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파를 넘어서: 앙리 마티스 6/16/09 > 김미연 아트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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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파를 넘어서: 앙리 마티스 6/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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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8,722회 작성일 10-01-28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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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의 현대 예술가  1st hour: Beyond Fauvism, Henri Matisse


Henri Matisse 1933 (1869-1954)  


Portrait of Henri Matisse by Andre Derain, 1905

마티스는 1869년에 태어나서 1954년 까지 85세로 장수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예술을 놓치 않았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둘다 great master 이면서 항상 서로를 의식하는 rival 관계에 있었다. 마티스는  피카소보다 12살 많은 띠동갑이다. 피카소는 미술선생인 아버지의 지도 아래 좋은 미술교육 환경에서 천재소년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고, 10대에는 Spain 에서 모든 상을 휩쓸었다.

하지만 마티스는 20살의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했다. 북부 불란서 시골에서 곡물사업을 하는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파리로 가서 법공부를 했으나, 건강이 나빠져서, 고향 근처에서 요양 생활을 주로 했다. 요양 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그림을 배우다가, 급기야는 전업 화가가 되기 위하여, 파리로 돌아가 그림을 전공할 결심을 하였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불란서 최고의 국립 명문 학교인  L’ecole des Beaux Arts de Paris (School of Fine Art) 를 졸업해야만 했다. 20살에 그림을 시작한 마티스는 21살에 에꼬 떼 보좌르의 입학 시험에 떨어지고, 6번이나 실패한 후 26살에 드디어 입학한다. 6수를 하는 동안 부모님께 야단도 많이 맞지만, 또한 그 시기에 스승을 만난다. 

                                        
William Bouguereau (1825-1905), The Bather 1879     


The Atelier of the Academie Julian 1889
윌리암 브게르는 마티스가 에꼬 떼 보좌르에 들어가기 전에 다니던 학교인 아카데미 쥴리앙에서 가르치던  스승이며, 그 당시에는 The Bather 같이 사실을 그대로  representation (재현) 하는 그림을 가르치고 있었다.  

 
                              
Gustave Moreau (1826-1898), The Apparition, 1874-76               



L’ecole des Beaux Arts de Paris, (School of Fine Art)

구스타프 모로는  에꼬 떼 보좌르에서 마티스를 가르쳤던 스승으로 19세기 중 말엽에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symbolism 화가로써, 이국적인 motive 를 그림 안에 가져온다. 당시 정통종교인 기독교나 캐톨릭이 아닌, 이색적인 동양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The Apparition (유령)은 이슬람 모로코 쪽의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살로메가 춤을 추고있다.

마티스는 모로에게 color 를 배운다. The Bather 처럼 사실적으로 Color 를 해야 하는데, 모로를 통해서 마티스는 사실과 멀어진다. 마티스는 26살에 에꼬 떼보좌르에 들어갔고 27살에 국전인 국가 salon 전에서 그의 그림이 성공적으로 다 팔린다. 이 그림들은 학교에서 잘 배운대로 그대로 그린 것들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방식대로 그대로 쭉 그리면 인생이 탄탄대로로 나가는데, 마티스는 그림 style 을 바꾼다. 19세기 말에 유행하던 모네, 르느와르 등이 주축이 된 Impressionism (인상주의)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던 당시에는 sensational 했다. 여기에 마티스가 관심을 갖고 그런 그림을 그리자, 스승들이 ‘왜 쓸데없는 짓을 하니’ 하며 그를 미워하지만 마티스는 남의 말 잘 안듣고, 자기의 갈길을 가는 사람이었다. 마침내 그는 Impressionist 그림 그린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듣도 보도 못한 무소속의 artist 가 되어 버렸다.

30살에 다시 학교 학생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에꼬 떼 보좌르에서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아카데미 쥴리앙에서는 그의 그림을 싫어해서 받아주지 않는다. 여기 저기 떠돌이 생활하며, 결혼과 이혼을 하고, outsider 취급을 받으며 생계가 힘들어 진다. 마티스의 생애는 up & down 이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중요한 사람을 만난다.


