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이후의 미국 12/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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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4,805회 작성일 10-01-28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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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의 근대 미술 13th hour: U.S. after WW2
Abstract Expressionism 추상표현주의
Minimalism 미니멀리즘
Pop Art 팝아트
Post Minimalism 포스트 미니멀리즘
Conceptualism 개념주의
Earth Art /Land Art 대지예술
Nouveau Realism 누보 리얼리즘 신사실주의
Decollage 콜라쥬의 반대 개념, 붙여져 있는 종이를 찢어냄
20세기 전반에는 유럽이 세계 질서를 주도하다가 후반기에는 미국이 주도하게 된다. 미술은 국가의 힘과 부와 연관이 되므로 20세기 후반에는 미국이 주류 미술의 무대가 된다. 2차 대전 직후 1945년을 기점으로 하여 피카소의 cubism, 뒤샹의 dadaism, Kandinsky 등이 이끄는 historical avant-garde 가 막을 내리고, Jackson Pollock, Andy Warhol 등의 미국 출신 post avant-garde 들이 20세기 현대 미술의 주역이 된다.
Jackson Pollock 1912-1956, Number 30, 1950
Abstract Expressionism 이 1950년 대를 휩쓴다. Canvas 를 바닥에 놓고 그 위에서 물감을 뿌리는 action painting 의 완전 추상이다. 1차 대전 전에는 추상의 움직임이 강하다가, 전후에 utopia 의 꿈이 허망했음을 깨닫고 다시 figuration 으로 돌아오고 사람의 초상이나 실제로 사는 사람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리고 2차 대전 후에 다시 추상의 움직임으로 돌아온다.
다리파, 청기사파, cubism 의 historical avant-garde 의 추상과 2차 대전 후의 neo avant-garde 의 추상은 그 성격이 서로 틀리다. 다리파와 청기사파는 utopia 적 idea 를 품고 세계 질서를 바꾸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초현실주의를 위시하여 대부분 좌파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잭슨 폴락의 추상은 그냥 그림일 뿐 더 나은 세계로 가자는 열망 같은 것은 없었다.
2차 대전후 1945년 이후 세계는 cold war politics 아래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 체재로 들어가고, 1950년에 Korean War, 1959년에 Vietnam War 가 일어난다. 서양 역사는 1차, 2차 대전이 미술사를 나누는 중심 기준이 되고있다. 미술사는 서양 중심의 역사쓰기로서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죽은 사람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미술사를 나누는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1950-60년에 미국은 풍요를 누리고 Marshall Plan 등으로 유럽은 미국의 원조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유럽의 사람들은 ration 배급을 받는데 미국의 문화, 예술도 구호 물자와 함께 같이 들어간다. 미국을 휩쓸던 mass culture 가 전 세계로 퍼지고 미국의 입김이 세어지면서, 미국은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추상표현주의가 엄청난 유행을 불러오고 그토록 힘이 있었는가? 그 막강한 힘의 배후에는 Jackson Pollock을 support 하는 CIA 가 있었다. CIA는 전세계로, 미국 각지로 순회 미술전을 다니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쓰면서 잭슨 폴락의 미술을 promotion 했다. 그 이유는 이런 추상 미술이 democracy 의 이상을 잘 보여주며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기에 이렇게 자유로운 예술이 가능함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폴락의 그림을 보면 ‘나도 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우선 든다. 하지만 나도 할 수 있는데 난 안 했거나 아예 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첫째로 폴락은 canvas 와 이젤을 던져버리는 canvas 혁명, 이젤 혁명을 가져왔다. 아무도 의심 않던 몇 백년 전통을 한Q 에 던져 버렸다. 그의 그림은 캔버스와 붓이 닿지 않고 물감을 흘려서 한 drip painting 인데도 붓을 사용한 Kandinsky 처럼 완벽한 추상이다. 아무리 폴락이 물감의 떨어짐을 열심히 계산하고 그렸다 해도 물감이 그곳에 우연히 떨어진 chance 의 개념이 있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은 수 많은 습작을 거쳐서 연습, 연습하고 계산대로 화폭에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폴락은 그런 과정이 아예 없었다. 2차 대전 후의 Neo-Dada 에게는 chance 의 요소가 중요했다.
