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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부처 백남준 1/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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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5,748회 작성일 10-01-28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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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시아 예술 1st hour: TV Budda, Nam June Paik

이번 학기는 현대 아시안 아트라는 조금 유별난 topic 이다. 이 때까지는 시대별, 작가별, 국가별로 분류된 아트 강의를 들었다. 계속 강의를 들었던 사람은 이제 뮤지엄이 조금 쉬워지고 친구에게 아는 척 제법 설명도 해줄 수 있다. 이제 뮤지엄은 되었고 슬슬 Chelsy 쪽으로 가 볼까. 전 세계 현대작가들의 꿈인 첼시에서의 전시. 그런데 그들의 작품이 내게는 왜 이리 해괴망칙할까.

첼시는 가장 최근의 미술을 다룬다.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한국작가들도 여러 명 있다. 그런데 이 한국작가들이 왜 첼시에 발탁이 됐을까. 이번 학기는 그 맥락의 이해를 위한 수업이다. 중국, 일본작가를 포함하여 강의 진행은 한중일 순으로 하며, 작가와 그 주변, 시대 배경, 전시대 예술 사조와의 dialogue 등을 살펴본다.

지금 현재 ICP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에서 3년에 한번씩 열리는 Triennial 에서 김수자의 작품 큰 전시가 있다. 큰 규모의 영상 image 작품이다. 이번 일요일까지 1월 17 일 까지 하니 시간이 있으면 가보면 좋겠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림 앞에서 1초 동안에 뭐가 click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현대 미술은 6시간을 봐도, 오늘 보고 내일 또 봐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대 미술은 기존의 감상하는 태도를 전복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Nam June Paik 1932-2006



백남준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1940년대 한국의 가난과 해방 직후의 격동기를 살았다. 사회는 좌익, 우익으로 갈라지고 6.25 전쟁이 터졌다. 18세때 토쿄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서독으로 유학을 갔으며 1964년에 뉴욕으로 온다. 

50년대와 60년대 이후의 작가들은 쟝르를 뛰어넘어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multi-tasking 을 하였다. Category 가 애매해서 딱이 화가, 조각가라고 분류할 수가 없다. 소설을 쓰는 writer 이기도 한 백남준은 50세 때에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의 인생의 획은 일본 유학 전인 18세를 기점으로 크게 그어진다. 나는 고국을 떠나기 전에 닥치는 책을 읽었다.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이미 역사, 사회, 정치 전반에 대하여 기반이 잡혀 있었던 셈이었다. 그러다가 Karl Marx Arnold Schoenberg 를 알게 되었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는 당시에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는데 1947년 15세 때 Swan Record 가게 주인을 2년간 졸라 Arnold Schoenberg 의 record 를 듣고 음악에 눈이 띄였다. 그리고 동경대를 갔고 만약 안 갔으면 아마 월북했거나 6.25 때 죽었겠지.'


Arnold Schoenberg 1874-1951                           


Karl Marx 1818-1883
대부분의 사람들은 칼 막스에 대해 cold politics 의 영향으로 사회주의를 다소 왜곡해서 알고 있다. 그러나 2차 대전 전에는 모든 나라들이 레닌과 막스가 있었던 나라 Soviet Union 을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1940년대에 한국에서도 소련의 위치는 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Stalin 이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간 사회주의를 원래 사회주의인 것 처럼 알고 있다.

백남준은 socialism 과 communism 에 대해 알고 있었고 café 에 앉아서 잘사는 사회를 꿈꾸는 상류층 지식인들 café Marxist 들을 사치스럽고 naïve  하다고 느꼈다. 정작 노동자들은 그런 것을 얘기할 틈이 없고, 백남준은 이 괴리를 보았다. 그가 센베르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화성법을 부수는 듯한 극단적 radical 시도 때문이었다. 센베르그는 가장 유명했지만 동시에 가장 판이 안 팔리고 연주가 안 되는 음악가였다. 음악의 틀안에서만 도전을 하는 기존의 음악가와는 달리 센베르그는 화성법의 틀을 부셨고 그 radical 한 시도가 백남준의 눈을 뜨게 했다. 피카소는 붓과 물감을 버리고 collage 라는 천재적인 idea 냈지만 여전히 canvas 라는 틀 안에서의 혁신이었다. 서독으로 유학가서 피아노치고 센베르그를 갈망하던 음악가 백남준은 어떻게 하면 category 와  boundary 를 해체할까를 궁리하게 된다.


