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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이후의 프랑스(2) 10/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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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6,362회 작성일 10-01-28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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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의 근대 미술 6th hour : France after WW1(2)

Surrealism 1923년에 공산당 소속 문학인 앙드레 브렝통 중심의 운동이다. 억눌려 있던 것을 드러내 표현함으로서 초현실주의 예술이 가능해 진다. 새로운 예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 가져다가 현실을 벗어난 것 처럼 보이게 한다.

Automatic Writing (Automatism)  종이를 부채모양으로 접어서 첫번째 사람이 문장이나 단어를 쓴다. 예를 들어 ‘하늘의 햇살이 눈에 부시다’ 를 쓰면 둘째 사람이 이것을 보고 연상되는 말을 쓴다. 이런 식으로 끝 사람까지 다 쓴 다음에 펴서 읽어보면, 말도 안 되는 시가 나온다.  Syntax, grammar 의 철저한 파괴, 해체를 가져오고, 최면 narcotic 에 의존해서 글을 쓴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반 수면 상태에서 글을 썼다.


1차 대전 후의 유럽의 정치적 상황
1918년에 1차 대전이 끝나고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독일이 모든 배상을 약속한다. 독일의 식민지 카멜른이 프랑스로 넘어가고 프랑스는 전 세계의 9%에 이르는 영토확장을 한다. 영국과 막상막하의 식민지를 소유하게 된다. 알제리아, 모로코, 시리아 등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고, 식민지를 소유하는 것이 별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2차 대전후 1960년대 후반까지도 식민지는 여전히 존재했다.

1차 대전 후에 발칸반도와 터키의 오토만 제국이 붕괴하고, 독일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넘어가고 러시아도 소비에트 유니온으로 된다. 그러나 유럽에는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과 2차 대전 발발의 1939년 사이에 1년도 쉬지 않고 전쟁이 있었다.

1919년부터 Poland 는 독일과 러시아등과 계속 전쟁을 했고, 끊임없이 나라가 분활 partition 되었다. Empire 가 무너지고 새로 공화국이 성립되기 시작했고, 소,영,러,프의 이해 관계에 의해서 땅이 분배가 되었다. 이와 같이 끊임없는 작은 전쟁과 더불어 정리가 안되는 상황이었다.

Socialism 과 communism 은 차이가 있다. Socialism 은 막스의 사회주의로서 사회주의가 climax 에 이르면 공산주의가 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반대 개념이 아니며, Karl Marx가 공산주의라는 것은 오해이다.  막스의 socialism 을 진일보시켜서 레닌이 communism 을 끌어낸다. 사회주의는 개인, 공장 주인, 가게 주인이 자신의 재산을 control 하며 나의 개인적 열망에 따라 일을 하되 내가 전부 가지는 것이 아니다. Communism 은 사유재산 private property을 소유할 수 없으며, 일을 개인적 욕망이 아닌 공동의 목표에 따라 한다.

덴마크, 스웨덴은 유럽식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나라이다. 사장이 세금을 워낙 많이 내므로 종업원의 월급과 비슷하다. 나라가 교육비를 지출하니까 교육의 hierarchy 가 없어서 사장 딸과 청소부도 똑같이 승마를 배울 수 있다. 따라서 의사를 한다고 해서 내게 큰 보장이 없고, 수입의 gap 이 크지도 않다. 딱히 merit 이 없으므로 의사를 꼭 할 필요가 없다.

공산주의 communism 에서는  토지가 마을의 공동소유이므로 공동으로 일하고 공동으로 분배를 받는다. 당시 유럽에서는 그게 가능할까 하고 의문을 가졌는데 1917년에 레닌이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했다. 러시아는 국제 사회주의 노동당의 분파로서 볼세비키당이 이미 있었고, 1924년 레닌이 죽을 때까지 여러 당 사이에서 권력 싸움이 계속된다.  스탈린이 정권을 잡자 또한 반 스탈린주의의 트롯츠키파 Trotsky가 생긴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 운영 방식에 대한 차이로 인해 분파간의 갈등과 struggle, 끊임없는 내전이 2차 대전 전까지 계속된다.

