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이후의 프랑스와 독일(1) 12/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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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6,636회 작성일 10-01-28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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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의 근대 미술 11th & 12th hour: France and Germany after WW2 (1)
Art Bru: outsider art
Art Autre: outsider art
Art Informel: formless art 형태없는 아트
Tachism: touch 추상을 의미
11th hour: France after WW2 (1)
정치적인 배경
1차 대전 이후와 2차 대전 사이에도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었다. 1914년 1차 대전 발발 직전인 1909, 1910, 1911년 유럽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2차 대전 전 1920-30년 사이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전쟁이 계속되었고 1937년에는 Spain 내전을 그린 피카소의 Gernica 가 나왔고 식민지 문제로 팽팽하게 대립되었다.
일차 대전 후에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League of Nation 이라는 국제조약이 생겼고 2차 대전 후에는 UN 이 탄생했으나, 자국의 이익과 직접 연관이 없으면 개입하여 복잡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국제 연맹이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제제가 없었다. 나라 간의 조약과 약속은 말 뿐이지 안지켜도 그만임을 Hitler 는 알고 있었다. 일차대전후 베르사이유 조약을 맺었지만 Hitler 는 조약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럼 너 국제 조약에서 나가’ Hitler 는 나갔고 나가도 별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청일 전쟁 당시의 일본의 군사전략은 중국의 주요 도시에 일본인들을 주둔케 해서 인구를 늘리고 자국민 보호 명목으로 일본의 공권력을 침투시켜 일본과 중국의 긴장을 조성했다. 사소한 사건 하나가 국가 대 국가의 전쟁으로 번진다. 일본은 ‘제네가 우리를 공격하게 하자’ 는 음모로 전쟁을 도발한다. 일본군이 밤 12시에 군사 훈련을 하자 그 마을에 사는 중국인들은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것 같아 불편해진다. ‘하지말라, 낮에 하라’ ‘알았다’ 그러나 또 한다. 이런 식으로 중국을 자극해 총성이 왔다 갔다 하고, 일본 군인 한 명이 중국 군인에게 잡혀 갔다고 해서 청일 전쟁이 발발한다. 결국 그 군인은 나중에 돌아온다. 한 사람 없어졌다고 진짜로 전쟁이 성립되는가? 일본의 치밀한 계획의 덫에 중국이 빠진 것이다. 일본은 만주 지방부터 치고 슬슬 내려온다. 각 도시마다 일본인, 일본군으로 가득 찼다. 일본의 대륙 침투 야망은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다.
중일 전쟁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분 문제로 국가적으로 단결하기가 어려웠지만 일시적으로 내분을 중단하고 2차 대전 끝나는 순간까지 항일전쟁을 계속 하였다. 한편 소련은 청일 전쟁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다수의 국가들이 일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조그만 섬나라가 뭘 하겠어?
Germany 에는 Hitler 가, Italy 에는 Mussolini 가, Soviet Union 에는 Stalin 이 있었다. Hitler 와 Stalin 이 손잡고, 일시적으로 일본과 소련이 서로 공격을 안한다는 neutrality pact 중립 조약을 맺고, 일본이 중국을 침략할 때 소련은 가만히 있는다. 한반도는 당시에 이름도 없는 일본의 식민지였다.
전쟁 일으킬 때는 국민들의 호응이 필요하다. 힛틀러가 폴란드 공격하려고 할 때 정당성이 없었고 국민 내부에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힛틀러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자원전쟁이라고 밀고 나갔고, 다른 구실은 유태인 학살을 겨냥한 인종 문제를 내 세웠다. 힛트러는 국민들에게 쇠뇌를 시킨다. ‘ 왜 우리가 이리도 살기가 힘들까? 고리 대금업자들, 다 Jewish 때문이예요. 우리 독일 Arian 족의 순수혈통을 오염시킵니다. 그들을 죽이고 내쫓아야지 우리가 잘 살 수 있어요.’ 힛틀러는 노동자들에게 전폭 지지를 받는다. 내가 살아가면서 답이 없을 때는 정치적 지도자가 귀가 솔깃해지는 대안을 제시할 때 그를 믿는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현실에 대한 답이 없었고 ‘유대인이라는 민족 때문에, 그들의 저런 짓 때문에’ 에 금방 휩쓸린다. 독일의 국가적 내부 문제는 ‘군중’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한 사람은 도덕적일 수 있어도 군중은 도덕적이 아님을 독일의 군중이 보여주었다. 군중 심리는 독일의 커다란 dilemma 이며, 이차 대전 후에는 독일의 national trauma 가 되었다.
