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 이후의 프랑스(4), 멕시코, 바이마르 공화국(1) 11/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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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4,806회 작성일 10-01-28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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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의 근대 미술 6th hour: France after WW1(4)
7th hour: Mexico after WW1
8th hour: Weimar Republic after WW1(1)
6th hour: France after WW1(4) 초현실주의
일차 대전 직후의 유럽은 Dada 운동과 Surrealism 초현실주의 운동이 복합되어 일어나고, 보수주의적 분위기에서 추상에 대한 반감이 전 유럽에 퍼진다. 1924년에 레닌이 암살된 후에 스탈린이 정권을 잡고 1929년에 Trotsky 는 러시아에서 추방을 당하고 기나긴 망명길에 오른다. 1938년에 멕시코에 가서 Diego Rivera 의 집에서 지낸다.
초현실주의를 창시한 브렝똥은 gallery owner 로서 생계를 유지했으며, Dali 를 발굴하였다. 독일 태생의 Ernst는 초현실주의에 새 technique 을 가져온다. 그림의 정통코스를 밟지 않고 천재적 재능이 없어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프로타쥬 frottage, 그로타쥬 grattage 등의 기법을 새로히 끌고 들어와 기존의 rationalism 에 반감을 나타낸다.
초현실주의는 정치적 측면으로는 프롤레타리아와 브르조아의 계급의 차이를 없애고자 하는 communism 과 연계가 된다. 초현실주의의 주요 개념인 꿈은 상상의 나래를 펴는 창의력의 확장 개념도 있지만, 누구나 꾸는 꿈에서 계급의 구조를 없애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Andre Masson 1896-1987
Yves Tanguy 1900-1955
Andre Masson, Battle of Fishes 1926
앙드레 마송은 프랑스 태생의 초현실주의 작가이다. Battle of Fishes는 중간 중간에 모래를 뿌리고, 막 그린 물고기와 물감을 대충 뿌린듯한 배경 등 유치원 학예회에서 볼만한 유치한 그림이다.
Yves Tanguy, Mama, Papa is Wounded 1927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인 그림이 파리의 gallery 에서 전시가 되고,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그의 영향을 받는다. 그의 The Soothsayer’s Recompense 와 The Melancholy and Mystery of a Street 는 절대적으로 사실적인 마을 모습인데, 너무 사실적이어서 그것을 넘어서서 꿈속 장면을 연상시킨다. 현실인데도 초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이브 탐기는 현실적인 사실을 그리되, 같이 있을 수 없는 현실을 병행시켜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었고, organic abstract 를 같이 접목하였다. 일차 대전 전에는 구도를 평면화 flatness 시키고 cubism 으로 면을 처리했다. 그러나 Mama, Papa is Wounded 에서 탐기는 멀고 가깝게 보이도록 구조와 명암을 다시 가져왔다. 세상에서 볼수 없는 물체와 둥굴둥굴한 biomorphic abstract ㅡ 두 가지가 함께 그의 그림 속에 나타나 사실적이 아닌 묘한 분위기가 난다.
1930년대를 지나면서 초현실주의에 분열이 일어난다. 분열의 핵심적인 이유는 French Communist Party 의 role model 인 러시아가 스탈린파와 Trotsky 파로 갈렸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 공산당 내에서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네가 이런 그림을 그려서 어떻게 뭘 바꾸겠다는거야?’ 말로만 ‘부르조아를 어떻게 하지’ 떠들다가, 해외여행 가서 호화롭게 노는 그들이 정치인의 눈에는 더욱 브르조아적으로 보였다.
한편 소련에서는 Kandinsky 의 추상이 용납이 안 되고,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use value 가 있는) 미술인 Constructivism 구축주의나 Productivism 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국내에서도 이단의 상황이었고, 러시아의 작가 모임에 참석하러 가도 그 곳에서 괴리감을 가지기는 마찬가지 였다.
