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를 향해: 피에 몬드리안 6/30/09 > 김미연 아트노트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미연 아트노트


 

유토피아를 향해: 피에 몬드리안 6/30/09

페이지 정보

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5,748회 작성일 10-01-28 01:31

본문

10명의 현대 예술가  3rd hour: Toward Utopia, Piet Mondrian

Theosophy : 신지학, 접신론. Spirit 과 knowledge 가 긴장 관계 유지하면 인류가 물질을 초월해서 더 높은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vision 을 추구한다.  철학과 학문이 합해진 이념으로 기독교를 대체할 만한 힘으로 닥아왔다. 학문의 boundary 를 넘어서서 예배, 집회 활동했으며 일반인들을 계몽하여 utopia 로 끌고 가기를 희망했다.
De stijl: the styleThe De Stijl (the style) 운동은 1917에 Neo Van Doesburg 가 창시했다. Modern art and architecture 에 새로운 스타일을 가져 왔고, 예술가들이 homes, buildings, furniture 를 디자인 하기 시작한다. 
Neo-Plasticism: 신조형주의.
The Style 운동의 철학적인 이론. 몬드리안은 그림의 새로운 조형을 통하여, 유토피아적 이상과 영적인 하모니와 질서를 추구한다.

Piet Mondrian (1872-1944)  


Composition 1922       


Piet Mondrian 1942 in New York
피에 몬드리안은 네델란드에서 태어나 파리, 뉴욕에서 작품 활동했다. 아버지가 화가로 귀족 계층과 어울리는 social class 였다. 20살에 미술학교에 들어가서 그림 배우고 정통 루트를 밟았으나. 30-40대 까지 그림이 안 팔려서 48살 까지도 그림을 포기할까 생각했다. Tile 을 색칠하고, 정물을 그려서 길거리에서 팔고 무명 화가들이 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50세가 되어서야 Composition 같은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몬드리안은 지적 탐구에 관심이 많았다. Theosophy는 신지학으로 종교의 일종이다. 신지학에서는 인간은 spiritual 한 단계과 intellectual 한 단계의 knowledge 의 balance 를 맞추면서 살면 높은 단계의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예술은 universe of cosmic order (우주 질서)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앙과 지식의 두 요소가  tension 을 유지하고, 서로 tackle 을 걸어 주면서 dynamic 을 유지하고 가면 물질을 벗어난 높은 단계의 우주 질서를 지향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몬드리안은 원리 원칙에 충실하며 그 누구라도  원칙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절교를 서슴치 않았다. 그의 중요한 principle 은 절제이다. Theosophy 는 19세기 용어로서 인도 요가 사상과 비슷하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 동시에 writing 도 하였다. 그림과 writing 은 tension 관계이자 상호 보완을 한다. 글이 못하는 것 그림이 하고, 그림이 못 하는 것 글이 한다. Mondrian 은 interior design 도 했으며, 자신의 idea 가 건축에 응용되는 것을 환영했다.


Molen (Mill), Mill in Sunlight 1908
1908년의 그림인데 파리에서는 한물 간 화법으로 20-30 년전의 Neo Expressionism (신인상주의) 의 Pointillism (점묘화)를 자신의 그림에 응용했다. 당시 Netherlands 에서는 사실적으로 그리는 풍과  풍경을 파노라마 식으로 묘사하는 Hague School (헤이그학파)가 유행하고 있었다. 1908년에는 파리 베를린 등지에서는 신인상주의는 이미 흘러간 운동인데 네델란드에서는 avant-garde 급의 sensational 한 그림 축에 들었다. 몬드리안은 주로 이런 그림을 그리다가 50세에 Composition 같은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Evolution Triptych, 1911
르네상스 시대에는 Italy 의 Rome 이 예술의 중심이었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파리, 뮌헨, 베를린이 중심이었고, 몬드리안이 태어난  Netherlands 는 변방 축에 속했다. 1911년  파리에서는 고호의 Post Impressionism 은 한물 지나간 추세였고 1905년 Matisse 의 The Joy of  Life 가 파리를 발깍 뒤집어 놓았는데,  같은 해에 Amsterdam 에 고호의 큰 전시가 열렸다. 20년 가량이 뒤처져 있었던 Dutch artists 들에게 고호의 전시는 충격과 놀라움을 주었다. 또한19 세기 말-20 세기 초반에 Gustave Moreau 의 symbolism (상징주의) 가 artist 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Moreau 는 그림이 사실 재현이 아닌, 감정 및 철학적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고의 포문을 열었다. 몬드리안도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Theosophy 는 spirit 과 knowledge 가 긴장 관계 유지하면 인류가 물질을 초월해서 더 높은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vision 을 추구한다. 1911년 피카소가 analytic cubism 을 활발히 하고 꼴라쥬로 들어갈 때, 몬드리안은 Symbolism 과 Post Impressionism 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Evolution Triptych 은 spirit 이 물질을 지배하고, 물질의 세계가 pure spirit 으로 evolution 한다는 cosmic law 를 나타내고 있다.