일본은 독일 못지 않게 못된 짓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1945년 이후, 두 나라의 패전 이후의 처리 과정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독일은 영, 프, 미, 소의 강대국의 power game 의 놀이터가 된다. 4국은 독일이라는 패전국을 4 zone 으로 나누어 그들의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1990년까지 동독과 서독이라는 이념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은 나뉘지도 않았고 강대국이 와서 주둔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차 대전에 대한 국가적인 반성이 없었다. 개개인적으로는 있을지 몰라도 국가적으로는 없다.
Holocaust Documentary Film 10 은 유태인 학살을 적나라하게 내보이고 있다. 유태인들은 갑자기 기차를 타고 다른 town 으로 이동하라고 하니까 독일 내의 anti-Semitism 때문에 우리를 이주시키나 보다 하고 트렁크 몇 개를 들고 전 가족이 다른 한 두 가족들과 섞여 기차를 타고 황량한 이름 모를 시골의 정거장에 내려 헛간 같은 곳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사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며칠 후에 또 다른 헛간으로 옮기라고 한다. 거기서 죽는지도 모른채 가스에 질식 되어 죽어간다. 이 Film 은 당시의 그 고장에서 살던 독일 사람들을 찾아내어 생생한 증언을 담았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폭발소리가 나고 사람이 무더기로 죽어있더라. 며칠 후에 가 보니까 뼈가 우글우글하더라’ 하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당신은 그냥 밭갈고 양배추 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았단 말이지? 그 심리는 뭘까?’ 하고 독일 국가 내의 아픈 상처 trauma 를 건드린다. 7천만의 일반 시민이 죽은 이차 대전, ‘과연 사람이 뭘까? 개만도 못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식이 전후에 생겨났다.
이차 대전 후 1947년에 Israel 이라는 국가가 생기고 유대인 세력이 등장한다. 프랑스는 이스라엘이 생김을 전폭 지원한다. 프랑스는 자국의 자본과 노동으로 이집트에 가서 Suez 를 팠는데, 이차 대전후 아무리 UN 이 식민지를 해방을 시키라고 하여도, 식민지 국가가 전 세계적으로 없어졌다고 하여도 수에즈 운하 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중동과의 교두보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으므로 Israel 의 형성을 전폭 지원하였다.
1945년 이 후에도 지구상에 평화는 없었다. 50-52 년 사이에 Korean War, 60년에 Vietnam War 가 있었다. 국제 연합 기구 역시 function 을 하지 못한다. 그냥 ‘하지 마세요, 죽이지 마세요’ 하고 권하는 것 이상의 어떤 실질적인 효과가 없었다. 이차 대전 후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법칙은 자본이다. 국제사회에서 한 국가가 고립되는 1순위는 ‘돈’ 이다. 북한에게 폐쇠, 고립 사회라고 open 하라고 하지만 경제 제제를 통해 사실상 고립시키고 있다. 미국 은행에 예치된 북한의 자본을 close 시키고 미국 쪽에 유리하게 관세를 매긴다. ‘너네가 경제 운영을 못하니까 그렇게 된거야. 돈 빌려줄께, 써’ 마치 좋은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과연 이들이 착한 사람인가? 니가 내돈을 써야 내가 부자가 된다는 논리이다.
