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사이보그와 괴물 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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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베이질 댓글 0건 조회 6,269회 작성일 10-04-13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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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시아 예술 10th hour : Cyborgs & Monsters, Lee Bul


Lee Bul (1964-)
이불은 한국 작가이며, 새벽 ‘불’ 자를 쓴다. 1997년에 MoMA 에서 전시를 했고, 1999년 Venice Biennale 에 한국 작가로서 처음으로 참가했으며, Guggenheim Museum 의 Hugo Boss Prize 의 finalist 에 오른 최초의 한국인 작가이다. 외국에서는 이불을 김수자와 더불어 백남준 급의 작가가 될 사람으로 바라본다. 이불은 90년대, 2000년대 초에 부상이 되었으며, 사회운동을 하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인권 문제, 여성의 권리 등에 개입을 많이 한다. Cyber 작가로 알려져 있다.


Lee Bul , 수난예감
이불은 쇠로 몸을 천장에 묶고 all nude 로 12일 동안 매달려 있는 퍼포먼스도 한다. 내가 이 세상에 소풍나온 강아지 인줄 아냐? 는 낙태에 관한 이야기 이다. 여자의 몸이 누구 것인가? 여자가 임신만 하면 여자의 몸이 헌법이 적용되는 국가 재산으로 종속이 되어서 내것이 아닌 것인양 마음대로 낙태도 할 수 없다.


Lee Bul , 화엄 (Majestic Splendor) 1997 ( 장엄한 광채, 생선, 시퀸, 철, 유리)
살아있는 생선에 예쁘게 수를 떠서, 1997년에 모마에 전시 작품으로 제출했다. 생선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여 전시 일정을 앞당겨 철거를 하였다. 이 작품으로 유명하게 된다.


이불, Gravity Greater than Velocity, 1999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으로 속력보다 더 큰 중력이다. 가라오께 공간이자 사람의 마지막 공간인 죽음의 관을 의미한다. 이 오락기구는 동양 (일본)의 고안물이지만 오늘날에는 ‘범세계적’인 오락기구가 되어 더 이상 동·서양이라는 이원론의 틀에 맞지 않는다. 베니스(서양,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가는 항구이자 세계적 여행지)에 처음 등장한 이 캡슐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다양한 관람객은 실제로 이 공간과 노래부르는 행위가 변태적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불은 한국 underground 예술가 그룹의 leader 이며 급진적인 아이디어로 유명하다. 97년 모마의 신진 작가 발굴project 에 생선을 제출해 전세계 예술세계에 파문을 가져왔다. 박물관에서 나는 썩은 냄새를 아무도 작품이라고는 예상 못 한다. 작품을 찾으려는 사람은 한명도 없고 안내 desk 에 가서 냄새를 complain 한다. 모마에서는 일일히 설명해야 했고 일찍 철거를 한다.
이불은 site specific artist 들이 가진 dilemma 를 건드리고 있다. 모마의 project 에 site –specific 작품을 내라고 하니까 한국의 여자 작가가 배포가 크게도 생선에 예쁘게 수를 놓아서 제출했다. Fabric 을 가지고 장르를 새롭게 열자는 의미가 아니라 조합이 안되는 천과 생선을 모마에 들고 왔다. 대부분의 경우 특정 장소에 맞춘 작품은 Robert Smithson 의 Spiral Jetty 처럼 관광지나 명소가 된다. 사람들은 작품을 보기위해 순례여행처럼 사진이나 찍고 왔다 가는 것으로 끝이다.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으니 작가는 마치 홍보 요원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이불이 모마에 제출한 썩은 생선은 바로 이 dilemma 를 지적헸다.
전세계의 curator 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불은 바로 pick up 되고 Venice Biennale 에 초대된다. 얼토당토하고 황당한 이불의 생선은 많은 사람에게 머리가 보통 돌아가는 작가가 아니구나, 백남준 급이 되겠구나 하는 인상을 주었다. 이불의 다음 작품 cyborg 역시 기대를 넘었다. 사람들은 일파 만파로 충격을 받는다. 생선보다 더 큰 이야기이다.

Lee Bul , Cyborg Blue, 1997-98
사이보그는 새로운 인간체로서, 반 사람 반 기계이다. Cyborg Blue 는 신체 조각의 일부로서, 입고서 performance 하기도 한다. 사이보그 세계에서는 싸우다가 팔을 잘리면 팔을 복제하고, 일부를 가지고 완성된 몸을 만든다.