둘째, 전통적으로 작가는 작품의 어머니, 창조의 신적인 존재로 여겨져 왔으나, 폴락의 작품은 ‘나도 할 수 있겠네’의 message 를 우리에게 준다. 마치 뒤샹의 변기가 그랬듯이, 작가를 기술적, 지적, 영적으로 열등한 image 로 한 순간에 부셔 놓았다. 뒤샹은 ‘예술가란 이게 예술 작품이라고 index finger 로 가르키는 사람이다. 오히려 institution 이 더 중요하다.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예술이 된다’ 라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폴락도 캔버스를 바닥에 내려 놓음으로서 모든 전통을 ‘땡’ 끝냄과 동시에 모든 지위도 던져 버렸다. 미술사는 신문지를 붙인 피카소와 이젤을 던진 폴락을 회화의 양대 천재로 꼽는다.
Peggy Guggenheim 1898-1979, American Art Collector
천재도 timing 이 중요하다. 피카소가 종이를 붙였을 때, 그가 원래 그림을 잘 그리는 작가로 이미 유명했으므로 그의 종이 오려 붙임에 대단한 의미를 두었지, 이름도 없는 무명 작가가 벽지를 오려 붙였다고 해서 누구 하나 관심을 두었겠는가? 폴락도 timing 이 절묘했다. 미국이 냉전 체체라는 독특한 입장에 있었고, 또한 폴락을 알아보고 support 를 하는 Peggy Guggenheim 이라는 중요한 사람이 있었다. 폐기는 유럽에서 내노라 하는 작가의 collection 가지고 뉴욕에서 The Art of the Century Gallery 를 오픈하여 킨딘스키, 피카소, 막스 에른스트 등의 전시를 기획하는 동시에, 새로운 젊은 미국작가를 발굴하려고 애를 썼다. Art collector 는 안목과 선견 지명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작품을 보고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필수인데, 미술교육을 정식으로 받지않은 폐기는 뒤샹의 조언을 많이 받았다.
폴락의 action painting 이 50년 대를 풍미하고 있었고 많은 작가들이 충격을 받고 나도 해보자 하면서 시도를 하지만 물감이 떡지고 폴락 같은 그림이 안 나온다. 폴락은 혼자서 무수히 training 을 한 결과 이런 추상이 나올 수 있었고, 붓을 던지고 캔버스를 바닥에 눕히는 과감한 혁명을 그림의 방식에 가져올 수 있었다.
폴락이 가져온 또 하나의 혁명은 canvas 의 광대한 크기에 있다. 벽 한면을 채우는 폴락의 scale 그림은 서양 전통 미술에 도전장을 내미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17, 18세기에는 그림에 등급이 있었다. Salon 전에 출품시 전쟁 및 Napoleon 등의 역사 영웅들을 그리는 역사화는 제일 중요하게 취급되어 가장 큰 규격으로 그렸고, 정물, 초상은 덜 중요하므로 가장 작은 규격으로 그려야 했다. 이렇듯 커다란 canvas 에는 역사적인 맥락이 담겨 있었는데 폴락은 아무 것도 없는 추상을 역사화의 scale 로 그려냄으로서 전통을 뒤집어 엎었다.
훌륭한 작가들의 그림은 전 시대의 예술 사조와 dialogue 를 나누면서, 당대 문화와 사회적 맥락을 집고 넘어가는 context 와 의미를 깔고 있는 layer 가 있어야 한다. 훌륭한 작가들은 누구와 dialogue 를 나눌 것인지, 어디에다 도전장을 내밀 것인지를 잘 찾아낸다.
Jackson Pollock, Blue Poles: Number II
폴락의 그림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impact 이 컸다. 사람들은 폴락의 큰 그림 앞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의 효과가 만족스럽고, 굳이 그림을 읽지 않아도 좋은 느낌을 받았다.