일차 대전 이후의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
WW1 이후 프랑스에서는 1920년에 공산당 French Communist Party 가 생긴다. 미테랑 대통령이 이당의 출신이며, 이미 있었던 Socialist Party 와 사회주의 노동당의 분파이며. 현재도 있다.

WW2 직후에 냉전 시대 cold war politics 가 열리고 공산주의, 빨갱이 등의 용어가  생겨난다. 욕망이나 아름다움도 사회에서 받은 가치관과 교육에 의한 것이다.  요즘은  윗저고리 없는 드레스 한복이 시대나 사회적 배경의 영향으로 인해 예뻐 보이지만, 옛날에 나왔었다면 혐오감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WW1 직후에 프랑스에서는 socialism, communism, democracy, capitalism 등이 다 공존했으며, 굉장히 좋게 바라본 개념들이다. 주로 지성인들이 공산당에 가입을 했고 사르트르, 시몬느 보봐르도 공산당이며, 피카소도 파리 공산당에 가입을 한다.

초현실주의 surrealism 은 1923년에 공산당 소속 문학인이 만든 운동이다. 이들은 WW1이전에 프랑스를 지탱했던 이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새 이념을 수립하기를 바랬다. 멀리서 프랑스가 소련을 바라 봤을 때 레닌의 지도 아래 모든 것이 착착 진행되는 듯 했지만, 1924년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나타나니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초현실주의는 문예조직 운동으로 프랑스 정당의 정치인들은 이들을 불편해했다. 소설 하나가, 그림 하나가 무슨 공산당에 도움이 될까 하고 의문시 했다. ‘꿈꾸니?’  정치인들은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에 대하여 negative attitude 를 가졌다. '이런 소설 어때요? 정신 나갔니? 정책을 만들어서 개혁을 해야지'—초현실주의 내부에서도 분열이 막 일어난다. Stalin Communism 하에 트롯츠키가 멧시코로 망명하고, 러시아에서는 스탈린파와 트롯츠키파로 나뉘어 내분이 일어난다.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좌파 지성인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극심하게 일어난다.

한편 WW1 이후  미국은 신흥 부유국으로 서서히 나타난다. WW1 전에는 유럽의 관심은 러시아나 영국의 식민지에 있었지, 미국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아직 서인도 제도나 남태평양에 힘을 안 벋쳤기 때문에 유럽은 미국에 신경이 덜 쓰여졌다.

일차 대전 이후의 프랑스의 예술적 상황
파리 다다가 1919, 1920, 1921년에 주된 예술 운동으로 꽃피다가 1922년에 초현실주의가 힘을 얻는다. 다다가 chance 와 ready made 를 들고와 art 와 non-art 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을 한다.


Man Ray, Dust Breeding 1920 
맨 레이는 New York Dada 의 대표 다다이스트이다. Alfred Stieglitz 가 291 Gallery 를 통해 유럽 아트를 뉴욕에 소개하고, Amory Show 를 통해 Picabia 에 이어, 파리에서 악평을 받았던 Duchamp 이 뉴욕에 오자 그를 중심으로 New York Dada 가 형성된다.   

