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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근육맨, 장후안 3/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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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7,246회 작성일 10-04-01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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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시아 예술 8th hour : New Muscle Man, Zhang Huan   신 근육맨, 장후안




Zhang Huan (1965-), Family Tree, 2000, New York, USA
장후안이 3명의 서예가를 초청하여, 해뜰 무렵부터 해질 무렵까지  자신의 얼굴에다 중국 명언, 속담을 쓰라고 했고, 그 결과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미국에 살아도 얼굴과 이름에서 중국인임이 드러나고, 내 나라에서 살아오던 stereotype 으로 살아간다. 속담이나 고사성어는 문화와 사고방식을 반영하며, 외국인이 남의 나라 말 배울 때 제일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A rolling stone doesn’t gather moss 는 ‘한 우물을 파라’ 는 긍정적 의미인데, 문화적 차이로 잘못 해석되어 ‘고인 물에는 이끼가 낀다’ 라는 부정적 의미로 전달이 되기도 한다.

Family Tree에서 글자로 인해 identity 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사회에서 살아온 시간에 의해 나도 모르게 나의 모습이 바뀜을 과장되이 표현했다. 나는 까만 글씨가 쓰여지기 전의 얼굴이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보는 나는 까만 얼굴이다. 나는 내가 남들과 다르고 unique 하다고 생각하지만, 남들은 나를 천편일률적으로 본다. 중국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개별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똑같게 본다.


Zhang Huan, My New York, 2002, Performance, Whitney Museum 
미국에 오면 동양인을  한결같이 왜소하다고 본다. 대중매체에 나오는 American man 의 image 는 우락부락 몸이 좋다. Family Tree에서 동양인의 얼굴을 똑같이 보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뉴욕에 가서, 고기를 몸에 붙여서, 하루만에 근육이 좋은 미국사람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동양얼굴이다. 장후안은 몸으로, 서도호는 집, 교복, 갑옷으로 identity 이야기를 한다.

낯선 나라 미국에 살면서 겪는 경험, 상처가 내 몸에 자국을 남긴다. 원인 모를 몸의 고통이 따라 다니고 병원 가도 왜 아픈지 모른다. 공간이 바뀌었을 때 여러가지가 몸에 들어가서 자신도 모르게 몸이 바뀐다. 장후안은 시간과 공간이 바뀔 때 몸에 변화가 있음을 알고, 그 장소에서 몸을 먼저 실험한다.


Zhang Huan, Peace 1, 2001


Zhang Huan, Peace 2, 2001

Performance Art 의 작은 가지인 Body Art 는 1970년 대에 생겨났고, 화두는 ‘몸’ 이야기이다.  1960년 대와 그 이전의 performance 나 happening 은 주로 작가의 터무니없는 부조리극이 많았다. 그러나 70년대의 performance 작가는 art 를 극단적으로 밀어 부친다. Chris Burden 은 미국 작가로 gallery 공간에 관객을 초대해 놓고 자기 손에 총을 쏜다. 관객은 보는 것 자체가 괴로움 이다. Carol Schneemann 은 Interior Scroll 에서 vagina 에서 scroll 을 꺼내며, 보는 것 자체를 혐오스럽게 한다. 크리스 버든은 전기통과 전선을 자기 몸에 감고 생명의 위협 순간까지 간다. 장후안과 Marina Abramovic 도 그런 맥락의 작가이다. 


Chris Burden, Doorway to Heaven, 1973
"At 6 p.m. I stood in the doorway of my studio facing the Venice boardwalk. A few spectators watched as I pushed two live electric wires into my chest. The wires crossed and exploded, burning me but saving me from electrocution."





Zhang Huan, 65 Kg
장후안은 나체로 몸을 천장에 묶고, 의사를 초청하고, 자신의 체중 65Kg 에서죽지 않을 정도로 피를 뺀다. 주사바늘로 수혈을 하는 것처럼 피가 바닥의 대야에 뚝뚝 떨어지고, 피를 불로 끓인다. 혐오스럽고 끔찍한 행위예술이다.


