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호, 내 집은 어디인가 3/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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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verbena 댓글 0건 조회 10,181회 작성일 10-03-2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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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시아 예술 7th hour : Who’s home?, Do-ho Suh

서도호 1962-

서도호의 아버지 서세옥씨는 서울대 동양학과 교수로 유명한 한옥 건축가이다.

Seoul Home / LA Home / NY Home 1999
투명 나일론으로 실제 서울의 한옥집을 만들어 매달았다. 나일론, 비단천을 사용한 설치 작업으로 집을 suitcase 2 개에 넣어서 들고 다니는 개념이다. 서도호는 대학 졸업후 유학을 와서 떠돌아 다니며 살았으며 이민 세대와는 경험과 이야기가 다르다. 유학을 오면 내집은 한국에 있고 어디가나 신분증을 들고 다녀야 한다. 서도호는 Rhode Island Art School 을 다녔고 기숙사나 맨하탄 아파트에서 살았다. 자신의 집 앞에 있는 fire station 에서 하루 종일 siren 이 울려서 잠을 편하게 잔 날이 하루도 없다. 서울에 있는 내방에서는 조용하고 편안하게 잤음을 기억하고 자기가 살았던 부모님 집을 천으로 떠서 만들고 뉴욕과 LA 의 아파트도 천으로 떴다.

The Perfect Home 2002

The Perfect Home ll 2003

Staircase IV 2003

Staircase V 2003
낯선 공간을 여행하고 오면 내집이 최고 라는 느낌이 든다. 서도호는 LA, 뉴욕, 토꾜를 돌아다니면서 살았는데 ‘서울집을 가방에 넣어와서 펼쳐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의 따스함, 안락함에 대한 nostalgia 를 가지고 서울집과 똑같은 집, 들고 다닐 수 있는 집을 만들었으나, 반대 급부로 내 집은 가져올 수 없다는 느낌이 더욱 증폭되었다.


Rachel Whiteread, House, 1993, destroyed 1994
집안을 cast 로 떠서 석고 모형을 만들었다. 고든 마타 클락은 버려진 집을 쪼개고 구멍을 뚫었지만, 레이철 위터리드는 버려진 집을 석고를 뜬다. 사진의 건물은 런던의 거주 공간인데 국가가 새 건물을 짓는 정화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헐어버린 건물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흔적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리는데 레이철은 시당국에 허가를 받고 헌 건물을 콘크리트로 cast 를 떠서, 사람들이 못 잊도록 남기려는 의도에서 이 작품을 하였다. 시당국은 이런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라에서는 헐어서 부수는 집을 nostalgia 로 삼기를 원하지 않으며 깨끗하게 정화된 아파트의 image 를 남기고 싶은데 레이철은 구태여 이런 작품을 한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기에 향수로 남는 것이다. 국가의 nostalgia는 좋은 것,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기고 싶어하는 양면성을 가진다. 한 국민이 가지는 집단 무의식 속에는 이제는 얘기해도 상처가 아닌 것들만 끌어내어 nostalgia 로 가지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다. 옛날의 굶주림은 끝나고 이제는 배부르니까 그 시절을 진공 포장된 상태로 그대로 남겨두길 원한다.


Do-ho Suh, Fallen Star 1/5, 2008
서울의 한옥집 모형이 뉴욕의 집 모형을 박아서 부셨다. 앞면 모형과 뒷면의 interior miniature 이다. Globalize 된 현대 작가들은 한 장소에서만 머물면서 작품 활동 하지 않는다. 이방인이 되어 낯선 곳에 머물면 또 하나의 ‘자기집 공간’ 이 생긴다. 서도희가 20세에 뉴욕에 왔을 때 서울에 있는 내 집을 생각하면서 한 작품이다. 유학생인 경우 identity 가 공식적으로 서류 매김되는 자리에는 permanent residence 와 current residence 가 따라 다니며, 집이 2개로 기록된다.


Do-ho Suh, Fallen Star 1/5, 2008
서울의 한옥집 모형이 뉴욕의 집 모형을 박아서 부셨다. 앞면 모형과 뒷면의 interior miniature 이다. Globalize 된 현대 작가들은 한 장소에서만 머물면서 작품 활동 하지 않는다. 이방인이 되어 낯선 곳에 머물면 또 하나의 ‘자기집 공간’ 이 생긴다. 서도희가 20세에 뉴욕에 왔을 때 서울에 있는 내 집을 생각하면서 한 작품이다. 유학생인 경우 identity 가 공식적으로 서류 매김되는 자리에는 permanent residence 와 current residence 가 따라 다니며, 집이 2개로 기록된다.