Lee bul, Byborg W1-W4, 1998
이불의 사이보그 개념은 이론적으로는 Donna Haraway 의 ‘Cyborg Manifesto’ 에 아주 가깝다. 인간과 기계의 구별을 넘나들고 이성구별을 넘어서는 존재로서의 사이보그 개념이다. 1997년과 1998년에 나온 그녀의 첫 사이보그인 적색과 청색의 실리콘 작품들은 몸 안의 순환을 돕는 듯한 호스들이 몸의 양쪽 바깥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래주의 조각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1998∼1999년에 나온 일련의 사이보그는 부분들의 조립으로 이루어졌고, 여체 형상을 한 그것들의 몸에는 남성 성기를 암시하는 이미지들이 장식처럼 흩어져 있다. 그녀가 사이보그를 조형한 실리콘은 성형수술을 할 때 쓰이는 것으로, 사람을 사이보그로 만드는 첨단 재료이고, 작가는 그 때문에 실리콘을 사용했다고 한다.


Ghost in the Shell

Cyborg Manifesto
Donna Haraway, "A Cyborg Manifesto: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in Simians, Cyborgs and Women: The Reinvention of Nature (New York; Routledge, 1991), pp.149-181.
1985년 ‘사이보그 선언’을 쓴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를 ‘사이버네틱 유기체’, ‘기계와 유기체의 혼성물’이라 정의했다. 그녀는 인류가 의수족이나 안경과 같은 기계의 도움으로 신체 일부를 대체하고, 사이버 공간에서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일상이 된 20세기 말에는 우리 모두가 “이론화되고 조립된 카메라들, 한마디로 사이보그들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녀는 사이보그의 등장을 야기한 세 가지 결정적인 경계들의 와해 -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유기체(인간-동물)와 기계 사이의, 그리고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 사이의 -를 들었다. 그녀에게 사이보그는 이들 사이의 혼성물로서 기존의 이원론, 궁극적으로는 부권적 위계와 지배를 극복할 수 있는 허구이자 실제의 존재로 보였다. 따라서 cyborg 는 postgender (포스트젠더) 세계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cybornetics 와 organism 의 합성어인 cyborg 는 이미 학계에서는 엄청난 이야기이며, 기존 인간에 대한 모든 의문을 제시한다. Cyborg Manifesto 는 feminism 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하며. 인간과 기계, 인간과 동물 등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한다. Feminism 이라는 용어 자체가 여성, 남성의 이분법적인 대립 구조에 근거해서 나온 말인데 그렇다면 gay 나 lesbian 은 어디에 속하는가? 변종이란 말인가? 우리는 이성애 동성애로만 분류를 하지만 실제 미국의 교정에는 LGBT club ( Lesbian Gay Bisexual Heterosexual) 이 존재한다.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feminism 의 이론과 사상을 흔드는 개념이 cyborg manifesto 이다. 이후로는 feminism 이라는 말보다 identity politics 나 gender 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cybornetics 와 organism 의 합성어인 cyborg 는 이미 학계에서는 엄청난 이야기이며, 기존 인간에 대한 모든 의문을 제시한다. Cyborg Manifesto 는 feminism 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하며. 인간과 기계, 인간과 동물 등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한다. Feminism 이라는 용어 자체가 여성, 남성의 이분법적인 대립 구조에 근거해서 나온 말인데 그렇다면 gay 나 lesbian 은 어디에 속하는가? 변종이란 말인가? 우리는 이성애 동성애로만 분류를 하지만 실제 미국의 교정에는 LGBT club ( Lesbian Gay Bisexual Heterosexual) 이 존재한다.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feminism 의 이론과 사상을 흔드는 개념이 cyborg manifesto 이다. 이후로는 feminism 이라는 말보다 identity politics 나 gender 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1921년 Marcel Duchamp 도 Marcel Duchamp as Prose Selavy 에서 여자로 변장한 사진을 냄으로서 identity issue 를 다루었다. 태어날 때부터 gay 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틀에서 교육되어지는 것이다. Difference 를 wrong 으로 취급하면 안된다. Cyborg 를 잔인하고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제 3의 생물체로 보지만, 사실은 인간이 더 비인간적이다.