뒤샹의 Large Glass 는 1915-23 년까지 8년을 걸려서 제작했는데 그 동안 그의 스튜디오에서 놓여져 있었다. 맨레이가 뒤샹의 스튜디오를 방문하던 중 Large Glass 위의 유리와 foil 에  먼지가 쌓이고 쌓인 것을 보고 사진을 찍었다. 예술 작품이니까 먼지를 닦아야지 하는 통념을 깨고, 그냥 ‘chance’ 로 먼지가 쌓인 것을 찍었다. 아티스트의 신적 위치, 레오나도 다빈치가 모나리자에 불어넣은 혼—이제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 예술가의 지위가 강등되고, 예술가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비예술의 category 에 있던 것을 예술 안으로 끌고 와 예술이라고 부른다. 예술이란 것은 태어날 때부터 짠하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index finger 로 가르키는 것처럼 지칭하는 것이 예술이 아니겠는가?  MoMA 에 있으니까 예술로 생각하듯이, 예술은 절대적 정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꾸 형성하고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예술이란 예술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아닌데요,  glass 위의 먼지 제가 안 만들었는데요.’   Man Ray 의 Dust Breeding 은 title 과 작가의 이름을 적었을 뿐인데 institution 에 있으니까 예술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Duchamp, Large Glass,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 1915-23


Francis Picabia, Ideal  1915                     


Man Ray, Gift 1921
Ideal은 피카비아가 생각하는 Alfred Stieglitz 의 초상화이다. 유럽에는  WW1을 통해 산업화가 부정적으로 증명되었다. 스위스시계 정밀산업 등 고도로 발달된 산업화는 탱크, 기계 등 수 많은 부품을 전쟁에 제공했고 유용하게 쓰였다. 그러나 미국의 산업화는 그 반대 였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 공장을 돌리고, 전 후에는 자동차 공장으로 전환하였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미국의 산업화의 산파역활을 하였고 pictorialism 주의를 만들었다. 피카비아와 맨 레이는 미국의 산업화의 영향을 받고, 피카비아가 생각하는 스티글리츠는 Ideal 에서와 같이 쭉 늘어난 카메라와 같은 모습이다. New York Dada 는 유럽의 다다와 달리 정치색이 전혀 없다.

Man Ray 의 Gift 는 인두에 압정을 꽂았다. 음악가 Erik Satie 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만들었으며 1921년의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appeal 하였다. 내가 만들지 않고 사물을 가져온 ready made 오브제 object 이다. 뒤샹이 변기를 가져와서 그냥 전시한 것에서 맨레이, 피카비아는 뒤샹의 idea 를 진일보 시켰다. Object 를 가져와서 변형시켜서 사물의 기능성을 twist 시켰다. 압정을 박음으로 인해서 인두의 기능이 없어진다. 단순한 ready made 라 부를 수 없으며 예술가가 일상적 사물에 개입한다. 뒤샹은 변기가 없어져서 다시 사서 놓았지만, 맨레이의 인두는 없어지면 그가 다시 해야한다. 예술가가 다시 개입을 한다.


First International Dada Fair, Berlin, 1920
다다는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생겼지만 가장 꽃이 핀 나라는 패전국인 독일이다. Berlin, Hanover 의 독일 작가들은 혁명을 일으키고 싶었기에 그들의 다다는 정치적인 색깔이 짙다.. 예술가 한명 한명이 정치적 파도에 휩싸이고, 소련에서는 예술가가 당원이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프롤레타리아 proletariat 와 호흡을 맞추어 예술을 해야 하나를 연구하였다. 전후의 현실 앞에 그들은 한가하게 예술을을 할 수 없었다. 러시아, 독일 상이 군인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선과 색의 균형을 맞추는 고민을 (art for art )할 수가 없었다. 빨리 세상 고민을 해야 하는 이 현실에서 artist 는 dadaist 로 고민에 동참하였다.


Pablo Picasso and Olga Koklova 
일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패전국이 된 후 다리파, 청기사파, 칸딘스키는 잊혀졌으나, 피카소는 여전히 제일 유명했다. 예술가들이 피부로 느끼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레닌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달랐다. 이런 상황에서 피카소는 어느 쪽에도 끼지 않는 이방인이었다. 파리에서 cubism 당시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 Paris Citizen 인   그들에게 전쟁의 trauma 는 컸다. 전쟁에 참전했던 친구 아폴리네르 Apollinaire 는 돌아오지 못 하였고, 또 한 친구 Mark Jacob는 수도승이 된다. 피카소는 무정부주의였으나 Paris Communist Party 에 입당한다. 피카소는 전쟁중인 1917년에 러시아 발레단 무용수 올가와 결혼 생활을 시작하나, 전쟁이 끝나자 헤어지고 싶은 생각이 슬슬 들고 여자 친구가 생긴다.