Klavier Integral 1960, Nam June Paik
Etude for Pianoforte, 1960 
피아노 포테에 대한 연구를 한다고 해서 선생과 동료들이 갔더니 백남준은 피아노를 부수고 관객의 넥타이를 자르는 performance를 동시에 하였다. 피아노를 부셔서 사람들은 panic 상태에 있는데 가위로 교수 John Cage 의 넥타이를 자르고는 백남준은 나가 버렸다. 사람들이 멍하게 앉아 있는데 방의 전화벨이 울리고 비서가 ‘공연이 끝났다’는 백남준의 말을 전한다. 


John Cage 1912-1992                                   


     
Cage는 훗날 회고록에서 ‘ 사람들은 5층 건물의 강의실에 앉아 있었는데 설사 백남준이 거기서 뛰어 내렸다 해도 꿈쩍 안 할 만큼 충격에 빠져 있었다.’ 라고 했다. 1960년의 이 performance 이후 백남준은 인지도가 높아져 안무가인 Merce Cunningham, John Cage 등과 공동 작품 의뢰가 들어온다. 백남준의 작품은 항상 sensation 을 주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피아노는 치기 위해서 뿐 아니라 부수기 위해서도 존재하고, 타이는 매기 위해서 뿐 아니라 자르기 위한 것일수도 있다’ 라고 하였다. 스승 Cage 는 남준이 뭘하려는지를 이해하였고, 남준은 Cage 와 Beuys 에게 영향을 받고 이들과 평생 동지적 관계를 가진다.


John Cage, Prepared Piano 1946-48
                

 4’33’’  1952  
John Cage, Prepared Piano 공연장에 grand piano 가 들어온다. 뚜껑이 있고 줄 사이에 송곳, 나사를 끼워놓아서 악보대로 연주해도 이상한 소리가 난다. Carnegie Hall 에서 죤 케이지를 연주한다고 해서 갔더니 pianist 앞에 사람이  4분33초 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들어갔다. 열심히 연주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관객들은 이게 뭐야, 궁시렁 궁시렁, 재채기, 휴대폰 소리, 엄마 왜 아무것도 안해 등의 noise 소음을 만든다. 이 noise 가 바로 작품이다.

음악의 category 와 장르를 구분짓는 boundary 를 부수는 의도이다. 남준도 이와 비슷하게 피아노 부수는 공연을 8년쯤 후에 한다. 사람들은 남준의 공연을 음악이라고 할 수 없으며 단지 scandalous showmanship 을 보여준 것이라고 욕했다. 화성법을 부순 센베르그와 비슷한 전략이지만 남준은 센베르그보다도 한 발 더 나아가 음악의 틀의 boundary 자체를 넘어서는 시도를 했다. 케이지는 4분 33초 동안 pianist 가 control 할 수 없는 우발적인 chance 에 의해 생기는 소음을 음악 안으로 끌고 왔다. 남준은 센베르그에게서 충격을 받고 케이지를 보고 놀랐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그것이 음악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한편 보이스 역시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했다. 죽은 토끼에게 그림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둥 떠벌리는 일을 했으며 shaman 무당과 같은 역활을 하려고 했다. 자신이 전쟁에 참전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썰매에 태여지고 펠트 천에 싸여서 구조를 당하고 라드 fat 을 먹은 경험이 있다고 하면서 이것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을 한다. 하지만 나중에 전쟁에 참전한 적도 없음이 밝혀져서 거짓이 드러났다.

보이스의 공연에 가면 Hitler 의 군가를 틀어놓고 건드리고 싶지 않은 상처를 자꾸 건드려서 미움을 받았다. 당시의 동독, 서독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피해자 가해자 쌍방이 holocaust 의 짐으로 인해 충격이 너무 커서 터부시 하는 주제였음에도 그는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1917-20년 다다 운동 발생지 스위스 츄리히의 볼테르 까페에서 유고발이 이상한 시를 낭독하고 악기 없이 연주 하는 등 최초의 performance 가 시작되었고 또한 Bauhaus 예술학교의 수업에도 theater workshop 을 통한 의상과 무대 디자인의 performance 가 있었다. (Kandinsky 가 그 수업의 선생을 하기도 했다)  60년 대에 나타난 performance 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1920-30년 대의 performance 와 1960년 대의 performance 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20세기 미술에서 자주 쓰이는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최전선 군인, 총알받이라는 군사용어에서 따온 말로 최초의 시도로 인해 너무 새로워서 약간 이해하기 힘든 뉘앙스를 풍긴다. 2차 대전 이전을 historical avant-garde 라고 하고 전후를 neo avant-garde 라고 한다.

