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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이후의 프랑스와 독일(2) 12/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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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5,727회 작성일 10-01-28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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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의 근대 미술 11th  &12th  hour: France and Germany after WW2 (2)

Nouveau Realism: 신사실주의. 추상에 대한 반향으로 미국의 pop art 와 비슷한 운동이 유럽에서 일어나다. 화가인 이브 클라인과 피에르 레스타니는 1960년에 선언문을 내고, 주로 Installation 과 performance 를 위주로 한다.

Decollage : 데꼴라쥬.
꼴라쥬의 반대 개념, 붙어있는 종이를 찢어 냄


2차 대전 후의 프랑스, 독일의 상황

2차 대전 이후의 유럽의 예술 운동은 paradigm 의 변화를 가져왔다. 하나의 paradigm (전형적인 패턴) 이 장악하다가 역사적 사건에 의해서 새 paradigm 이 나타나는 것을 paradigm shift 라고 한다. 20세기 예술에 있어 큰 사건은 abstract expressionism / abstract art 라고 불리는 추상이 대두한 것이다. 1차 대전 직전의 추상은 utopia 적 이상향을 추구했으며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던 것을 흔들어서 다 함께 좀더 나은 사회로 끌고 가려는  예술가들의 열망이 강했고 피카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다 함께 노력했음에도 양차 대전이 발발했고 1차 대전 후에 추상에 대한 반감으로 figuration 이 돌아오고, 예술 밖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으며, 예술가들은 자신이 주류라고 믿었으나 엄밀히 말하면 outsider 였다. 그들의 꿈이 허황되었음이 양차대전을 통하여 드러났다.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팔자좋게 앉아서 그림이나 그릴 수는 없었다.  

20세기 예술의 핵심의 두가지는 cubismdada 이다. cubism 은 추상으로의 전환 paradigm shift 를 가져왔고, dada 는 추상이 해결 못 하는 생활 속의 예술을 가져왔고, 뒤샹은 예술 정의 자체에 넌덜머리를 내는  anti-art 운동을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현실을 넘어서는 움직임으로 초현실주의 운동과 이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공산당 작가들의 활동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Bauhaus 운동이 일어나 생활 속의 예술, 공예, 디자인, 건축에 중점을 두었고, 찻잔, 의자, tea pot 등을 통해 추상을 생활 속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바우하우스 예술학교는 힛틀러에 의해 페쇄되기 전에도 정치적 압력을 받아 바우하우스, 데소, 베를린 등으로 학교를 옮겨 다녔다. 독일의 예술가들은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어떻게 사람들이 Hitler 를 뽑아줄 수가 있는가 하고 경악하였다. 경제 발달의 slogan 을 내민 힛틀러의 그런 말을 민중이 고스란히 믿는다는 것이 독일의 예술가 지성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1차 대전 정확히 20년 후 1939년에 2차 대전이 일어난다. 20살 때 1차 대전을 겪은 사람이 40살 때 2차 대전을 또 겪는다. 1차 대전을 겪고 처참해서 다시는 전쟁이 안 일어나기를 바랬다. 2차 대전이 보여준 것은 1차 대전과는 급이 다른 원폭이었고, 20년 사이에 기계문명, 무기발달은 놀라웠다. 유럽은 1차 대전보다 2차 대전후에 훨씬 황폐해진다. 지성인들은 양차 대전 치루고 나니 사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1945년에 2차 대전이 끝나고 UN 에 의해 mixed community 였던 Palestine 지역에 Israel 이 형성되고, Korea 역시 남북으로 갈린다.

2차 대전은 holocaust 생존자들에게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소름 끼치는 trauma 를 안겨 주었고, 그들은 대거 미국으로 망명한다. 2차 대전 직후의 미국의 분위기는 소련 대 미국, 공산주의 대 민주주의 구도로 들어간다. 미국의 지성 체계는 유럽에서 대거 망명한 Jewish intellectual 들이 뉴욕에 정착하여 그 유명한 New York Intellectual 학파를 시작한다.