Jackson Pollock, Life Magazine, 1949
사람들은 느낌의 수준에서 폴락의 추상을 받아들이고 그의 그림을 굉장히 좋아했으며 Life Magazine 에도 실렸다. 예술 작가가 대중 잡지에 홍보가 되기는 폴락이 처음으로 다분히 미국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Vogue 잡지에도 보그지가 선정한 young artist 가 협찬을 받은 예쁜 옷을 입고 사진과 기사가 실린다. High art 가 mass 의 level 로 내려오는 계기를 마련한 잭슨 폴락은 미국 체재하에서 자유로운 작품이 가능하다는 인상을 풍기며 그림도 다분히 democratic 해 보인다. 그의 작품은 또한 당대 최고의 art critic 인 Clement Greenberg 에게 제일 훌륭한 예술이라는 비평을 듣는다.
세잔이 20세기 미술에 추상의 문을 열었고, 피카소, 반고호도 다 추상을 시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figuration 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추상으로 가는 형태였다. 몬드리안(1872-1944) 의 나무도 처음에는 형태를 가지다가 추상으로 가는 progress 를 밟았으나 폴락은 그것이 아니다. Start 부터가 추상이다. 폴락은 0 gram 에서 땅하고 추상을 하였기에 천재이고 그래서 더욱 더 힘과 탄력을 받는 입장에 선다.
Piet Mondrian, Evening Red Tree 1908
Flowering Apple Tree 1912
폴락보다 뒤에 오는 작가들은 완벽한 추상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20세기 전반의 historical avant-garde 는 뭉쳐서 group 만들고 manifesto 선언문 내고 예술운동을 시작하였으나, 폴락은 같이 뭘하지 않았다. 온몸을 던져서 자기 표현 gestural expression을 한 폴락에게 항상 따라 다녔던 것은 gossip 이다. 알콜 중독자. 페기 구겐하임의 파티에서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봤다, 광기, 우울증 등등. 광기 예술가에게 붙어 다니는 수많은 scandal 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Andy Warhol 에게도 무수한 scandal 이 따라 다녔으며 이런 현상은 post avant-garde 작가들에게 많이 나타난다.
당연히 만족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잭슨 폴락을 둘러싼 수 많은 끈들이- CIA, Peggy Guggenheim, 알콜중독- 다 만들어낸 myth 라고 했다. 주례사 비평이란 것이 있다. 훌륭한 사람이 자기와 친분이 있는 artist 에게 글을 잘 써주는 것, 그래서 catalogue 의 서문에 싣는 것. 폴락에게 덧 쓰워지는 이러한 평을 싫어했고 혹은 질투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잭슨 폴락에게 도전장을 내는 작가가 또 나온다.
Jasper Johns (1930-), Target 1961
Neo- Dadaist 인 Jasper Johns 에게서 뒤샹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다. 죤스가 폴락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표면이 거칠거칠하고 덕지덕지한 밀납으로 칠을 해서 폴락의 abstract expressionism 을 흉내내고, 밑에는 low and mass culture 의 상징인 신문지를 발라 꼴라쥬를 응용하면서 elite and high art 인 추상표현주의를 비꼬았다. 관객에게 이것이 '과녁인지? 과녁 그림인지?' 를 묻고 있다. 대답은 애매모호해진다.
Jasper Johns, Flag, 1954-55
깃발과 과녁은 쉽게 그려서 밖에 가지고 나가면 everyday 의 object 가 된다. 경우에 따라 painting 도 되고 object 도 될 수가 있다. 경계와 장르가 애매모호해지는 시점이다. 폴락은 그의 추상 표현주의의 그림에서 representation 이 전혀 없는, 그림 밖의 것을 절대 가져오지 않는 완벽한 추상을 추구 하면서 representation 과 abstract 경계를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를 기본으로 깔고 있었다. 그러나 죤스는 예술이란 결고 그렇게 이것 아니면 저것의 경계를 나눌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림이 될 수도 물건이 될 수도 있는 중이적인 의미가 있다. Painting 과 object 는 미술세계에서 전혀 다른 두 쟝르로 취급되어 왔으며, 뒤샹은 오브제를 들고 들어왔고, 그 이후에 죤스는 기호체계의 애매함을 들고 들어와 경계를 허물고 뒤샹보다 더 재미있는 도전을 하였다.