Ghost in the Shell 은 일본의 animation 만화 시리즈인데, 단순한 만화가 아니고 철학자들이 풀어내지 못한 human condition 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시대는 2029년이며 일본 공안국가 수사기관에서 사회 network system 을 hacking 하는 범죄자를 찾아내는 내용인데 (누가 hacking 하면 memory line 이 다 무너진다) 공안 국가 chief 여자 소령이 주인공이다. 소령은 피와 살은 가지고 있지만 몸속은 다 기계인 cyborg 이다. 회로에 의해 memory 를 전송받으며 모든 문서 file 이 머리 속에 들어있는 컴퓨터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싶어하는 무서운 능력이다. 여자 소령은 인간의 조건을 하나도 갖추고 있지 않다. 괴로움의 근원인 욕망이 없는 cyborg 는 식욕, 탐욕, 성욕이 없고, 쓸쓸함,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미식가의 욕망이 없으며, 생존위해 음식 성분을 약간 먹을 뿐이다. 사이보그는 사람처럼 생각 판단은 하지만 오래 살고 싶은 욕망, 가족을 꾸리고 싶은 욕망이 전혀 없다. 시 소설의 주제가 되는 사랑이 없으니 예술이 없어진다.
사이보그에 비해 나약한 마음을 지닌 인간은 검사 변호사 및 감시 기관에서 일할 수가 없다. 돈 권력에 쉽게 넘어가 공정심이 흔들리며, 서로를 파멸시키려 한다. Ghost in the Shell 에서 인간은 재래 시장에서 게걸스럽게 먹으며 추하게 살며, 그 위의 지배체재인 cyborg 가 감정이 개입되지 않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한다.
소령은 어떻게 cyborg 가 됐는지 기억에 없다. 소령은 10대 때에는 사람이 었는데, 누군가가 데려다 속을 다 빼내고 기계로 조립해서 cyborg 를 만들었다. Cyborg 의 dilemma 는 인간과 cyborg 로 2번 살아야 한다는 점인데 Memory 교란이 일어날 때는 문득 옛날 기억이 떠오른다. 인간처럼 생각하지만 인간의 삶이 다 지워졌다. Hacking group 을 찾는 과정에서 게이샤 cyborg 등 여러 층의 사이보그를 만나면서 혼동에 빠진다. 내가 어쩌다 사이보그가 되었는지,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등의 어려운 질문에 부딪친다.
인간이 가진 모든 조건이 다 상쇄되고, cyborg 는 영원히 산다. 사람의 가장 큰 욕망은 죽지 않고자 하는 것—인공 심장, 인공 근육을 가진 사람이 나옴은 멀지 않은 이야기이다. 문제는 뇌, 정신을 어떻게 control 하는가 이다. 인간의 정점에 있는 욕망은 정보 보유와 생명 무한대이다. Ghost in the Shell은 중독성이 있으며, 보고 나면 우울증, 휴유증에 시달린다.
Donna Haraway 의 Cyborg Manifesto 가 나오자,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의 조건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인간은 고통과 슬픔이 없는 utopia 를 계속 꿈꾸다가, 인간이 인간이면 안되겠구나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Utopia 는 인간 답지 못해야 오겠구나 하고 깨닫는다. 인류 역사가 꿈꾸던 utopia 의 pattern 이 계속 바뀐다.
철학적 dilemma 에 '테세우스의 배' 라는 것이 있다. 전투용으로 튼튼하고 휼륭한 배를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 나무로 덧대고 고치고 하여 결과적으로 예전의 테세우스 배에 썼던 재질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것이 계속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는가? Cyborg 의 경우에도 같은 질문이 따른다. Cyborg 가 인간인가 아닌가? 왜 인간인지? 왜 인간이 아닌지? 감정이 있고, 정의롭지 못하면 분노하므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식탐과 성욕이 없으니 인간이 아니다. 계속 꼬리를 무는 질문은 ‘우리가 인간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사는지?’ 로 이어진다.
Donna Haraway 의 Cyborg Manifesto 가 나오자,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의 조건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인간은 고통과 슬픔이 없는 utopia 를 계속 꿈꾸다가, 인간이 인간이면 안되겠구나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Utopia 는 인간 답지 못해야 오겠구나 하고 깨닫는다. 인류 역사가 꿈꾸던 utopia 의 pattern 이 계속 바뀐다.
철학적 dilemma 에 '테세우스의 배' 라는 것이 있다. 전투용으로 튼튼하고 휼륭한 배를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 나무로 덧대고 고치고 하여 결과적으로 예전의 테세우스 배에 썼던 재질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것이 계속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는가? Cyborg 의 경우에도 같은 질문이 따른다. Cyborg 가 인간인가 아닌가? 왜 인간인지? 왜 인간이 아닌지? 감정이 있고, 정의롭지 못하면 분노하므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식탐과 성욕이 없으니 인간이 아니다. 계속 꼬리를 무는 질문은 ‘우리가 인간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사는지?’ 로 이어진다.
인간이 cyborg 를 생각해 냈다는 것이 더 무섭다. 새로운 세상, utopia 의 꿈을 쫓다가 결과적으로 cyborg idea 까지 나왔다. 인간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nihilism 의 정점에서 나온 이 끔찍한 생각, 2029년은 인간과 cyborg 가 같이 사는 세상이며, 개인의 욕망은 없어지고, 하나의 cyborg 가 전 cyborg 를 지배하려는 욕망, 즉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이 존재한다. 이불의 작품은 그런 것들을 다룬다.

