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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이후의 프랑스(3) 10/3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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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4,579회 작성일 10-01-28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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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의 근대 미술 6th  hour:  France after WW1 (3)

frottage, grattage 동전 위에 종이를 놓고 막 칠하면 종이 위에 동전의 모습이 나타나는 기법
decalcomania 도화지 반에 물감을 칠하고 반 접은후에 펼치는 기법
The Metaphysical School
1917-1920 이태리에서 일차 대전 중에 데 키리코를 중심으로 생긴 운동. 기용 아폴리네르가 그림이 형이상적이라고 하여 형이상학파라는 이름이 생겼다.


Surrealism 초현실주의



Andre Breton 1896-1966                                              



Tristan Tzara  1896-1963
 Andre Breton, Valentine Hugo, Greta Knutson and Tristan Tzara,Exquisite Corpse, 1930

일차 대전 직후의 중요한 두 운동은 다다와 초현실주의이다. 다다는 1914년 Zurich 에서 탄생해서 서양세계에서 전반적으로 다 퍼져서 돌아간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Berlin, Qulin, Hanover 에 다다가 생긴다. 추상에 대한 혐오감으로 figuration 이 다시 돌아와서 초상화를 그리고, Jean Cocteau 는 Return to Order 를 말했고, 전후의 정치는 보수적 성향으로 변하며, 사람들은 급진과 혁명에 피곤해 한다.

Tzara는 Zurich Dada 를 만들었고, Breton 과 함께 초창기(1919년)에 Paris Dada 를 창시한다. 그러나 나중에 브렝통과 이념이 틀려서 파리다다 내에서 패싸움이 일어난다. 1924년에 브렝통은 짜라의 공연을 때려 부수고,  친구들과 함께 문학운동인 초현실주의 운동을 시작한다.

1920년 불란서는 French Communist Party 가 생기는데, 좌파의 일부 운동일 뿐 유럽 전반에 걸쳐서는 인기가 없었다. 당시의 초현실주의 작가는 French Communist Party 의 소수 당원으로서, 예술가란 이름에 걸맞게 사회의 outsider 처럼 물의를 일으켰다. 이태리의 Futurism 이 파리의 르 휘가로 신문에 선언문을 실었듯이, Andre Breton 도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한다. Cubism 이나 Fauvism 은 비슷한 성향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그린 그림을 보고 비평가들이 부쳐준 이름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이와는 성격이 틀리게 직접 그룹의 이름 만들고 선언문을 발표했다.

초현실주의의 가장 중요한  tool 은 automatism 이다. Breton 은 군의관으로서 군인들의 trauma, 정신적 고통, 불면증, 환청등을 치료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총을 든 군인의 모습에 상당히 익숙해있다. 하지만 일차 대전 그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견딜 수 있었던 잔인함의 강도는 지금의 우리에 비하면 상당히 약했다. 피가 낭자한 scene 을 거의 본 적이 없던 사람들, 그들의 mentality 에 전쟁이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국가적 trauma 가 가장 큰 나라는 독일이었다. 시체가 길거리에 널려져 있었다. 브렝통은 그런 정신적 외상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도와주는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는 전쟁이나 외상에 대한 고통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치료 방법에 대한 사례가 없었다. 그 때부터 브렝통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psycho-analysis 와 Freud 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무의식, 잠재의식에 심취했고 전쟁에서 돌아와서는 시인, 소설가로 직업을 바꾸었다.

1900년에 Freud 의 꿈의 해석이 나왔고, Karl Marx 와 함께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사람의 본능과 감정을 억누르는 이성, 합리적 사고에서 벗어나 돌파구를 찾아 표현하자는 해방 liberation 의 의미이다. 초현실주의와 Freud 의 생각은 합리적, 이성적 사고에 대한 반발로서, 사람들은 인류가 진보하고 과학과 산업이 발달하면 행복해질줄 알았다. 그러나 일차 대전이 그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많이 배운 만큼 잘산다’—그것은 위험한 생각이었다. 오히려 남을 짓밟기 위해 전쟁을 초래했다. 이성주의,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이 깨어져 버렸다.