신문지가 있으니까 그럼 꼴라쥬인가? 결코 꼴라쥬가 아닌가? 두 개 다 정답이 되는 상황이다. 죤스는 폴락의 재현이니 추상이니 하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부수려고 하였다. 27-8살의 어린 사람이 나타나서 ‘그런 것은 정답이 없다’ 라고 딱 이야기 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고 보았다.
Robert Rauschenberg 1925-2008, Bed 1955
캔버스 위에 자신의 이불과 배게를 붙이고 폴락처럼 물감을 뿌렸다. 나도 상당한 action 을 통해 했는데 폴락같은 추상은 결코 아니다. Object 를 캔버스 안에 가지고 와서 경계를 흐뜨리며 Duchampian 뒤샹피엔 하다. Johns 와 더불어 Neo –Dadaist 인 라우션버그도 재현, 추상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불가능함을 보이며 폴락을 parody 하고 있다. 폴락의 elite 적 high art 는 지성인들이나 이해를 한다. 라우션버그는 대중적인 low art 를 표방하며 everyday life 의 배게를 가져왔고, Andy Warhol 은 아예 Campbell Soup 깡통이나 Vogue Magazine 을 가지고 작업을 하였다.
Andy Warhol 1928-1987 Campbell Soup Cans 1962
Andy Warhol 이 이 작품을 발표했을 때 비평가보다 오히려 더욱 반감을 표현한 쪽은 대중이었다. 대중은 비록 이해가 안되더라도 Jackson Pollock 이 더 좋다. 박물관 안에는 비록 내가 이해를 못해도 난해한 작품이 있어야 그 곳에 갈 맛이 난다.
Abstract Expressionism 이후의 모든 미술은 추상표현주의의 myth 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로 포장된 미국의 위선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며, 또 하나는 high art 의 벽을 무너뜨리고 low art 로 가려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미국문화가 실제로 대표하는 것은 Jackson Pollock 이 아니고 대중적으로 찍어서 마구 나오는 consumer culture 가 미국의 대표 문화라고 비판하였고, mass media, yellow paper 에 나오는 celebrity 가 오히려 더 적절히 미국을 표현한다고 했다. 신이 없어진 그 자리에 mass media 를 통해 한 사람이 우상 idol 이 된다. 이것이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이지 결코 잭슨 폴락의 추상표현주의가 아니라고 하였다.
Andy Warhol, Car Crash Series
Red Race Riot 1963
Warhol 은 high art 를 조롱 parody 했지만, 동시에 자국의 문화에 대한 비판을 심도깊게 하였다. Car culture 가 미국을 대표하게 되자 극심하게 늘어나는 차 사고에 대한 작품을 하기도 했다. 한편 racial discrimination 을 다룬 Red Race Riot에서 미국 남부의 인종 차별과 segregation 의 사회적 issue 를 건드렸다. African American 이 알라바마에서 시위를 벌이자 경찰이 개를 풀어서 사람을 물게한 사건이 있었다. 와홀은 자국의 현실이 이러한데 Jackson Pollock 의 그림을 통해 민주주의를 promotion 하는 위선적인 나라라고 꼬집었다. Pop Art 는 겉으로는 재미있어 보이지만, 안으로는 미국을 신랄히 비판하는 운동이다.
Roy Lichtenstein, The Drowning Girl 1963
만화책 image 를 똑같이 그대로 깨끗하게 그렸다. 사람들은 값싼 로맨스를 끊임없이 소비하기 좋아한다. 자신의 현실을 직시했을 때 겁이 나므로 soap opera, TV, 만화책에 마취된다. 지금은 슬퍼도 다 happy ending 이다. 대중이 대중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비판없이 받아들임으로서 오히려 만화 속의 아줌마처럼 거기에 빠져들고 대중 문화에게 먹힌다. 슬프게 눈물 흘리면서 자신의 stress 를 대중 문화 속에 들어가 잊으려고 한다. 수많은 유럽의 지성인들은 이 점을 구구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미국은 힛틀러보다 더 무서운 전체주의 국가이다. 사람들이 민주주의임을 한치도 의심 안 하게 하면서 달콤하게 한가지 생각만하게 만든다.