Dune Landscape 1910/1911
재현에서 멀어지고 표현에 가까워 진다. Vincent Van Gogh 의 풍이다. 피카소가 보기에는 한심해도 Amsterdam 에서는 sensational 했다. 당시 Netherlands 에서는 Hague School (헤이그 학파) 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Mondrian 은 비주류의 아방가르뜨에 속했다.  


                                      
Diego Rivera (1886-1957)        

    
Fernand Leger(1881-1955)     

   
Georges Braque(1883-1963)
모든 Dutch Cubists 들은 파리로 가는 것이 꿈이었다. Mondrian 은 1912년, 40세에 파리로 가는데, 생계가 힘들어 거리에서 그림 그리는 일로 연명한다. 위의 작가들은 파리에서 Mondrian 이 만난 사람들이다. 



Evening Red Tree 1908 
상징주의와 Post Impressionism 의 화풍으로 재현이 여전히 남아있다.


Flowering Apple Tree 1912
Mondrian 에게는 피카소의 analytic cubism 이 충격이었고 또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Flowering Apple Tree 에서 서서히 추상이 나온다. 몬드리안이 1912년 당시에 본 피카소의 꼴라쥬는 도저히 소화하기 힘들고 1,2년 전에 보았던 analytic cubism 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새로운 그림을 내어 놓는다. 브라크와 피카소의 analytic cubism (분석적 큐비즘) 처럼 나무를 분해시켰고  Grid 가 슬슬 나타나고, 나무 형태가 재현에서 멀어졌다. 관람객들은 이 그림이 나무처럼 안 보이는데, 제목이 tree 니까 그림에서 나무를 찾아내려고 한다. 기존의 서양화에서는 perspective 가 한 개였는데, 이제는 하나의 관점이 아니고 perspective 가 여러 개인 것이 분석적 큐비즘의 특징이다.


Composition No. 6  1914
기하학적이며 점점 재현에서 멀어진다. Mondrian 나름의 추상이며, 그에게 representation 으로서의 그림은 끝이 났음을 말한다. 그림에게 영향을 미치는 외부의 모든 것을 차단하고, 그림 자체만의 효과를 구하려 했다. 그래서 모든 작품에 composition 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20세기 초 Kandinsky 는 여러가지 예술 장르 중 음악이 제일 high level 이라고 했다. 음악은 처음부터 전혀 재현을 하지 않는다. ‘도레미파솔라시’ 를 들으면 음악 자체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재현이 되지 않는다. 음악 이외의 외부의 것을 전혀 가져오지 않는다.  이런 의미로서 미술도 음악과 같은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했다. Kandinsky 와 Mondrian 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사상이나 이념들이 그림으로는 표현이 가능하다고 했다.
 
Picasso 의 cubism 을 본 Mondrian은 온 몸으로 전율하면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름대로 해석하였다.  Painting 이 autonomy (자율성) 를 가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림에 있는 것은 글로도 다른 어떤 것으로도 표현이 안되고 그림으로 밖에 가능하지 않다. 우주의 질서를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할까가 그의 고민이었고, horizontal (수평선, 하나의 정의) 과 vertical (수직선, 그 반대개념) 의 2개가 dynamic 한 관계를 유지함이 우주 질서이다. Hegel 의 Dialectic (변증법) 의 thesis, anti-thesis, synthesis (정, 반, 합) 적인 approach 이다.

그림에 인간의 생활을 넘어가는 질서를 표현하고 싶다.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 왜 Renoir  같은 화가는 세느강변에서 밥먹고 술먹고 댄스하는 일상생활을 그리는가? 그림이 지향해야 할 것은 Composition No.10 같은 추상인데 말이다.


Composition No. 10,  Pier and Ocean, 1915




Theo Van Doesburg (1883-1931) 
De Stijl 운동을 창시했으며 예술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추상이라고 했다.                                                                     

The De Stijl (the style) art movement was founded by Theo Van Doesburg in 1917. It encompassed a new type of style in modern art and architecture. This movement used the artistic talent of the artists by designing homes, buildings, and furniture. 
The artistic philosophy of the group's work is known as neoplasticism — the new plastic art. The member of De Stijl sought to express a new utopian ideal of spiritual harmony and order. They advocated pure abstraction and universality by a reduction to the essentials of form and colour; they simplified visual compositions to the vertical and horizontal directions, and used only primary colors along with black and white.


Piet Mondrian   Le Neo-plasticisme 1920 
몬드리안이 De Stijl 잡지에 신조형주의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신조형주의는 몬드리안이 만든 운동이다. 혼자만이 member 였고, 몬드리안 혼자만이 Composition 같은 그림을 그렸다.