Henri Matisse (1869-1954), Luxe, Calme, et Volupte 1904                                      
Neo Impressionism (신 인상주의) 그림으로 pointillism (점묘화) 화법이다. 마티스는 신 인상주의 화가인 Paul Signac 만나며, 그의 화풍을 배운다. 이 그림을 통해 구스타프 모로에게 배웠던 color 에 대한 탐구를 계속한다. Color 사용에 점을 이용하니 그 효과가 증폭됨을 발견하고, 색깔을 전폭적으로 탐구하는 기회를 가진다. 이 그림이 salon 전에 전시되자, Signac 이 만족해 하며 그림을 샀지만, 마티스에게는 Signac 은 거쳐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단지 색을 탐구하고자, 그의 화풍인 pointillism 을 실험했을 뿐 이었다. 

 

Bacchus Festival, 박카스 축제     
Luxe, Calme, et Volupte 는 전원에서 남자와 여자가 벗고 노는 idyllic (전원시) 이다. 당시에는 Bacchus 신을 위시하여 신들만이 idyllic 의 주제가 되었다. 신들은 무슨 행동을 해도 다 받아들여졌으므로, 야외에서 반 누드로 먹고 노는 신들의 행동은 당연시 되었다. 누드로 벗고, 노래하고, 악기를 타며, 술마시고 하는 것은 박카스 축제에서 신들만이 할 수 있는 놀이였다. 마티스는 야외에서 벗고 노는 전원적 목가적 주제로 Luxe, Calme, et Volupte 를 그렸으나, 신이 아닌 실제 사람을 대상으로 그렸다. 왼쪽 끝의 옷입은 여자는 마티스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Paul Cezanne (1839-1906), The Large Bathers, 1906
마티스는 세잔을 존경했다. 세잔은 기존 서양예술의 중요점을 최초로 파괴함으로써 20세기 미술의 포문을  열었다. 그는 perspective (구도) 를 파괴하고, 그의 still art (정물화) 안에서만 존재하는 파란색의 사과로 유명하다.  또한 세잔은 명암을 무시했다. The Large Bathers 는 첫째 perspective 가 맞지 않는다. 뒤의 인물이 더크고, 팔 다리의 비례가 맞지 않는다. 음영 사용을 자기 멋대로 해서 빛이 어디서 들어 오는지 알 수가 없다. 기존의 미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고 shadow 나 shade 넣고 잘 그리려는 노력인데, 세잔이 그런 노력을 다 파괴해 버렸다. 그림이 더 이상 representation (재현) 이 아니고 expression (표현) 이라는 art 의 새로운 정의에 문을 열어 준 화가가 바로 세잔이다.
 
비록 세잔은 당대에 혹평을 받았지만, 마티스는 마음 속에 세잔의 천재를 간직했다. 세잔이 2년 후에 마티스의 Luxe, Calme, et Volupte 와 같은 주제로 The Large Bathers 를 그렸고, 기존 형식을 무시한 과감한 그림을 세상에 내 놓았다. 사람들은 미완성 그림으로 이해했고, 덜 그린 그림이다 라고 했다.


Paul Gauguin (1848-1903), Christ in the Garden of Olives 1887           


Paul Gauguin, Self-Portrait with Halo, 1889
원색의 노랑색 빨강색의 배경이 야릇하고, 머리 또한 애매하다. 독사와 나무가지는 그냥 선으로 보이고, 사과의 색과 매달린 것이 묘하다. Post Impressionist (후기 인상파) 이며, 더 이상 현실을 그리는 것에 관심없다. 고갱의 그림 안에서만 존재하는 파랑, 노랑 사과 들이다. 드디어 그림이 이 때까지 묵여있던 틀에서 해방된 것이다. 한편 마티스는 Neo Impressionism 의 Pointillism 통해서 색깔의 다양한 효과를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Henri Matisse (1869-1954), The Open Window 1905
창문 밑에 화분이 있고, 창문 밖에는 배가 있는 풍경인데, 풍경이 멀찍히 있지않고 너무 가깝다. 풍경의 색깔도 보라색으로 이상하다. 창문 뒤의 풍경같지 않고 마치 포스터를 붙인 듯 답답한 느낌이다. 마티스는 색깔 탐구 과정 중에 있었다. 서양 미술의 개념인 ‘그림= window or mirror’ 가 파괴되는 기로에 놓여 있다.  아무도 안 알아주는 도전의 최전방에서 욕과 비난을 한몸에 받으며 서있는 외로운 아방가르드 (Avant Garde) 에 마티스는 가담을 한다.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32살의 최초의 개인전은 소리소문없이 끝났다. 5년전 에꼬 떼 보좌르에서 배운 그림을 팔던 시절과는 판이하게 틀렸다.