그래서 이념적으로 communism 으로 옮겨간다. 근대국가 이후 농노와 왕 제도가 없어지고 대통령 선거의 system 이 생겼다. 국민들은 더 잘 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산업화 이후 상황은 더 나빠졌다. 오히려 농노시대에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냥 살았는데, 이제는 뭘해도 억울하다. 10살 짜리까지 포함하여 온 가족이 18시간씩 일하는데 사장과는 비교도 안되게 못 산다. ‘자유와 평등이 어디 있어?’ 억울함을 견디고 견디다가 일차 대전이(1914-1918) 터졌다.

1917년에 Russian Revolution 이 터진다. 레닌은 브르조아 bourgeois 와 프롤레타리아 proletariat 계급이 문제임을 증명하고 capitalism 의 나쁜 점을 드러낸다. 1917년에 생긴 러시아의 공산주의 국가에 유럽의 지성인들은 눈이 뿅뿅 나간다. 마침내 러시아가 그들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꿈꾸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비극은 곧 시작된다. 레닌이 1924년에 갑자기 죽고, 레닌과 막스가 놓쳤던 것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것이었다. 어느 철학자가 말했던가?  인간은 계속 불행해야지 자기의 존재를 느낀다고? 계속 행복하면 행복한 것을 모른다. Up and down 이 있어야 어느 시점에서 행복을 느낀다. 내가 100만원을 버는데 나는 50만원이면 족하다. 그럼 50만원은 내 놓아야지.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50만원을 국가에서 세금으로 환수하면 사람들은 화가 난다. 세금제가 사회적 system 으로 굳어지면 사람들은 100만원 을 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덜 일하고 50만원 만 벌겠다. –사람의 욕망에 깔린 이러한 심리를 막스, 레닌은 놓쳤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대부분 부잣집 자식들로서 이들은 French 공산당 당원으로 utopia 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Louis Aragon (1895-1952)     


Paul Eluard (1897-1982)                                               
초현실주의는1924년에 파리에서 문예운동으로 우뚝 쏟는다. 루이스 아라곤은 19살 때까지 아버지가 없이, 정기적으로 방문한 godfather 가 아버지인 줄 몰랐고, 어머니를 누나로 할머니를 엄마로 알고 살았다. 엄마와 godfather 와의 불륜의 관계에서 자신이 태어났음을 뒤늦게 알고, last name 을 바꾼다. 프로이드 심리학에 의하면 정상적인 가정 하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오이디프스 컴플렉스, 거세 공포증등이 유아 시기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아라곤은 이런 것이 이상하게 왜곡된 상황이었고, 아라곤의 색다른 경험은 초현실주의에게 좋은 twist 를 주었다.

러시아가 공신당 국가가 된 후에 전세계 문인협회가 러시아의 St. Petersburg 에서 열린다. 파리가 더 이상 이념의 중심지가 아니며, 파리의 초현실주의 문인들은 참석하기 위해 그 먼데를 간다. 그런데 갈 때마다 분위기가 이상하고 레닌이 죽고 나서는 러시아 당원들 사이에 분열이 일고 사회 분위기가 더욱 이상해진다. 폴 엘리아드는 끝까지 Stalin 을 옹호하였고, 브렝통은 Stalin 을 반대하고 Trotsky 파로 돌아선다.

엘리아드는 그의 부인 Gala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부유한 집안의 아들인 엘리아드는 지병인 결핵 때문에 스위스에서 요양하던 중 갈라를 만나 결혼하고 파리로 온다. 초현실주의의 모든 남성들이 갈라에게 빠진다. 자유스런 life style 을 실험하는 예술가들인지라 엘리아드와 갈라와 Max Ernst 는 한 집에서 부부관계로, 애인관계로 같이 산다. 셋이서 같이 사는 ménage a trios 는 24-27년까지 계속되었다. 앙드레 브렝통도 갈라에게 반했고, 마침내 갈라는 초현실주의 분열의 한 요인을 제공한다. 


