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 이전의 독일제국(1) 9/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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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4,594회 작성일 10-01-28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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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의 근대 미술 2nd hour: German Empire before WW1(1)
German Expressionism 독일표현주의. 1900 년대 초에 독일은 German Expressionism 의 The Bridge (1905-1913), The Blue Rider(1911-1914) 등의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재현에서 표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예술을 통해 민중과 다같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utopia 적 idea 이다.
Die Brucke (the Bridge) 다리파는 1905년에 Dresden 드레스덴에서 형성되었다. 니체의 Zarathustra Said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인간의 Superman 초인 개념이 소개되는데, 인간과 초인 간의 다리 bridge 역활을 하는 인간 개념에서 The Bridge 파가 나온다.
Der Blaue Reiter (the Blue Rider) 청기사파는 Kandinsky 가 주축이 되어 시작했고 다리파와 함께 Avant-garde의 대표 주자이다.
1870년까지 독일은 아직 국가 개념이 아닌 연방제였는데 France Prussian War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1870-1871) 이후에 근대 국가 German Empire 가 형성되었다. 왕 빌헬름 1세의 monarchial system 하에 비스마르크 총리가 철의 정책을 폈고 연방제의 통일을 가져왔다. 따라서16, 17 세기 독일은 각각의 state 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북과 남의 지역에 따라 이념과 문화의 차이가 많다.
1871년 이전에는 이해 관계와 종교가 다른 각각의 state 였으나 France Prussian War 이후에는 강대국인 프랑스와 영국을 의식해서 독일은 빨리 힘을 뭉쳤다. 이 당시는 국제법이 없었으므로 군사력이 센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입해서 종속시키는 것이 쉬운 일이었다. 당시 약소국인 루마니아, 터키를 강대국이 먹을까봐 강대국들끼리 서로 견제했고 땅 따먹기 식으로 조건만 들어주면 눈감아 주곤 했다.
German Empire 형성 과정에 빌헬름 1세 황제 즉위, 비스마르크의 총리 즉위가 이루어지자 외교 관계가 발달하고 독일의 힘이 세어졌다. 독일은 산업화가 잘되고 자원도 많아, 나라의 개념을100-150년 먼저 시작한 프랑스보다 국력이 세어지고 부유해져서 WW1 전까지 영국 다음 강대국은 독일이었다.
독일은 풍부한 자본 덕에 힘이 생겨 외교의 입김이 세지고 프랑스는 식민지를 이용한 부 축척을 위해 멕시코에 눈독을 들인다. 이때는 서로 전보로 통첩만 하면 전쟁이 성립되던 시대였는데 Spain 의 이자벨라 여왕이 죽고 왕위 즉위 문제로 프랑스와 신경전 하던 중 프랑스에 보내는 빌헬름왕의 전보 내용을 비스마르크가 도발적인 말로 바꿔치기를 해서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
France-Prussian War (1870-71)보불전쟁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의 주도권에 종지부를 찍고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제국을 성립시킨 전쟁이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육군이 프로이센을 격파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은 승리를 통해 프랑스에서 실추된 황제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 전쟁을 감행했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총리는 나폴레옹의 야심을 역이용하여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에 남독일 국가들을 끌어들여 강력한 독일 제국을 형성할 수 있는 호기로 삼았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외교관계는 1870년 7월 프로이센 왕실과 인척관계에 있던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레오폴트 대공에게 스페인 왕위를 넘겨주려던 프로이센측의 시도로 매우 악화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프로이센과 스페인의 반프랑스 동맹 가능성을 내포한 위협으로 보였다.
프랑스 대사는 엠스 온천에서 휴양중인 빌헬름 1세를 방문하여 레오폴트 대공의 왕위 포기에 대한 공식적인 다짐을 받으려고 했다. 빌헬름은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그 전말을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렸다 (엠스전보) 7월 14일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격분시켜 전쟁을 도발시킬 목적으로 전보를 자극적으로 조작하여 공표했다. 프랑스는 5일 뒤 전쟁을 선포했다.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희망과는 반대로 남독일 국가들이 프로이센 편에 서자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Ems Telegram 1870년 7월 13일 프로이센의 엠스(바트엠스)에서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의 총리 비스마르크에게 보낸 전보문으로 비스마르크가 고의로 프랑스 정부를 자극하기 위해 표현을 바꾸어 발표함으로써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7월초 프로이센 왕의 친척인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레오폴트 공이 스페인 왕위 계승 후보로 떠올라 프랑스를 긴장시켰다.