20-30년대 historical avant-garde 는 미술로 사회를 바꾸고 싶은 정치적 열망이 강했다. 칸딘스키를 위시해서 다다 및 바우하우스 운동은 민중은 근본적으로 무지하다고 보고 그들을 계몽 enlightenment 시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관객은 그들의 작품에 일단 놀라기는 했으나 이해 못하겠네 땡 하는 수동적 자세였으며 아방가르드의 미술이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은 전혀 없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관객을 낯설게 만들기 alienation 전략을 썼으나, 사람들은 얼떨떨해 하고 불편해 했지만, 뒤에 담긴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예술가들의 의도는 ‘브르조아 예술을 전복시키고 프롤레타리아 예술, 정신 차리시오’ 라는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작품을 보러오는 사람은 대부분 브르조아였고 프롤레타리아들은 다 공장에 있었다. Historical avant-garde 들이 꿈꿨던 예술은 퍽이나 naïve 했다고 할 수 있다.

양차 대전을 겪고난 60년대의 neo avant-garde 들의 회의감은 극도로 컸다. Historical avant-garde 들의 전략이 옳았다면 왜 전쟁은 터졌나? 백남준, 케이지, 보이스등은 이제는 다양한 새 전략이 필요함을 절감했고, 작가가 아닌 관람객 바로 당신을 행위예술의 주체로서 내세운다. 케이지의 작품에서 pianist 의 연주가 이니고 바로 당신이 소음이라는 음악을 연주하고 집에 간 것이다.

Fluxus Festival 에 가면 관객에게 참여하는 지침을 나누어 주며 관객은 따라 한다. 내가 participate 함으로서 작품을 만든다. 그렇다면 60년 대 이후의 관객은 2차 대전 전의 관객과 과연 다른 관객이 되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일단 보류해두자. 강의가 진행 됨에 따라 저절로 밝혀질 것이다. 어떻게 하면 관객을 참여하게 만들까 불편하게 할까 하고 궁리하다가 다양한 전략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간다. 관객들은 이것을 보고 욕을 실껏하거나 재미있어 하는 두 부류로 대개 나뉜다. 1964년에 백남준이 뉴욕에 왔을 때 앤디 워홀과 도날드 져드가 당시의 미술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Andy Warhol, Turquoise Marilyn 1964            


Donald Judd, Stack 1967

60년대에는 Pop Art, Land Art, Fluxus, Body Art 등의 운동이 있었으며, 60년대의 예술만 가지고도 2-3년을 공부할 수 있다. 백남준은 Pop Art 를 너무 naïve 하고 덜 비판적인 뭉툭한 예술 운동이라고 보았다. 이런 비판의 이유는 워홀을 보는 관객들에게 문제가 있었다. Pop Art 는 Abstractive Expressionism 의  어려운 추상화에 반기를 들고 시작되었다. 워홀은 High art 와 low art 를 나누는 추상 표현주의를 뒤집기 위해 마릴린, 코카콜라, 캠벨숩의 image 를 들고 왔지만, 사람들은 박물관에 가서 ‘재미있다’ 의 수준에서 머무르거나, 아니면 ‘내가 모마에 와서 왜 이런 것을 봐’ 하고 싫어했다.

워홀의 진정한 의도는 high art 의 elite 적 태도를 공격하고, 일반 대중이 매일의 상품, celebrity 등을 소비하는 태도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double edge 의 message 는 둘 다 실패했으며, 워홀의 작품 역시 고가 commodity 가 되었고, 대중의 빠른 소비를 부추기는 새로운 image 가 자꾸 만들어져 나왔다. 여기에 반기를 드는 Minimalism 이 등장했고, 그들은 pop art 의 순진한 의도를 비판했다.