                            
                       
Gala Dali 1894-1982                     


Salvador Dali & Gala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신진 예술가들을 발굴하러 다녔다. 스타급 작가인 피카소에게도 가담을 권유하였고, 1929년에 스페인에 있던 Salvador Dali 가 브렝통과 엘리아드에 의해 발굴이 된다. 초현실주의 내에서 여신처럼 떠받들여지던 35세의 갈라가 10년 연하인 달리와 사랑에 빠져 엘리아드와 헤어지고 달리와 결혼하여 Gala Dali 가 된다. 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으나 갈라는 딸의 양육에 강한 혐오감을 나타내었고, 전통적인 어머니상과는 전혀 다른 여자였다. 나중에 브렝통은 공개적으로 갈라를 미워하며, 초현실주의를 망하게 하는 여인이라고 하였다. 

                                      
Jean Cocteau 1889-1963                        


Antonin Artaud 1896-1948
쟝꼭또와 안토닌 알토는 희극인 playwright 이다. 알토는 대부분을 정신병원에서 일생을 지냈으며, 수감상태에서 광기의 작품들을 썼다. 또한 예술 평론도 하였는데, Vincent van Gogh 의 작품에 대하여 그의 작품을 광기의 잣대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사람들이 잘 찾지 못 하는 예술가들을 재빨리 발굴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 중에는 20세기의 유명 인사가 많고, Joan Miro 와 Dali 도 여기에 속한다. 1924년에 생긴 초현실주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열하여 초기 초현실주의는 브렝통, 엘리아드에서 끝나고, 후기에는 달리와 Bataille 가 중요 역활을 한다. 



Georges Bataille (1897-1962)
Georges Bataille 는 달리와 더불어 후기 초현실주의를 이끈다. 바타이는 인간의 추악함 debasement 에 촛점을 맞추어 인간의 배설물에 대한 글을 썼고, 이 때부터 automatism 이 없어지며 초현실주의는 다른 국면에 접한다.  Automatism 은 꿈, 유년시절의 그림, 정신병 등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인간은 utopia 를 향한 열정을 지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바타이는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추악하고 더러운 존재이며, 꿈이나 무의식에 innocence 가 없다고 본다. 달리 역시 돈을 좋아했고 브렝통은 달리의 자본주의와의 결탁에 대하여 비난을 서슴치 않았고, 달리와 바타이는 브렝통이 너무 독단적 dogmatic 이라고 평하였다. 


                           
Marcel Proust 1871-1922                           


Andre Gide 1869-1951
당시의 문예 사상가로서는 마르셀 프로스트와 앙드레 지드가 있었다. 프로스트는 일차 대전 후에 사상과 문예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글은 기존 방식인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고 난해해서 따라가기 힘이 든다. 그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쫓아서 In Search of  Lost Times  의 주인공이 마들렌을 홍차에 찍어 먹는다는 귀절은 유행어가 되었다. 브렝통은 합리적 이성적 사고를 부셔뜨렸고, 바타이는 무의식 잠재의식의 추악함을 말했고, 이런 추세에 발 맞추어 프랑스에서는 기존의 소설 방식을 극복하고 있었다.



Giorgio de Chirico (1888-1913), The Soothsayer’s Recompense 1913


Giorgio de Chirico, The Melancholy and Mystery of a Street 1914
데 키리코는 이탈리아의 The Metaphysical School 의 일원으로 일차 대전 후 추상에 대한 반발과 혐오로 유럽 전반이representation 과 figuration 으로 돌아 온다. The Soothsayer’s Recompense (점쟁이의 보상) 은 사실적으로 그렸음에도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기차역과 앞에 있는 문이 생뚱맞다. 정확한 구도와  강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ㅡ모두 재현의 중요 요소임에 틀림이 없는데, 이상하게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이것은 애써서 추상이나 반재현으로 그리지 않아도 초현실적인 표현이 가능함을 말해준다. 실제로는 우리가 사는 현실이 어떻게 보면 지극히 초현실적이다. The Soothsayer’s Recompense 는 르네상스 그림처럼 사실적으로 그렸는데, 르네상스 그림과 똑같은 재현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데 키리코의 정적인 melancholy 분위기는 은근히 무의식을 끌어낸다. 데 키리코는 당시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작가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Hans Jean Arp 1886-1966, Objects Arranged According to the Laws of Chance/Navels 1930
아프의 구조, 조각 작품으로 그는 1920년대 후반에 뒤늦게 초현실주의에 동참한다. 그는 geometric abstract 과 대비되는 둥근 형태의 biomorphism 을  작품에서 보여 주었고, 아프가 아메바 모양의 organic abstract 에 중요한 역활을 한다. 초현실주의의 2 가지 특징은 데 키리코의 사실적인 style 의 재현과 아프의 둥근 아메바같은 추상이다. 직선을 사용하는 기존의 geometric abstract 를 벗어나, 다른 방법인 organic abstract 를 사용해서 추상을 가져왔다.


