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웨이웨이, 동화를 현실로 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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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6,865회 작성일 10-03-10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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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시아 예술, 5th hour : Realizing Fairytale Ai Weiwei
아이 웨이웨이 의 아버지 아이칭은 중국의 유명한 시인으로서 문화 혁명 (1966-76 년) 시기에 숙청되어 온 가족이 사막의 허허벌판 마을로 쫓겨가서 살았다. 모택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화 대 혁명을 catch phrase 로 내걸고, 시인, 지식인들, 부르조아를 타도하였다. 문화 혁명의 뿌리는 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57년에 모택동이 공산주의 상황에 변화를 꾀하면서 소련과 대립각을 세운다. 모택동은 대학진 운동을 시작해서 철강 사업에 주력한다. 농가에서 낫, 쟁기를 만들던 기술로 철생산을 시도했으나, 질이 낮은 철 밖에 만들지 못했고 막중한 작업량을 맞추지 못해 농민을 탄압했고 대학진 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마침내 주석을 사임하고 종이 주석이 된 모택동은 입지가 약화되자, 초중학생의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사상 운동을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3-4년 후에 이 아이들은 홍위병이 되어 문화 대혁명의 중요 견인차 역할을 한다. 11살, 12살 때부터 사상주의를 배운 몇백만의 홍위병들은 몰려 다니며 사회 전체의 뿌리를 뽑는다. 교수, 공직자, 지성인들은 홍위병에게 내몰려 자아 비판 및 부르조아 사상을 반성하는 의미로 공장에 가서 일을 한다. 당시 집단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못 이겨 800 여명이나 자살을 하였다. 힘이 커진 홍위병은 모택동을 신격화하고, 종교, 제사, 유교의 잔재 등을 몰아내며, 마을을 불지르고, 마을 사람을 때려 죽이는 일을 한다.
문화 혁명 운동의 중요 인물인 모택동의 부인 장칭과 그의 후견인인 신문사 편집장은 언론을 장악하게 되고, 문화 혁명은 장칭의 진두 지휘 아래 일파 만파로 퍼진다. 장칭은 나중에 4인방의 한명으로 재판을 받는다. 66년에서 76년 모택동의 죽음까지 10년을 문화 혁명 시기로 보며, 실패한 비극적인 혁명이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르조아라는 이유로 동족이 동족을 죽인 역사적 trauma 로 중국인에게 영원히 남아 있다.
문화 혁명 시기에 태어난 중국 작가들은 이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이웨이웨이는 10대를 사막에서 보내고 베이칭으로 돌아 오지만 할 일이 없다. 시인인 아버지의 친구 지성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림을 그리다가 미국에 와서 Parsons School 과 Art Student League 에서 공부를 한다.
Ai Weiwei, Beijing National Stadium 2008
아이웨이웨이는 베이찡 올림픽의 스타디움을 bird nest 형태로 design 하였다.
Ai Weiwei, Template, Documenta 12, Kassel, Germany 2007
Documenta 는 독일의 카셀에서 5년 마다 열리는 국제적 예술 전시회이다. 2007년에 열린 12번째의 Documenta 에 아이웨이웨이는 1001개의 청시대의 문짝을 연결시킨 조형물 Template 을 전시했으나, 전시 첫날에 바람에 무너졌지만, 그는 고치지 말고 그대로 전시하라고 했다. 카셀은 군수 물자 공장이 있었던 곳으로 2차 대전 중 최고로 폭격을 많이 받은 도시이다. 국제적인 예술 전시회가 전쟁의 상처가 굵직하게 남아있는 카셀에서 상처를 건드리면서 열리고 있다.