Zhang Huan, 12 square meter
장후안은 시골에서 베이징 변두리로 이주했고,  돈없고 이름없는 젊은 아티스트들이 막노동하는 사람들과 섞여 사는 동네인 East Village 의 공중 화장실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나체로 몸에 꿀과 멸치 액젓을 바르고 화장실안 간의 의자에 몇시간 앉아 있으니 파리가 미친듯이 달라붙고, 이 광경을 video 촬영하였다. 



Zhang Huan, Foam, Beijing China, 1998



 


Marina Abramovic, Happy Christmas, 2008


Marina Abramovic as Joseph Beuys, 2005




Marina Abramovic, The Lips of Thomas, 1975-1997
아브라모빅은 몸에 마비가 오는 사람이 먹는 약인 근육을 깨워주는 약을 먹고, 반대로 우울증에 먹는 신경안정제를 또 먹는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부작용으로 발작이 나온다. 배에 면도칼로 별을 새기고 피가 줄줄 흐른다. 채찍으로 피가 날 때까지 때리고 고통을 느끼다 못해 몸전체가 멍해지는 순간에 얼음 위에 눕는다     


Marina Abramovic, Breathing in - Breathing out
독일 작가인 Ulay 와 입을 맞추고 두사람이 이산화탄소 과다로 질식하기 직전까지 숨을 내쉰다. 실제로 아브라모빅이 정신을 잃었고 911 으로 구출되었다. 목숨을 담보로 한 미친 짓이다. 아무리 작가라 해도 고통 감내의 목표가 무엇인가?

60년대의 happening 은 공연 시간이 짧았고, 70년대 크리스 버든의 퍼포먼스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장후안이나 아브라모빅은 6, 7, 24 시간 등 긴 시간으로 자기 몸이 의식을 잃을 때까지 학대를 한다. 관객은 그렇게 오래 앉아있지 않는다.


Marina Abramovic, Rhythm0, 1974
아브라모빅은 누드로 서서 테이블 위에 갖가지 도구를 놓고 관객은 도구를 가지고 작가와 engage 를 한다. 처음에는 주저주저하면서 연필로 찔러보다가 나중에는 작가의 머리에 총을 겨누면서 이래도 안 움직일건지를 실험해본다.

마음과 몸이 별개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도전장을 내밀어 육체의 한계와 경계를 실험해보는 행위이다. 리밍웨이나 오노요꼬의 행위예술은 관객이 participation 하면서 즐길 수 있었지만 작가 자신의 몸울 자학하는 행위예술은 spectacle show 에 지나지 않는다. 이전에는 자학 행위예술에 대한 criticality (비판) 이 있었는데, 비슷한 종류의 행위예술이 유행처럼 퍼져나감에 따라 criticality 가 아예 없어져 버렸다.

끔찍하다고 느끼는 unbearable 의 경계가 어디인가? 경계는 다분히 작위적이다. Censorship 과 관련하여 성, 폭력이 검열이 가장 크게 들어오는 부분이다. 예전에는 TV 에서 격렬한 kiss scene 은 허가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TV drama 에서 표현 수위의 한도가 자꾸만 무너진다. 무너져도 사람들은 화 안내고 금새 익숙해진다. 백남준은 media 의 중요 요소가 sex 와 violence 라고 했다.

장후안이나 아브라모빅의 행위예술은 (다른 기존의 퍼포먼스는 그냥 구경거리로 끝났다) 단순히 spectacle 로 끝나는 dilemma 를 벗어나려고, 극단까지 밀어 부치고, 관객에게 마음의 짐을 지운다. 그래서 보기가 힘들다.

행위예술은 예술이 commodity, product 로 귀결되는 dilemma 는 벗어났지만, video art 의 영상물로 쉽게 보고 잊혀지는 소모품이 되었다. Reality Show 와 경계가 모호해지며, 장사꾼들은 행위예술의 idea 를 Art marketing 의 이름으로 돈을 버는데 이용한다.

행위예술가는 우리의 옆, 뒤에서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고 싶고 ‘우리가 잘 살고 있는지’ 건드려 보고 싶다. 우리가 매일 쓰는TV, 대중매체 등의 일상용품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장후안과 아브라모빅은 편안히 앉아서 그들의 예술을 감상하는 우리에게 피를 뚝뚝 흘리는 장면을 보여 주면서 우리의 태도와 느낌을 살핀다.





