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 중의 스위스/1차 대전 후의 프랑스(1) 10/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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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6,057회 작성일 10-01-28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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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의 근대 미술 5th hour: Switzerland during the WW1 / 6th hour: France after WW1
Zurich Dada (1914-18) 1차 대전 중 1916년에 츄리히에서 휴거볼과 마르셀쟁코가 논센스 poem 가라가네를 perform 함으로서 시작되었고, anti- art, 기존 가치에 대한 전복이 목적이다.
New York Dada (1915-21) 피카비아와 뒤샹이 중심이며, 과학 문물, 새로운 technology 에 관심이 많다.
Berlin Dada (1919-22) 독일의 작가이자 문학가인 리차드 휴얼슨벡은 쥬리히에서 다다운동 하다가 Berlin Dada 를 창시한다.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바이킹 에글링이 함께 참여한다.
Hanover Dada (1919-25) 1920년 대에 Mass media 를 차용했고, 포토 몽탸쥬를 시도한 독릴인 쉬비터즈는 ‘chance’ 의 요인을 사용하여 작품을 한 하노버 다다의 핵심인물이다.
Paris Dada (1919-24) 취리히에서 활동하던 타짜라가 전쟁이 끝나 파리로 돌아가서 창시한다.
Bimorphism 둥글둥글한 아메바같은 추상 organic abstract 를 가르킨다. (직선으로 그리는 것을 geometric abstract 이라 함)
Readymade 뒤샹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object 를 예술에 들고 들어오며 작가의 authorship 을 배제시킨다.
5th hour: Switzerland during the WW1
Bosnia 영토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영입하자 세르비아를 방문한 오-헝 제국의 왕자가 암살되었고(사라예보의총성), 오-헝 제국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세르비아 지역을 중요시했던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을 하고 러시아 군대의 이동 mobilization 이 시작되자, 독일은 demobilization 할것을 요구하나 러시아가 거부하자 독일은 오헝제국과 연맹을 맺고 전쟁에 참전한다. 한편 프랑스는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잡고, 가장 강대한 군사력의 영국은 처음에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스위스와 벨기에는 중립국 선언을 하고, 독일은 벨기에에게 프랑스 공격을 위해 길을 내달라고 했으나, 벨기에가 거부하자 벨기에를 침략하고 프랑스로 진입한다. 프랑스 수도 파리 함락을 40 마일 앞두고, 삽시간에 밀어부친 독일에게 영국이 위기를 느끼고 전쟁에 끼어드나 별 효과가 없었다.
프랑스에서 upgrade 시킨 tank 가 최초로 모습을 들어내어 전쟁에서 유효하게 쓰이고, 전쟁이 길어질수록 프랑스땅에서 독일군은 불리해지고, 1917년에 결정적으로 미국이 참전을 하자 전세는 역전이 되어 독일은 밀려 나가고 패전을 한다.
마침내 1918년 10월에 휴전이 선포되고 베르사이유 협정 Treaty of Versailles 에 독일은 사인을 한다. 승전국인 프랑스와 영국이 내거는 모든 조건을 수락하여, 독일은 전 책임을 지고 전쟁비용을 부담하고, 독일의 Africa 식민지 카멜른을 프랑스와 영국이 나누어 가지고, 독일의 석탄 생산지를 프랑스에게 넘겨준다. 경제력과 영토를 고스란히 뺏긴 독일-- peace agreement 에 사인을 하고 나오면서 독일의 chancellor 는 ‘이것은 평화 협정이 아니라 20년 동안 휴전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법적인 유형의 제재가 없는 국제 조약-- Hitler 는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안 지킨다. 국제 사회에는 법적 제재의 잣대가 없으며, morality 나 humanity 에 호소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경제 제재 embargo 를 가하는 것이다. 나라 간에는 윤리적 기준보다는 경제적 이해에 의해서 움직인다.