국가의 위기감은 UN 이 아니고 돈이 좌우한다. 뭇솔리니, 스탈린, 힛틀러는 capitalism 에 대한 불평을 가지고 민중의 호응을 받았는데 이차 대전 후에 자본의 힘이 더욱 극명하게 정립된 질서로 자리를 잡는다.
예술 및 문학적인 배경
Art Bru 와 Art Autre 는 outsider art 라는 뜻으로 제도권에 대한 반향을 의미한다. Art Informel 은 형태없는 아트, formless art 를 말하며 canvas 의 화폭을 두툼하게 채우는 커다란 완전 추상을 의미한다. Tachism 은 역시 추상을 의미하며 touch 라는 뜻이다. 추상에 대한 반향으로 미국의 pop art 와 비슷한 Nouveau Realism 이 나왔고 추상작가들이 구사하던 전략이 꼴라쥬의 반대인 Decollage 이다.
Picasso's Baboon and Young 1951
이차 대전 후에도 피카소는 여전히 살아 계셨다. 아들의 장난감을 바분의 머리에 올리고 과일 씻은 후 물을 빼는 coriander 같은 daily life 의 object 를 가져다가 조합을 했다. Anti- art 를 표방한 뒤샹은 변기를 가져오는 것으로 그쳤으나, 피카소는 anti-artist 와는 거리가 먼 타고난 artist 였다. Dadaist 로서 예술을 전복시키려는 뒤샹의 의도와는 달리 피카소는 새로운 예술을 만든다.
가장 얄밉고 자유로운 사람이 제도권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결코 안하는 것도 아닌데 하면서 딴지를 거는 사람이다. 피카소는 거장의 반열에 이미 올랐고 예술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했다. 신춘 문예는 관심이 없으면서 좋은 글을 쓴다. 제도권에 들어와서 교수를 하라고 하면 싫다. 그러면서 신춘 문예를 흉본다. 변방 변두리에 있으면서 결코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정말 얄밉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life pattern 을 유지하는 것은 엄청 힘들다.
Pablo Picasso, Women of Algiers, after Delacroix 1955
Eugene Delacroix, Women of Algiers In Their Apartment 1834
피카소는 2차 대전 후에 드라크루나의 알제리의 여인들을 재해석했다. 아비뇽의 여인들보다 신체가 더 분열되어 마치 로버트같다. 1800년대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국가는 끊임없이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전쟁을 하였다. 그런데 2차 대전 후에 피카소가 시끄러웠던 알제리 나라의 여인들을 그것도 무서운 얼굴로 화폭에 그려내자 프랑스인들은 불편하고 난감하게 쳐다본다.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했던 식민지 정책은 일본이 했던 것과 똑 같다. 프랑스 국민에게 알제리에 가서 살면 무상으로 땅과 집을 주어 많은 프랑스인을 알제리에서 살게 한다. 그러나 알제리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시민권을 주지 않는 차별 정책을 쓴다. 억지로 남의 나라 땅 빼앗고 창녀 prostitute 들을 억지로 아름답게 그리던 시절이었다. 드라크루나의 아파트에 있는 알제리 여인들이 그런 종류의 그림이었다.
Pablo Picasso , Self Portrait Facing Death Mougins, 1972
피카소의 후기 작품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사람들의 호응도 별로 없었으나, Gagosian Gallery 에서 전시를 크게 한 후에 후기 작품의 가격이 뛰었다.
Eugene Ionesco 1909-1994
Samuel Beckett 1906 -1989
연극 희곡계 역시 변화가 왔다. 유진 아이오네스코의 The Bald Soprano 대머리 여가수 라는 연극은 story 의 기승전결이 없이 말도 안되는 부조리극이다. 의자가 주인공이며 사람이 의자에게 말을 붙인다. 사무엘 백겥의 Waiting for Godot 에서 고도는 결코 안 나타나는데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고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실존주의 existentialism 철학 운동과 연결되어 있다. 어려운 책 읽고 앉아서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가 아니라 사람은 행위를 통해 증명된다. 위의 부조리극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의 고민, 합리적인 사고 등이 전혀 의미없고, 사람들은 신, 눈에 보이지 않는 행복, 지성, 도덕 등의 의미를 찾고 싶어하지만 실존주의는 여기에 반기를 든다. 사람은 사고를 통해 중명되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는 행위를 통해서 증명된다. 곧 행위 자체가 존재이다. 2차 대전을 통하여 인간들이 저지른 행위를 통하여 이것이 증명되었다.