마티스는 29-30살에 폴 시낙을 만났고, 32살에 Fauvism (야수파) 화가 Andre Derain 을 만난다. 일반 대중들은 몰라 주지만, 그래도 같은 그림을 그리는 동지들이 있었다. Fauvism은 1898-1905 사이에 존재하다가, 그 이후에는 없어지고, 화가들은 각자 갈길을 간다. 마티스는 이 기간 동안 Fauvism 활동을 하다가 국가 규모의 국전급인 Paris Salon 에 출품하나, 보기좋게 떨어진다. 심사위원들이 학교 다닐 적의 선생들인데 ‘얘가 미쳤나’ 하고 아무도 마티스를 뽑아주지 않았다. Paris Salon 이 국가가 인정하는 정통파 화가를 위한 미술전에 속한다면, 주류에서 벗어난 예술가들이 따로 전시하는 Salon of Independence 가 있었는데 전위예술가들, 아방가르드 화가들이 여기에 전시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입소문 덕에 엄청난 인기가 있었다. 마티스는 작은 그룹전인 Salon d'Automne 전에 다음과 같은 야수파 작품을 전시한다.


Henri  Matisse, Woman with the Hat 1905                                        


Portrait of Madame Matisse, The Green Line  1905
세상에 저런 모자가 있나 할 정도로 기이한 모자이며, 얼굴 색깔 및 허리의 위치도 이상하다. 마티스 부인의 초상은 콧날에 green line 이 있다 하여, Green Line 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뒷 배경은 세가지 색깔이다. 야수파는 Wild Beast 에서 나온 말인데, 그림의 색깔이 너무 강렬하다 하여 비평가들이 붙인 이름이다. 마티스에게는 모델 자체가 중요치 않고, 모델을 representation 하기보다는 나의 느낌의 expression 이 더 중요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대로 그린다. 세잔은 이미 형식을 파괴했고,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마티스는 하고 싶은대로 그려서, 20세기 미술에 추진력을 확확 불어 넣는다.


Andre Derain (1869-1954), London Bridge, 1906
야수파의 그림으로 강렬한 색체의 불타는 도시이다. 다리의 구도가 안 맞는다. 그림에는 원색을 쓰지 않는다는 통념을 깨고, 원색을 통해 감정을 표현(express) 했다. 그 당시는 인상파의 모네그림 같이 granulation (점진적인 표현)이 잘 되어야 좋은 그림이라고 여겼다. 


Andre Derain, Portrait of Henri Matisse  1905
앙드레 드레인이 그린 마티스의 초상으로 야수파 작품이다.



Henri Matisse(1869-1954), The Joy of Life 1905-6
The Joy of Life 가 발표 되자 파리 시내가 홀딱 뒤집혔고, 시냑과 영영 만날 수 없게 된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리자 시냑은 마티스에게 절교 선언을 한다. 1년전에 시냑의 화풍을 배워 마티스가 Luxe, Calme, et Volupte 를 그렸을때 시냑은 흐뭇해 하면서 Luxe, Calme, et Volupte를 사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티스는 1년 후에 같은 주제이나 완전히 다른 style 로 The Joy of Life 를 그렸다. 마티스에게 시냑은 지나가는 process 였을 뿐 이었다.