WW1 이후 처리에서 인류의 비극은 다시 시작되고 정확히 20년 후에 WW2 가 터진다. 결국 독일을 심판하는 조약들이 문제가 되어 전쟁이 다시 터진 셈이다. 승전국인 불란서와 영국은 베르사이유 조약이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illusion 을 가졌고 또한 자신들의 나라가 영원한 힘을 가질 줄 알았고, 식민지의 해방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당대의 지성인들은 전쟁이 터지고 나면 사회가 정화 purification 된다고 믿었다. 지성인들은 전쟁을 통하여 종교, 학교, 박물관 등의 기존 paradigm 이 붕괴되면 우리가 원하는 새 세상이 온다고 믿었으나, 실제 전쟁 후 새 세상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시민인 아줌마, 애들이 죽었다는 데에 전쟁의 비극이 있다. 전쟁으로 기존 체제가 무너졌으니, 우리도 예술로 기존 전통을 부수는 전쟁 비슷한 것 하겠다—이것이 바로 Dadaism 이다.
Zurich Dada (1914-18)
Hugo Ball reciting the poem Karawane at the Cabaret Voltaire, Zurich 1916
Hugo Ball reciting the poem Karawane at the Cabaret Voltaire, Zurich 1916
19세기에 유럽의 나라들은 스위스의 중립국 선언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스위스는 말만 중립이지 중립국이라는 미명 아래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빴다. 마피아등과 연관이 된 Swiss Bank 는 악명이 높아지고 유사시에는 Swiss franc 만이 유일한 통화 system 이 된다. ‘우리는 중립이므로 독일이든 뭐든 차별 안 한다’ 그래서 다른 국가들의 미움을 산다. ‘중립’의 의미를 반문하게 하는 나라가 Swiss 이다. Dante 는 말하기를 지옥의 최고 극심한 자리는 어려운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의 자리라고 하였다. 또한 Swiss 는 Alps 산맥의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tunnel 을 가지고 장사를 하여서 이득을 챙겼다.
WW1 이 터지자 독일 예술가들은 스위스의 Zurich 등 유럽 각지로 흩어졌다. 유고발은 Cabaret Voltaire 에서 스위스 아티스트 마르셀 젱코와 함께 ‘Dada’ 운동을 시작한다. 볼테르 café 의 무대에서 유고발은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다다는 아무 meaning 이 없다. 예술가들이 café 에 모여 사전에 칼을 넣어서 펼쳐지는 page 의 첫 단어가 dada 였다. 독어로 아이들이 타고 다니는 말 rocking horse 를 의미하기도 하고, 아무 의미없는 의성어이기도 하다. ‘Dada’ 단어를 뽑은 행위 자체가 말해 주듯이 dada 운동은 우연 chance 를 예술 안으로 끌고 온다.
이 때까지의 모든 예술은 강한 의도, 꿈, 열망, utopia 에 대한 욕심, 재현에 대한 반항심 등등이 동기가 되어 왔다. 그런데 전쟁이 나고 사람이 죽고 모든 것이 처참히 끝이 났다. 그래서 질문을 던진다 ‘의도? 의도를 가짐이 중요해?’ 온갖 위대한 의도를 가지고 예술을 했으나 결과는 파괴만 가져왔다. 그래서 이젠 의도 따위는 생각 안 한다. 오히려 Chance 와 즉흥성을 가지고 예술을 하겠다.
유고 발은 독일의 시인이며 연극 manager 로 생계를 이었으며, 마르셀 젱코가 만든 옷입고, 아무 뜻없는 단어 가라와네 시를 볼테르 café 에서 암송하고 있다. 마르셀 젱코는 예술가들의 performance 를 돕기 위한 도구를 만들었고 유고발과 함께 Zurich Dada 창시자이기도 하다. 유고발의 옹알이 같은 시, 네 명이 악기 없이 움직임만 보여주는 연극, 브라보 하고 박수치는 관객—짜여진 각본없이 일시적으로 하고 만다. 1920년대 시작된 Dada 는 1960-70년대 중요 예술 장르로 자리매김을 한 행위예술 Performance 를 가져온다.