프랑스는 프로이센이 스페인에도 영향을 미치어 프랑스를 위협하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레오폴트 공은 7월 12일 후보에서 물러나겠다고 공표했으나 다음날 프로이센 주재 프랑스 대사 뱅상 베네데티 백작이 엠스에 있는 빌헬름 1세에게 그의 가문에서 스페인 왕위에 후보로 나서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다짐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이 베네데티의 요구를 정중히 거절함으로써 면담이 끝났으나 비스마르크는 이 사건을 묘사한 국왕의 전보를 받은 다음날 내용을 손질해 공표했다. 비스마르크가 손질한 전문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정중함은 전혀 없었으며 서로 상대방을 모욕한 것처럼 비쳤다. 이것이 파리와 베를린 사이에 고조되고 있던 전의(戰意)에 불을 붙여 7월 19일 프랑스는 전쟁을 선포했다. 이 사건은 힘에 의한 해결을 추구하던 프랑스와 프로이센 모두에게 구실을 제공했지만, 비스마르크가 엠스 전보를 실제 내용과 다르게 공표했기 때문에 결국 먼저 전쟁을 선포한 것은 프랑스였다.
1900 년대 초에 독일은 German Expressionism 의 The Bridge (1905-1913), The Blue Rider(1911-1914) 등의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독일 표현주의 말 그대로 재현에서 표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작가들이 예술을 통해 민중과 다같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Utopia 적 idea 이다. 유럽 전반이 추상의 길목에 있었다
청기사파는 Kandinsky 가 주축이 되어 시작했고 다리파와 함께 Avant-garde의 대표 주자이다. 이 아트 그룹들은 그들의 이름으로 선언문, 책들을 발간했으며 그들의 idea 를 일반 대중에게 알려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같이 고민하고자 했다. 문학쪽으로는 낭만주의 Heinrich Heine 하인리이가 있었고 Hermann Hesse 헤르만 헤세의 1906년 소설 Beneath the Wheel(수레바퀴 아래서) 에 독일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1900년대에 독일과 프랑스의 적대감은 커지고 유럽 전반에 유태인에 대한 증오심이 생긴다. 많은 유럽인이 공감을 하는 가운데 유태인 학살이 독일에서 시작된다. Richard Wagner 바그너는 오페라 The Nibelung’s Ring 리벵룬겐의 반지 작곡가로 19세기 독일을 풍미했고 20세기 독일 역사에 중요한 인물이다. 수필가이기도 한 바그너는 유태인에 대한 적대 감정 Anti-Semitism 을 수필집으로 냈다. 당시 독일의 분위기는 반유대감이 팽배했고 바그너는 ‘멘델스존이 유태인으므로 곡이 저 따위이다. 독일 음악의 장래를 위해서 유태인에게 음악 교육을 금해야 하며 유태인을 내쫓아야 한다’ 라고 했다. 이런 바그너가 Hitler 의 사랑을 받았음은 당연하다. 이런 식으로 싫어하는 예술, 좋아하는 예술하고 나누면 예술은 순수성을 잃어버린다. 특정 지역 그 시대를 풍미하는 예술은 당시의 사람들이 꿈꾸던 세상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독일의 문화에는 바그너와 Frederick Niche 니체가 있었고 그들은 글쓰는 자와 철학자 간의 교감을 나누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에 실망하고 바그너는 니체가 ‘신은 죽었다 (God is dead)’ 라고 기독교에 회의 입장을 표명하자 마침내 절교를 한다. ( 프랑스인 Cezanne 과 Emile Zola 역시 친구 사이였다. 세잔은 말년에 유명해졌을 뿐 salon 전에 150번 출품하고 150번 낙방했다. 그래서 평생을 아버지에게 용돈을 타 썼다. 이런 세잔에게 에밀졸라는 늘 용돈을 주곤 했다. 그런데 에밀졸라가 실패한 천재 화가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자 세잔은 자신이 그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에밀졸라와 절교를 한다.)
