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근대미술 3: 일본 메이지 천황의 사진에 절을 1/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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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3,300회 작성일 15-01-29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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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대미술 3 Splendid Monarchs and Heads of States
사진을 권력의 수단으로 이용한 일본의 메이지 천황
서태후 Empress Dowager of China 와 대사부인들

19 세기 초중반 청나라는 격변의 시대였다. 중국을 세상의 중심(중화 사상)으로 여겨왔던 중국인은 동등한 입장의 외교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교역을 조공으로 해석하여 ‘열강이 조공을 바치니 무역을 허락한다’ 하는 식이다. 열강들과의 전쟁에 참패하고, 광서제는 일본의 근대화를 바라보는 가운데, 외세에 트라우마가 있는 서태후도 열강을 의식한다. 외교적 관례로 대사 부인들을 초청하여 사진을 찍어 초상사진을 선물로 준다. 광서제는 서태후에게 가택 연금을 당한 채 죽는다. 어린 아들, 어린 조카를 대신하여 50년 동안 섭정을 한 서태후는 3 살짜리 부이를 마지막 황제로 옹립한다. 1911 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증화민국이 탄생한다.
더링 Der Ling (1886-1944)
서태후는 중국 대사로 외국에 나갔던 관료의 딸 더링을 시중으로 옆에 둔다. 더링은 영일불어 삼개국어에 능하고 외교문물에 박식했다. 더링을 통해 서태후는 세상의 소식을 들으며 빅토리아 여왕을 본보기로 삼는다. 빅토리아 여왕은 초상사진을 홍보물로 이용한 최초의 서양 군주이다.
서태후는 중국 대사로 외국에 나갔던 관료의 딸 더링을 시중으로 옆에 둔다. 더링은 영일불어 삼개국어에 능하고 외교문물에 박식했다. 더링을 통해 서태후는 세상의 소식을 들으며 빅토리아 여왕을 본보기로 삼는다. 빅토리아 여왕은 초상사진을 홍보물로 이용한 최초의 서양 군주이다.
더링 Der Ling, <서태후를 시중들며 Assisting Her Imperial Majesty, the Empress Dowager of China>
더링은 후에 미국에 와서 살며 서태후에 관한 책 <Assisting Her Imperial Majesty the Empress Dowager of China>를 발간한다. 서태후의 외교용 사진은 더링의 오빠가 대부분 찍는다.
서태후 Empress Dowager of China
![cixi-flowers-chang_2699521b[1].jpg](http://www.bongkim.com/data/cheditor4/1501/09e8ea0312470deaad24d15881ac9d16_rduygEiA6VR2TwTsKGtbDuo.jpg)
외교 관례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서태후는 사진매체에 취미가 생기고, 자신이 마치 영화 감독처럼 장면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경극을 좋아했던 서태후는 여배우로 분장을 하여 entertainment 사진을 찍기도 한다. 외교관례용 사진에는 서양 문물을 알고 있음을 보이려고, 프랑스제, 이태리제 가구를 배경에 넣는다. 청나라는 하늘이 내린 존재인 황제의 사진은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았고, 사진을 유포해서 권력을 곤고히 한다는 개념은 당시에 없었다.
캐더린 칼 Catherine Carl (1865-1938)
서태후는 미국대사 부인의 주선으로 화가 캐더린 칼을 시켜 초상 그림을 그리게 한다. 캐더린 칼은 세상이 궁금해하는 서태후에 관한 책을 발간한다.
캐더린 칼 Catherine Carl, 서태후 Empress Dowager Cixi, 1903-1904 Oil on Canvas
미국화가 캐더린 칼은 서태후가 화가에게 자율권을 주지 않아서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얼굴을 납작하게 그리면 안되고, 최고 권력자임을 나타내는 모든 소도구가 다 들어가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1904년에 미국의 루이지애나 퍼쳐스(Louisiana Purchase) 백주년 기념 박람회에 이 그림이 전시된다. 황후 그림은 황후와 동등시 되니 눕힐 수 없다고 한다. 그림을 세워서 운반하며, 기차역 마다 신하들이 나와서 절을 하면서 미국으로 옮겨온다.