WW1 중인 1916년에 기존 가치인 (rationalism) 합리주의, 이성적 사고등의 해체 움직임이 있었다. Karawane 시는 의성어, 소리의 조합, 음악, 노래 처럼 들리기도 한다. 시인의 시가 무대에 올라와 하는 행위 예술로 한 단계 올라간다. WW1 중에 탄생한 Dada 가 20년후 WW2 후에 Neo-Dada 로 다시 연결되어 performance 로 발전한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캔버스 내에서의 혁명만 주도했을 뿐, 한번도 canvas 를 벗어날 생각을 한 적이 없다. Dada 운동이 나오자 사람들은 ‘이게 뭐야? 시야 연극이야?’ 하고 질문했다. Dada 의 핵심은 장르를 흐리는 것에 있다. 어느 장르에도 안 들어간다. 음악 연주 한다고 해서 갔더니, 악기없이 motion 으로만 즉흥적으로 한다.
1915년에 Zurich Dada 에서 시작한 이 운동은 Berlin Dada, New York Dada, Paris Dada, Hanover Dada 로 퍼지면서 지역마다 예술가들에게 sensation 을 일으켰다. 이 때까지는 그림의 의도나 의미가 무척 중요했으나 1차 대전 이후에 예술가들은 그들의 의도, 계획, 계산이 아무 의미도 주지 못 했음을 깨달았다. 이제 dada 운동하는 시인, 음악가, 미술가들에게는 ‘의도’ 가 하나도 의미가 없다. Utopia 로 가려고 그림을 그렸는데 세상은 전쟁이 터졌고, 엄청난 고뇌와 의미를 가지고 그려봤자 관객들은 ‘아하, 그렇구나’ 하고 끝난다.
6th hour: France after WW1
Paris Dada (1919-24)
Tristan Tzara 1896-1963
타짜라는 취리히에서 다다운동 하다가 WW1후에 파리에 가서 다다를 창시한다. 다다는 도시마다 성격이 틀리고, 1924년에 끝이 난 파리 다다가 마지막 종착지가 되며, 파리 다다가 막을 내리는데 타짜라가 중요한 역활을 한다.
일차 대전 전의 파리에는 아비뇽의 여인들과 큐비즘과 꼴라쥬가 있었다. 전 후에도 파리는 여전히 예술의 중심으로 피카소와 dada 가 활동했고, 1924년에 파리 다다 해체 후에는 초현실주의가 생긴다. 초현실주의의 Salvador Dali 도 2차 대전 전까지 파리에서 활동했다. 초현실주의 Surrealism 의 창시자이자 시인인 Andre Breton 은 강한 성격의 열렬한 공산주의 지지자로 레닌을 연모하였다. 그런데 타짜라가 공산주의에 애매한 태도를 취하자 그가 무대에서 공연할 때 브렝통은 친구들과 함께 타짜라의 performance 하는 무대를 부순다. 친구들 간에도 이념이 다르면 용납을 할 수가 없었다.
Berlin Dada (1919-22)
Viking Eggeling 1880-1925
Viking Eggeling, Diagonal-Symphonie 1924
Richard Huelsenbeck (1892-1974).
바이킹 에글링은 영화감독이자 작가이며 Hans Richter 와 함께 다다적이고 추상적인 영화 Diagonal-Symphonie 를 제작한다. 리차드 휴얼슨벡은 독일의 작가이자 문학가인데 쥬리히에서 다다운동 하다가 Berlin Dada 를 1917년에 창시한다. 자신들의 의견을 알리기 위해 잡지 Dada Almanach 을 위시하여 많은 출판물을 발행했으며, 이는 mass media 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Dada Almanach 에는 유고발의 시, 알아볼 수 없는 그림, 선언서등이 실려있다.
Sophie Taeuber-Arp (1889-1943)
Hans Arp (1886–1966)
독일인 Sophie Taeuber 와 프랑스인 Hans Arp 부부는 Zurich Dada 의 중요 인물이었다. 한스 아프는 이미 유명한 작가였으며 전쟁이 터지자 츄리히에 와서 소피를 만나 결혼한다. 1차 대전 중에 태어난 Zurich Dada 는 무정부주의적 사고를 지향했으며, Dadaist 들은 전쟁 후 각자의 나라에 돌아가서 파리, 베를린 다다를 만든다.