32살 때의 1차 개인전은 소리 소문 없이 끝났고, 34살의 2차 개인전은 너무 이상한 그림으로 attention 을 받았는데 37세에 그린 The Joy of Life 가 왜 그토록 sensational 했는가?  세잔에게 관심이 있었던 마티스는 세잔의 The Large Bathers 와 같은 주제인 야외에서 벗고 노는 남녀를 The Joy of Life 에 그렸다. 그런데 나무의 색이 이상하고, 나뭇가지가 선 하나로 처리되어 있다. 중앙에 누워있는 여자 몸에 있는 red line 과 green line 의 contour 가 엄지 손가락 만큼이나 굵게 나왔다. Kiss 하는 사람들 몸은 suntan 색깔이다. 가운데 강강수월래를 추는 사람들은 원근법이 맞지 않다. 크기 비례와 색체가 엉망이다. 이런식으로 일파만파로 욕 얻어먹으면서, 마티스는 졸지에 유명해졌다. 마티스는 The Joy of Life 를 통해 색채해방을 가져왔던 것이다. ‘나는 인생의 기쁨을 나타내는 색을 썼다.’  박카스의 축제같은 사실적인 그림을 인정했던 그 당시 사람들은  The Joy of Life 를 명작에다가 낙서를 해서 망쳐 놓은 광기 어린 실패작 이라고 평하였다.


 

Man Ray, Gertrude Stein and Picasso’s Portrait 1922
Irony 한것은, 마티스를 욕하면서도,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서둘러서 샀다는 점이다. 그 중의 반은 재능을 알아보았을 것이고, 그중의 반은 ‘욕먹으면 나중에 꼭 유명해지더라’ 는 투자심리로 샀을 것이다. 그중에 마티스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그림을 많이 산 patron 중에 남매인 Gertrude Stain과 Leo Stain 이 있었다. 피카소가 그린 거투르드의 초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femininity (여성스러움) 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부자 집안의 스타인 남매가 파리의 아파트에서 artists 들과 교류하고 그들을 support 하면서, 작품을 collect 하기도 했다. 스타인 남매는 마티스의 The Joy of Life 도 사 주었다. 미술 입문 10년 만에 마티스도 드디어 patron 이 생긴 것 이다.


Collection of Leo & Gertrude Stein in the Studio, 27 rue de Fleurus
거투르드의 아파트에서 마티스와 피카소는 만나고  피카소는 마티스의 The Joy of Life 를 보고 놀란다. 다음 해 피카소는 Les Demoiselles of d’Avignon(아비뇽의 여인들)을 내 놓는다.  이 둘은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관심 있었다. 

 
Henri Matisse(1869-1954), Dance 11, 1909-10
The Joy of Life Dance 11 는 야수파에서 멀어진 그림이다. 마티스는1906년 까지 3년 동안만 야수파 활동하고 그 이후에는 야수파에서 멀어진다. 1907 년에서 1954년까지 마티스만의 그림이 나온다. 1906년 The Joy of Life 이후 경제적으로 숨통이 트이고, gallery 소속 작가도 된다. 1908년 39살때 스타인에 의해 알게된 다른 patron 의 도움으로 Academy of Matisse ( 마티스 학교) 가 생긴다.



Sergei Shchukin (1850-1936)
서지 슈킨은 Russian Collector 이며, 피카소의 작품 100개, 마티스의 작품 50개를 가지고 있다. 피카소와 마티스를 러시아에 소개했으며, 일요일은 그의 맨션을 공개하여, 작가나 일반인이 그림을 관람하게 한다.  Dance 11 나 Music 은 슈킨이 마티스에게 commission 주고 그리게 한 작품이다. 4-5년전 야수파 그림과 비교하면 색채가 wild 하지 않다. 평면적이며 2-3개의 색만 썼다. 마티스만의 독자적 화법인 장식성 decorativeness 평면성 flatness 이 보인다. The Joy of Life 는 비록 원근법과  인물간의 관계는 무시되었지만, 그래도 공간이 있는 것 처럼 보였는데 이 그림은 거의 평면으로 보인다.          


