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근대미술 4: 근대화를 향한 조선 고종의 외로운 노력 1/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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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2,929회 작성일 15-02-05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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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대미술 4 Spectacles of State Events and Formation of Modern Nation-States
대한 제국을 선포하며 근대화를 노력했던 고종
19세기 말에 동아시아는 외세의 압력으로 근대국가로 바꿔가지만, 국민들은 근대국가가 무엇인지 알 턱이 없다. 일본은 천황의 초상 사진을 관공서에 배포하여 절을 하게 하는 등 근대국가의 정체성 확립을 위하여 군주의 이미지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유포한다. 당시 조선은 열강들의 침입으로 자고 일어나면 굵직한 사건들이 하나씩 터지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임종국(1929-1989), 친일 문학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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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임종국은 일제 시대에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이상 평론 전집을 내기 위하여 문학 자료를 찾던 중에 우연히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모윤숙, 김동인, 노천명 등 동시대 기득권 문인들이 일제 강점기에 친일 활동을 했음을 알게 된다. 근대 문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최남선, 이광수, 홍명희 등도 조선의 청소년들에게 일본의 '성스러운 전쟁'에 참여하도록 글을 썼던 기록을 발견한다. 임종국은 매일 신보 10년치를 손으로 복사하고 총독부의 기록들을 뒤지며 철저한 자료 조사를 한 후에 1966년에 <친일 문학론>을 낸다.
임종국은 이 책에 대한 사회적 반향을 예상하지만, 의외로 그의 책은 주목을 받지 못한다. 경제 부흥이 주 관심사였던 1960년대 한국 사회는 오욕의 역사를 들추지 말고 묻자는 분위기로 흐르며 그의 저술을 스캔들 정도로 취급해 버린다. <친일 문학론> 초판 1300 부 중에서 일본이 1000부를 사들이며 나머지 300부를 파는데 20년이 걸린다. 임종국 사후에 친구들이 민족문제 연구소를 설립하여 그의 방대한 자료를 보관하며 친일 인명 사전을 편찬한다. 시간이 흘러1970-80년 대 민주화 운동가들이 독재의 뿌리를 캐다보니 그들이 일제 시대에 ‘잘 나가던 인사’였음이 드러나고, 드디어 임종국의 책은 세상의 주목을 받게된다.
운요호 사건 1875
1870-80년대 조선은 혼란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8)이 시작된 직후 운요호를 타고 강화도에 나타난다. 일본은 페리 제독이 미국기를 달고 자신의 나라에 들어왔던 방법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한다. ‘조선 근처 바다를 측량한다’는 빌미를 주고 조선이 공격하자, 일본은 '배에 단 일본기도 못 보았냐’고 트집을 잡으며 조선을 공격한다. 조선은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수호통상 조약 (1876)을 맺으며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한다.
조약 및 국기라는 개념은 들어본 적도 없었던 조선은 강화도 조약 (1876)후 수신사 및 유학생을 일본으로, 보빙사를 미국으로 보내서 선진 문물을 공부하며, 근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조선의 신하들은 친일파 친청파 친러파로 나누어 지며, 조선에 침을 삼키는 열강들은 조선이 근대화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명성왕후 시해 사건 후 미국 신문 하와이안 가젵트에 실린 고종과 민비 삽화 1895
1882 년 임오군란이 일어난다. 친일파, 친청파, 친러파의 파벌이 심해지고, 신식 일본식 군대와 구식 군대 간에 갈등이 생기자, 구식 군인들이 일본 공관을 쳐 부순다. 이 사건이 고종의 삽화와 더불어 1882년 일본 신문에 실린다. 한국의 고관이 어진을 궁금해하는 일본의 한 외교관에게 삽화를 그려서 준 것이다. 신성하게 간주되었던 어진은 1882-85년까지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었다.
1895년에 명성왕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을 겪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아관파천 한다. 강화도 조약을 맺은지 20년이 흐른 후 조언을 많이 해주던 부인은 죽었다. 고종은 일본 미국 프랑스와도 강압적으로 불평등조약을 맺는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고종은 제국 (empire) 개념이 퍼지는 세계정세를 들고 조선 역시 제국으로 재탄생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1897년에 대한 제국을 선포하고, 자신을 황제, 명성 황후로 칭한다. 또한 국가 체제에 전반적인 개혁을 시도하지만 개혁을 뒷받침할 힘의 근간이 전혀 없었다.
노웰 Percival Lowell, 고종 King Gojong 1884

드디어 고종의 초상 사진이 나온다. 창덕궁 농수정 정자에 조선 복장을 한 고종이 있다. 카펫, 향료 및 서양식 가구도 있다. 강화도 조약 후 사진기 등 일본 신문물이 조선에 들어온다. 고종은 보빙사 사절단의 미국인 통역인 노웰을 초청하여 사진을 찍게한다. 노웰은 <The Land of Morning Calm>이란 책을 내고 고종의 사진을 실는다. 이 사진은 외국에 알려지는 고종 이미지의 표본이 된다.