New York Intellectuals 들이 주야장장 지금까지도 글쓰고 연구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holocaust 가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Jewish 이민자들은 엄청난 부를 축척했으며 그 돈을 여기에 들어 붓는다. 박물관을 짓고 학자에게 어마어마한 funding 을 제공한다. 내가 holocaust 를 연구하겠다고 하면 생계 걱정이 뚝 떨어진다. 기록을 찾아내고 집요한 추적 끝에 15년 만에 나치 계급 군인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찾아낸다. 아이히만은 ‘100명은 어디에서 죽이고 200명은 어디에서 죽이고’ 하는 학살을 담당했던 책임자였다. 2차 대전 후에 그를 잡아서 전범 재판에 세우려고 혈안이 되었고, 마침내 아르헨티나에 숨어서 사는 그를 1960년에 찾아서 재판에 세우는 장면은 전세계적으로 생중계가 되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체포 당시에 아르헨티나 citizen 인 아이히만을 두고 Israel 과 외교분쟁이 일어나지만  Israel 은 외교법을 어기면서 그를 압송하고 재판장은 미어 터진다.

Holocaust Study 는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아직도 자기 가족 중에 생사가 확인 안 된 사람들이 많다. 대규모 자본으로 연구가 운영되며 유럽과 미국 전역에 연구센터가  있으며 이 잡듯이 잡아낸다. 그리고 2차 대전의 기억이 없는 젊은 사람들에게 까지 계속 주입을 시킨다. 80세 넘은 할머니들은 holocaust symposium 에 다니면서 반드시 해결해 달라고 말한다. 목소리가 커져야지 입김이 세어진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나라 한국 사람들은 참 착하다. ‘과거인데 뭘--, 다 끝난 일인데’

2차 대전 직후에 미국의 지적인 분위기는 New School 과 Columbia University 에서 군중 mass 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를 진행시키는 방향으로 돌아갔고, 독일의 분위기는 동서로 두 동강 난 나라에서 공산주의, 민주주의 구도가 성립되었고 holocaust 악몽과 죄책감 및 원망이 돌아 다녔다. 프랑스의 분위기는 독일군에게 협조했던 사람들을 이잡듯이 찾아내고 심지어 독일 군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했던 창녀들까지 잡아서 광장에 끌고 나와 파리 시민이 보는 가운데 다 죽였다. 집안 자체를 말살시키는 흉흉하고 공포스런 사회 분위기였지만 프랑스는 그 당시에 매듭을 확실히 하였기에 지금은 별 말이 없다.

독일의 지성적인 분위기는 어떻게 Hitler 같은 정권이 생겨났는가에 대한 totalitarianism 전체주의 연구가 시작되었고, Sartre 의 existentialism 실존주의 철학이 퍼져 나갔다. 기존의 철학은 Human being 에 대하여, 형이상학적 인간의 행복, 고통이 무엇인지에 대해, 심오한 것에 대해 고민해 왔다. 양차 대전 후의 existentialism 은 오늘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 오늘 먹은 밥, 지금 하는 말과 행동 자체가 인간의 정의를 내린다고 말한다. 당신이 타인과 현재, 그 장소에서 어떻게 involve 하고 engage 하느냐가 인간의 정의를 결정한다. 이 때까지는 공연히 형이상학적 고민을 하면서 철학과 생활의 gap 이 너무 컸기에 이런 비극이 인류 역사에 일어났다는 반성이 2차 대전 후에 나왔다. '이제부터는 현실로 나아가 무심코 하는 말, 무심코 대답 안 하는 것 등에 대해 생각을 좀 해보자' 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2차 대전 후의 예술적인 배경

                                        
Lucio Fontana, Concetti, Spaziali 1963               


Spatial Concept Expectations 1960
단색화이며 칼로 뿍 찟거나 나이프로 구멍을 낸다. Minimalism 작가에게 중요한 개념이다. 2차 대전 후에 추상으로의 움직임이 일었고, 한편에서는 뒤샹이 예술을 정의내리는 조건이 허상임을 보여주었는데 다시 한번 커다란 화폭에다 그리면 퇴보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폰타나는 캔버스를 찢고 구멍을 냄으로써 뒤샹처럼 예술에 거부반응 anti-art 을 보여주었고, 2차원이 아닌 3차원의 오브제같이 보이게 함으로서 비판을 해결하였다. Canvas 라는 material 을 부각시켜 덩어리, 물질로 보이게 하면서 쟝르를 흐뜨린다.