Max Ernst 1891-1976
갈라만큼 화려한 인생을 살았고 죽을 때까지 부와 명성을 누렸다.  여러번 결혼을 했고 이름만 들어도 다 알법한 여성들과 살았다. 이들로 인해 advantage 가 있었고 재능과 운대가 맞았다. 막스 에른스트는 Jewish 로서 끊임없이 게쉬타포 Gestapo 의 추적을 받았다. 파리와 독일에서 추적을 당할 때 창문에서 뛰어내린 순간에 Peggy Guggenheim 이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와 함께 미국에 와서 성공 가도를 달린다.   
               
                                 
                            
Max Ernst and Dorothea Tanning                                                   


Peggy Guggenheim
막스 에른스트는 처음에 art critic 인 Louis Strauss 와 결혼하였고, 그 다음엔 Gala 의 애인으로서 브렝통과 함께 ménage a trios 의 관계에 있었고, 페기 구겐하임과 같이 미국에 와서 짧은 결혼 생활을 했고, 마지막 부인은 미술가인 도로시아 탠닝 이다.

                                  

Gala Dali


Max Ernst, Celebes 1921
Celebes 는 머리가 잘린 여자 석고상과 일상에 없는 괴물 형체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림 안에 제3의 새 물질을 만들어 내는 변형 metamorphosis을 가져왔다.  
                                         
 

Max Ernst, The Blessed Virgin Chastises the Infant Jesus 1926
사실주의적 그림이며, 기존 서양 예술 icon 에 대한 모욕이 소재가 되었다. Pieta 를 풍자 parody 한 것이다.  성모 마리아가 3명의 증인 브렝통, 엘리아르, 본인 에른스트 앞에서 아기 예수를 혼을 내고 있다. 꼭 끼는 옷과 빨강색은 마리아를 그릴 때는 쓰지 않았다. 지고 지순한 성모마리아의 story 를 뒤집어 낸다. 낯설은 모습의 마리아를 보여 주면서 사람들의 느낌을 낯설게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낯섬 alienation 을 부정적으로 받아 들인다. ‘나는 이들과 달라’ 내가 사람들에게 낯설게 보이면 나는 그것이 싫다. 어디를 갔을 때 그곳이 낯설면 싫다. Alienation 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Pieta Michelangelo



Max Ernst, The Horde 1927
The Horde  어렸을 때 동전 위에 종이를 놓고 막 칠하면 종이 위에 동전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신기해 하였다. 이것을 frottage, grattage 프로타쥬, 그라타쥬 라고 한다. 화가가 되려면 미대에 가서 basic skill 을 master 하고 잘 그려야만 한다. 그런데 Ernst 는 심지어 아이도 하는 동전 빼끼기 기법을 작품 세계에 끌고 온다. 석고돌에 생명을 불어넣는 신과 같았던 Elite 예술가의 지위 hierarchy를 강등 leveling 시킨다.

예술가 자신이 스스로를 올려놓기 보다는 주변에서 만들어 준다. 지식, 기술을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가진 자에게 지위를 자꾸 만들어  준다. 예술가는 가만히 있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권력의 aura 를 넓혀준다. 그러나Dadaist 뒤샹이나 초현실주의 운동은 반대로 예술가의 지위를 강등하고자 몰두했다. ‘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니 나가서 하지 말고 너나 잘해’

Feminism 에서도 이 점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1970년대에 feminism 운동이 봇물 터지듯 터졌지만 하루하루 나가서 재봉틀을 박아야 밥을 먹는 공장 노동자 여성들은 정작 무관심했다. ‘너나 해, 너나’ ㅡ 그녀들은 feminists 들이 마치 자신들을 상품으로 팔아먹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모순을 Dadaist 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café 에 앉아서 차 마시면서, Karl Marx 를 논하고, 술마시면서 노동자들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공산주의 사회가 올까 등의 담론을 펼쳤다. 이들을 Café Marxist 라고 비아냥거린다. 초현실주의를 보는 두가지 stereotype 이 있는데, 한가지는 ‘저렇게 해도 안돼’ 하는 냉랭한 시선과 ‘저렇게 하면 꼭 이루어 질거야’ 하는 열렬한 시선이 공존했다.