Hans Arp and Sophie Taeuber, (Pathetic Symmetry) embroidery on cotton 1916-1917
아프와 태버의 공동의 textile 작품이다. 아줌마들이 집에서 하는 수는 저급한 것으로 예술작품이라고는 칸딘스키나 마티스도 생각하지 못 했었다. 러시아 여자 화가들이 embroidery 를 예술에 가져오자 신선하고 새로왔고, 이 추상적인 수는 아방가르드의 물결을 타고 needlework 임에도 아트안으로 수용이 되었다. Embroidery 를 정통으로 하는 장인들이 볼 때에는 마치 망친 수 같았으며, 또한 정통 아티스트에게도 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스 아프는 소피 태버를 통해 다양한 medium 에 눈을 뜨고, 태버는 아프를 통해 추상적인 미술 style 을 배우지만, 아프가 더 많이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훌륭한 예술가였던 아프는 태버를 통해 붓, 물감, canvas 없이도 예술 작품이 가능함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인다.
Sophie Taeuber Dada Head 1920
Sophie Taeuber
나무에 색을 칠해 head 를 만들고, 자신의 작품 뒤에서 소피 태버가 사진을 찍었다. 정통 코스를 밟지 않고 기본 터전 없이 예술을 시작한 태버는 처음부터 춤, 그림, 수 등을 다 합쳐서 자유로히 작품을 했고 다른 작가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dada performance 에 dancer 로도 활동을 했다. 정통코스를 밟은 예술가는 혁명을 해도 틀 안에서 이루어지며, 데미안처럼 ‘알’을 깨야지만 다음 단계로 갈 수있다. 그러나 태버처럼 애시 당초부터 틀 밖에 있던 사람은 자유롭다. 아프도 소피를 만나고 나서 알을 깨듯이 붓과 canvas 를 버린다.
Hans Arp, Collage Arranged according to the Laws of Chance 1916-17
태버의 영향으로 틀에서 자유로와진 한스아프는 새 것을 하고 싶은 열망에 자신의 작품을 빡빡 찢어서 공중에 던져 버린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작품의 조각을 풀로 붙여서 collage 작품을 만든다. 피카소는 관객과 puzzle game 을 하기 위해 철저한 계산하에 꼴라쥬를 했지만, 아프는 계산이 없는 우연한 chance 를 예술 안으로 가지고 온다.
아프는 태버를 통해 충격을 받고 높은 단계의 자기 발전을 이루었다. 이때까지는 철저한 계산과 준비가 예술인줄 알았다. 그러나 아프는 우연을 도입해서 예술가의 위치를 중요하지 않게 만들었다. 피카소는 작품을 잉태하는 위대한 신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프처럼 던지면 나도 할 수 있다. 예술의 hierarchy 가 동등 leveling 해졌다. 아프는 계산없이 Laws of chance 를 따랐을 뿐 관객이 이해 못 해도 별 상관이 없다.
Dada 는 collage 에 paradigm 의 shift 를 가져왔다. 유고벨의 Karawane 시 암송은 melody 의 반대 요소인 소음 negative noise 를 시 영역 안에 들고 온다. 소음을 듣기 싫어하는 기존의 idea 를 역행한다.
Dadaist 아프를 통해서 biomorphism 이 소개되었다. 아프는 직선으로 그리는 geometric abstract 를 주로 했는데, 둥글둥글한 아메바같은 추상 organic abstract 를 Fleur Marteau에서 보여준다. 둥글한 추상을 나무 판대기에 그려서 붙였다. 조각인지, 꼴라쥬인지, 그림인지 category 가 애매하다. 이처럼 아프는 태피를 만나서 그전에 없던 것을 자유롭게 시도한다.
