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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th hour: 동아시아 조선 진경 산수화 18세기 (1) 4/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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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3,752회 작성일 14-05-07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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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미술 16th hour: 동아시아 진경 산수화 18세기 True-View Landscape and Western Perspectives  4/31/14
 
                                                          
 
 
 
 
 
18th century renaissance in Joseon
 
조선시대 Jeseon Korea에는 신유교주의 Neo Confucionism(주자학, 성리학)가 나라의 근간으로 대두된다. 조선 중기로 접어들어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근대로 넘어가며, 상업으로 재산을 축척한 신흥부자 층이 출현한다. 18세기 숙종에서 영 정조 부흥시대를 르네상스라고도 한다. 16 세기 말에 임진왜란, 17세기 초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 탕평책 및 농업정책을 잘 쓰고 인구도 늘어난다. 동시에 문예부흥 을 이루어 한글 소설이 유통된다.
 
조선시대에 유명했던 정치적 당파 싸움factional struggle 은 일본 역사학자들의 식민지 사관으로 인해 1960년대 까지 부정적으로 알려졌지만, 1980년대 새로 나온 revisionist 의  학설에 의해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도적 습성을 가진 한국인은 당쟁으로 조선을 말아먹고 결국은 일본 식민지가 되어 수혜를 받은 것이 근대화에 차라리 도움이 된다는 학설을 만들었다. 하지만 신역사주의  학자들은 당쟁은 국수파와 진보파의 공존으로 민주주의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며 당쟁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꾸준한 성장을 보인다고 한다. 절대적인 왕권을 가진 중국과도, 만장일치를 좋아하는 일본과도 차이점을 보이는 한국은 당쟁을 권력 견제시스템으로 해석한다. 역사적으로 외세에 의해 많은 사건을 겪은 한국은 생각보다 그렇게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프랑스 Annales (Journal) 학파는 사회 경제적 분석을 따른 역사적 고찰이라는 잡지를 발행한다. 아날 학파는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겪어도 사람들의 근본적인 고정관념 및 사고방식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신분적으로 꼭대기와 하층이 뒤집히는 극적인 프랑스 혁명동안 1789-1793년 사이 4년 동안 분석을 한 결과 시민들의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자료를 통해 분석한다. 혁명 동안 종교가 땅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유언장을 남길 때는 수도원 및 교회에 돈을 기부하고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리게 하는 미사 예물을 남긴다. 근본적인 삶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역사의 패턴은 반복이 된다.
 
 
 
 
 
안견, 몽유동원도 An Gyeon, Mongyu dowondo (Dream Journey to the Peach Blossom Land) 1447
 
 
조선 중기에는 중국적 스타일의 그림을 선호한다. 실제가 아닌 상상 속의 관념적 풍경이다. 명암의 대조가 뚜렷하고 준법을 많이 써서 사물의 촉감을 잘 나타낸다.
 
 
 
 
 
안견, 사시팔경도 Early Autumn                                                               Late Autumn
              
 
가운데를 비우고 한쪽으로 모으는 변각 구도가 조선 중기에 유행한다. 명나라 그림을 좋아하여  조선의 사신들은  중국에서 그림을 가져온다.
 
 
 
 
Byeon Bak, Painting of defense of Busanjin Fortress 1760
 
 
임진왜란 중 일본의 군함들이 부산진 요새를 감싸고 있고, 개미떼같은 군인을  묘사한 비단에 그린 기록화이다. 세종대왕의 아들 안평대군의 미술 콜렉션이다.
 
 
 
 
Pan ok-seon 판옥선
 
일본은 1592 년에 침입하고 1597 년에 한번 다시 오는데 이 때 이순신 장군이 성공적으로 왜적을 물리친다. 조선은 대포 및 지붕이 덥힌 군함 판옥선을, 일본은 포르투칼 상인들이 가지고 온 조총을 가지고 있었다.
 
 
 
 
 
거북선 Korean turtle boat at War Memorial Museum(rebuilt)
 

이순신 장군은  노량진 한산 대첩에서 왜군이 육지로 오기 전에 바다에서 전멸시킨다.
 