이런 국내외 정치 상황에서 브렝똥은 한눈에 달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로 인하여 초현실주의가 다시 부흥하기를 바라면서 달리를 초현실주의에 가담시켰다. 하지만 브렝똥의 희망과는 정반대로 달리는 다른 노선을 걸었고 Gala 와 바람이 나는 둥 말썽을 야기시켰다. 그는 의상 소파 design 과 영화 제작을 하면서 capitalism 과 섞이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비아냥거리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1933년이 마침내 분기점이 된다. Hitler 가 대통령이 되면서 Weimar 제국이 끝나고 독일 제3 공화국이 된다. 같은 해에 브렝똥은 French Communist Party 에서 추방을 당하면서 심한 모멸감을 느꼈지만 자신은 여전히 스스로 공산당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련 체제를 반대하는 Trotsky 파임을 주장함으로서 공산당이 아니라고 몰리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초현실주의에 대한 평가에 갈등이 생기자 달리가 대표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Salvador Dali 1904-1989
Andalusian Dog 1929
Golden Age 1930
달리는 Spanish 영화 감독 루이스 브누엘 Luis Bunuel (1900-1983)과 함께 silent surrealism film 을 제작하는데, 안달루시안의 개에서 면도칼로 눈을 도려내는 장면을 16 분 동안 침묵 속에서 보여준다. Sexual Fantasy 에 관한 영화 Golden Age 는 여자가 동상의 발가락만 보면 빠는 성적인 집착을 보여준다.
달리는 미술의 장르를 넘어서서 영화감독 브누엘과 영화를 만들면서 ‘난 예술하는 사람이므로 그 어느 맥락에도 구속받지 않는다’ 라고 했다. 영화는 미국 자본주의 system 의 commodity society 를 대표하는 장르하고 할 수있다. 브렝똥의 dogmatism 은 달리의 capitalism 을 허용할 수 없었고, 영화, 옷 디자인은 자본주의와의 결탁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달리는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하나의 이념에 대한 illusion 이며, 도를 지나치면 고집이 되고, 폭력에 이른다고 반박하였다.
Dali, 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치즈가 녹아내리며 개미가 빠글빠글하고 코에서 뭐가 나온다. Biomorphic abstract 이며 추상적인 형태의 생물체가 꿈과 무의식의 효과를 준다. 여기까지는 브렝똥이 좋아한다.
Rene Magritte 1898-1967
Rene Magritte, The Treachery of Images, 1928-29
르네 마그리뜨는 벨기에 태생이며 그 당시에는 초현실주의 작가로 분류되었지만, 몇 십년 후인 1980년대에 기호학 학문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발굴된 인기 작가이다. The Treachery of Images 안에 This is not a pipe 라고 써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pipe 가 아니라 pipe 그림이다. 말장난 같지만 image 에 관한 착각과 오해를 다루고 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은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은 나의 직접 경험보다는 TV, 그림, 신문, 삽화 등에서 보는 image 가 80-90%를 차지한다.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라 image 를 봤을 뿐인데, 사람들은 내가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TV news 를 통해 본 이라크 전쟁 ㅡ 내가 이라크 전쟁을 겪은 것처럼 ‘image 를 truth’ 라고 생각한다.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더 이상 seeing is believing 이 아니다. 뉴스에 나오는 image 를 다 믿는다. 조작된 image 에 의해 내가 움직여지는 것은 아닐까? 뭐에 대한 근거를 댈때 ‘신문에서 봤어’ 하는 것처럼, 나의 세상 경험은 신문, TV 를 통해서 한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과연 그렇게 투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 투명성 transparency 에 대한 비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을 이해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이해가 아닌 오해일 수도 있다. 사람은 타인이 자신에 대하여 하는 이야기에 따라서 자신의 image 를 형성한다. ‘착하다’ 라는 평을 들으면 착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노동자들은 Hitler 가 자신들을 대변해준다고 생각하고 수 십만명의 대중은 손을 흔들며 그를 환호했다. 힛틀러가 유대인 학살해야 한다고 하니까 독일인들은 ‘그 지독한 고리대금업자들ㅡ 죽여야 해’ 하면서 그의 연설을 믿었다.
대중들은 자신들이 듣는 것, 보는 것, 읽는 것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기가 힘이 들지? 누구도 얘기 안해준다. 대중 스스로 진실을 찾지 못하고 누군가가 폭로해 주기를 바란다. Elite 집단, 사회 권력 집단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자신들의 실체를 감추는 일이다. Apple Computer 는 비밀에 쌓여있는 회사이다. 매우 엄격하게 출입이 통제되어 어디를 통과하려면 지문을 여러 번 찍어야 한다. 회사 직원들은 아무 것도 모르며 주식이 터지면 비로소 신문을 보고 안다. 삼성의 비자금 터질 때도 직원들은 아무 것도 몰랐다.