                
Pablo Picasso, Portrait of Igor Stravinsky 1920                       


Pablo Picasso, Nessus and Dejanira 1920
전쟁 전의 꼴라쥬와 큐비즘은 추상 abstraction 의 취급을 받았으며, 피카소는1907, 1908년에 혁명작 아비뇽의 여인을 내놈으로써 추상에 가장 큰 역활을 하였다. 그러던 피카소가 위의 두 작품을 전쟁 후에 내 놓자 사람들은 추상을 버리고 재현으로 후퇴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 많았다. 올가와 결혼 생활을 하는 피카소는 지중해 별장의 따스한 햇살에서 그림을 그리는 최고의 상류층 생활을 한다. 피카소는 러시아 발레단 순회 공연하는 올가를 쫒아 이탈리아, 로마, 밀란으로 여행을 하며, 무대를 꾸미는 theater design 에 가담을 하고, 가는 곳마다 영웅 대접을 받는다. 많은 예술가들이 피카소를 만나기를 원했으며, 그와 돈독한 우정을 맺으려면 그만큼 똑똑해야 했다. 피카소는 혼자 있어도 너무 바쁘며 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단 한명의 제자도 없다. ‘내 작품 이해 못 해? 그럼 말어’ 붓을 든 순간부터 일평생 동안 단 한번도 천재라는 title 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해 친구들을 잃어버리고 피카소는 또 다른 유명인사 친구들이 생긴다. 새 친구들인 희곡가 playwright Jean Cocteau 와 시인 Paul Eluard 는 피카소의 예술을 대중에게 해설하는 입장에 있었다. 쟝 꼭또는 피카소의 전후의 그림을 ‘질서로의 회귀 Return to Order’ 라고 설명했으며, 그 전까지의 파리, 베를린의 추상운동은 질서와 재현에 반대하는 것이고, 다다도 이성적 사고에 역행한다고 했다. 쟝꼭또는 재현으로의 퇴보가 아니고 질서로의 회귀를 거쳐, 여기서 끝남이 아니라 다시 그것을 재검토 하려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을 결코 설명한 적이 없으며, 주로 dealer 들이 제목을 붙였으며 아비뇽의 여인들도 그의 dealer 가 붙인 이름이다.

      

Pablo Picasso, Three Women at the Spring 1921          


Pablo Picasso, Two Women Running on the Beach 1922
큐비즘을 했던 사람의 그림이라고 믿기 힘들다. 대비가 안 맞고 여자들이 그리스 로마 네로황제 시대의 옷을 입고 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재현으로 퇴보하는 것이 아니냐고 오해를 했지만 재현으로 돌아가는 그림이 아니라 피카소의 예술적 탐구일 뿐이다.

당시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일차 대전 후에 추상을 버리고 재현적 그림으로 돌아왔다. 쟝 꼭또는 도전, 진보 등에 신물이 난다고 하면서, 당시의 보수적 정치적 상황과 연관을 짓고, 추상이 무엇을 기여했나? 반항이 무슨 의미가 있었나? 를 반문하였다. 전후에는 빨리 정리를 하고 정상적 생활로 돌아가서 평화롭고 싶다. 일단 생활부터 정상적 궤도에 올려 놓고 보자—이것이 일반 사람들의 분위기였고 (단 좌파 지식인들은 예외였다.)  예술가들의 분위기도 세상 세계관에 변혁을 버리고 다시 초상화로 돌아 가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카소도 그런 분파라고 생각했다.