Fairytale, Chairs 1001 Qing Dynasty
아이 웨이웨이는 fairytale project 라는 이름 하에 1001명의 중국인을 카셀에 데리고 왔다. '아니 독일에 왔는데 왜 이리 중국 사람이 많아?' 어디를 가도 중국 사람, 중국말이 들린다. 아이웨이웨이는 Documenta 참가 작가로 뽑혔고, site specific art 를 참가 작품으로 내 놓았다. 자신의 blog 에 ‘1001명을 독일로 여행시켜 주겠다’ 라고 공지했고 한번도 여행을 못 가본 사람들을 각 직업 별로 골고루 뽑았다. Documenta 가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비자, 여권 준비에 상당히 긴 시간 소요된 project 로서 1001명의 중국인들의 fairytale 동화가 실현되었다.
중국 작가인 내가 독일의 카셀에 가서 전시함이 무슨 의미가 있나? 독일 안에서 바라보는 중국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그러지 말고 차라리 중국 사람을 데려가자. 국제 규모의 박람회가 진짜로 국제적인가?--- 아이 웨이웨이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한 도시에 여러 나라가 모여서 올림픽을 할때는 공평한 경쟁을 하지만, 실제로는 국가 간의 경쟁 관계가 평등하지 않다. 만국 예술 박람회에 가면 세계 각국의 작가들이 공평하게 작품을 전시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hierarchy 가 크게 벌어져 있다.
Ai Weiwei, Fairytale, Documenta 12, Kassel, Germany, 2007
2007년 독일의 Kassel 에서 열리는 Documenta 에 아이 웨이웨이가 초대되었을 당시에 중국에서는 2008년에 있을 베이찡 올림픽을 대비해서 낡은 옛날집을 부수며 도시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아이 웨이웨이는 철거 site 에 pile 처럼 쌓여있는 명청시대의 문짝과 창문 1001개를 모아 Kassel 로 가져가서 Template 라는 사원을 만들어서 display 했다.
Documenta 는 중국인 1001명을 초대했고, 중국 사람들을 위한 자는 공간과 중국식 의자에 앉아 쉬는 공간도 Kassel 곳곳에 마련하였다. 카셀은 동화 작가인 Grimme Brothers가 태어난 군사도시로써, 2차 대전후 초토화가 된 도시였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중국사람을 본 적도 없었는데 갑자기 1001명의 중국인이 여행용 가방을 끌고 나타났다. 이 중국인들은 노동자, 학생, 길거리 악사 등으로 난생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드는 모든 비용은 Documenta 측에서 다 지불했다. 이들의 fairytale 같은 여행을 위하여 아이웨이는 쉬는 공간을 곳곳에 만들었으며, 단순한 display 를 넘어서 1001명의 중국 관객이 없으면 이루어질수 없는 participatory work 이다.
1001명의 비행기표, 숙식, 교통비를 대느라 많은 경비가 들었는데, 중국인들은 그 돈을 들여가며 관광도시도 아닌 조그만 도시 카셀에서 보기 난해한 Documenta 작품들만 보았다. Kassel 도시 안에 있는 큰 성이 전시 공간이 되었고, tram 이라는 지상 전차로 이동하며, 성안의 도축장에는 Poland 작가의 video 작품이 전시되고, 또한Kassel 에서 엄선한 작가인 박찬경의 작업이 전시가 되고 있었다.
박물관 도서관 같은 데는 가본 적도 없는 이 중국인들에게는 피곤하고 짜증나는 결코 재미있는 여행이 아니다. 또한 Documenta 를 관람온 전세계의 관광객들에게는 재미있게 즐기는 것 처럼 보이지 않는 중국 사람들이 신기하게 보였다. International 한 규모의 Documenta 라지만, 이것이 무슨 그리 의미있는 일인가 하고 아이웨이는 질문하고 있다. 그림, 돈, 상품등은 국경을 쉽게 넘지만, 국경을 넘기 제일 힘든 대상이 인간이며, 그 중에서도 돈없는 사람이 제일 힘들다. 아이 웨이 웨이는 Documenta 에 전폭 참여가 아니고 critical intervention (비판적 개입) 을 하고있다.