Ilya Ehrenburg 1891-1967
Leon Trotsky1879-1940
일리야 이렌버그는 소련의 journalist 로서 신문에 초현실주의 브렝똥에 대하여 인신 공격 수준의 글을 쓴다. 어떤 식으로든 자기가 생각하는 것 벗어나면 못 참는 브렝똥은 이렌버그를 폭행한다. 이 사건으로 초현실주의 작가 전체가 공산당에서 퇴출을 당하고, 초현실주의는 유명무실해진다.
1938년 브렝땅은 멕시코 정부에서 주관하는 conference 에 참석하러 가서 Trotsky 와 Rivera 를 만나게 된다. 브렝똥은 Mexico City 공항에 도착하는데,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아 국제 미아가 된다. 브렝똥은 ‘오히려 잘 됐다’ 하고 공항을 나와서 정처없이 떠돈다. 흘러 흘러 예술인 만나고, Diego Rivera 이름을 듣고 그 집에 찾아가니 Trotsky 가 있었고, 그들과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예술가라는 지위로 인한 만남이 아닌, 초현실주의적인 경험이라고 할까?
7th hour: Mexico after WW1
Diego Rivera 1886-1957
Frida Kahlo 1907-1954
디에고 리베라의 부모는 교사였고, 어렸을 때부터 미술 교육을 받았고 미술 신동이라고 불렸다. 17-19살 때 국가 장학생으로 파리에 유학을 가서, 피카소와 장꼭또 등 유명인을 만난다.
Diego Rivera, Jean Cocteau 1918
디에고 리베라는 파리에서 만난 장꼭도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리베라는 복잡한 여성 관계로 유명하며, 결혼은 5년을 못 넘기고, 여자를 바꾸며 살았고, 43살에 22살의 프리다 칼로와 결혼한다. 프리다는 리베라의 여자 관계로 인해 평생을 마음 고생했으며, 자신의 지병으로 인해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았다. 16세 때의 교통사고로 30-40번의 대수술을 해야 했으며, 아이도 가질 수 없었다. 깔로는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전에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말년에 마약, 술 중독이 된다. 깔로는 처음에는 리베라의 assistant 로 그림을 시작했으며, 리베라의 영향을 받는다.
Diego Rivera, Mural, Allegory of California 1930-31
리베라는 젊은 시절에는 파리에 있었지만, 멕시코로 돌아가서 격동에 휘말리는 나라의 운명과 함께 험한 세월을 산다. 멕시코는 19세기에 스페인의 식민지였다가 1810년경 독립을 한다. 19세기 중반에는 미국과 전쟁을 하고 Arizona, New Mexico 를 빼앗긴다. 1910 년에 혁명이 일어나고 나라 사정은 정신이 없는 가운데 급진파, 온건파등 여러 분파로 나뉜다. 일차 대전 당시 1912년에 참전하라는 전보를 독일로부터 받지만 멕시코는 답하지 않는다.
일차 대전 후 세계 지도는 변하는데, 멕시코는 소련의 체제에 눈이 뿅뿅나간다. 네명의 대통령의 연속적인 암살 뒤에는 미국이 있었고, 멕시코의 내전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미국의 세월을 사는 멕시코ㅡ 리베라가 그런 나라에 있었다.
리베라는 강력한 레닌 지지자로서 소련을 utopia 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병을 고치러 소련에 다니러 간다. 당연히 프롤레타리아 proletariat 를 위한 예술을 해야 하며, 그들을 위한 예술은 벽화 mural 라고 보았다. 돈이 없어 박물관에 가지 못하는 proletariat 를 위해 벽에 있는 그림 즉 생활 속에서 그림을 봐야 한다고 했다. 벽화는 low class 를 대변하는 쟝르로서 Harlem Renaissance 도 벽화와 graffiti 가 주종을 이룬다. Institution 이 필요없이 밖에 나와서 그린다.