Bertolt Brecht 1898-1958
Mother Courage and Her Children
지성적 표양 제시가 Ironical 하게도 독일 지성인이다. 낯설게 하기 효과, 속격효과 alienation 을 골수 Marxist 인 베톨티 브레트가 만들었다. 관객을 낯설게 해서 정신차리라고 한다. 자꾸 황당한 설정을 만들어서 정신적 자극을 준다. Familiar 한 상황이 아니라 unfamiliar 한 곳으로 관객을 몰아 간다.
Mother Courage and Her Children 에서 돈에 억척인 엄마가 돈 때문에 자식들을 차례로 잃어간다. 독일국가라는 배경에서 물불 가리지 않는 억척 엄마의 비극이 그녀가 주변의 정치, 사회적 문제를 묵인하기 때문에 나중에 크게 일어난다. 도덕적으로 찜찜해도 이번만 그냥 넘어가자 했기에 5년 후에 그것이 엄마의 발목을 잡는다. 이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 비극이다. 끝은 더욱 찬란한 비극이다. 보고 나오는데 집에 갈 때까지 계속 불편하다. ‘뭐야 이연극, 평생 고생만 하다가 저러고 죽는거야’
나의 생활이 내가 오늘 밥 숫가락을 입에 넣는 것에 달려있지, 책과 사상과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의 고민에 달려있지 않다. 토지를 쓴 박경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고 절망이다. 이 세상에 행복이 있기나 하냐? 라고 했다. 사르트르와 브레트는 당신이 지금하는 행동이 당신의 존재이지 형이상학적 idea 를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라고 했다.
Marguerite Duras 1914 –1996
Hiroshima Mon Amour
히로시마 내 사랑은 마케트 듀라의 자서전적인 소설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에서와 같이 실존주의 작품 대부분은 연극이나 소설에서 인물 간의 대화가 어긋난다. 서로 이해 못하고 대화가 흩어진다. 2차 대전의 제 각기 다른 상처를 가진 타인들이 서로의 trauma 를 치유해 주지 못한다. 내 고민 얘기해도 네가 나를 이해 못 한다. 더 이상 군중은 대의에 의해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큰 의미에 대하여 거부 반응을 보이는 움직임이 사상, 철학, 문예에 나타난다.
Jean-Paul Sartre 1905-1980
Simone de Beauvoir 1908-1986
시몬느 보바르는 제 2의 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 라고 했다. 인간의 행동은 엉망 진창이며 도덕적 합리적인 것에 근거하지 않는다. 빈부의 차이 많은데 큰일이구나 하면서 저녁을 뭐 좀 맛있는 것을 먹을까 하고 궁리하며, 삼겹살은 먹고 싶은데 돼지가 불쌍하다. 알면 알수록, 공부를 하면 할수록 살기가 불편해진다. 과연 학문이 인간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가?
12th hour: Germany after WW2
Heinrich Boll 1917-1985
독일의 하인리히 벨은 Nobel prize winner 로서 소설 And Never Said a Word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를 썼다. 카트린 이라는 가정부는 어느날 생면부지의 남자를 집에 숨겨주는데,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그가 지명수배 탈영자였음을 알고 경찰 수사에 증인으로 채택되어 사건 취재에 연류가 된다. 사건을 파헤치는 자이퉁이라는 이름의 신문기자는 카드린의 주변인들을 하나하나 파헤쳐 신문에 기사를 실고 그녀는 세상에 둘도 없는 나쁜 여자가 된다. 저속한 신문이라고 욕하면서도 사람들이 꼭 보는 yellow paper 의 신문기자에 의해 카드린의 사생활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고 단한번도 그 여자와 이야기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그녀에게 돌을 던진다. 마침내 카트린은 자이퉁을 죽이고 자수를 한다. 진실 여부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언론에 쉽게 동화됨을 비판하는 소설이다.