Henri Matisse    Music 1910
Dance 11 와 Music 은  The Joy of Life 그림 안의 춤추는 사람들을 옮겨다가 크게 그린 것이다. 화면이 꽉차서 공간감이 없고 그래서 평면성이 나온다. 마티스의 flatness 가 Russia 쪽으로 넘어가서 Mark Rothko 의 작품같은 monochrome 으로 완성된다. 야수파의 색채 해방은 Expressionism 쪽으로 꺽이면서, 칸딘스키에서 꽃핀다. Music 은 초록색이 언덕인지 벽인지 알수 없다. 앞 뒤 사람의 크기가 애매하고, 악기의 비례도 안 맞다. The Joy of Life 는 festival 의 축제 무드로서 sensual 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Music 은 tone down 된 듯한 melancholy 의 우울한 느낌이다. 마티스는 이미 초창기에 representation 에서 벗어나 expression 으로 옯겨 갔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벗어나 decorative design 으로 넘어간다. 마티스는 색채 해방을 위해 여러 색을 마음대로 써 왔다. 선과 색의 관계에 심취하고 선에 대한 탐구를 했지만 선을 극복 못 하고 항상 선이 있다.


Henri Matisse, Spanish Still Life 1910-11
Arabesque 무늬를 탐구했다. 노랑선의 아라베스크 무늬를 그렸는데, 어떤 것은 잎사귀, 꽃도 되고, 선이면서 면이다. 그래도 table, sofa, blanket 등은 구분이 된다.


Henri Matisse, Harmony in Red 1908
슈킨이 마티스에게 interior 작품 용으로 commission 준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테이블과 벽의 구분이 없다. 창문 밖 풍경의 나무는 몽땅 검은색 선으로 그렸다. 동양화에서는 당연한 개념이지만, 서양화에서는 밑그림으로 뎃생하고, 라인잡고 그 안에 색칠한다. 마티스는 테두리, 선을 어떻게 처리하나를 항상 고민하다가, 스케치 잡고 않해도 선자체를 그림으로 보이도록 처리했다. 즉 선이 그림이 된다.


Henri Matisse, Interior with Eggplants 1911
파란색 꽃무늬가 더 알기가 힘들다. 공간 파괴, 색채 해방 끝냈고, 이제는 색깔로만 형태가 이루어지고, line 만으로 꽃이 된다. 즉 line 이 없어지고 color 가 모든 것 지배하는 paradigm 으로 간다. 1911년 이 시기는 피카소의 cubism 이 날리던 시기였다. 마티스는 스타인 남매의 집에 가서 피카소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본다.



Henri Matisse, Bathers with a Turtle 1908
마티스는 1907년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을 보고 놀랐다. ‘내 것과 어딘가 비슷한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피카소는 마티스의 생의 기쁨을 스타인 남매의 집에서 보고 난 후 아비뇽의 창녀들을 그렸던 것이었다. 피카소의 창녀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마티스는 나도 standing nude 그린다 하며 Bathers with a Turtle 을 내 놓았다. 이 그림의 여자들은 창녀가 아니고, 자기네끼리 목욕하러 나왔다가 거북이랑 노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이다.

선을 위주로 하는 피카소의 큐비즘이 주름잡던 시대에 그것을 보고 마티스는 ‘나는 선을 극복하고 있다. 선이 중요하지 않다. 색깔을 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피카소의 큐비즘은 line dominate (선 위주) 로 grid 를 쓰며, 색에 관심이 없고, 음영을 위하여 주로 갈색을 썼다. 마티스는 color dominate (색깔 위주) 이며, 음영을 주는 갈색을 절대로 쓰지 않는다.

1908년에 마티스는 Note on Painting (그림이란 무엇인가) 라는 글을 쓴다. '예술가는 means 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color 와 line 을 탐구해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림의 content, story, narrative 는 중요하지도 않거니와, 그런 것들을 그림에서 찾을려고 해서는 않된다. Art 는 그림책이 아니다. Content 를 벗어나서 line 과 color 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art 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마티스는 그림이란 하루의 고단한 일을 마치고 쉴 때 마음에 와 닿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림은 entertainment 로써, 거실에 걸고 감상하기 좋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마티스는 그림의 기존 형식에 개혁은 가져 왔지만, 여전히 브르조아의 미술로 남아있고, 보수적 정치성향이다.