리베라는 유명 미술대학의 학장을 지낸 elite 계층이었다. 자신의 정치적 관념과 행정 관료층의 방식에 괴리가 있어 갈등을 하다가 1930년에 미국에 넘어온다. 미국에서는 리베라를 환영하며 5-6개 벽화의 commission (청탁을 받고 그려줌) 을 준다. 리베라는 자본주의 system 에 대한 생각을 한번 해보고 싶었고, 주로 좌파 계열의 노동자층과 어울렸다.
Diego Rivera, The Making of a Fresco Showing the Building of a City 1931
Diego Rivera, Detroit Industry fresco Garden Court of Detroit, south wall, 1932 Institute of Arts
Diego Rivera, Detroit Industry fresco Garden Court of Detroit, north wall, 1932 Institute of Art
디에고 리베라의 mural 의 특징은 도시를 만드는데 주춫돌이 되는 노동자와 노동자의 일을 주제로 삼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의 벽화를 보고 그가 의도하는 주제를 생각하기보다는 역동성이 느껴지는 새 쟝르로 본다.
Man at the Crossroads 1933 Rockefeller Center, Radio Corporation of American Building, New York
(Diego Rivera was one of Nelson Rockefeller's mother's favorite artists and therefore was commissioned to create the huge mural. He was given a theme: " Man at the Crossroads Looking with Hope ...)
록펠러 집안이 뉴욕에 있는 Rockefeller Center 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탁을 하였는데 리베라는 레닌의 초상을 넣고 브르조아를 비판하는 그림을 그렸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은 적대적인 분위기였고, 록펠러 가문은 미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집안이었다. 이 그림을 본 록펠러는 리베라에게 그림을 수정하든지 없애라고 하였다. 리베라는 아예 그림을 없애버리고 미국을 떠난다. ‘ 진짜 레닌도 아닌데, 레닌 그림도 못 그리냐?
Diego Rivera, Portrait of America 1934
미국을 떠나면서 가만히 있을 리베라가 아니다. 미국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미국의 초상 series 를 New York, Detroit, San Francisco 에서 그린다. 위의 그림은 공장 노동자가 방독면 쓰고 일하는 모습과 전쟁 기계 이미지이다.
Epic of the Mexican People in their Struggle for Freedom and Independence 1935, Diego Rivera
멕시코의 주요 건물에는 위와 같은 벽화가 많으며 주로 민중의 모습을 보여준다. 리베라는 유럽 style 을 멕시코에 가져오기 보다는 멕시코 folk art, 그릇, 옷 등 민중의 모습을 그림 안으로 그대로 가져왔다.
Frida Kahlo, Frida Kahlo and Diego Rivera 1931
프리다 칼로와 리베라의 결혼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리베라는 칼로와 결혼 전에 다른 부인들의 자식들이 많이 있었고, 칼로는 리베라를 내 것으로 만들수 없음을 깨달아 가는 인생을 산다.
Frida Kahlo, Henry Ford Hospital 1932
칼로가 미국의 Detroit 에 있는 병원에서 낙태했을 때의 그림이다. 칼로의 작품은 대다수가 자화상이다. 살고자 하는 몸부림을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Frida Kahlo, The Two Fridas 1939
서양적인 옷의 프리다와 멕시코 옷을 입은 두 프리다를 그렸다. Trotsky 가 부인 나탈리와 칼로 집에서 묵었고, 칼로와 트롯츠키는 둘이 사귀었다고 전해진다. 리베라와 사이가 나빠진 트롯츠키는 그의 집에서 나가고, 그 당시에 프리다는 칼로와 이혼을 하지만 나중에 다시 재혼을 한다. 트롯츠키가 칼로의 집에서 나간 해에 스탈린이 보낸 KGB에 의해 ice axe 로 머리를 찍혀 트롯츠키는 암살을 당한다.
Frida Kahlo, The Broken Column 1944
브렝똥은 칼로를 초현실주의 작가로 보지만, 칼로는 ‘나는 꿈, 무의식을 그린 것이 아니고 내가 느끼는 그대로를 그렸을 뿐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현실이다. 당신의 초현실주의를 내게 붙이지 말라.’ 라고 했다. 칼로가 47세에 죽자, 리베라는 자신의 dealer 와 곧 재혼을 하고, 칼로가 죽은 3년 뒤에 71세로 생을 마친다.