휴버트 보스 Hubert Vos, 서태후 Empress Dowager Cixi 1905 Oil on Canvas

네덜란드 화가 휴버트 보스가 그린 서태후 초상이다. 청왕조에서 원하는 시호, 의자, 사과, 꽃이 다 들어간다. 20세기 초에 서양에 만연한 오리엔탈리즘으로 인해 휴버트 보스는 타인종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 휴버트 보스는 1899년에 조선에 와서 고종과 민비의 사촌 민상호를 그린 후, 청나라를 가서 서태후 초상을 그린다. 이 시기에 고갱도 타이티로 간다.
일본 메이지 유신 Meiji Restoration 1868

19세기 후반 중국, 조선의 인텔리는 다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광서제를 보필했던 신하 중에는 일본 유학파들이 많았다. 19세기 후반 광서제가 바라보던 일본은 도꾸가와 막부 시대가 막을 내리고, 헌법 내각제로 전환한 메이지 천황 시대가 시작된다. 도꾸가와 시대에 쇼군은 도쿄에 살았고, 천황은 교토에 살던 그림자같은 존재였지만, 1868년에 메이지(명치) 원년이 시작되어 일본은 근대화가 시작된다. 이 갑작스런 근대화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일본은 16-17세기 경부터 규슈섬의 나가사키항을 통해 네덜란드와 교역을 하며, 서구문물을 접하고 있었다. 이 영향으로 규수 사람들은 자유분방하며 개혁에 관심이 많았다. 초슈와 규수는 지역적으로 멀어서 도꾸가와 막부와 척을 지고 있었다. 또한 도꾸가와 막부 집안에 후손이 없자 알력이 생기고, 이 시기에 마침 페리 제독이 들어와서, 나라가 위태로와진다. 서구 문물에 일찍 접해 무기 개발 능력을 가지고 있던 규수와 쵸수는 연맹을 결성하여 쇼군 체제를 없애고 천황을 중심으로 나라를 꾸민다. 규수와 쵸수에서 시작된 메이지 혁명은 일본 근대사의 시발점이 된다.
메이지천황 Uchida Kuichi, Emperor Meiji (1852-1912), 1872

메이지천황은 도쿄로 입성한 최초의 천황으로 수도 이름을 애도에서 도쿄로 바꾼다. 찬황은 16살에 도쿄로 옮기면서 당시 실세들과 사진을 찍었다.
사이코 타가모리 Saigo Takamori
메이지 유신을 이끈 3대 영웅은 하급 무사 출신인 사이코 타가모리(Saigo Takamori 1828-1877), 키도 타카요시(Kido Takayoshi 1833-1877), 사카모토 요마(Sakamoto Ryoma 1836-1867)이다. 규수 지역에서 사령관급으로 출세한 이 3인은 최초의 근대전쟁이라 불리는 보신 전쟁(Boshin War 1868-1869)을 벌여서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시대를 연다.
Okubo Toshimichi
![240px-Toshimichi_Okubo_4[1].jpg](http://www.bongkim.com/data/cheditor4/1501/09e8ea0312470deaad24d15881ac9d16_JfPbCGPb9fI8JKS.jpg)
일본 근대사의 정치판을 짠 인물들은 대부분 큐수와 쵸수에서 나온다. 1868 년에 메이지 천황체제로 바뀜을 세계에 알리자 서구 열강들은 이를 인정하지만, 조선의 흥선 대원군은 인정하지 앉는다. 사이코 타가모리는 이에 앙심을 품고 조선을 침략하자는 정한론을 주장한다. 하지만 부하 오큐보는 메이지 초기 정권이 아직 약하고 조선을 칠 자금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이토 히로부미 Ito Hirobumi 이와쿠라 토모미 Iwakura Tomomi
![TomomiIwakura[1].jpg](http://www.bongkim.com/data/cheditor4/1501/09e8ea0312470deaad24d15881ac9d16_MOmuBotfsI21etLG.jpg)
한편 이와쿠라 토모미와 이토 히로부미는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가서 선진 시스템을 공부하고 돌아온다. 이들 역시 타가모리의 정한론을 반대한다. 그러자 다카모리는 쿠수와 쵸슈에서 초기 메이지 천황을 반대하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1877년에 선암전쟁에서 전사한다. 다카모리가 죽자 정한론이 꺾이고 이 때부터 유학파 이토 히로부미와 이와쿠라는 실세로 등장하여 근대국가를 위한 행정 및 제반 제도의 기틀을 마련한다.