Marina Abramovic, Art Must Be Beautiful
“I brush my hair with a metal brush held in my right hand and simultaneously comb my hair with a metal comb held in my left hand. While so doing, I continuously repeat ‘Art must be beautiful’, ‘Artist must be beautiful’, until I have destroyed my hair and face.”

알루미늄 재질의 빗으로 머리를 장시간 과도하게 빗어서 머리가 뽑히거나 얼굴에 상처가 난다. 이 video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사람은 드물다.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 를 계속적으로 중얼거리는 아브라모빅을 보면서 관객은 ‘저게 뭐야? 저게 예술이야?’ 라고 질문한다. 관객의 이 질문 밑에는 ‘예술은 나를 달래고 위로해야 하며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 는 전제를 깔고 있다. 나는 박물관에 가서 고문을 당하고 싶지 않다. 나의 팍팍한 삶을 위로 받고 싶다.

그러나 위로 받는다고 뭐가 삶이 달라지는가? 현실에서 도망가고픈 fantasy 는 누구나 있지만 삶은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행위예술가는 쓸데없이 난해한 activity 를 통해 세상의 악세서리 예술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의 삶을 꽉 쥐었다가 놓을 수 있을 때까지 깊게 개입하고 싶다.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작가들보다 훨씬 더 끔찍한 짓을 하면서 살고 있다. 일상의 생활에서, 신문만 펼쳐도, 전쟁에서 몇천명 씩 죽이면서 작가가 자신의 몸 가지고 하는 것 끔찍해서 못 보겠다고 한다. 야오이 쿠사마가 모마의 정원에서 행한 Grand Orgy to Awaken the Dead 퍼포먼스에서 한 것이라곤 나체의 여자들에게 예쁘게 점 찍어준 것 밖에 없다. 그런데 ‘Is it Art?’ 라는 기사가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으며 정신나갔다고 비난을 받았다. 쿠사마는 ‘너희들이 나를 돌았다고 하는데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마을 전체를, 여자와 아기들까지 학살한 짓은 어떠니?’ 하고 묻고 있다.

행위예술은 human condition 이 무엇인가를 건드린다. 아브라모빅은 사람이 극단까지 가면 짐승보다도 못한 야만성, 폭력성이 나옴을 보여준다. ‘짐승보다 못함이 아니라 사람보다 못하다’ 라고 말을 고쳐야 한다. 한 아이가 나와 달라 보이면 왕따되어 학대받고, 친구들이 나에게 동조하면 굉장히 쉽게 같은 선상에 서며, 나의 단점 지적하면 적이 된다. 혼자 있고 싶어 하면서도 혼자 있음을 무서워 하며. 본능적으로 결부력을 갈망하는 인간은 단체가 싫어도 단체에서 떨어져 나감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타인에게 attach 를 하며, 밀착감을 크게 가짐에 비례해서 배신감 또한 크게 느낀다. 급속도로 좋아하고 또 금방 실망하며 인간 관계에서 상처를 받는다. 서운한 감정이란 상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선의,호의를 plus 로 거저 주었다고 너그럽게 생각 하지만, 실상은 give and take,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마음 속에 숨어 있기에 섭섭한 것이다. 내 마음이 그 사람에게서 돌아서면 그에게 상식선을 넘어선 짓을 끝까지 한다. 인간의 잔인성에는 한계가 없다.

한번의 일시적 행위예술보다 사실 우리의 일상이 더 무섭다.  맨정신 가지고 역사공부 하기 힘들다. 죽고 죽이고, trauma 생기고, 그에 따른 예술작품이 나오고, holocaust 반성하여 기념관 지었으나, 또 죽인다. 행위예술은 예술에 대한 회의이며 비아냥이다. 예술은 60년대 부터 petit bourgeois 의 leisure 를 충족시키면서, 돈 있는 사람이 과시하느라고 입에 올리는 고급 상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에 동조하는 작가도 있지만 장후안, 아브라모빅은 옆에서 한번 뒤틀면서 예술에 개입하고 있다.


Zhang Huan, Pilgimage, Wind and Water in New York, 1998
관객은 ‘이게 예술이야? 이게 무슨 뜻이야?’ 하고 질문던지고, 행위예술가는 답이 없는 질문을 한 관객이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예술가는 관객이 작품을 보면서 혐오감, 불쾌감을 왜 느끼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기를 원한다. ‘배의 면도칼, 왜 끔찍합니까? 끔찍의 경계가 어딥니까?’