노웰 Percival Lowell, 황태자 순종 The Crown Prince of Korea 1884
귀인 엄비 소생 순종은 몸이 약해서 이복동생 영친왕이 후계자가 된다. 당시에는 사진을 찍으면 혼을 뺏긴다고 믿었기에 사진에 대한 터부가 강했다. 순종은 너무 놀래서 들어갔다가 억지로 나와서 찍었다고 전한다
Charles Varat from Tour du Monde 1892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 바르의 책에 실린 고종과 순종의 사진이다. 일본은 일부일처제의 근대화된 황실의 이미지를 보이기 위하여 메이지왕, 쇼켄왕후, 자식들의 가족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조선의 왕실 사진에는 명성 왕후의 이미지는 없고 대신에 황태자가 나온다. 왕후 사진이 나돌기는 하지만 실제 왕후였다고 믿기는 어렵다. 조선은 왕족 사진을 철처히 관리했기에 시중에서 구할 수 없지만, 일본은 고종의 사진을 입수하여 요꼬하마 항구 등에 유통 시킨다. 일본 사진관을 통해 고종 사진은 미국의 스미소니안 박물관으로 간다.
King Gojong, Constance J D Tayler, Koreans at Home, 1904
근대화가 대한 제국기에 많이 일어난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서양 군주들의 신식 군대 복장으로 완전히 바꾼다. 일본은 프러시아 (독일)의 헌법 및 군대 체제 등을 본딴다. 조선에도 프러시아 군인들이 들어오며 자신들의 옷과 황제의 사진을 보여준다. 훈장 제도도 만들고, 카펫 및 가구도 서구식으로 바뀐다. 고종은 외교적 관례로만 사진을 사용했다.
King Gojong and Prince Sunjung, Karl Lewis 1900-1903
대한제국 선포 이후 3 년만에 고종과 순종은 세련된 복장으로 다시 사진을 찍는다. 고종의 삽화가 일본 신문에 실린지 20여년 지나니 요꼬하마항에서 서구 복장의 고종의 사진이 막 유통된다. 한편 고종은 자신의 초상을 대중에게 알릴 필요성을 느낀다. 1900-1907 년에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셀러 등이 한국에 들어와서 그리스도 신문을 구독하면 고종 황제 초상 사진을 준다는 광고를 내는데 고종은 이를 허락한다.
Joseph de la Neziere, Matin Calme(Morning Calm), King Gojong, 1902
프랑스인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 라는 책을 내고 고종의 초상을 그려서 실는다. 황금색 곤룡포 입고 경운궁 중화전 왕좌에 앉았다. 황제를 상징하는 일월 오공도를 배경으로 한다.
대한제국 태극기 교룡기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2 마리의 용이 마주보는 교룡기는 있었다. 국민적 정체감을 심으려는 의도로 태극기를 만드면서 대한 제국의 모습을 갖춘다. The U.S. Navy에서 1882년에 발행한 책자<The Flags of Maritime Nations>에 태극기가 실린다.
경운궁 일제시대 사진엽서
고종은 아관파천 후에 경운궁으로 가서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왕을 황제로 고쳐서 권력이 더 커지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힘이 없었기에 1894-1895년의 갑오개혁도 실패로 끝난다.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짧은 기간 동안 노력했지만, 내부적으로 의견이 모아지지 않고 외부적으로 열강들의 방해가 너무 많았다. 메이지 일본의 경우 천황을 중심으로 헌법이 유지되도록 노력을 했고 신하들의 생각은 하나로 모아졌다.
경운궁(덕수궁) 중화전
1897년에 고종은 정무를 보는 중화전을 2층으로 짓지만 1904년의 화재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대한제국 선포하면서 황제가 되니 천정의 그림을 교룡으로 바꾼다.
중화전 가운데 왕의 가마가 올라가는 통로 닥돌이 있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면서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1907년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하고 어린 순종을 즉위시키고 후계자로 정해진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간다. 일제의 강점이 1910년에 시작된다.
덕수궁 석조전
서양인 건축가를 고용하여 신고전주의 Neoclassic 건물로 짓는다. 이씨왕조 문장인 오얏꽃 (자두꽃, 이화)이 페디먼트에 새겨져 있다. 왕실 집기에 조선 왕조 문장인 이화문이 들어간다.
경운궁, 돈덕전 빌코니에 있는 고종, 어린 영친왕
경운궁 안에 화려한 서양식 건물 돈덕전이 있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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