미니멀리즘은 공장에서 주문해서 벽에다 걸어 놓는다. 예술가와 작품은 엄마와 자식 같다고 하는데 minimalist 들은 그 연결 고리를 끊는다.  이것은 변기를 가져온 뒤샹과 비슷해서 뒤샹피엔 Duchampian  하다고 말한다. 미니멀리스트들은 작가와 작품의 관계, 고리를 끊어내고 ‘예술 작품이 뭘해? 예술 작품은 아무 것도 아니예요. 꿈꿔?’ 하고 반문한다. 예술 작품에 덕지덕지 붙은 명찰이 지겨워서 떼어내자는 의도이다. 예술 작품은 ‘nothing’—그게 답이다.  작품을 모마에 가서 만났으면 그것으로 땡이다  ‘오늘 1월 15일 낮 12시 모마’ 그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러나 minimalist 의 이런 태도 역시 비판을 받는다. 밖에서는 전쟁이 나고 여성들은 무시를 당하는 현실인데 이런 meaningless 한 작품을 자꾸 내놓으면 되니?  Post Minimalist 들은 ‘비록 그림 하나가 세상을 바꾸지 못해도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얘기해야 한다’ 의 입장을 취했다. Feminism 이 여기에 추진력을 제공하고 루이스 부르조와는 여성으로 느끼는 이 불편한 감정을 작품으로 내놓거나 performance 를 하였다.


Claes Oldenberg, The Store 1961
클레 올덴버그는 뉴욕의 downtown 에 the store 라는 가게를 차렸다. 60년대에 예술 작품에 쫓아 다니는 중요한 연결 고리 중의 하나가 institution 이었다. 올덴버그는 Institution 이 예술작품들을 조정하는데 반기를 들어, 박물관에 작품을 전시를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가게를 차려서 판매했다. 운동화, 여자 원피스, 햄버거를 종이쪽으로 만들고 굳으면 칠을 했다. 입을 수도, 신을 수도 없는데 비싼 가격이므로 사람들은 ‘아하, 이게 작품이구나’ 라고 생각한다. Money, institution, artist 가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임을 twist 시킨 발상이다. 이런 혼동과 실험의 시기, 1964년에 백남준이 뉴욕의 예술 세계에 뛰어 들었다.

뒤샹은 이미 1917년에 변기를 제출함으로서 예술 작품에 붙어다니는 예술가라는 명찰을 떼려 했고, 박물관이라는 명찰을 떼려 했다. 뒤샹은 work of art 는 작가나 박물관을 떼어 놓으면 아무 것도 아니며, 작가나 박물관이 work of art 를 구성하는 요소임을 비판했다.



Allan Kaprow, Household, 1964
알란 카프로우가 happening 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관객이 오면 자동차 위의 딸기쨈을 핱아 먹으라고 하였다. 이 happening 은 올덴버그의 the store 와 맥락을 같이 한다. 모마가 작품을 못 사게 Institution 과의 고리를 끊으려는 시도이다. 직접 happening 이 벌어지는 공간에 와서 핱아야지만 작품을 경험한다. 60-70년대에  박물관과의 고리를 끊으려는 움직임이 만연했기에 이런 행위예술이 꽃필 수 있었다.

또 하나는 문제점은 institution 이 남성 중심의 기관이라는 점이다. 모마에서 여성의 작품을 보여주는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1980년 까지 여성 artist 의 solo show 는 한 번도 없다가 루이스 브루조아가 회고전을 연 최초의 여성 화가였다.  모마에 전시하는 화가는 모마가 support 하는 ideology 에 같이 동참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행위예술 작가들은 Institution 은 중립적 neutral 이지 않으며, 예술도 중립적일 수 없으며, 나라는 존재도 중립적일 수 없다고 한다.

백남준은 미디아를 움직이는 5개 원리가 sex, violence 폭력, greed 욕심, vanity 허영심, deception 속임수 라고 했다. 백남준을 잘 이해를 못하는 사람은 ‘백남준이 TV 를 사랑하는 것 아니었어?’ 라고 말한다. 백남준은 독을 독으로 다스린다는 pastiche 전략으로 TV 를 사용했다. TV가 너무 재미 있어서가 아니라 TV 의 문제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관객이 TV 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를 바랬다.

백남준이 TV 에 대해 느끼던 것은 60년대 지성인들이 느끼던 것과 같았다. 유럽의 지성인들은 겉으로는 미국이 symbol of  freedom, symbol of democracy 라고 내세우고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같이 똑같이 생각하는데 놀랐고 그런 미국이 totalitarian 전제국가처럼 보였다. 갈등이 지속되어서 자유롭게 discussion 이 되는 사회가 민주주의인데,  미국의 민주주의 기반에는 갈등과 토론 대신에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열광하는 대중 문화, Hollywood 의 celebrity 등이 굳건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Nam June Paik, TV Cello with Charlotte Moorman 1971

사람들은 TV 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truth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fact 는 될 수 있어도 truth 일 수는 없다.  어느날 homeless 가 얼어 죽었다. Fact 이다. 그 fact 뒤에는 파헤쳐져야 하는 미국의 부조리, 빈부의 차이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이 Truth 이다. 그러나 truth 는 무시하고 fact 가 100% 라고 믿는 사회가 미국이다.