Theresa Hak Kyung Cha, Exilee , 1980 Super 8 film and video Installation
차학경은 1.5세로 가족 전체가 이민을 와서 하와이, San Francisco 쪽에서 살았다. 행복한 삶이나 자식 교육의 꿈을 위하여 새로운 곳으로 온 것이 아니라 도망치듯 이민온 case 이다. 차학경의 오빠가 독재 시절 학생 운동에 연류되어 전 가족은 서울에서의 삶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지금 여기의 삶이 지옥이므로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찾아 떠나는 이민이 50, 60년대 이민이었다.
차학경은 Berkley 대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했고,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하고, 주로 performance art 를 많이 했다.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 사는 주제를 다룬 Exilee (Exile)는 정치적 이념이 다른 국가 사이의 망명을 의미한다. 차학경은 이름에 대한 identity 이야기를 한다. 이름만 가지고도 identity 가 드러나며 Face to face 일 때는 피부색깔과 생김새에서 identity 가 드러나고, 그 다음에는 말에서 생활, 교육 수준이 가늠된다. 사람의 성격은 외양에서 드러나지 않으며, 마음이 착한지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함은 극히 제한적이며 절대적 가치가 없고 상대적이다. 차학경같이 남의 나라에 이민온 사람에게는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조차도 상처가 된다. 차학경은 언어와 외양으로 인해 이나라에서 낯설게 보인다. 나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도 그들이 낯설다. 한국을 떠날 때 흔적 자체를 지워버렸고 그리움 같은 건 남아있지 않고 돌아갈 집도 없다.
그러나 서도호는 돌아갈 부모님의 집이 있다. 그리움을 가지고 큰 기대감을 가지고 갔는데, 가보니 유학가기 전의 그집이 아니다. 본인이 변했고 부모님 집과 주변 환경도 변했다. 서도호의 그리움은 서울에서의 삶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뉴욕에 있으면서 만들어진 fantasy 였다. 그 공간에 살 때는 오히려 짜증스러워도 했었는데 그 공간을 떠난 후에 fantasy 가 생겼고 포장이 되었다.
서도호가 그리워 하는 집은 자신의 fantasy 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집은 아니다. 집의 소재도 아주 취약하여 시간이 지나면 낡고 때묻는다. 원래 집이란 나를 보호해 주는 곳이지만, 서도호의 ‘집’ 은 바람에도 휘청거리며 조그마한 사건에도 집 자체가 뒤집휜다. 차학경의 집도 오빠의 사건 하나로 위험해졌고, 애증의 관계가 되어 버렸다.

차학경은 글을 쓰는 유명 작가로 Asian American literature 의 필수 항목으로 꼽히는 Dictee (Dictation) 라는 책을 썼다. 어른이 된 후에 유학 와서 작업을 한 서도호는 6-7세에 이민을 온 차학경 세대와는 엄연히 다르므로 Asian Modern Art 란 이름으로 함께 묶기가 힘들다. Identity 가 상이하게 다름이 작품을 통해 뚜렷히 나타난다. 미국에 와서 활동하는 작가가 많지만 예술하는 이유, 떠나온 이유가 다 틀리므로 그들이 하는 이야기도 틀리다. 이것을 다 함께 묶어서 한국적 작품인가보다 라고 하기는 힘들다.
서도호의 전시는 외국에서는 한국적인 작품으로 보여지고 한국에서는 class issue 가 된다. 그의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와 부자 인가봐, 저렇게 큰 한옥이 서울 한복판에 있다니’ 하고 말한다.

Do-ho Suh, Uni-forms: Self-Portraits My 39 Years, 2006
초, 중, 고등학교의 교복과 교련복, 군복, 양복이다. 교복이란 원래 빈부의 차가 드러나지 않고 identity 를 판단할 수 없게 하는 옷이다. 치마길이, 머리길이에 민감하여 정해진 rule 에서 벗어나면 죄인 취급을 받는다. 교복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말하며, 사람들은 rule 과 법칙에 쉽게 길들여지고 따라가며, 거기에 폭력성이 있다고는 생각 못한다. 시민은 규칙을 잘 준수 하는데, 힘을 가진 사람은 법을 안 지킨다. 서도호는 학창시절 내내 한가지 옷만 3년씩 입고 다니는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class’ 의 의미가 더 확연하게 전달되었다. 유치원 및 초등학교 교복은 서도호가 부유한 집 출신임을 나타낸다.
작품이 어디에서 전시되는가, 주로 만나는 관객이 누군가에 따라 다른 의미의 해석이 나온다. 작품을 볼 때 세대차도 있으며, 이 작품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장소에 따라 각각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