                                       
Pierre Restany 1930-2003                                            


Yves Klein 1928-1962
비평가인 피에르 레스타니는 1960년에 신사실주의의 선언문을 내고, 화가인 이브 클라인과 Nouveau Realism운동을 함께 시작하였다. 
             

Yves Klein, Blue Monochrome 1961                    


Yves Klein, Leap into the Void, 1960
누보 리얼리즘이 추상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 놓고 이게 어디 realism 이냐? 이것도 추상이다’ 라고 사람들은 반박했다. 이브 클라인은 International Klein Blue 라는 색에 대한 특허를 내고 자신의 작품에는 Klein Blue 만을 쓴다고 하였다. 2차 대전 이전에 러시아의 avant-garde 들이 utopia 적이며 proletariat 를 위한 예술을 하기위해 시도했던 monochrome 과 비슷하다.

2차 대전 후의 세상 분위기는 미국, 미국, 미국 이었다. 미국의 물질 문명이 홍수처럼 유럽으로 들어갔고 전후에 쓸모가 없어진 미국의 군수 공장들은 자동차 산업으로 돌았다. 2차 대전 전에는 그럴 수 없었던 미국이 한 가정에 차 한대를 가지는 부유국이 되었고 car culture 가 범람을 한다. 미국의 차가 유럽으로 수출되고, 영화, jazz 음악 등의 American Culture 가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2차 대전 전에는 문화의 중심이 유럽이었지만 2차 대전으로 부유국이 된 미국은 문화 산업이 엄청나게 발전한다. 전후의 프랑스 젊은이들은 나라로부터 배급 ration 을 받으면서 leisure 는 미국에서 수입을 한다. 그런 시기에 monochrome 특허를 낸다는 의미는 중요했다. 예술이 대중 문화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예술가의 작품이 소수의 elite 만이 즐기는 high art 로서 벽이 높았는데, 이제는 대중이 내 작품에 적극적으로 engage 하기를 바라면서, Reality 와 예술의 관계를 건드린다.

신사실주의 작가는 주로 installation 과 performance 를 위주로 했다. 하지만 클라인은 신사실주의 창시자이면서도 유일하게 그림을 그린 화가이며, 또한 이상한 짓도 많이 했다. Leap into the Void 라는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performance 를 해서 scandal 을 일으켰다.  또한 white monochrome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갔더니 벽을 하얗게 칠하고 이게 작품이다 하였던 적도 있었다. 1970년에 나타나는 conceptualism 에 영향을 주었고 마치 뒤샹의 변기처럼 Duchampian 뒤샹피엔 해서 분노를 일으키게 만든다. 클라인의 작품은 철학적 message 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Everybody could be an artist’ 를 주장하며 특별한 재능이 없이도 누구라도 engage 하려고 하면 예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Leap into the Void 의 사진은 신문에 실리고 1960년 당시의 사람들에게 shocking 했다. ‘이게 가능한가’ 사람들은 놀랜다. 물론 밑에 mat 를 깔았고 나중에 사진에서 지웠다. 마치 독일의 Joseph Beuys 의 artist as shaman 같이 특이한 능력을 가진 무당 예술가로 자신을 포장하면서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하고 유사하다.