Yoko Ono 1933-, Cut Piece, 1964
60년대의 Vietnam War 에 반대하는 concept 이다. 50년대의 Jackson Pollock 이 말하는 아름다운 미국은 더 이상 없다. 60 년대에 막 도입된 Fluxus 운동에서 happening 이 나타난다. 계산, 계획하지 않고 대본이 없으며 즉흥적인 chance 를 들고 들어오며, 관객이 참여 안 하면 성립되지 않는다. ‘아저씨는 관객인데 무대위에 올라와서 내 옷을 잘라요’ 관객이 이제 creator 역활까지 한다.
Nam Jun Paik, Charlotte Moorman, TV Cello, 1971
Joseph Beuys, How to Explain Pictures to a Dead Hare, 1965
Fluxus 운동에 가담한 백남준(1932-2006 ) 은 TV 를 예술의 영역으로 올렸으며 media art 를 시작하고 교두보 역활을 하였다. 죠셉 보이스는 자신의 얼굴에 금박을 칠하고 죽은 토끼에게 박물관의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보이스 역시 Fluxus 작가에게 관심이 많았으며, Fluxus 는 라틴어로서 flow 흐름이란 뜻으로 international art movement 이며 manifesto 를 발표하고 Fluxus Festival 을 개최했다. Fluxus 는 Bourgeois 예술인 Abstract Expressionism 과 상업화 예술인 Pop Art 를 타파하려는 좌파적 성격으로 Non-Art, Anti- Art 를 표방하였다. 미국내의 유명한 모든 예술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Fluxus Movement 는 독일인 작가 보이스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독일은 2차 대전후 국가의 정체성에 심한 혼란이 왔다. 독일은 무엇으로 정의내려 지는가? Holocaust? Nazi? 어디에서도 답을 찾을 수 없는 identical crisis 를 겪고 있었다. 대다수 독일 작가들은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했고 Nazi 의 역사를 들춰내 공공연히 얘기해야지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이스가 자신의 happening 공연에서 나치 군가를 틀면, 경찰이 압수를 한다. 그들의 대다수 작품이 압수대상 confiscation 이며 검열에 censorship 걸린다. Fluxus 는 international movement 인데 보이스는 독일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므로 Fluxus 작가들은 그것을 싫어했다.
Minimalism
Donald Judd, Untitled 1965
Dia Beacon Museum 에 가면 Minimalism 의 전반적인 작품을 볼 수가 있다. 알루미늄 박스를 공장에서 order 해서 그냥 붙이고 제목에 untitled 무제 라고 붙어 있다. 사람들은 제목을 보고 작품에 대한 story 를 만들어 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제목이 무제이면 ‘이게 뭘까’ 하고 생각한다. Minimalism 의 목적은 작품 밖과의 연관을 끊는 것이다. 그래서 Judd 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고 공장에서 주문 생산함으로서 예술가의 지위를 강등 시키려는 뒤샹피엔적인 시도를 했다. 미국의 상업문화 Pop Art 와 격동적이고 표현적인 abstract expressionism 을 다 벗어나서 narrative 하나도 없는 minimal (군더더기를 없애는 최소치) 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Minimalism 은 Fluxus 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회의를 가진다. Pop Art 도 Fluxus 도 마취제 역활을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벗어나서, 정치적 색깔도 배제시키고 중립적 neutral 이고 싶다.
이후에 나오는 운동은 Post Minimalism 으로 minimalism 에 반기를 들고 feminist 작가들과 연관이 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얘기를 해야 한다. 비록 작품 하나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사람들이 몰라라 해도, 그래도 우리는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또한 70-80년 대는 예술의 다변화가 되어 제 3세계의 작가들이 주목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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