Do-ho Suh, Floor 2007
Venice Biennale 출품작으로 작가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다. 관객은 유리바닥을 딛고 지나가면 되는데, 무심코 올라섰다가 작은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유리 천장을 떠받치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내려온다. 깁수자처럼 사람 간의 관계를 말하는데 다른 맥락이다. 내가 의식을 하던 못하던 사람의 관계는 폭력적, 일방적이다. 내가 현재 누리는 여러가지 조건이 ‘내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경제, 소비 활동에는 내가 의식을 못해도 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있다. 유통경제에 혁신을 가져온 고속도로 건설을 짧은 시간에 제한된 자본으로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임금을 줄여야 했으며, 한강의 기적이라 일컷는 고층 아파트를 건설한 사람들은 거기서 일만 했을 뿐이다. 국가의 부를 축척하기 위해서 희생된 사람들, 유리 천장을 떠바치면서 버티어 준 노동자들이 있었다. 서도호는 개인과 집단에 대하여 같이 산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었다.

Do-ho Suh, Some/one, 200
한국의 military service 는 의무이며, 논란의 여지가 많다. 군대 같다 온 남성에게는 20-30대에 2-3년 이란 소중한 시간에 큰 흔적을 남기는 trauma 이기도 하다. 군대 의무제 역시 폭력성이 있다. 2차 대전 이후 냉전 시대 부터 굳건히 내려오는 모범 시민의 개념은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soldier citizen 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도 모범 시민은 남자이며 여자는 군대를 가지 않으므로 준시민에 속한다. 그래서 남자는 공무원 시험에서 가산점을 받으며, 여대생들은 차별에 분개한다. 여자 남자 차이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 군대 제도이며, 군대 의무제는 Cold Politics 하의 ideology 이다. 한국은 soldier citizen 의 개념이 뚜렷하게 살아있는 나라이다.
미국의 soldier citizen 의 개념은 2차 대전 후에 바뀐다. 2차 대전 전에는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쟁 참여였는데, 전후에는 남의 나라 영토extraterrestrial 에 가서 전쟁을 한다. 남의 나라에 가서 싸우므로, 내 나라의 image, fantasy 가 강해진다. 국가는 나가 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큰일난다는 공포심을 citizen 의 마음에 심어준다. 애국심에 호소할 때 쓰는 전략이다.
Some/one 한사람의 군인을 의미하는 하나하나의 군번줄로 어마어마한 갑옷을 만들어 내었는데 안에는 텅 비어 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야한다’ ㅡnational fantasy 를 계속해서 심어준다. 아버지가 돌아 가셔서 군대를 면제받은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회의 돌아가는 분위기는 군대를 가지 않은 남자를 뭔가 이상하게 본다. 학교, 사회 동료, 선배 만나는 자리에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하고 자기 얘기를 다 해야한다. 군대를 가지 않은 남자에게 주홍글씨처럼 따라 다니는 무서운 폭력이다.
미국에 와서 soldier citizen, rich citizen 이 되면 곧바로 모범시민으로 승격이 된다. 전쟁에 참여하거나 돈을 가져오면 미국 시민권이 나온다. ‘증’ 안에 굉장한 차별이 숨어있다. 2차 대전 이후부터 ‘돈’과 ‘전쟁’이 모범 시민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형성되었다. 서도호의 Some/one 을 국제무대에서 보는 관객들은 마치 이런 것이 대한민국에만 해당되는 일인 것 처럼 생각을 한다. Korea 라는 또 다른 위험한 fantasy 를 심어준다. Asian artist 는 손에 양날의 칼을 쥐고 있다.


Do-ho Suh, Who Am We? 1996/ 2001
The portraits are of about 40 000 teenagers and were taken from photographs in the artist’s high-school yearbooks. At a distance, the faces cannot be distinguished. On closer viewing dots become recognizable as photographs.
졸업앨범의 조그만 단체 사진을 오려서 40000개를 두 벽에다 붙였다. 막상 보면 알 수도 없는 얼굴이지만 나중에는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

Do-ho Suh, Screen, 2004

Do-ho Suh, Karma,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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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호의 유학과 차학경의 이민 이야기에 이어 1980년대 초 나의 이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름이 identity 를 나타내는 첫번째 요소인데 내 이름은 ‘미연’이 아니라 ‘마연’ 으로 읽혀졌고, 한국에서의 24년은 어디로 없어졌고 그들 눈에 비치는 낯설고 쭈빗거리는 내가 의식되었다.
모든 아시안 작가들도 어쩔 수 없이 identity issue 를 내포하면서 작업을 한다. 차학경도 서도호도 가슴에 상처로 남을뻔 했던 것들을 끄집어 내어 손가락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가 우리가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것도 아니지 않는가?
다만 정신차려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 보지를 못했고, 말해도 되는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이민 생활에 겪은 아픔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죠셉 보이스처럼 shaman 으로 둔갑해 보기도 하고, 리 밍웨이처럼 빨간색 천을 꺼내 들고 재봉질을 한번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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