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근대미술 5: 명성황후의 사진을 자객에게 넘긴 일본인 사진사? 2/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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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2,701회 작성일 15-02-12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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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의 어머니 엄비)
동아시아근대미술 5 Photography Studios and Film Theaters
조선에 생긴 일본 어용 사진관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empire)을 선포한다. 서구 열강처럼 제국을 만들고 근대국가의 정체성을 위한 장치들을 시작한다. 황제로 등극하고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국장을 지낸다. 또한 서구식 건물 석조전을 지으며, 사절단을 보내는 등 노력하지만 열강에게 휘둘리고 신하들의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제국을 꾸릴 힘의 근간이 마련되지 않는다.
1905년 일본과 을사조약을 맺은 후 조선은 외교권을 잃고 반식민지 상태가 된다. 고종은 헤이그에 이준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소행을 알리려 하지만 실패한다. 이를 빌미삼아 일본은 1907년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킨다. 순종은 창덕궁에 머무르며, 퇴위한 고종의 장수를 비는 의미로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환구단과 황궁우

대한제국 시기에 고종은 환구단과 황궁우를 짓는다. 청의 제후국이었던 조선은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내지 못했지만, 이제 황제가 된 고종은 중국 황제의 제단인 천단을 본떠서 환구단을 짓는다. 고종은 여기서 대한제국 선포식을 거행한다.
조선호텔 (1914-1968)
1910 년에 조선을 합방한 일본은 환구단이 심히 거슬린다. 황궁우와 아치를 제외하고는 환구단을 다 밀어 버리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을 짓는다. 한국 최초의 서구식 문화가 대부분 이곳에서 시작된다. 해방 후 호텔은 대한민국 정부 소유가 된다. 국빈급의 호텔이 필요한 정부는 외국자본과 결탁하여 현대식 호텔을 짓는다. 1972년에 정부는 삼성에게 지분의 반을 주고 웨스틴 인터내셔널이 나머지 반을 소유하다가, 지금은 재벌 신세계의 소유로 되어있다.
병인양요(1866)
프랑스신부가 한국에 천주교를 포교하자 흥선대원군 부인 및 아녀자들 사이에서 급속하게 펴진다. 아편전쟁으로 청이 혼란에 빠짐을 목격한 조선은 프랑스가 들고 들어온 종교를 침입의 구실로 여긴다. 1866년 프랑스 신부를 위시하여 8000 명이 순교하는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청진에 주둔 중인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들어온다. 작은 나라 조선을 우습게 보고 별 준비 없이 들어온 프랑스는 조선에게 당하고 후퇴한다. 이로 인해 흥선 대원군은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쇄국 정책을 강화한다.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올림피아 Olympia 1863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 파리는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창녀 ‘올림피아’로 인하여 들끓고 있었다. 당시는 비너스, 오달리스크 등 여신과 타국 여자의 누드만 그리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동시대 프랑스 여자의 누드가 ‘점잖은’ 젠틀맨이 ‘고상한’ 취미를 즐기는 갤러리에 전시가 된다. 프랑스는 1789 년 혁명 이후 오랫동안 혼돈을 거듭하는 가운데 나폴레온으로 인해 제국주의 기수로 등장한다. 아프리카를 나누어 가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아시아 쪽으로 눈을 돌리는데, 여기에 일본이 동참하면서 조선은 급속도로 휘말리게 된다.
신미양요 1871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막무가내로 강화도에 들어오자 조선의 공격을 받는다. 서양인에 반감이 컸던 조선은 무역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일본도 1876년에 운요호를 끌고 강화도에 들어오고 조선은 불평등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박병선 (1928-2011) 외규장각 의궤
왜 일본도 미국도 하필 강화도로 들어왔을까? 당시에 강화도에는 왕실 도서관인 외규장각이 있었다. 18세기 말 정조는 왕실의 서책을 분리 보관키 위해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만들었다. 이 외규장각은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인의 공격으로 불타고 서책 몇 천권을 약탈당한다. 일제 강점기에 프랑스에 유학간 최초의 여성 박병선은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외규장각 도서를 찾기 위해 프랑스 전역을 다닌다. 그러다가 우연히 조선의 직지 신경을 발견하고 세계 최초의 활자임을 알린다. 드디어 프랑스 국립 도서관의 허름한 창고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발견한 박병선은 스파이로 낙인 찍히고 해고당한다. 여성 사학자의 반평생의 노력으로 인해 외규장각 의궤가 알려지고,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미테랑 대통령과의 떼제베 협상시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요구한다. 프랑스는 그 중 일부인 의궤를 5년 단위로 갱신하며 영구 대출을 해 주고 있다. 19세기에 일어난 외규장각 도서 약탈 사건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보빙사 민영익 1883
청은 일본의 한반도 독점을 막기 위하여 조선에게 열강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라고 권고한다. 조선은 1882년에 한미수호통상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에 사절단 보빙사를 파견한다.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은 약관 23세에 보빙사로 미국에 간다. 명성황후의 오빠는 배달된 폭탄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의 양자로 입적된 민영익은 집안의 제사를 책임져야 할 입장이었다. 명성황후는 가난한 방계 출신 민영익을 청, 일에서 유학시킨 후 조선의 정치 요직을 섭렵하게 한다.