사람들은 똑같은 이유로 백남준을 좋아하고 또한 싫어했다. 반응은 ‘장난해?’ 아니면 ‘재밌네’ 였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백남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사람들이 TV 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랐다. TV 가 백남준의 gallery 에 왔을 때는 새로운 모습이다. ‘나는 TV 를 가지고 cello 를 만들었는데 여러분은 TV 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 입니까?’ 그는 묻고 있다. 행위예술이므로 여러분이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가만히 있다.

백남준은 TV 매체에 대한 두려움, 공포를 건드림과 동시에 음악의 경계를 건드렸다. 음악인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백남준의 의도는 경계가 허물어진 새로운 괴물 형태의 hybrid 예술을 만들어 냄이 아니고 각각의 category 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품 앞에 1초도 서 있기 싫어하는, 노력을 전혀 안하는 관객들이 대부분이며 백남준을 이해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 놀이하는 사람이구나.  재밌게 작품하는 사람이구나. 보고 ‘땡’

Charlotte Moorman and Nam Jun Baik performing Yoko Ono’s Cut Piece 1988 


 

Charlotte Moorman & Baik , Performing Cage 26’1’, 1499”  for a String Player 1965        

100년 이상의 예술의 역사를 담고 있는 작품을 단숨에 이해하려는 것은 무리이다.  여러분이 작품이 담고 있는 전 시대 사조와의 dialogue, 당대의 context 와 여러 겹 깔린 layer를 읽을 줄 알게 되면, 그 때에는 비로소 작가에 대한 taste 가 logical 해질 것이다. 그래서 작품과 작가가 싫은 이유, 좋은 이유를 조목조목 이야기 할 수있게 된다.

백남준은 1960년대 Fluxus 주요 맴버였고 2차 대전 이후의 post avant-garde 인 백남준은 1920년대의 historical avant-garde 의 다다 운동과는 다른 차원의 행위 예술을 내 놓았다. 60년대 Conceptualism (개념주의)에서 백남준의 위치 역시 중요하다. 그는 명목상 TV 를 들고 들어왔고 비록 요즘 작가들이 그와 같은 생각은 아니지만 new media 의 설치 작품의 시조로서 자리 매김을 한다.


Nam June Paik, TV Buddha 1978-9

백남준은 high art, low art 의 구분을 없애려는  앤디 워홀의 시도를 naïve 하다고 보았다. Pop Art 가 실제로 대중을 각성시키는데 실패했고, 고급 예술을 조롱한다는 포장을 쓰고 워홀 자신의 작품을 고가의 commodity 로 올렸다. 그의 캠프벨 숩 그림은 실제 캠벨보다 어마어마한 고가가 되었다.

백남준은 TV 를 부수고 TV 회로를 바꾸고 괴기한 소리와 영상을 싣는 설치 작품을 보여줌으로서 TV 에 익숙한 대중을 낯설게 하였다. 그는 대중이 무방비 상태에서 소름 끼치도록 TV 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gallery 에서 만나는 TV 가 집에서 보는 TV 와 다르게 보이도록 샬롯 무어맨에게 TV 브라를 만들어 주고, 그녀가 음이 안나는TV 첼로를 연주하게 한다.

비록 백남준의 의도가 ‘TV 를 경계하세요’ 하는 것이었지만 대중이 받아들이는 것을 작가가 콘트롤하기는 힘들다. 가끔씩 New York Times 의 art review 를 읽으면 ‘꿈보다 해몽이 더 좋네, 진짜로 작가가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작품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평론이 더 어렵다.