피카소의 위의 두그림은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 에 속한다. 피카소는 로마, 이태리 등지를 여행하면서 유적과 건축물, 레오나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에 노출이 된다. 위의 두 그림에서 여자들의 드레스는 고전주의 건축물의 기둥을 본땄다. 피카소는 고전주의의 paradigm 내에서 예술을 새로 공부하고자 했다. 근대화 산업화의 새로운 세상, 로마 이태리에 이런 고전적인 건축물이 널려 있듯이, 두 다른 것이 공존하는 세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15, 16 세기 세상의 이탈리아와 미래파의 큐비즘 비슷한 그림이 같이 있다. 피카소는 산업화의 공간안에 있는 이런 세상에 어떤 예술이 있을 수 있을까를 연구하였다.  

 

Pablo Picasso,Two  Nudes 1906
전쟁 전인1906년의 그림으로 큐비즘의 혁명작 아비뇽의 여인들이 나오기 직전이다. 이와 같이 피카소는 단 한번도 재현을 버리지 않았다. 피카소의 탐구 과정 중에 나온 분파 중의 하나가 큐비즘이었을 뿐, 사람들은 피카소 하면 큐비즘을 연상 하지만 피카소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다.

                             
The Pipes of Pan 1923                                          


Harlequin with Violin 1918
피카소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심이 있었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새로운 것이 보이면 끝까지 탐구했고 신화와 이탈리아의 신고전주의를 묶어서 연구했다. Harlequin with  Violin 에서 보여주듯이, 피카소는 로마 신화 학습을 끝나고 cubism 과 결합을 했다. Harlequin 은 어릿광대라는 뜻으로 피카소는 집시와 유랑극단에 끊임없는 관심을 나타냈다.


Family  of  Saltimbanques   1905                              
전쟁 전이며 큐비즘 전인 1905년 그림이다. 살팀방끄는 떠돌이 공연가, 집시를 의미한다. Rose Period 작품으로 황토색이나 분홍색을 쓰고, 떠돌이 공연가의 가족은 공연 중에도 후에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재미있는 공연에는 관심이 없으며 소외와 고립이 theme 이다.


Pablo Picasso, Three Musicians 1921
Three Musicians 도 자신과 두 친구로 구성된 유랑극단이다. 전쟁에서 죽은 친구 아폴리네르 Apollinaire, 수도승이 된 친구 Mark Jacob, 가운데는 피카소 자신이다. 골라쥬의 이미지를 물감으로 그렸다. 피카소는 한번도 칸딘스키처럼 완벽한 추상을 한 적이 없고 옹호하지도 않았다. 재현과 추상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서로가 도전하는 양식을 취했다. 어떤 하나가 절대적 권력을 가지면 그게 곧 폭력이다. 완전 추상, monochrome, 색면 그림 등은 피카소가 지향하는 예술의 모습이 아니다. 완전한 추상이 힘을 가지면 재현이 미천해 보이고, 완전한 재현이 힘을 가지면 추상이 미천해 보인다. 

피카소가 바라보는 세상은 늘 그렇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도 하나가 절대적인 힘을 가지면 폭력이 된다. 초현실주의 시인 Breton 도 다른 시인과 이념이 맞지 않으면 ‘나가’ 하고 그를 퇴출하였다. 피카소는 보편성과 절대성을 항상 경계하였다. 피카소가 수 많은 예술가 친구에게 느꼈던 감정이 그랬다. 우정이 지속되지 않았고 친구들이 자꾸 변한다. 예술가 친구들 만이라도 open  mind 를 가졌다고 믿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들도 하나에 빠져 들었다. ‘네가 생각하는 공산주의가 법이야?’  젊을 때는 기득권에 도전하는 위치에 있던 예술가가 자신이 기득권을 가지면 변한다. 피카소는 그게 싫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름을 못 받아 들인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절대적 진리이다.’ㅡ 피카소는 여기에 도전한다. 사람들의 평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Pablo Picasso - Studio with Plaster Head 1925
초현실주의가 적극적으로 환영한 그림이다. 그들의 정기 간행물에 피카소의 그림을 싣고 그에게 수많은 love call 을 보냄에도, 피카소는 단 한번도 예술 운동에 가입한 적이 없으며 자신을 초현실주의라고 부르지 않았다. 피카소는 집단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줄을 알고 있으므로, 절대 어느 단체에 개입하지 않았다. 혼자 일함이 편한 사람이다.