과거의 예술작품은 작가가 중심이었고, 또한 institution 이 예술의 흐름을 좌지우지 하였으며, 작가는 museum 과 공모자의 입장이었다. 나의 작품이 MoMA, Whittney 안에 들어가면 100, 1000배 가격이 뛰고, 첼시의 gallery 로 갈 수 있다. 그런데 1960년 대 이후에 institution critique 이 나오고, 개념 미술 conceptual art 가 institution 을 비딱하게 본다. 개념 미술은 미술이 object 로서 존재하지 않고, 개념 concept 으로서 존재한다. 개념 미술, performance, Fluxus 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아이 웨이웨이같은 작가가 현대 예술을 더욱 팽창시킬 수 있었다.
Ai Weiwei, Housing Space, Fairytale, Documenta 12, Kassel, Germany, 2007
Ai Weiwei, Template, Documenta 12, Kassel, Germany, 2007
2008 년 Beijing 올림픽의 준비를 위해 당시 중국에서는 대대적으로 옛날 건물을 부수는 철거와 신축 아파트 및 건물을 올리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 웨이웨이가 ‘버릴거면 저 주세요’ 하고 헌 문짝을 1001개를 모아다가 카셀에다 사원을 만들었다. 중국인에게는 쓰레기이지만 서양인에게는 고급스럽게 보이는 이중성이 내포되어 있고, 아이 웨이웨이가 건드리는 핵심은 정체성 identity 이며 orientalism 과 관련이 있다. 내가 다른 맥락에 놓이면 그들이 다른 것이 아니고 내가 다르게 보인다. 동양이 바깥에 놓이면, 어딘지 달라보이고 인지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쓰레기를 모아 놓은 하찮은 것이지만 독일에서는 ‘어어’ 하고 본다. 똑같은 것을 다르게 바라보는 2중, 3중의 잣대가 있을 수 있다. 과연 이런 예술을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도큐멘타에서 작품을 감상하기 보다는 피난민처럼 우르르 다니는 것이 실제의 중국인 모습인데, 중국 밖에서 아이 웨이웨이의 현대 미술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분위기가 다 그렇게 멋있게 돌아가는 줄로 알고 중국과 중국인을 낭만화 romanticizing 시킨다. 할머니 세대가 경험한 전쟁 이야기가 내게는 흥미롭고 낭만적으로 들린다. 할머니는 진폭이 너무나 컸던 역사적 사건의 상처로 인해 얘기하시면서 막 운다. 중국 작가의 한 작품이 정말로 중국 전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가?
영어단어 represent 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재연한다는 representation 과 대표한다는 representative 의 뜻이 있다. 독어나 불어는 다른 두 단어로 존재하는데 영어로는 represent 를 같이 쓰니까, 재연과 대표의 의미가 같이 간다. 중국의 문화 혁명 cultural revolution 을 다루는 많은 작품이 그 당시를 재연은 하지만 결코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들은 Chinatown 에 가면 저 사람들이 중국사람 모습인가봐 하다가, 모마에 가면 저 작품들이 현대 중국 작품인가봐 하면서 계속 stereotype 을 만들면서 살아간다. Kassel, Venice Biennale 를 구경다니면서 또 다른 stereotype 을 만든다. 어떤 특정의 한국 유학생을 보고 ‘한국 유학생은 다 저런가 봐’ 라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들은 매 순간 끊임없이 stereotype 을 시키면서 사고의 유연성을 놓치고 산다. 카셀의 도큐멘타를 보면서 ‘저것이 중국적 현대 미술의 흐름인가 봐’ 하고 있는데 갑자기 중국 사람이 떼지어 확 지나가면 ‘아이 정말’ 하고 얼굴을 찌푸린다. 아이 웨이웨이가 중국 현대 미술 앞에 생뚱맞게 중국 사람들을 데려 와서 stereotype 만드는 것을 방해하며 stereotyping 의 위험함을 건드리고 있다.