New York Dada (1915-21)
Alfred Stieglitz at his gallery “291” in 1934, with a painting by his wife, Georgia O’Keeffe
1차 대전 후 미술세계에 뉴욕이 등장한다. Alfred Stieglitz 는 그의 갤러리 “291” 를 통해서 브라크, 피카소등의 유럽 예술을 뉴욕에 소개한다.
Francis Picabia (French Dadaist/Surrealist 1879-1953)
뉴욕의 Amory Show 를 통해서 유럽의 아방가르드의 작품이 소개된다. 1913년에 열린 아모리쇼에 거부인 프랑스 화가 피카비아가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쇼에 온다. 다른 유럽 화가들은 초청을 받아도 막대한 여행 경비로 인하여 올 수가 없었지만 피카비아는 올 수 있는 유일한 화가였다. 피카비아는 뉴욕 화가들을 만나고 그를 중심으로 유럽의 예술이 소개된다.
Man Ray (1890–1976) with Salvador Dali
Man Ray, Gertrude Stein
피카비아와 친구인 Man Ray 역시 New York Dada 출신이며 상업 사진작가이자 아방가르드 예술가이기도 하며양쪽에서 다 성공을 거둔다.
Marcel Duchamp (1887-1968), 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 2 1912
마르셀 뒤샹은 뒤샹피엔 Duchampian (뒤샹스러움, 다다적)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아주 중요한 New York Dadaist 이다. 뒤샹이 뉴욕에 나타나 압도하자 그를 중심으로 화가들이 뭉쳤다.
Nude Descending a Staircase는 motion 의 연속 동작으로 futurist 와 비슷하다. 당시의 신기술, 사진 도입의 영향을 받았다. 뒤샹과 피카비아는 modern machine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사진, 기계, 볼트, 전구등의 technology 에 관심을 가졌다. Nude Descending a Staircase 같은 이런 류의 그림은 유럽에서 한물간 취급을 받았고 피카소의 큐비즘을 잘못 이해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파리에서 미천한 작가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뉴욕 아모리쇼에 전시가 되자 한순간에 어마어마한 그림이 나타났다는 평을 받는다.
Marcel Duchamp, Fountain, porcelain urinal 1917
Bicycle and Wheel 1913
뒤샹은 뉴욕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을 착각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이들과 자꾸 gap 이 생김을 느낀다. 한편 뉴욕 예술인들은 뒤샹을 통해 파리의 예술, salon 전 등에 대해 많이 배운다. 그리고 Jury free exhibition 으로 제출만 하면 다 받겠다는 motto 하에 ‘독립 예술가 협회’를 만들었다. 파리의 가을 살롱전 보다 더 liberal 하다. 뒤샹은 거꾸로 세워놓은 변기를 Fountain, porcelain urinal (샘) 이라는 제목으로 제출한다.
어느날 협회로 웬 ‘변기’ 하나가 배달되어 왔다. 이 작품 때문에 난리가 났다. ‘전시 못 하겠다. 왜? 다 받아 준다고 했잖아?' 예술 작품이 아니다. 표절 plagiarism 이다. 난 표절한 게 아니고 샀다.’ 뒤샹의 변기를 놓고 두 파로 의견이 갈렸다. ‘반대한다. 전시 못 한다. 옹호한다. 유약의 색깔이며, 선과 빛이 아름답다.’
뒤샹이 왜 그랬을까? 예술을 정의 내리는 기존의 standard 에 질문을 던지기 위하여 장난을 친 것이다. 예술을 정의하는 조건이 무엇입니까? 첫째, 붓과 캔버스로 하는 것 아닙니까? 둘째, 예술가가 만드는 것 아닙니까? 셋째, 박물관에 들어가 있으면 작품 아닙니까? 기존의 예술을 정의하는 조건에 맞아 떨어지는 나의 변기가 왜 예술 작품이 안됩니까? – 뒤샹의 의도는 사람들이 옳다고 받아 들이는 예술의 정의를 전복시키기 위함이다.
