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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따리여인 김수자 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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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베이질 댓글 0건 조회 6,214회 작성일 10-02-15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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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시아 예술 4th hour : Woman with Bottari, Kim Sooja

feminization of labor 노동 시장에서 남성과 여성이 차별이 되는 노동의 여성화를 뜻한다. 

site specific art 
2009년 Guggenheim Museum 에서 열린 The Third Mind 특별전은 미국에 영향을 끼친 아시아 작가전 이었다. 앤 해밀턴은 Guggenheim Museum 의 구조에 맞는 installation 작품 Human Carriage 를 전시했는데 이를 site specific art 라고 한다.

earth art / land art 
대지 예술로서 야외에서 땅을 파는 것 자체를 예술이라고 여긴다.

conceptual art / conceptualism
1970년 대에 나타난 개념주의로서 site specific art 와 earth art 가 여기에 속한다.

participatory work 
특정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고 잊혀졌던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장소 맞춤의 installation 작품을 participatory work 라고 한다.

                            

Kimsooja, 1957-


Ann Hamilton, 1956- 
김수자와 앤해밀톤은 나이도 비슷하며, 현대 미술을 끄는 엄청난 power 를 가지고 있다.



Kimsooja, Mumbai, A Laundry Field 2008
인도의 slum가의 빨래터에서 천 빨아 너는 textile 에 대한 이야기 이다. 김수자가 직접 문바이를 여행하면서 찍었다. Still 작품도 있고, ICP 에서는 video projection 으로 전시가 되었다. 사람들이 기차에 매달려 이동한다. 밖을 구경하느라고? 사람이 너무 많아 아수라장이며 사람이 꾸겨져서 이동한다. 김수자는 주로 낮은 계급에 촛점을 맞추며 일부러 슬럼가만 다닌다. 길거리에서 사람이 자는 모습, 공동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모습—저게 빨리는 건가? 다시 더러워 지는 건가?  재밌는 이미지는 결코 아닌, 힘든 본적이 없는 이미지이다. 약간 얼떨떨 해지기도 한다. 내가 뮤지엄에 와서 이렇게 어려운 사람을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TV 처럼 채널을 돌릴 수도 없고, gallery 에 가면 이런 이미지가 내 앞에 던져진다.



Kimsooja, Cities on the Move, 2727 Kilometer Bottari Truck 1997
11일 동안 보따리를 실은 트럭 위에 올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닌다. 한국 사람에게는 익숙한 이미지이다.  바리바리 쌓고 이불은 보따리에 싸서 용달차에 싣고 단순한 물건의 이동이 아닌 사람의 이주를 의미한다. 이사, 전쟁, 피난, 여자가 도망갈 때 싸는 보따리는 갑작스런 ‘이동’ 을 상징한다.





Kimsooja, Migateurs (migrator), Je Reviendrai 2008
김수자로 인해 ‘보따리’라는 단어가 서양 세계에 알려진다. 남의 나라에서 살러 온 이민자처럼 보따리 트럭을 타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는 performance 로서 파리시민들은 이 이색적인 트럭을 다 보았다. 요즘은 이렇게 이사하는 사람 없을까요?  달동네는 아직도 보따리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보따리 이사를 옛날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내 삶이 나아진 것이다. 김수자의 보따리 트럭을 보고 아직도 나와 같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당신이 못 봤다 해서 그것이 존재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인도의 문바이를 보면 한국의 50, 60년대 라고 생각하며 경제적 수준이 낮으면 시간적으로  퇴보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인간의 이주는 어쩔 수 없어서, 먹고 살려고, 조금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찾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김수자의 작품은 슬프다. 보따리에 앉아서 가는 엄마,  앞자리의 애들. 저런 모습은 철거민이거나, 남편과 헤어져 나 혼자 짐을 싸거나, 집주인의 집세 인상에 내몰려 더 변두리로 가는 마음이다. 김수자는 내가 흔하게 이웃에서 보는 사람이 아닌, 별로 볼 기회가 없는 '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제는 세계 여행이 쉽다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미국의 공항은 사람의 기분을 떨어뜨린다.  Finger print 까지 해야 하고 심문 수준의 질문 공세를 받는다. 사람의 이동이 자유로운 것 같지만, 인간의 지위,국적, citizenship, 합법, 불법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이 인간을 제일 힘들게 한다.