또 한가지 아이 웨이웨이가 깔고 있는 layer 는 ‘ 미술품은 아무 문제 없이 국경을 넘어 독일에 와서 보여 줘도 되는데 중국 사람은 여기서 살 수 없다’ 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항 출입시 까다로운 검문을 거쳐야 하며, 삼성 전자 휴대폰보다도 못하게 취급을 받는다. 국제적인 미술 박람회가 쉽게 열리는 것 같아도 국가간의 높은 장벽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아이 웨이웨이는 건드리고 있다. 좋은 작품일수록 결 layer가 많아야 하며, 계속 이야기 거리가 나와야 한다. Template 와 Fairytale Project 로 아이 웨이웨이는 Documenta 에서 제일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아이 웨이웨이는 다음해 열린 올림픽에서 Beijing National Museum 의 디자인에 조언만 하고, Olympic Show 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다국적 기업의 marketing tool 이 되어버린 Olympic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그러나 사이코 칭은 끝까지 남아서 project 에 참여한다.
Beijing Olympic 당시 그 주변에는 internet 연결이 전혀 안되고 관광객이 허름한 동네 건물을 사진 찍으려고 하면 못하게 했다. 올림픽을 통해 중국은 나라가 선진화가 되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우리나라도 88 올림픽 때 상계동 판자촌을 철거했으며, 외국인들이 밤 10시에 거리에 있는데 통금이 웽하고 울리면 이상하니까 national curfew 를 없애 버렸다.
국가 간의 관계를 너무 의식한 결과 나라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올림픽에 아이 웨이웨이는 계속 참여할 수가 없었다. 외국인들은 중국이 많이 좋아졌네, 많이 세련되어 졌네 하지만 그것이 중국의 참 모습은 아니다. 누가 중국을 대표하는가? 시의원이 진짜 우리를 대표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있다. 아이 웨이웨이는 Documenta 에서 그의 장소 맞춤 작품 site specific art 를 통해 여러가지 면을 건드리고 있다.
Gorden Matta-Clark (1943-1978), Splitting, Englewood, New Jersey, 1974
집을 반으로 잘랐다. 얼마나 부자이기에 집을 쪼개나? 고든 마타 클락 은 헌집을 부수고 새로 짓게 계획이 된 집을 찾아내어 ‘집을 부술 때까지 내가 작업을 좀 해도 되냐?’ 하고 허락을 받고 버려진 건물에 가서 쪼개거나 구멍을 낸다.
Gorden Matta-Clark, Conical Intersect, 1975
부순 것을 사진이나 영상물로 전시하거나 부순 잔해물을 gallery 공간에 전시한다. 고든은 Cornell 대학에서 건축과 조각을 공부했으며 그의 아버지 마타이는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고든의 작품은 architecture 를 건드리고 있다. 그는 an+ architecture 를 합성하여 anarchitecture 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건축을 부순다는 건축의 반대 개념이며, anarchy 무정부주의의 뜻을 함축한다. 정부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는 진공 상태를 의미한다.
Gorden Matta-Clark, Office Baroque, 1977
고든은 건물을 뜯어와서 gallery 에 전시를 하였다. 버려진 건물에 가서 작업을 한 것이지 고든이 건물 부수기에 공모한 것은 아니다. 그의 미술은 1970년대에 나타난 개념 미술의 흐름에 잘 부응이 되었다.
Robert Smithson, Spiral Jetty, Great Salt Lake, Utah, 1970
로버트 스미쏜은 고든의 선생이다. 70년대의 개념미술 conceptual art 에는 land art 가 포함되어 있다. Museum 이 작품을 못 사게 하고, Sotheby 나 Christy 의 경매에 못 나가도록 대지나 야외에 나가서 작업을 한다. 위의Spiral Jetty 의 copy right 은 Dia Foundation 이 가지고 있으며 이 작품의 image 를 쓰기 위해서는 디아와 협상을 해야 한다. 또한 디아는 land art 하는 작가에게 돈을 대어 주므로 작가는 어쩔수 없이 sponsorship 이라는 이름 아래 역이게 되고 idea를 제출해서 디아가 좋아하는 작품만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돈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돈의 굴레에 다시 씌이게 되는 Land Art 의 irony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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