하지만 피카소는 그림이 사람을 괴롭혀야 한다.  이 무서운 아비뇽의 여인들을 거실에 걸어놓고 어떻게 감상할건데요?


Pablo Picasso, Les Demoiselles of d’Avignon (아비뇽의 여인들) 1907




Henri Matisse, The Back Series, MoMA , NYC                  


The Back  1 1909           


The Back ll  1916              


The Back IV  1931
마티스는 피카소와 더불어 20세기를 이끄는 최고 예술가라고 할 수있다. 마티스는 색채 해방을 가져왔다. 3년 동안의 짧은 야수파 시기를 통해 부인의 초상화에 green line 그어서, 얼굴색이 더이상 살색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그림을  imitation, representation 역활에서 확실한 해방을 시켰다. 이를 기반으로 해서 pure abstraction 이 가능해졌고, 단색화 monochrome 과 Jackson Pollock  의 Abstract Expressionism 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마티스는 또한 공간을 재정립했다.  르네상스 시대 그림은 완벽한 3차원을 보여주는 노력이며. 회화는 window 나 mirror 역활을 했다. 그러나 마티스는 공간을 flat 하게 재정립을 했고, color 를 해방시킴으로써, 20세기 미술의 기반을 다졌다. 마티스는 야수파 때문에 유명해졌지만, 그가 근본적으로 관심있는 분야는 color 와 line 이었다. 동양화에서는 난을 치듯이 선만 그려도 그림이 된다. 하지만 서양화는 스켓치와 line 을 그리고 면을 색칠한다. 마티스는 서양화의 canon(표준) 을 부수고 싶었다. The Back Series 를 통해서 마티스는 20년 동안 여자의 등을 탐구했다. 첫번째의 여자 뒷모습은 어깨, 등, 엉덩이 등의 덩어리가 있었으나, 마지막의 등은 평면이며 line 이 없다. 20여년 동안 Line 을 없애려고 고민했다. 

마티스는 또한 background 에 대하여 고민했다. 여자 누드를 그릴 때 모델 자체보다도 배경을 고민했다. 공간감 을 무시하고 평면적으로 그려도, 앞과 뒤가 계속 구분되어 보이고, 사람들도 평면으로 보지 않는다. 아무리 평평해도 관람객은 벽, 언덕등의 뒤에 있는 배경으로 자꾸 본다.


Henri Matisse, The Red Studio, 1911, MoMA
바닥과 벽, drawer  다 빨갛다. 테이블과 의자의 구분은 희미한 선 하나로 한다. Line 없이 그리려고 고민했다.


Henri Matisse, Laurette in a Green Robe, 1916
바닥, 벽 구분 안되고, 여자가 공중에 뜬 것 같다. 3차원의 배경을 없애려는 노력이다.


Paper Costumes of Henri Matisse
마티스는 The Joy of Life 이후 많이 알려져서 비슷한 아방가르드 작곡가, 안무가, 러시아 발레 댄서들과 친구가 된다. 거투르드 스타인의 집에서 salon 처럼 모이고 토론과 발표를 한다. 거기서 만난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발레무대 set design 을 한다. 마티스가 디자인한 무대 의상이다. Line 과 decoration 을 simplify 하고 essence 만 표현했다.  


Henri Matisse, Reclining Odalisque (Harmony in Red) 1927
마티스는 피카소와는 달리 창녀 모델을 가지고 브르조아 계급을 parody (풍자, 비꼼) 하지 않는다. 피카소는 Spanish 로써 파리에서는 이방인이었고, 냉소적인 시각으로 그림을 그렸다. 마티스는 여자 누드같은 고전적 motive 를 가지고 social issue 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미적 소재를 decorative 하게 탐구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오로지 design, drawing, painting 에만 관심 있었다.