TV Buddha는 부처가 TV 보고 있고, 그 앞을 지나면 실시간으로 여러분이 화면에 나온다.  이 작품은 백남준의 의도와 달리 우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TV box 여러 개를 공중에 매달아 물고기처럼 떠 다니게 하려고 했으나 당시에 이름없고 돈없는 작가로서 비싼 box 를 다 구할 수가 없었다. 전시 전날까지도 해결되지 않자 투자 목적으로 싸게 사둔 불상으로 공간을 메꾸려다가 우연히 TV 앞에 부처를 놓게 되어서 만들어진 행위예술이다. 독일의 퀠른 공연에서는 부처 대신 백남준이 TV 앞에 앉았다. 사람들은 딱보고 ‘ 아, 부처, 명상, TV 는 서구문명의 심볼, 동양과 서양의 대치, 부처마저도 TV 없으면 명상이 안되는 현대 사회’ 등등을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아시안 작가는 정체성 identity 에 dilemma 가 있다. 60년대는 선불교 Zen Buddhism 의 붐이 전체적으로 퍼지는 trend 였다. 선불교에 매료된  Beat Generation 은 백남준의 작품을 이런 context 에서 읽으려고 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낯 뜨거운 Reclining Buddha 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Reclining Buddha 1994
Reclining nude 는 서양 미술에서 역사가 깊다. 마네의 올림피아, 피카소는 아비뇽의 나부를 세워 그렸고 마티스도 Reclining Nude 를 그렸다. 서양 미술사에서 여자 누드 icon 은 신의 알몸만 허용이 되던 시대에는 여신 비너스에게서 시작이 되었고, 나중에는 반은 창녀, 반은 Ingres 의 Odalisque 에서 보여지는 터키(외국) 여성의 알몸이 주종을 이룬다. 누드를 소비하는 층은 부르조아 남성이었다. 백남준의 눈에는 reclining nude 가 부처에게서 발견이 된다. Gaze(응시) 의 객체는 항상 여성이고 gaze 의 주체는 남성임을 twist 시켜 서양 미술사에 전무후무한 드러누운  남성 nude 인 부처를 가져왔다.  또한 불교와 Orient 에 대한 막연한 fantasy 를 twist 시켰다.

백남준은 TV 를 무서운 매체라고 생각했고, 60년대의 지성인들도 염려하고 있었다. 2차 대전 전에는 celebrity 하면 교수, 작곡가 등을 연상했으나, 전후에는 Hollywood 의 마릴린 몬로, 엘비스 프레슬리등이 celebrity 가 되었다. 미국의 대중은 순간적인 entertainment 인 TV 를 통해 전혀 자극도 받지 않고 거르지도 않고 똑같이 생각하고 받아 들이는 totalitarian 사회로 향해가고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란 서로가 tension 의 관계에서 두려움 없이 논의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백남준은 이 매체를 낯설게 하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를 한다.  


Nam June Paik, Good Morning, Mr. Orwell 1984



한 곳에서 방영하면 전 세계에 퍼지는 위성 TV 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다원화 system 으로 뉴욕과 파리, 독일, 서울을 동시에 연결하여 1984년 New Year’s Day 에 백남준의 coordination 으로 죤케이지, 보이스, 커닝햄 등이 참여한 Good Morning, Mr. Orwell 이 위성중계 되었다. 죠지 오웰은 1948년에 쓴 그의 책 1984년에서 1984년이 되면 탐욕스런 지배 계층인 Big Brothers 가 나타나서 노동자를 착취하고, TV 를 통해 온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도 부정적인 세계관을 예언하였다. 정말 그런 세상이 되었지만 백남준은 그의 satellite installation 작품Good Morning, Mr. Orwell 에서 오웰이 예언한 부정적인 지배관이 아니라, 긍정적인 utopian view 를 보여 주었다. 죠셉 보이스의 어렵고 난해한 예술을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돈내고 박물관에 가지 않아도, TV 를 통해 일반 대중이 차등없이 쉽게 접하게 된다.

백남준은 타블로이드 잡지등을 보고 더 이상 박물관에 가지 않는 대중을 인식하고 매체의 잠재성을 이용해서 작가가 전달 방식을 바꾸어, TV 매체를 사용해서 대중이 안방에서 전위예술을 접하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대중이 보기 싫으면 채널을 바꾼다는 점이다. 이런 이상한 공연 보느니 경제 뉴스를 본다. 20년 후 지금 우리가 TV 에서 전위 예술을 보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백남준은 매체를 바꾸어서 예술 방식을 바꾸려 했지만 그 역시 utopia 적 생각이었다. 그가 놓친 문제는 매체와 돈의 관계였다. 매체는 돈이 안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는다.


John Cage in New York is producing music from simple natural objects.


Joseph Beuys carrying out his action in the Centre Pompidou, Paris


Merce Cunningham’s Minimalistic Dance in S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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