8th hour: Weimar Republic after WW1
일차대전후 독일은 패전국에다 나라는 초토화가 되었고 시민은 먹고 살 수가 없었다. 전쟁이란 굵은 흐름이 터지고 나면 평가를 잘 해서 마무리를 짓고 지나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다시 터진다. 프랑스는 일차 대전을 냉정하고 꼼꼼하게 마무리 짓고 정리를 잘 하였다.
독일은 1919년에 Weimar Republic 이 수립되고, 영국체제인 liberal democracy 를 채택한다. 독일 내에는 communist 와 socialist 도 많이 있었고 이들은 liberal democracy 를 불편해 하였다. 군인들은 노동자와 연대하여 사회 민주주의 socialistic democracy 로 가지는 입장을 취했다.
전쟁이 끝나자 보수적 경향과 급진적 경향의 작가 모두 추상을 싫어하게 되었다. 청기사파, 다리파 등의 German Expressionist 들로 예술의 핵심지였던 독일이었으나 전후에는 expressionism 을 없애려는 움직임으로 기울고 있었다. 대신 1917년에 Zurich Dada 가 시작되어 다다가 전유럽적인 Pan European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First International Dada Fair, Berlin, 1920
Berlin Dada 는 무정부주의자들로서 liberal democracy 에 반대하였다. 미술이 프롤레타리아의 생활 안으로 들어온 소련을 동경의 눈으로 보았다. 이런 다다의 입장을 독일 정부에서 곱게 보았을리가 없다. 다다가 performance 를 하면 경찰에서 와서 체포하였다. 옆의 사진에는 늑대 얼굴을 한 경찰이 천장에서 감시를 하고 있다. 이런 표현으로 인해 국가 모욕죄로 잡혀갔다. 전후의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세가지 운동이 공존하고 있었다. Berlin, Hanover, Qulin 의 다다운동, 바우하우스 Bauhaus 운동, 신직물주의 New Objectivity 등이다.
Raoul Hausmann 1886 –1971, The Spirit of Our Times, Mechanical Head, 1919
라울 하우스만은 다다운동 참가작가로서 ready made 와 일상 사물을 조합하는 아샹블라쥬 assembly 작품을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첫번째 목표는 경제부흥 이었으므로 산업 발달 노력을 엄청한 결과로 출판 문화가 발달하고,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러나 작가들은 빠른 자본주의 성장을 경계하는 입장이었다. 일차대전이 그것을 증명했다. Dadaist 들은 인류가 진보하여 기계화에 빠지면 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machine 의 발전에 회의적이었다.
Hannah Höch, Cut with the Dada Kitchen Knife through the Last Weimar Beer-Belly Cultural Epoch in Germany, 1919 (독일의 배불뚝이 시대의 다다의 모습)
독일에서 출판문화가 부흥되자, 저명소설가, 유명한 무용가등이 celebrity 로 부각되는 분위기였고, short cut 과 모던한 양장을 한 신여성들의 이미지가 잡지등을 통해 사회에 널리 퍼졌다. 잡지에서 보고 나도 쫓아하면 잡지속 모델처럼 된다. Image 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중 이었다.
그러나 dadaist 들은 이것을 경계하였다. 하나 호는 위의 포토 몽타쥬 작품에서 같이 있을수 없는 여러가지 image 를 중첩시켜 낯설어 보이게 했다. 여자 댄서와 여자 사상가가 같은 page 에 있는데, 이 여자와 놓고 보니까 저 여자가 낯설다. Intervening 중재의 노릇을 하면서 출판물에 tackle 을 걸고 있다. Berlin Dadaist 들은 포토몽타쥬를 선호하였다.
Kurt Schwitters
Kurt Schwitters, Merzbild 25 A, 1920
Kurt Schwitters, Hanover Merzbau (Merz Building) 1931
Hanover Dadaist 인 커트 슈비터즈는 길거리의 쓰레기, 끈등을 가져다가 붙인다. Merz 는 쓰레기, 배설물이란 뜻인데, 쓰레기를 모아서 예술을 만듬으로서 debase 시키고 있다. 1960년 미국 서부 California 의 junk art 의 효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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