피카소는 가담은 안하지만 어디를 가든 노출되는 것을 catch 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천재였다.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파악하고 자세히 보고 있었다. 그는 소설, 시, 음악 연구에 엄청난 관심이 있어서, 친구 혹은 친구들의 운동을 통해서 읽어내고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내놓는 작품이 초현실주의 작가의 작품보다 더 초현실적이며 훌륭했다. ( 피카소는 Braque 의 studio 에 가서 벽지를 그림에 붙인 것을 보고,  그것을 더욱 진일보 시켜 브라크를 제치고 cubism 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Studio with Plaster Head 는 전반적으로 추상이지만 두상, 계단, 건물, 석고상, 책 등 다 알아 볼 수 있다. 오브제 object 를 그림 안으로 들여옴이 초현실주의적이다. 새로운 추상적 개념으로 일상적으로 매일 보는 사물. 현상인데 이상한 느낌을 내뿜어 낸다. 맨레이의 다리미도 상당히 초현실주의이다. 인두는 일상적인 사물이지만 압정을 붙인 인두는 전혀 현실적이 아니다. 초현실주의는 새로운 예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 가져다가 현실을 벗어나게 한다. Studio with Plaster Head는 현실적인 사물이지만 이 그림 안에서는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Surrealism 초현실주의


Andre Breton (1896-1966)


Tristan Tzara (1896-1963)


Andre Breton, Valentine Hugo, Greta Knutson and Tristan Tzara, Exquisite Corpse, 1930
4명의 초현실주의 작가가 자동기술법 automatism 으로 그린 그림이다. Freud 가  현실을 벗어나게 하는 데 중요 역활을 했다. 다다는 현실을 믿지 않으며, 초현실주의는 잠재의식이나 꿈을 들여다 봄으로서 해결하자는 대안을 내놓는다.

Breton 은 일차 대전 중 군의관으로 복무를 하였다. Psychiatrist 로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군인들에게 정신과 치료를 해 주었다. 과거에 한번도 사람을 죽인 경험이 없었던 군인들의 끔직한 trauma 를 상담해 주었다. 프로이드의 technique 을 써서 군인들을 눈을 감게 하고 누워서 이야기하게 한다. 억눌려 있던 것을 드러내 표현함으로서 초현실주의 예술이 가능해 진다.

Exquisite Corpse 는 첫째 사람이 과녁을 그리고, 두번째 사람이 과녁을 보고 연상되는 것을 그리고, 세번째 사람이 두번째 그림을 보고 생각나는 것을 그리고, 이어서 네번째 사람이 그린다. 이것을 automatism 방식이라고 한다. 또한 종이를 부채모양으로 접어서 첫번째 사람이 문장이나 단어를 쓴다. 예를 들어 ‘하늘의 햇살이 눈에 부시다’ 를 쓰면 둘째 사람이 이것을 보고 연상되는 말을 쓴다. 이런 식으로 끝 사람까지 다 쓴 다음에 펴서 읽어보면, 말도 안되는 시가 나온다.  Syntax, grammar 의 철저한 파괴, 해체를 가져오고, 최면 narcotic 에 의존해서 글을 쓴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반 수면 상태에서 글을 썼다.

초현실주의 Surrealism 이 공산주의의 새로운 사상과 연관이 되었다. 기존의 시나 문학작품은 고도의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 아니면 쓸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누구나 시를 쓸 수가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노동자도 자다가 일어나 연상되는 것을 마음대로 쓰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proletariat  문학과 맞물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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