Composition 11 in Red   1920
색깔을 red, yellow, white, blue, black 의 5가지만 썼다. 원색을 대치시켜서 선과 긴장 관계를 만듬이 목표이다. 마티스도 선과 색을 고민하다가 색종이를 오렸고, 몬드리안도 색과 선의 긴장 관계를 고민했다. 몬드리안은 캔버스 내에서 수평과 수직의 선이 원색과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는 그림을 그리려 하였다.

1925년 Theo Van Doesburg 가 대각선이 중요하다는 이론을 들고 나와 대각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수평과 수직에만 전념하는 Mondrain 은 참을 수 없어서, 두 사람은 결별을 했다.

Composition 11 in Red 는 피카소의 cubism 을 보고 몬드리안 나름대로 진일보 시켜서 나온 그림이다. 마티스와 피카소가 고민하던  선과 색의 dilemma 를 한큐에 해결시켰다.

1920년에 패전국이 된 독일과 혁명 성공국인 러시아가 몬드리안의 예술을 환영했다. 독일에는 New Objectivity (신즉물주의) 운동이 모든 예술에 영향을 미치고 추상의 흔적이 없는 사실주의가 퍼졌다. 가구, 의자의 디자인이 기하학적인 건축의 디자인을 따라 modern furniture 화 되어 곡선이 없고 오직 직선으로만 되었다. 몬드리안의 작품이 Bauhaus 예술학교의 개념과 잘 맞아 떨어져 그들의 commission 받아서 디자인을 했다.



Victory Boogie-Woogie 1941-4 (unfinished)
The term Boogie Woogie refers to a new kind of jazz then popular in New York, in which short melody lines were interrupted by open rhythmical patterns. Victory undoubtedly refers to the triumph of a new form of art in a free world.
 
1940년 몬드리안이 뉴욕에 왔을 때 그는 이미 유명 인사였다. 1936년에 모마에서 ‘Cubism and Abstract’ 라는 전시가 열렸을 때, 피카소와 몬드리안의 작품이 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New York 에 온 이후에 line 과 color 그리고 color plane 을 가지고 정 반 합을 완성시켰다.

Mondrain 은 화려하고 바쁜 도시 뉴욕의 모습과 재즈 음악에 감명을 받고, 자신의 미술과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음악은 멜로디가 중요한데, 재즈는  rhythm 과 counter rhythm 이 melody 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그 이상을 넘어선다. 이런 이념을 내포하고 있는Victory Boogie-Woogie 가 그가 죽기 직전에 탄생했고, 갑작스런 죽음으로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Broadway Boogie Woogie 1942-3
Line 인데 color 가 되고, 동시에 plane 이 된다. 어느 하나도 튀어 나오지 않고 긴장, 조화를 이룬다. 2차 대전 후의 avant garde 는 몬드리안이 해결했다고 할 수 있다. Cubist 피카소와 야수파 마티스는 완전 추상으로 가지 않았고 재현과 추상의 in between 에 있었다. 그러나 몬드리안은 모든 것 던져버리고 완전 추상으로 과감하게 길을 열었다. 이후의 모든 현대 미술은 몬드리안에게 빚을 지고 있다.  



Agnes Martin, Untitled 1977
이 작품의 grid 도 Mondrian 이 이루어 놓은 작업의  결과이다. 몬드리안으로 인하여 후대에 이런 작품이 가능했다.

Painting 은 색과 선을 벗어날 수 없다. 피카소, 마티스, 몬드리안 이 세 화가는 color 와 line 을 가지고 평생을 고민했다. Color 와 line 만이 회화의 autonomy 를 이루어 내는 tool 이다. 몬드리안은 회화가 Autonomy 를 가지는 길은 완전 추상 밖에 없으며 수직, 수평을 가지고는 어떤 재현도 불가능함을 발견했다. 기존의 서양화의 좋은 그림에는 원색이 절대로 쓰이지 않았는데, 몬드리안이 원색을 쓴 이유는 원색은 다른 reality 를 연상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제목도 untitled 라고 하여 어떤 연상도 못하게 하였다. 몬드리안의 의도는 그림 앞에 서면 그 그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영적 감정을 끌어내는 것으로 그림이 universe of cosmic order 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Robert Ryman, Winsor 34, 1966 
몬드리안으로 인해 나중에 이런 그림이 가능해졌다.


Jackie Winsor, Bound Grid, 1971-72
피카소, 마티스, 몬드리안 세명의 작가가 평생에 걸쳐 해놓았던 작업으로 인하여 이런 작품이 후대에 가능해졌다. 그들은 예술의 중요한 paradigm 에 감히 도전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몬드리안은 보편 우주의 진리는 사회적인 것과 관련있다 라고 생각했고 1, 2차 대전 같은 전쟁을 넘어서는 utopia 적인 것이 있지 않을까 하고 고민했던 사람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 같은 그림을 통하여 당시의 정치적 역사적 답변을 그때그때 하지만, 몬드리안은 피카소보다 10배 정도 utopia 적인 사람으로, 그림을 영적인 level 로 올리고 싶었던 화가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