쵸슈 출신 이토 히로부미는 동아시아 근대화에 절대적 역활을 한다. 1860년 최초로 영국 유학을 다녀오고, 정치를 하면서도 유럽, 미국으로 일년씩 공부를 하러 간다. 미국에서는 세법제도를 배우고, 독일에서는 화족 제도 및 헌법을 배우지만, 이토는 서구식 제도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천황이 존재하는 일본식 헌법을 구상한다. 동북아를 나누어 가질 외교 전략도 세운다. 일본은 러일 전쟁(1904-5)을 일으키고 무적함대로 알려진 러시아를 쳐부순다. 이름도 없었던 섬나라 일본에게 당한 러시아는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일본은 국제적 주목을 받는다. 이토는 협상차 러시아에 가다가 만주에서 1909년에 안중근이 의해 암살당하고 1910년에 조선을 합병한다. 일본의 전략은 항상 같다. 빌미를 먼저 제공하고 일부러 도발한다. 1868년 명치유신 후 불과 30년만에 일본은 눈부신 발전을 이룬다.
이와사키 야타로 Iwasaki Yataro
메이지 초기에 수많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게 있어서는 배가 제일 중요했다. 이와사키 야타로(1835-1885)는 이 시기에게 선박 사업을 벌인다. 작은 사업체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나중에 미쓰비시 회사를 만든다. 메이지 유신을 도와주고 천황 권력에 선을 대서 정부 관료의 모든 접대를 담당한다. 국가의 무기 주문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가진다. 나가사키에서 조선소를 만들고 은행, 탄광에까지 손을 댄다. 당시 조선의 광부들이 일본으로 끌려간다.
메이지천황 Uchida Kuichi, Emperor Meiji 1873
일본은 근대 국가 체제를 알리기 위하여 서태후처럼 천황의 사진이 필요했다. 처음에 찍은 전통복장을 한 천황의 사진은 비문명화된 이미지로 보여졌다. 그래서 유럽식을 모방하여, 머리도 자르고, 칼도 차고, 탁자 위에 모자도 놓고 다시 찍는다. 이 사진은 일본 군주의 이미지로 자리매김한다. 19세기에 서구문물은 문명화civilization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이 유행은 동아시아에 급속도로 퍼진다.
메이지천황 Edoardo Chiossone & Maruki Riyo, Emperor Meiji 1888
나이가 들어 관록이 붙은 군주의 이미지가 또 필요했다. 사진찍기를 극도로 싫어했던 천황이 회의하는 동안 화가가 몰래 스케치한 것을 사진으로 찍었다. 서태후는 외교적 관례로서만 사진을 사용하고 대중에게는 유포하지 않았는데, 메이지는 사진을 광고 홍보 수단으로 사용한다. 신적 존재인 천왕의 모습을 일반에게 보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메이지 천황은 초상사진을 전국의 학교 및 관공서에 배포하여 국가 권력을 형성한다.
쇼켄 황후 Empress Shoken (1849-1914)
유럽의 왕궁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여 찍은 천황의 부인이다. 천황 가족의 이미지가 대중에게 배포되기 시작한다.
천황의 사진 The Mikado's Photograph, The Illustrated London News, March 23 1878
일본에서 천황의 사진이 일반인에게 배포가 되자 런던 신문에 일본 천황에 관한 삽화가 실린다. 천황 사진 앞에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모습이 영국 사람의 눈에 너무 신기하다. 천황은 자신의 사진을 권력의 상징으로 부각시킨다. 신을 모시는 제단같은 곳에 사진을 보관하며 행사 시에는 사진 앞에 절을 한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에 대만과 조선 역시 사진에 절을 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동남아의 근현대사에서 사진을 이용하는 뿌리는 19세기 일본에게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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