Kimsooja, A Mirror Woman 2002
홍대 석사를 마치고, 모노크롬, 몬드리안 풍의 그림을 많이 그리던 시절이었다. 그림을 가지고 고민하던 터에 하루는 어머니가 이불을 꿰매자고 불렀다. 어머니와 같이 이불을 꿰메면서 전기 감전 오듯이 찌르르 뭔가를 깨우쳤다. 이때부터 김수자이불보, 보따리, 바느질을 주제로 삼는다. 이불은 내가 태어나자 마자 싸여지는 곳이며, 평생 동안 자는 곳이며, 또한 이불 속에서 죽으며, 인생의 전반이 이루어지는 핵심의 장소이다. 어머니들은 이사 다닐 때 촌스런 알룩달룩 용이 새겨진 덮지도 않는 이불인데도 못 버리고, 꼭 가지고 다니며, 철철히 호청을 뜯어서 다시 꿰맨다. 김수자는 이불을 통해 여자 이야기,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A Needle Woman, PSI Contemporary Art Center, New York 2001
김수자
에게 바늘은 중요한 개념이다. 예술가의 역활은 바늘에 실을 꿰어서 인간 관계를 연관시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와 당신이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우리가 어떻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나를 보여주는 ‘타인과 관계’ 이야기를 김수자는 한다. 익숙한 image 인 homeless 나 beggar 를 보고 사람들은 그냥 넘어간다. 그러나 김수자가 대 도시에서 자신을 beggar 로 변신시키자 사람들은 관심을 보인다. 익숙한 것 낯설게 만들기 alienation 전략이다.

김수자가 needle 이 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바느질 하듯 needle woman 이 되어 서 있다. ‘수자’ 라는 이름이 인도어로 ‘바늘’ 임은 단순한 우연일까?  Mexico City, Cairo, Lagos 등의 바쁜 거리에 주변 사람들은 획획 지나가는데, 수 많은 군중 속을 ‘바늘’이 되어 관통한다. 김수자는 뒤로 돌아 서 있다. 절대로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정면으로 서 있으면 사람들은 내 얼굴만 본다.  나의 identity 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타인에 대한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사람들과 바늘로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연관이 있다. 바늘로 구태여 인간 관계를 기우지 않아도,  내가 파고 들지 않아도, 가만히 서 있어도 어떤 식으로든 기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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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sooja, A Homeless Woman, Delhi 2000                                                  

           
Kimsooja, A Beggar Woman, Cairo 2001                                                      
김수자가 실제로 이 도시에 가서 구걸하는 여자를 보았고, 익숙해진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것을 보았다. Beggar 나 homeless 에 무감각했던 그 도시 사람들이 김수자가 땅 바닥에 누워있거나 구걸을 하면 낯설게 느낀다. 속격 효과 alienation 이다. 그녀가 그들의 익숙한 공간에 들어가 낯이 설게끔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멕시코 여성이 구걸을 하면 못본 척 하는데 김수자가 하니까, 말 걸고, 돈을 주고 막 쳐다본다. 피부색, 생김새의 다름에서 오는 새로움이다. 외면하고 사는 것 건드리고 일깨워 준다.


                   


Eva Hesse, Contingent 1969
에봐 해스 Post Minimalism 의 대표 작가이다. 천, cheese cloth, 노란색 라텍스의 재질인 Contingent 는 관객이 이 사이를 지나가면 흔들리고 약간의 바람에도 움직인다. ‘자꾸 경험한다’ 는 의미에서 minimalism 의 연장 선상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이 많이 경험하고 나면 취약한 재질로 인하여, 작품이 변한다. 낡은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경험도  변한다. 차겁고 딱딱한 재질의 영구 불변하는 minimalism 에 반기를 드는 해스가 사용한  Cheese cloth 는 수술의 상처 부위를 싸는 거즈를 의미하기도 한다. 백혈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은 자신의 삶을 투영시킨다.
이렇듯 textile 은 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밀턴의 청바지, 린넨도 몸과 제일 먼저 접촉을 하며, 김수자의 보따리도 천으로 만들어 졌고, 브르조아도 린넨으로 책을 만들었다. 1970년 대에 일어난 Body Art 운동은 작가가 자신의 몸을 가지고 작품을 한다. 사람들은 영화에서 총 싸서 죽이는 것은 매일 재밌게 보면서 작각가 자신의 몸을 자학하는 장면의 body art 는 끔찍하게 여긴다.




Christo and Jeanne-Claude, The Gates, Central Park, New York City 1979-2005
크리스토는 불가리아 태생으로 부인인 진느가 manager 로서 행정적인 일을 다 처리한다. Public Art 인 The Gates 는 뉴욕시에 허가 신청을 1979 년에 제출했으나, 복잡한 문서 제출과 더불어 시장이 바뀌고 예산이 삭감되고 담당자가 다른 곳으로 차출이 되는 등의 이유로 6년이 걸려서야 완공이 되었다.
Christo and Jeanne-Claude는 600명 이상의 설치 작업을 하는 사람을 고용할 정도로 큰 기업 이다. Central Park 을 포장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양의 천을 어디서 구할까?  클라우드 부부는 구상 중인 작품의 이미지 디자인 sketch 를 미리 팔아서 그 돈으로  싸는 작업에 들어 간다.  자금 조달의 donation 은 일체 사양하며 그 이유는 donation 을 받으면 특정 기업을 위한 광고가 되고, 예술 작품이 아닌 홍보 물자가 되기 때문이다. Public Art 는 20-30년 동안 공무원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해야지 작업이 가능하며, 과정 자체를 예술로 보기도 한다.