개화파와 보수파 왕가 사이에서 중간 입장에 있었던 민영익은 1883년에 만장일치로 보빙사 추천을 받고 미국에 간다. 미국 대통령을 접하자 그는 갑자기 신발을 벗고 절을 한다. 뜻밖의 행동에 놀란 미국인들은 삽화와 함께 기사를 신문에 낸다. 1895 년 고모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자 입지가 약해진 민영익은 상해 홍콩 등지로 망명을 다니다가 죽는다. 대한제국기 및 일제 강점기에 지식인 및 명문가 자제들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기도 했다.
청일전쟁(1894-95), 러일전쟁 (1904-5) 신문 삽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무대는 한반도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종군사진가를 파견하고, 이를 게기로 일본인 사진가들은 조선에 대거 들어온다. 이들은 전쟁 후에도 한반도에 남아서 일본인 거류지 남산에서 사진관을 차린다. 청일 전쟁은 일본 사진사에 있어 국외 사건을 사진으로 보도하는 최초의 기념비적 사건이 된다.
가이 사진관 1895 남산 일대 일본인 겨류지역 1894-95
조선에 사진관이 언제부터 생겼을까? 1885년부터 남산에 일본 거류지역이 생기고 숙박업 및 게이샤 요리집도 생긴다. 사진관은 지붕을 채광창으로 덮었기에 눈에 뛰는 landmark 건물이 된다. 조선은 일본인 사진가들에 의해 찍히는 대상이 된다. 조선의 풍속 및 풍경을 찍어서 서양인에게 팔기도 하며, 조선의 산세를 찍어서 일본에 보내는 스파이 노릇도 했다. 일본인 사진가는 떼돈을 버는 가운데 사진관은 일본의 이미지로 굳혀지고 반감이 커진다.
당시 사진관을 조선에 차린다는 것은 정치적 배후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을 구실로 하여 청과 일본이 조선에 파병을 한다. 청일 전쟁 직전 일촉즉발의 전운이 조선에 감돌자 일본 아사이 신문에서 조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왕궁과 사대문 일청전쟁실기 제1편 1894.8.27
서양에서 1839년에 발명된 카메라는 기록 매체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전쟁 사진을 찍는 것은 노출 시간이 길어서 불가능했다. 당시에 전쟁 장면은 삽화나 도화로 그려서 신문에 실린다. 전쟁의 무대가 됐던 조선을 보러 만주와 일본에서 관광객이 몰려와 붐이 인다. 전쟁 중 찍혔던 조선 이미지들이 관광 카탈로그 및 화보 사진첩에 실린다.
무라카미 텐신, 전봉준 (1854-1895)
청일 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인 사진사가 이름을 드러낸다. 이토 히로부미와 친근한 무라카미 텐신은 신문 특파원으로 조선에 와서 동학혁명의 주역 전봉준이 압송당하는 장면을 찍는다. 텐신은 조선에 계속 머무르다가 1895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자취를 감춘다. 당시 명성황후는 공식 사진을 찍은 적이 없어서 얼굴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토의 지휘 아래 무라카미 텐신이 왕후의 사진을 찍어 자객에게 넘겼다는 설이 있다. 2년 후 1897년 대한제국 선포하는 해에 무라카미 텐신은 다시 조선에 나타난다. 이토 히로부미의 주선으로 어용 사진가가 되어 왕실행사의 사진을 찍는다.
무라카미 텐신, 일본 황태자 방문 기념사진 1907
1907년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킨 일본은 조선 왕실의 후계자 구도를 만들어 간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황태자(다이죠 천황)의 조선 방문을 기념하는 사진을 무라카미 텐신로 하여금 찍게한다. 또한 순종의 후계자로 엄비의 소생인 10살의 영친왕을 지명하여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시킨다. 영친왕은 일본 황족 교육을 받으며 육군사관 학교를 다닌다. 일본에서 볼모로 살면서 일본 황족 이방자와 결혼하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산다.
엄비와 고종 Consort Eom and Gojong 1907
1907년에 아들 영친왕을 일본으로 보낸 엄비는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한다. 영친왕은 1912년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엄비는 진명 여학교를 1905년에 만든다.
무라카미 텐신, 순종황제 개성만 일대 순행 "순종서북순행사진첩" 1909
고종에 이어 어린 순종이 즉위하자 불안을 감지하는 조선 백성은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메이지 황제는 천황체제로 파라다임이 바뀌자 낯설어하는 백성에게 천황을 체험 시키려고 전국을 여행다니며 민심을 다독거렸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천황의 순행 경험을 조선에 그대로 옮겨서민심 무마 차원으로 순종과 함께 조선 곳곳을 다닌다. 하지만 이토가 동행한 순행은 오히려 조선인을 자극하여 골목길, 뱃길, 기찻길을 막아 놓는다. 1909년에 이토가 안중근에 의해 암살되자, 조선은 1910년에 합병된다. 이토와 안중근의 초상 사진은 일본과 조선에서 마구 팔리며, 텐신은 실업가 재력가로 부상한다.
이와타 카나에 순종황제 초상 1909 Uchida Kuich Emperor Meiji 1873
이와타 카나에는 어용 사진가로 주로 스튜디오 촬영을 한다. 메이지 초상 사진이 당시 군주의 아이콘이 되어 순종도 비슷하게 포즈를 취한다.
김규진 천연당 사진관 1907
엄비의 도움으로 조선인이 하는 최초의 사진관이 생긴다. 사진관을 하려면 정부의 뒷받침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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