우리는 자신이 지성과 이성을 갖추고 합리적 사고를 하는 인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지성 이성 다 내려 놓으면 인간의 조건은 ‘몸’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과 딱 몸으로 맞딱뜨리면, 그 상황에서는 모든 지성 없어지고, 이성을 사용해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장후안과 아브라모빅은 몸의 원시성을 말한다. 모든 인간이 공통 분모로 가지고 있는 것은 이성도 지성도 아니고 그냥 ‘몸’ 하나이다. 인간 대 인간, face to face 로 부딪칠 때 의식을 가지고 있는 몸이 별 의미가 없다. 대학살을 몰고 간 군중심리가 이성, 지성 내려논 인간에게 짐승의 야수성 밖에 남는 것이 없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의식과 지성이 몸을 앞서간다고 생각하고, 몸은 2차적, 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면서 산다. 그러나 우리는 매 순간 외모. 외양을 무엇보다도 크게 치면서 살고 있지 않는가?

현대예술가 장후안과 아브라모빅은 또한 participation 을 건드린다. 리밍웨이가 차려주는 저녁, 재밌고 맛있게 먹을지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참여는 책임이 따르므로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길거리, 혹은 어느 단체에서 반전 운동에 서명해 달라고 하면, 의심과 거부 반응이 먼저 일어나고 참여를 꺼린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에서 가장 끔찍한 자리는 가장 혼동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의 자리이다.’ 라고 했다. 내가 반전 운동에 서명을 안함으로서, automatically 다른 쪽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참여, 비참여는 내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나는 이미 어딘가에 참여가 되어있다. 책임이 싫어서 참여 안하려 했지만, 그로 인해 자동으로 다른 쪽에 참여가  되었고, 거기에 나의 책임이 있다. 내가 비록 그 책임을 인식 못해도, 나는 여전히 타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개개인은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군중 심리로 몰아부쳐서 그 많은 사람을 죽였음을 역사는 말해준다.

장후안, 아브라모빅의 고통을 보면서 participatory 하는 관객은 마음이 불편해진다. ‘저거 911 불러야 하는 것 아냐? 내가 이렇게 서서 구경만 해도 되는 거야?’ 참여에 따른 책임. 마음에 부담감이 온다. 나는 나와 attach 된 사람들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citizenship 자체가 책임이 따르는 ‘증’ 이다. 아브라모빅은 군인인 어머니 밑에서 밤 10시의 curfew 를 엄격히 지키면서 자랐고, 어머니가 딸에게 지운 책임감의 틀을 사회에 나와 사람들에게 지운다.


Zhang Huan, To Add One Meter to an Anonymous Mountain, 1995
This is a collaborative work by the Beijing East-Village artists.  This live performance begins with each of the artists being weighed by Kong Bu. He then ordered the artists determined by weight and they began to build a human mountain by lying on top of each other. The heaviest lay down first, and the lightest lay down last. Collectively when stacked the height of the bodies was one meter high.


 Zhang Huan, To Raise the Water level in a fishpond, 1995

장후안은 시골에서 베이찡으로, 또 미국으로, 뚫고 들어오면서 내 몸으로 느끼는 강도와 열기가 어떠한지를 직접 몸으로 실험을 한다.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올 때 왜 여기는 이렇게 따뜻한지, 혹은 이렇게 추운지를 느끼고, 옷을 기후에 맞게 갈아 입기 보다는 내가 왜 이것을 따라야 하는지를 질문한다. ‘ 당신은 이 질서에 편안하십니까?’ – 내부인에게 물어본다.


****
Performing Artist 는
몸 이야기를 하는데,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이성과 지성이라는데
다 발가벗고,  땅에 내려 놓으면
남는 것은 몸 한조각에 지나지 않고,

우리가 뽐내는 이성, 지성이
몸 다음에 온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고
자신의 몸을 자학을 하면서
그래야 사람들이 쳐다봐 주니까
누드로 행위예술을 합니다.

'이게 예술이야? 도데체 의미가 뭐야? '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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