Christo and Jeanne-Claude, Running Fence 1972-76

Christo and Jeanne-Claude, Wrapped Reichstag, Berlin 1971-95
포장 예술가라는 별명을 가진 크리스토와 진느는 1971 년 동독 시절에 국회 의사당을 싸겠다는 계획을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 허가가 떨어지고  24년 후인1995 년에 완공되었다. 작가의 자비를 들여 많은 천을 다 구하고 헬리콥터까지 동원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 사람들에게 동독 시절과 국회 의사당 Reichstag 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 그래 맞아, 여기가 분단 되어 있었지’ 공중 예술, Public Art 라고 부르며 장소의 특성을 살리는 작품이라고 하여 Site Specific Art 라고도 한다. 
해밀턴도 첼시 지역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작품을 하였듯이, 크리스토도 역사적, 정치적으로 대중과 함께 생각해 볼 만한 장소를 주로 싼다. 처음에 Central Park 를 인공적으로 조성할 때, 원래는 gate 를 해서 밤에는 파크를 폐쇄시키려고 하였는데 파크의 디자이너가 철문이 맘에 안들어 지금과 같이 open 시키고, 대신에 이름만 gate 로 남겨 두었다. 크리스토는 The Gates 를 통해 센트럴 파크의 숨겨진 history 를 이야기 하고 있다.
                
백남준 역시 performance 를 많이 했다. 바이얼린, 피아노 부수기, 넥타이 자르기등 기존 예술을 부수는 showy 한 작업이다. 관객은 놀라고 황당하며 수동적인 입장이다. ‘같이 하자’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 한다. Document 로 남은 기록을 볼 뿐 결코 백남준의 작품을 보는 것은 아니다. Happening 은 동시간에 같은 공간에 관객이 있어야 한다. 그 이후로는 다 기록일 뿐 이다.
그러나 김수자는 documentary 기록 차원이 아닌 영상물을 남긴다. 사면의 벽을 둘러싼 화면의 image 의 effect 에 관객이 푹 빠지고 압도되는 느낌이다. 마치 문바이, 멕시코 시티를 떼어다 놓은 것 같고 내가 실제로 체험하는 것 같다. 하니만 백남준의 performance 는 몇월 며칠의 공연 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으며 작가 백남준 자체가 그 performance  에 있어 너무 중요하다. 내가 피아노 부수는 공연을 한다면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질 것이다. 아마 무관심을 넘어서서 백남준을 표절 plagiarism 했다고 비난을 할 것 이다.
김수자는 절대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관객은 김수자의 뒷모습을 보며 그의 뒤를 따라서 다가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관객을 김수자의 위치에 놓으며, 우리는 이 route 를 통해 같이 걸어 간다. Video 작품인데도 관객이 참여하는 듯한 아주 똑똑한 전략이다. 또한 김수자가 돌아 앉아 있으니까 일본, 중국, 한국인도 아닌 일반적인 image 로 보여져서 class, category 로 지칭되는 beggar, homeless 라는 다수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김수자의 작품은 내가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처음에는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일로 여겼지만 $3.80 에 사먹는 Starbucks Coffee 가 저 멀리 지구 상의 어딘가에서는 함 사람이 먹고 사는 돈이라는 생각도, 노동의 착취까지도 차츰 생각하게 된다.   