 
 
 
 
김정호 대동여지도 Map of Choson Dynasty, Kim Jong-ho's Daedong Nyeojido, 1861
 
 
18세기에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상인계층이 부각되는 가운데 조선도 후기에 상업이 번성한다. 걸어서 다니는 보부상이 중인 계층의 산업 조직으로 발전하여 전국에 지점을 가진다. 대원군 시대 김정호는 백성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지도를 만들어 인쇄 하여 판다. 대동여지도는 6-4meter로 크지만, 접으면 딱지만한 포켓 사이즈로서 산등성이 및 골목길을 자세하고 정교하게 표시했다.
 
 
 
 
 
윤두서, 자화상Yun Du-Seo, Self Portrait (1668-1716)
 

조선의 유명한 화가로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의 삼재를 꼽는다. 관직에 나가는 문인화가들은 취미로 그린 그림을 선물로서 주고 받음을 미덕으로 여겼다.  윤두서는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해남에 머물면서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그림을 취미로 그린다. 창의적이고 파격적인 화가 윤두서는 호랑이 눈과 섬세한 수염을 한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데 몸은 일부러 그리지 않는다.
 
 
 
 
 
윤두서, 채과도, 해남종가 소장
 

직업화가들은 관습적인 화조도는 그리는 반면에 문인화가 윤두서는 실학정신에 근거한 실사구시( 실제에 있는 것을 연구하여 참된 것을 구함)이념을 보이는 새로운 장르 채과도를 개발한다. 명암법 및 축도법을 사용한 뛰어난 면모를 보인다. 해남에서 local celebrity 로 사는 동안에 여행을 많이 다니지는 않지만 청나라 책을 공부하여 명압법을 이용한다.
 
 
 
 
 
윤두서, 동국여지도 1710
 
 
종이에 그린 동국여지도이다. 지형이 자세히 나타나있다.
 
 
 
 
 
윤두서, 나물캐기
18 세기에 진경산수화가 유행하는 가운데 일반인을 그리는 풍속화도 대두된다.
 
 
 
 
 
윤두서 <윤씨가보> 중 짚신삼기                                                              목기깍기
         

짚신마는 아저씨와 목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영감이 번뜩이고 관찰과 소묘를 많이 한 듯한 그림이다.
 
 
 
 
 
 
정선 1676-1759, 독서여가
 
 
정선은 자신보다 50 살 정도 많은 문인화가  윤두서의 호 공재를 쫒아서 자신의 호를 겸재로 정한다. 정선의 눈에는 윤두서가 미켈란젤로같은 거장으로 보인다. 인왕산 자락에 사는 가난한 양반 집안의 정선은 안동 김씨의 후원으로 미술 공부를 한다. 정선은 마치 메디치 가문이 예술가를 후원하듯이 세도가의  보살핌을 받고, 필립 4 세의 후원을 받으며 승승장구한 벨라스케스처럼  높은 관직에 올라간다. 독서여가에 앉아서 화분을 감상하는 자화상으로 생각된다. 큰 그림으로 원근법에 대한 이해가 보인다.
 
 
 
 
 
정선, 장안사도 풍악도첩 1711
 

겸재 정선은 진경 산수화를 꽃 피운다. 36, 37, 72세에 금강산을 다녀온 후에 그림을 그린다. 처음 금강산에 다녀와서 그린 <풍악도첩> 중에 있는 장안사도이다. 풍악도첩(1711)은 열세점의 그림으로 구성된 다. 초창기 그림으로 장안사,바위 등을 신선하게 해석을 한다. 관념에 있는 중국의 산수가 아니라 실제로 관찰하여 그린다.

 
 
 
 
정선, 금강산도 1734
 
 
나이가 좀 든 후에 기술과 기록을 모아서 금강산을 파노라마로 커다랗게 그려본다. 유명한 계곡 및 바위를 세밀하게 그렸다. 일행으로 같이 간 시인이 기록에 남기기를 정선은 여행 중에 계속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집에서 완성하지만 주의깊게 관찰한 진경산수이다. 그림에도 유행이 있어 물을 많이 섞은 수채화 같은 담채를 선호한다.
 