Lee Bul, Hydra 1998
히드라는 사진 image 이며, 알수 없는 복장과 hair style, 포즈로 제 3의 생물체를 만들었다. 일, 중, 한국도 아닌 hybrid 잡종의 개념이며, 괴기스러워 보인다. 포즈도 마치 무슨 교주처럼 취했다. 이불의 performance 인데 자신을 대안의 인격체로 바꾸었다. 여성성을 나타내는 포즈도 아니고, 복장도 애매하고 이것 저것 잡종이 아무렇게 섞여서 새로운 개체가 나타나는 느낌이다.

Lee Bul, Amaryllis, 1999
이불은 cyborg 를 만드는 작가이다. 인간이 왜 이런 변종 기계같은 모습의 꿈을 꾸는걸까? 아무리 살아도 인간에 대한 기대치가 안선다. 인간에게 도덕, 윤리를 기대하는 생각을 접는다. 인간은 안된다. 이불 전의 작가들은 인간을 전제로, 인간의 조건 안에서 왜 이렇게 사나? 어떻게 나아지나를 고민했지만 이불은 딴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피카소가 나타날 때보다 더한 충격이 휩싸인다.

Lee Bul, Divine Shell Crush, 2000

Lee Bul, Stembau, Installation view 2007, courtesy Foundation Cartier, Paris

Lee Bul, Autopoeisis, Installation view 2007, courtesy Foundation Cartier, Paris
알 수 없는 제 3의 생물체이다. Cyborg 는 유기체이므로 나방조차 끼지 않는 Cyborg 나무도 가능하다. 인간은 대자연에 대항할 힘이 없는데, cyborg 세계는 산불, 홍수 등의 대재난이 없이 철저하게 조절이 되는 사회이다. 편리함, 쉬움, 용이함 등 인간이 그리는 욕망의 끝에 cyborg 가 온다.

Lee Bul, On Every New shadow, Installation view 2007, courtesy Foundation Cartier, Paris
큰 방에 규정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들의 설치 작품이 가득하다. 인간도 아니고 독수리도 아닌 제 3의 생물체이다. 어린 시절의 공상 과학이 더 무섭게 발전하여 사람이 새로운 생물체를 만든다. 내가 편하고 싶고, 잘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과 편함은 경계가 없고 무한대로 뻐친다.

Lee Bul, Hydra / Monument, 1998
participatory work (참여 작품) 으로 관람객이 발로 페달을 누르면, 괴기스런 여자분이 점점 커진다. 참여가 예전에는 재미 있었지만, 이제는 무섭고 부담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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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을 정리하면서
괴기스런 형태의 작품들
제 3 의 생물체를 들여다보면서
인간이 너무 똑똑해져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이 3% 만 모자라도
예술가들이 그렇게 부르짖는 유토피아는
어쩌면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TV 드라마나 소설에서
약간 모자라는 캐렉터가 나오면
긴장이 풀어지면서 더 재미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못하는 말과 행동들을
꺼리김없이 합니다. 속이 시원해 집니다.
꺼리김없이 합니다. 속이 시원해 집니다.
무엇이든 넘치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그리 좋은 것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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