Yves Klein, Shroud  Anthropology 1960
Gallery 에 같더니 이상한 음악이 연주가 되고 여자들이 나체로 들어오더니 어쩡쩡한 분위기에서 canvas 위에서 서로의 몸을 끌고 다닌다. Jackson Pollock 에 대한 질문이다. 거대한 화폭에 온몸을 움직여 과격한 붓질과 물감을 들어 부으면서 격렬하게 그리는 Pollock 의 그림을 action painting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몸을 끌고 다니고 canvas 에 불을 지르는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action 이 아닌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boundary 를 건드린다. 사람들은 Pollock 의 action 은 칭찬하면서 클라인이 이렇게 이상한 짓을 하면 욕했다.

신사실주의는 예술과 reality 의 관계를 건드리는데, reality 란 사람들의 이중적 잣대를 의미한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Stereotype 이나 쉽게 설득당하지 않으려는 마음, 고정 관념 등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어떤 것은 괞찮고 어떤 것은 왜 욕하나?  이브 글레인의 퍼포먼스는 저질이라고 욕하면서 실제로는 2차 대전에서 그 많은 사람을 죽인 존재가 바로 인간 아닌가?

                 

Jean Tinguely 1925-1994                                  


Niki de Saint Phalle 1930-2002


Jean Tinguely, Homage to New York 1960   
   


Niki de Saint Phalle, Black Venus 1965-67
Homage to New York 은 MoMA 의 정원에서 했던 performance 이다. 여러가지의 고물 부품을 줏어서 기계처럼 조립한 조각 작품이다. 기존의 예술은 박물관 안에서 완성품을 감상하지만 쟝 팅귤리에는 관람객 앞에서 잠시 전시하고 부서지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사진으로만 남으며. 여기에 institution critique 이 암시되어있다. 박물관이나 gallery 의 상업성을 비판하는 것으로 예술 전시 제도권을 당혹하게 만든다. Marketing system 을 벗어나 나중에는 쓰레기가 되므로 금전으로 가치 매기기가 힘들어진다. 뒤샹은 object 를 institution 안에 전시했지만 팅귤리에는 1분 동안만 예술이라고 전시하고 끝, 다시 쓰레기로 돌아간다. 뒤샹보다 한걸음 더 나간 생각이다.

Black Venus는 여성 icon, 여성 신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스 로마 여신은 금발과 파란 눈으로 항상 그려지고 있는데 미의 잣대는 절대적이 아니므로 그 당시 신들의 아름다움의 기준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허구헌날 Venus 는 다 그렇게 똑같게 그려질까?  2차 대전 후 미국 문화의 peanut girl, Marilyn Monroe, 예쁜 여자는 딱 하나로 도식화되어 대중이 소비하는 매체에 나타났다. 예술의 세계에서 여자의 누드는 항상 그려져 왔는데 19세기에는 외국여자인 터키, 알제리나라의 창녀, outsider 계급의 여자를 객체화 시켜왔다.

기존의 Venus 는 뽀얀 살결을 보이지만 니키드셍팔은 쓰레기 같은 신문을 가져다가 반죽을 빚어서 그 위에 물감을 칠해서 커다란 Black Venus 만들고 잡지 광고에서 보이는 듯한 수영복을 입히고 공놀이를 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니키드셍팔은 뷔너스를 항상 같은 모습로 그려내는 stereotype 을 꼬집고 있다. 

            
Niki de Saint Phalle, She: A Cathedral 1966
성당안에, 어머니의 자궁 안에 들어간다. 설치작품으로 엄청난 sensation 을 일으켰다. 예쁘게 생긴 French 작가의 전시라고 해서 보러 갔더니 황당한 scene 이 연출되었다. 들어가면서 굉장히 불편해 한다. 신사실주의 작가들은 museum, gallery 의 정의를 괴롭힌다. She: A Cathedral 의 전시를 받아줄 수 없다는 gallery 가 99% 였다. 물론 루브르 박물관도 이런 것은 전시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과연 museum, gallery 가 뭐하는 공간인지? 관객은 어떤 기대를 갖고 오는지? 한번쯤 박물관 institution 을 비판의 눈 critique 으로 보자는 의도이다.