Henri Matisse, Decorative Figure on an Ornamental Background 1925-6
관심은 여자가 아니고, 밑바탕의 carpet 과 벽지이다. 선이 하나의 면이 되게 표현했다. 벽지의 design 은  그가 계속 탐구하는 decorative theme 중의 하나이다.


Henri Matisse, The Main Gallery on the 1st Floor of the Barnes Foundation,
La Danse between 1931 and 1933
Barnes Foundation 는 20세기 초반 인상주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예술 재단으로 필라델피아 근교에 위치한다. 그림으로 그려서는 항상 선이 있으므로 색종이에 오려서 캔버스에 붙이면 선이 없어진다. 피카소는 신문지를 붙이는 골라쥬를 했으나, 마티스는 절대로 신문은 안 썼고 색지나 벽지를 썼다. 이 둘은 관심사가 달랐다. Barnes Foundation 에서 마티스에게 갤러리 1층의 벽화를 부탁했다. 마티스는 여자 누드인 사람의 몸을 위 아래로 해서 아치형의 둥글둥글한 벽화를 그렸다. 색종이를 사람 사이즈로 오려서 벽에 붙이고 색칠했다.



Henri Matisse, Blue Nude 111, gouache on paper, cut and pasted
젊은 시절 요양 하다가 그림으로 전업한 마티스는 죽을 때 까지 많이 아파서 요양하러 돌아다닌다. 나중 말년은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해 침대 위에서 색종이로 오리고 붙이는 작업을 한다. 흰종이에 파란색 칠하고 여자몸 오려서 흰종이에 붙였다.


Henri Matisse, Jazz (book) 1947
색종이 작업 묶음집이다. 더 이상 붓으로 drawing, painting 안하고 cut and paste 한다. 쟝르 구분이 어려워진다. Collage 는 ready-made object 인 신문 잡지 같은 인쇄 매체인 mass material 을 오려서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마티스는 자신이 만든 색종이만을 오려서 쓴다. 마티스 만의 독특한 cut and paste painting 이다.






La Chapelle de Rosaire (Rosary Chapel), Chapelle Matisse, Vence, 1949-51
그림을 초월한 Cut and Paste 테크닉으로 스테인 글래스에 무늬를 오려서 붙였다. 마티스가 말년에 요양하면서 살았던 방스의 로자리 성당이다. 한 수녀가 마티스를 끝까지 돌보면서 그의 말년 작업을 도왔다.

           

Henri  Matisse, Memory of Oceania 1953, MoMA
오려서 붙였다. 마티스 말년의 작품이다.


Henri Matisse, The Snail, 1953, L’Escargot
거의 최후의 작품이다. 여러가지 색종이를 덕지덕지 붙였다. ‘달팽이가 어디 있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은 안하시겠죠? 굳이 달팽이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마티스의 목적은 expression 이다. 회화는 이제 더 이상 representation 이 아니다. 이제 미술은 다른 예술 장르가 모방할 수 없는 ‘미술’이 되었다. 어떤 음악도 글도  The Snail 을 표현할 수 없다. 그림의 역활은 몇백년 동안 story 있는 그림책이었다. 교회에서는 그림이 글을 대신했으며 글이 없더라도 그림이 있으면 이해가 되었다. 드디어 그림이 몇백년 동안의 representation 의 옷을 벗고, expression 으로 훌쩍 뛴다. The Snail 은 마티스 본인이 생각하는 달팽이이다. 이 작품 하나에도 수백가지 interpretation 이 가능하다. 그래서 서로 다른 interpretation 이 또 예술의 장르를 풍부하게 이루어 나간다. 

                                                                     
Kirchner, Girl under Japanese Umbrella  1906    

                                                                                            
Matisse   Reclining Nude 1907   
         


 Kirchner, Self-Portrait with model 1907
1906, 1907년 마티스가 파리에서 Reclining Nude 같은 그림을 그릴 때,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도 The Bridge (다리파), The Blue Rider (청기사파), 칸딘스키등 German Expressionism (독일표현주의) 의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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