 
 
 
 
정선, <해악전신첩> 1747 

정선은 <장안사도>를 그린 뒤  36년 만에 다시 같은 장소를 가서 그린다. 말년의 대작으로 <해악전신첩>을 만든다. 21 개의 그림을 그리고 중간에 다른 사람이 쓴 시를 넣는다. 초기  그림에는 stylish 한 경향이 있지만, 말년에는 독자적 풍이 나타난다.
 
 
 
 
 
 
 
 
 
정선, 수성동 인왕성 근처
 

서울 토박이 정선은 주변의 자연 풍광을 그린다. 중국 회화의 권위적 준법을 따라 하지 않고 필체가 다채롭고 자유롭다. 스케일의 대조를 보이기 위해 사람을 집어 넣는다.
 
 
 
 
 
정선, 행호관여
 

17세기 병자호란 후에 조선은 명나라에 충성심을 고수한 나머지 청나라에 조공을 보내지 않고 중화사상에 젖어있였다. 따라서 중국적 그림이 인기를 끌었던 시기인데  갑자기 진경 산수가 대두됨은 특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박은순 교수에 따르면 전선은 자신이 속한 정당인 노론의 낙론계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낙론계는 현실주의적 경험론적 입장을 강조하고 국제적 감각을 갖춘 사람들로서 천경기실(직접 경치를 보고 그리며 기록함)을 중요시한다. 정선은 이런 철학에 발 맞추어 유명 장소를 다니면서 그렸다고 한다.
 
 
 
 
 
겸재 정선, 박연폭포
 
 
개성에 있는 폭포를 현대적인 풍으로 그렸다. 폭포 이외의 부분을 짙은 먹으로 그리고, 정작 폭포 부분은 그리지 않았다. 사람을 넣어  폭포규모를 짐작케 한다.
 
 
 
 
 
겸재 정선, 인곡유거도, 종이에 담채 1742
 

안본지족의 태도를 보이는 자화상으로 봄의 정경이다.
 
 
 
 
 
겸재 정선, 소요정 서울시 양천구 강남동 주변, 종이에 담채 1891
 
서울의  모습을 그린다.
 
 
 
 
 
겸재 정선, 청풍계, 종이에 담채 1730
송도가는 길에 있는 계곡이다. 붓이 부러질 때까지 그렸다는 고사가 있을 정도로 노력형 정선은  당대에 자수성가를 이룬다. 친구가 남긴 기록 속에 정선이 평생 쓰다 버린 붓이 무덤을 이루었을거라는 말이 있다.
 
 
 
 
 
겸재 정선, 광진, 워커힐 주변,  종이에 담채 1741

고깃배가 떠 다닌다. 다작을 하는 정선은 말기로 갈수록 좋은 작품이 나온다.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After Rain at Mt. Inwang 1751
 
 
정선 말년의 걸작품으로 큰 그림이다. 안개가 걷힐 즈음에 인왕산 중턱이 구름에 싸여있다. 종이에 그리는 그림은  충분한 연습이 선행된 후 짧은 시간 내에 끝내야 한다. 정선은 중국의 관념적 산수화에서 벗어나 한국적 산수화를 남기며 진경산수화 분야에 독보적 경지에 이른다.
 
 
 
 
 
정황, <양주송추도>
 
정선의 손자 정황은 가업을 이어 그림을 그린다.
 
 
 
 
김응환, <금강전도> 1772
 
 
정선은 후대의 화가들에게 감명을 남긴다. 문인화가 김응환은 정선의 금강전도를 그려가면서 김홍도에게 정선의 그림풍을 알려준다. 후대에 오는 김홍도(1745-)와 신윤복(1758-)은 직업 화가이지만 너무나 실력이 특출하여 자존심을 내세우는 문인화가들도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현재 심사정, 강상야박도 1747

명문가의 자손인 심사정은  할아버지가 영조 역모 사건에  연류되어 집안이 몰락하자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꾸린다. 관념적 중국풍의 산수이다.
 
 
 
 
 
심사정, 만폭동
 

심사정은  당시에 유행하는 진경산수를 그린다. 금강산 만폭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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