Ana Mendieta 1948-1985, Silueta Works in Mexico, 1973
60년대 말 Post Minimalism 과 Feminism  이 맞 물리면서 많은 여자 작가들이 performance art 에  참여했다. 애나 맨디에타 는 쿠바 출신으로  ‘흔적 남기기’ 작업을 한다. 자신이 해변에 누워서 실루엣을 남기고, 화약으로 불을 지른다. 대부분 바닷가나 숲속의 인적이 없는 곳에서 하므로 그 누구도 보지 못 한다. 관객이 보는 것은 사진이나 짧은 영상물에 불과하다. 다시 가면 이런 흔적이 이미 사라져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쿠바의 피텔 카스트로 정권의 격동 시기에 권력가 집안의 딸로 태어난 멘디에타는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부모가 생명의 위협을 받자, 동생과 함께 미국에 망명을 보내진다. Iowa 의 고아원에서 부모의 생사를 모른채 자라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고향을 찾아가나 부모의 생사를 알 길이 없다. 부모님에 대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으며 돌아갈 곳도 없다. 이런 곳에 가서 자신의 흔적을 남긴들 누가 기억을 하나? 소용없는 짓이다. 아무리 맨디에타가 tracing 작업을 하여도 바로 다음 순간 efface 된다. 흔적이란 물리적인 것이 아니고,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흔적은 그 시간이 지난 후에도  ‘기억’ 속에 계속 남아 있다. 역사책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이며 사람이 죽는 얘기이다. 죽은 수는 굉장하지만 일반인은 통계의 숫자로 남을 뿐이다. 인간만큼  잔인하게 뭔가를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존재는 없다. 기록, 흔적, 남의 기억 속에 뭘 남긴다는 것-- Memory 는 잔인하다. 맨디에타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 아름다워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지우려 해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흔적은 너무 폭력적이다.
애나 맨디에타의 layer 는 1회성, 일시성으로 김수자와는 또 다른 layer 이다.  작가가 중심이 되어 하는performance 가 흔적 trace 이 꼭 남아야 하는가?  혁명가의 굵직한 사건은 역사에 기록이 남는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아무 죄도 없이 누군가의 가정이 풍비박산되는 기록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마치 맨디에타의 퍼포먼스처럼 파도가 한번만 치면 금새 지워진다.

1970년대의 많은 작가들이 performance art 를 통해 개개인의 이야기, 여성성, 매체적인 이야기를 펼치고 있으며, 멘디에타와 김수자는 쟝르 자체를 팽창시켜 풍부하게 만든 여성 작가이다. 작가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보고 또 다른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맨디에타는 memory 속에 폭력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끌고 온다.





Ann Hamilton, Mattering 1998
시뻘건 천에 둘러 싸여 있고 공작새 수컷 5 마리가 돌아 다닌다.  천장의 구멍을 뚫고 전신주를 설치하고 그 위에 남자가 앉아 있다. Typewriter 칠 때 글자 수정하는 리본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 그는 그것을 손에 칭칭 감아서 큰 덩치가 되면 바닥에 떨어뜨리고 또 다시 감기를 시작한다. 바닥에는 파란색 리본 뭉치가 돌아 다닌다. 이 전시는 프랑스의 Lyon 에서 열렸는데, Lyon 에는 전 세계 textile, tapestry 를 모아논 최대 규모의 큰 직물 박물관이 있다. 섬유 산업으로 유명한 도시 리용의 성격에 맞는 site-specific performance  이다.
전신주에 앉아 있는 남자는 3 시간 마다 교대된다. 해밀턴, 브르조아, 쿠사마의 천 작업은 노동의 여성화 feminization of labor 와 관련이 있다. 옷의 수, tapestry 등은  여성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뜨개질, 깁는 것을 좋아 하는가?  그렇지 않다. 여자라고 해서 다 뜨개질 잘하는 것은 아니다. Art versus Craft – Art 는 고 난이도의 교육을 통해 남자들이 주로 했고, 바느질과 뜨개질은 여자들의 손재주 craft 로서 예술로 치지 않고 열등하게 본다. 
Post Minimalist 의 여성 작가들은 남성 작가 중심의 minimalist 의 철강, 돌의 재질에 반기를 들고, 여성들이 하는 털실, 바느질등을 작품 안으로 가져 왔으며,  art 의 지위에 대하여 공격을 했다. 여성은 교육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서양 예술사에 여자 화가는 찾을 수가 없다. 누드화 수업이 진행 중인 salon 에 여자는 입장이 불가했다. 여자는 누드화 모델이고, 남자는 화가라는 그런 이분법은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철강 일은 남자들이 하는 일로서 정당한 노동으로 여기지만, 여자가 하는 옷 만드는 작업은 노동으로 안 본다. 노동 시장에서 남자와 여자의 노동은 분리가 되며, 여자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low wage laborer 로 간주된다.
Mattering 에서는 여자 대신 남자에게 단순 반복 노동을 시킨다. 전통적으로 원앙 금침등 화려한 혼수는 여자의 몫으로 던져져 있다. Mattering 화려한 색깔의 천을 볼 때 여성의 작품 같은데, 아저씨가 앉아 있고 수컷 공작새가 돌아 다닌다. 공작은 구애를 하기 위해서 수컷이 더 화려하고 예쁘다. 공작새에게는 여성의 몫이 수컷에게 있다. 과연 화려함, 예쁨, 천 등이 여성과 필연적인 관계인가?  여자로, 딸들로 교육되고 키워지는 것이 아닐까?  
가정에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일이 팽창되어 사회로 가서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해밀턴, 김수자는 무심코 넘어가고, 아무 일도 아닌 것 처럼 보이는 것을 ‘어? 잠깐만요’ 하고 끌어낸다. 나비의 날개 짓이 생사의 기로를 갈라 놓을 수 있다는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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