리된 일본 미술사 책 <History of Art in Japan>이 1908년에 불어로 발간된다. 인종주의적으로 기술된 일본 미술사가 서양에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추려는 일본은 유럽의 뮤지엄을 쫓아서 서양식으로 토교 박물관을 만든다.
 
 
다카이치 유이치 Takahashi Yui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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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정부는 안토니오 폰타네지(Antonoi Fontanesi)를 양화( yoga) 교사로 초빙한다. 다카이치 유이치는 양화의 대표적 인물이다. 1870-80년대에는 양화가 탄력을 받지만 1980-90년대에는 니홍가를 지지하는 텐신과 페넬로사로 인해 양화의 입지가 좁아진다.
 
 
구로다 세이키 Kuroda Seiki, Lakeside 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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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옷을 입고 있지만 유럽적 구도이다. 화가 구로다 세이키는 규슈 남단 사찌마 지역의 가고시마 출신이다. 구로다 세이키의 큰아버지는 메이지 유신에 공을 세워 자작 작위를 수여 받고 그에게 입양된 구로다도 자작이 된다. 프랑스에 유학가서 법을 공부하다가 미술가로 전향한다. 조선 최초 서양 화가 고희동은 일본에 유학가서 양화를 배운다.
 
 
빈센트 반 고호 Vincent van Gogh, Flowering Plum Tree, 1887 Japonaise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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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서양화를 쫒는 반면 반고호 등 인상파 화가들은 일본 우끼요예를 쫒아가는 자포니즘이 유럽에 유행한다. 추상의 길목에 있었던 유럽은 일본의 평면적 장식적 니홍가에 매력을 느낀다. 자포니즘 역시 오리엔탈리즘의 일종으로 서양의 시각에서 신비스런 미를 느끼는 것이다.
 
 
 
조선 근대미술
 
채용신(1848-1941),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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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적 그림이 조선에도 나타난다. 어진을 그리는 당대 최고 화가 채용신은 관료지만, 조선말 혼란기에 관직을 버리고 화가 집안으로 살아간다. 당대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초상화를 의뢰하면 아들에게 고객 사진을 찍어오게 해서 그린다.
 
 
채용신, 매천 황현 초상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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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지사, 독립지사의 초상을 주로 그리는 채용신은 황현의 사진을 가지고 초상화를 그린다. 얼굴은 사실적으로 그리지만 옷은 정해진 본대로 그린다. 1911년 합방이 되자 자살을 한 매천의  영정은 최초의 조선인 사진관에서 찍은 국보급 사진이다. 
 
 
김은호, 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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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화가 김은호는 일본화를 배우러 유학을 간다. 니홍가 스타일로서 수묵담채화적이며 동양적인 편편한 면모를 보인다. 김은호는1919년 삼일운동에 참가하지만 1920년 일본 유학 후 친일적 경향으로 바뀐다. 김은호를 위시한 당대 유명 화가들은 이완용이 만든 조선 서화 미술회(1912-1920)에서 그림을 배운다. 조선 화가들의 등용문인 조선미술 전람회(1922-1940)가 생기고, 국전이 1951-81년 동안 이어진다. 김은호는 국전 심사위원이 된다.
 
 
김은호, 금차봉납도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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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중일전쟁 당시 김은호는 고위층 인텔리 부녀자들의 모임인 금차회 장면을 그려서 금모으기 운동을 지지한다. 2004년 경 이 그림이 나타나자 남원 지역민들은 춘향 사당에 가서 그가 그린 춘향 그림을 떼어낸다고 소동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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