뒤샹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독창적인 작품 이어야 한다는 originality 에 도전했다. 창조주 예술가의 신적 위치를 흔든 것이다. 또한 ready made 를 도입해서 이 작품이 하나 밖에 없다는 신뢰성 authenticity 에 도전장을 던졌다. 뒤샹은 ‘이 둘의 개념을 버리세요. 에술의 주인은 작가가 아니라 바로 관람하는 당신이거든요.’ 하고 말한다. 이는 저자의 죽음 death of author 이며, Tennis match 에서 공이 관객의 court 로 넘어 왔음을 의미한다. 그림을 보는 관객 각자의 느낌이 중요하며, Dada Performance 는 관객의 존재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뒤샹을 위시한 Dadaist 의 업적으로 예술 안에서는 paradigm shift 가 일어 났지만, 바깥 세상에서는 죽네 사네 하며 싸우면서 이들의 예술에 관심이 없었다. 현실에서는 공산주의자, 자본주의 맹산자가 판을 치며, 볼테르 café 의 문을 열고 나가면 Dada 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1917년에 러시아는 일차 대전에서 발을 빼고, 미국은 전쟁에 개입하고 전쟁 덕으로 부자가 된다. 볼테르 café 맞은 편의 inn 에서 살던 레닌이 1917년에 기차를 타고 러시아에 가서 볼세비키 혁명을 주도한다. 러시아 혁명의 소식은 Dadaist 에겐 충격이었다. ‘춥고 공장도 없는 곳에서 utopia 혁명이 일어났다는 거야? 츄리히, 파리, 베를린도 아닌 곳에서?’
당시의 지성인들은 충격과 함께 허무주의에 빠지고 많은 소설가, 시인들이 꿈의 세상인 모스코바로 가서 문학 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1924년에 Stalin 의 출현으로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러시아의 utopia 세계가 퇴색되는 듯 했다. 당시의 혼동스러운 상황에서 일부는 끝까지 Stalin 을 믿고 쫒아 가자는 파와 트롯츠키파와 무정부파로 갈렸다. 이에 따라 프랑스에서도 균열이 생기고 마침내 다다를 때려 치운다. 작가들이 서서히 발을 빼고 1924년에 파리에서 다다는 공중 분해가 된다.
이 혼동 속에서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는 장 꼭도 Jean Cocteau 가 이름한 Return to Order 였다. 사람들이 이제는 질서를 갖고 싶어했다. ‘예술가들의 다다가 짜증나고 추상 못 알아 먹겠다.’ 파리 다다나 초현실주의는 소수 운동에 지나지 않았고 뒤샹은 그들과는 멀리 뉴욕에 있었다.
Marcel Duchamp, Three Standard Stoppages 1913-14
Chance 라는 개념에 대한 실험이다. 한스 아프가 했듯이 공중에서 실을 떨어뜨리고 그 실의 길이를 재는데, 구불구불한 실을 기존의 자로 잴 수가 없다. 구불구불한 자를 새로 만들어서 실의 길이를 재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 자를 만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실을 똑바로 펴라' 라고 한다.
예술의 standard 에 대한 질문이다. 뭐가 이상해 보이면 사람들은 standard 는 그대로 나두고 이상해 보이는 것을 바꾸려고 한다. 여기서 뒤샹은 frame 을 바꾸지 않으려는 attitude 를 공격하고 있다. 그 음악이 이상한 게 아니고 내가 바뀌어야 한다. Madness 광기에 대한 정의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총들고 전쟁에 나가는 사람이 미친 사람일 수도, 말도 안되는 시를 웅얼거리는 사람이 정상일 수도 있다.
뒤샹은 구부러진 실을 보이면서 간단한 방법으로 standard 에 대한 정의를 물어보는데, 사람들은 난해하게 생각한다. 그는 Three Standard Stoppages 에서 ‘chance’ idea 를 발판삼아 몇 단계 진일보 시킨 실험을 하면서, 사람들이 open mind 를 가지기를 원했다.
전쟁이 없어지지 않을까 했지만 그것은 허무맹랑한 생각이었다. 정확히 20년 후에 2차 대전이 터졌고 그 사이에도 피카소의 Gernica 를 낳게한 Spain 내전이 있었다. 유럽에는 평화가 한 순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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