Arman, Fagot de Clarinettes 1976   실제의 클라리넷을 덕지 덕지 붙여서 만들었다. 신사실주의의 object 작가로 유명하다.    
                                 


Daniel Spoerri (1930-) Kichka’s Breakfast 1960
자신의 여자 친구가 먹었던 아침 밥상을 그대로 모아서 벽에 붙였다. 쓸모를 잃어버린 쓰레기를 가져다가 작품을 한다. ‘나도 할 수 있겠다’ 하고 비웃지 말고 직접 해보라는 의도이다.

아르망이나 다니엘 스포에르는 수동적인 관객에게 engage (끌어들임) 를 하라는 message 를 전하고 있다. 관객은 이상한 작품을 보면 욕하고 짜증을 낸다. 그러나 당신도 동참을 해라. 집에 가서 한번 만들어 보면서 생각해보라. 창작 활동은 또 다른 차원이다. 그냥 쉽게 받아들이는 공부보다 스스로 만들어 보는 공부가 20배 이상 효과가 있다. 우리들은 성인이 되면 절대로 만들지 않고  만들어진 것 보러만 다닌다. 그러지 말고 만들어 보라. 만들면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다니엘 스포에르 역시 ‘Everybody could be an artist’ 라는 생각을 가졌다.


Arman, Long Term Parking 1982
폐차된 자동차를 모아서 18 meter 의 높이의 콘크리트로 쌓았다. 공원에 주민이 갔더니 영웅의 동상 대신 이것이 서 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하고 주민으로 하여금 한번 생각하게 한다.


Christo, Package 1963
이 package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크리스토는 의자도 싸고 자꾸 싼다. 초기에는 작은 것 싸다가 나중에는 큰 것을 싼다. 해변가를 따라 쭉 쌌다. 사람들이 가는 park 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아르망이나 니키드셍팔 보다 더 파격적이다.


Christo and Jeanne-Claude Running Fence 1972-76

 
Christo and Jeanne-Claude, Wrapped Reichstag, Berlin 1971-1995
베를린 국회의사당을 싸기 위해서 1971년부터 설득을 시작했으나 매년 국회위원들의 토론 결과 부결되었고, 89년에 동서의 장벽이 무너지고, 95년 에야 비로소 허가가  떨어졌다. 

  

Mimmo Rotella,  Marilyn Décollage
데 꼴라쥬는 꼴라쥬의 정반대 technique 이다. Mass media 의 범람으로 길거리의 벽에 poster 가 즐비하다. 파리 시내 덕지덕지 붙은 poster 를 한무리의 작가들이 뜯어낸다. 뜯어내 canvas 에 붙여 작품으로 만든다. 손톱으로 뜯었더니 뒤에 또 다른 poster 가 있다. 박물관이 아닌 거리를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면서 뜯으며 작품을 한다. Reality 안에 직접 들어가서 engage 한다. 



Pierre Manzoni, Achrome 1958
Monochrome 을 twist 시켰다. 흰색 Canvas 를 하얗게 칠하고 주름을 잡았다. 폰타나가 찢고 구멍낸 것처럼 
만조니도 있는 것 twist 시켜서 오브제를 만든다.


Marcel Broodthaers. La Tour visuelle The Visual Tower 1966
실제 mass media 에 있는 잡지 화장품 광고 사진에서 눈을 오려서 컵 안에 넣고 쌓았다. 신사실주의 작가이며 institution critique 에 대해 연구를 했고 외부에 나가 해변이나 바닷가에서 작업을 했다. 가상의 museum 을 바닷가에 만들고 사람을 모이게 하는 ‘미친 짓’을 했다. 클라인이 사람들로 부터 ‘도데체 뭐하는 거야?’ 라는 질문을 이끌어 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웃어 넘기고, 짜증내지 말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라고 말한다. 관객이 먼저 이야기하고 물어보도록 그들을 예술 안으로 engage 시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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