독일에서 유학한 전혜린은 하인리히의 소설과 똑같은 제목의 수필집을 냈다.
Gunter Grass (1927-) The Tin Drum 1956
The Tin Drum 은 happy ending 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동안 내내 독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읽는 동안 인상쓰게 하고 ‘당신은 어떻게 살고있나’ 라는 질문을 던진다. 가령 뉴욕에서 새벽 2시 쯤 한여자의 도와 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아침에 시체가 발견되었다. 새벽의 그 소리는 모두가 들었다. 왜 안 나가 보았을까? 딴 사람이 누군가가 나갈거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은 사람들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 ‘나만 아니면 돼, 나 하나가 한다고 뭐가 되겠어? 내가 안하면 누군가가 하겠지, 나 하나가 쓰레기 분리수거 한다고 뭐가 달라져? 나 까지는 괜찮겠지. 우리 시대는 이제 다 살았어’ 당신은 이런 생각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누군가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한 개인 Single individual 으로서의 당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 당신은 반드시 책임이 있고, 만약 지금 그것을 못 느낀다면 10년 후에라도 책임을 지게 된다.
흉보고 남의 뒷다마 치는 아이, 반드시 복수당한다. 무심코 하는 일상의 하나하나의 행위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불편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한다. 1회용품 쓰지말고 자신의 컵을 쓰세요. 7-8명 중에 유독 한 명만 유난을 떤다. Starbucks, 그냥 가자, 이번 한번만 가자. 너 왜 유난떠니? 그 한사람은 소외당한다.
Alberto Giacometti 1901-1966
Head of a Man on a Rod 1947
The Chariot 1950
Man Pointing 1947
스위스 조각가인 알베르또 지오코메티는 청동의 재질을 써서 인물의 모습을 얇고 거칠거칠하게 아름답지 않게 조각을 하였다. 전후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을 잘 표현하고 있어 사르트르가 그의 조각을 좋아했다. 르네상스 인본주의 시대의 인간은 합리적 사고에 의해 문화를 꽃피우는 아름다운 David 상 같은 존재였으나, 지오코메티는 2차 대전후 인간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는 파괴를 가져오는 부정적인 존재로서 표현하였다.
Jean Dubuffet 1901-1985
Dhotel Hairy with Yellow Teeth 1947
Le Metafisyx 1950
쟝 듀브페의 그림의 motive 는 정신병원에 있는 광기에 싸인 사람이다. 애들 그림처럼 보이고, 광기가 정상이고 합리가 비정상임을 보여주는 부조리극 같은 그림이다. 시계의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Le Metafisyx 에 나타난 여자누드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여자누드의 전통적인 도식을 파괴했으며 이를 이코노클라스틱 iconoclastic 이라고 한다. 제일 먼저 iconoclastic 을 시도한 사람은 피카소이며 그의 아비뇽의 여인들에서 창녀들을 무섭게 그렸다.
Jean Dubuffet , Ontogenese
Group of Four Trees, 1969-72
Ontogenese는 낙서 doodling 같은 그림으로 의미부여가 무의미함을 말한다. Group of Four Trees는 뉴욕의 야외에 있다.
Jean Fautrier - Paysage Sombre 1958
Hans Hartung, T 1963-H44, 1963
두 작품 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비숫하며 다시 한번 Kandinsky 가 주목을 받는다. 역사적 trauma 를 가지고 다시 추상으로 돌아간다. 파우트리에의 인질 시리즈는 어두우며 2차 대전 후의 실존에 대한 고민과 추상 화폭의 실험을 동시에 건드리고 있으나 효과는 별로 없었다. 여기에 누보 리얼리즘이 도전장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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