예술가들이 하는 일은 법, 정책을 만드는 정치인과는 다르다. 그들은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 보자’ 하는 것이다. 누구나 한 두번은 사회의 정의니 인권이니 하는 것에 관해 생각한 적이 있고  잠시 동안 가슴아프고 지나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이렇게 낯선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면서 ‘세상이 확확 바뀌지는 않지만 100-200년 후에는 바뀜을 희망으로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너무나 당연시 해 오던 것들을 한 번쯤은 낯설게 바라봅시다.’ 라고 말한다.

대중이 어떻게 움직일까는 아무도 예언하지 못한다. 문예는 2차 대전 후에는 노동자들의 여가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시간이 나면 소설읽고 영화관에 가고 박물관에도 간다. 그들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시간과 돈을 쪼개서 큰 맘먹고 주말에 관람하러 가는데, 가서 불편하고 싶지 않다. 너무 훌륭한 작곡가라고 해서 비싼 티켓을 샀는데, 음악이 이해가 안된다. 아름다운 화음이 아닌 소음처럼 들리고, 내가 접해오던 기존의 melody 가 아니다. 난해하다. 짜증난다.ㅡ 이것이 소시민의 petit bourgeois  딜레마  dilemma 이다.

소시민들은 예술을 느끼고 싶은데, 굵직 굵직한 dialogue 에 이루고 싶은데, 잘 안된다. 20세기 미술은 딱 하나를 말하고 있다.ㅡ ‘불편하세요. 앞으로도 쭉 불편하실 거구요. 그치만 계속 보러 오세요.’ 책도 보고, 문화 강좌도 듣고, 박물관도 다니면서, 그러면 예술가의 삶의 방식, 사고 방식이 조금씩 드러나 보인다. ‘나도 한번쯤 저것 생각해 보았다. Criminal 이 없는 세상, 빈부의 차가 좁아지는 세상은 없을까?’  나는 잠깐 생각하고 지나가지만, 예술가들은 ‘낯섬 alienation’ 을 길게 생각한 사람들이다. 레저 leisure 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들의 예술이 싫을 수도 있다.

 
Max Ernst, Two Children Are Threatened by a Nightingale 1924
뒤샹으로 인해 이제 ready made 는 쉽게 이해된다. 액자를 가져다가 집모양과 울타리 붙이고, 그림은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림과 실제 존재하는 것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Max Ernst, Europe After the Rain 1940-42
도화지 반에 물감을 칠하고 접은 후에 펼치는 기법을 데칼코마니아 decalcomania 라고 한다.  아트에 특별한 skill 이 없어도 예술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Elite 예술가의 자기 반성, 자기 비판이며 예술가가 스스로의 지위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Max Ernst, Surrealism and Painting 1941


Max Ernst, The King Playing with Queen 1944


Joan Miro 1893-1983                                


Joan Miro,  Nude with Mirror 1919
스페인 화가인 후안 미로는 초현실주의에 잠시 동안만 가담하였고, 그렇게 불리는 것도 거부했다. 스페인에서 피카소와 같은 미술학교를 다녔다. 목수와 대장장이 장인의 집안이었으나 몸이 병약하고 마음이 유약한 vulnerable, 민감한 소년이었기에 부모님은 가업을 이끌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시골로 요양을 자주 보낸다. 그곳에서 그림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고, 혼자서 별을 보는 등 낭만주의 Romanticism 에 눈이 뜨인다.


Joan Miro, Dog Barking at the Moon 1926


Joan Miro, Painting 1933


Joan Miro, The Poetess 1940
초현실주의의 biomorphic abstract 가 미로의 그림에 많이 나타난다. Fantasy 와 꿈과 아이들의 세계를 많이 그리며, 그림이 아름답고 예뻐서 일반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미로는 에른스트와 더불어 미국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 의 젊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화폭을 장악하는 추상을 대규모로 그렸으며 color field 를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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