또한 Austria 에서 출생한 Freud가 1900년에 꿈의 해석을 출간한다. 이 책이 나오기 전에는 인간심리와 증오심등을 종교라는 큰 틀에서 답을 찾았다. 프로이드는 사람의 심리와 잠재의식, 꿈등을 억눌린 본능과 연결시켜서 그동안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20세기 학문에 전반적인 영향을 끼친 두 대가는 사람의 생각을 분석한 프로이드와 그들의 돈 (경제)를 분석한 Marx 이다. ‘내가 못 사는게 타고난 운명 팔자가 아니라 system 에 문제가 있었구나’ 사람들은 자각을 하기 시작했으며 지적인 system 의 paradigm shift 를 가져왔다.
프로이드는 무의식과 본능에 의거한 행동을 하는 집단 무의식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어떻게 사람들이 Hitler 를 지지했을까’ 개인은 양심적이어도 집단이 되면 비양심적이 되어 사람을 함께 죽일 수 있다. 막스, 프로이드는 독일어로 책을 출판했으며 모든 사상 혁명은 독일에서 일어난다는 대륙 철학을 수립했다. 독일은 비록 나라 형성은 늦지만 철학 사상면은 앞서 있었다. 그러나 배운 놈이 더 무섭다고 결과적으로 독일이 양차 대전을 일으켰다.
WW1 후에도 독일은 사상과 철학에 주도권을 잡았다. Marxist 학자들로 이루어진 Frankfurt School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유명하다. 독일의 기본 문화는 토론 문화와 출판 문화이다. 그들의 신문의 역사는 매우 길며, 각 신문 마다 논조와 색깔이 틀리다. 글 쓰는 것이 전혀 부담감 없는 그들은 노동자 계층의 신문도 많다. 단순히 말과 생각으로는 충분치 않고 반드시 글로 남겨서 같이 생각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동의를 구하고자 묻는게 아니라 당연히 다른 생각임을 알고 차이점을 듣기 위해 묻는다.
학문의 출발은 왜? 이다. 독일은 각자 다르게 생각하는 group 이 널려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많아진다. 주류 신문과 고무신 공장의 노동자 신문 내용은 너무 다르다. 글이 너무 다르니까 서로 질문하고 자신들의 현재 system 을 계속 생각한다. 그래서 그냥 앉으면 얘기 나오고, 의심이 많아짐과 동시에 융통성 또한 많아진다. 논쟁의 준비가 항상 되어있다. 빌헬름, 힛틀러의 탐욕이 아니었더면 독일의 사상적 발전은 엄청났을 것이다. WW2 이후 독일에서는 훌륭한 사상가가 안 나온다. 그들은 양차 대전 후 ‘우리가 더 이상 고민할 필요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Paula Modersohn-Becker (1876 – 1907), Self- Portrait with Camela Branch, 1907
Paula Modersohn-Becker, Self-Portrait, 1906
독일의 화가들은 개인적으로 활동 안 한다. 예술가로 뭉쳐서 그룹 만들고 의견을 모아서 책 내고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추구한다. 그림을 통해 훌륭한 사회를 만듬이 목적이다. 독일에서는 Art 와 Life 는 밀접하게 연관이 되있다. 피카소는 지적인 탐구를 혼자서 하였지만, 독일 화가들이 group 을 만드는 목적은 훌륭한 사회를 위해 예술이 바뀌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림 그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대중과 같이 고민하기를 원했다. 이런 그림을 그리면 utopia 가 온다고 믿었으나 1차 2차 대전 후에 ‘전혀 그럴 수 없다’ 라는 답이 나왔다.
Matisse 의 The Joy of Life 가 1905-6년에 나오자 1908년에 독일 Dresden 에서 전시가 열린다. 파리의 avant-garde 예술은 독일에서 빨리 전시가 되었다. 그리고 셋만 모여도 이에 대하여 토론했다. Modersohn 모더슨은 독일 표현주의 작가이다. 색, 선, 면에 관심이 쏠리고 재현에서 추상 쪽으로 옮겨 갔다. 위의 자화상은 figuration 이지만 배경에 공간감이 없고 풀, 꽃잎등이 평면적이다. 색깔도 재현을 벗어나 파란색으로 나뭇잎을 색칠했다. 이는 고갱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Paula Modersohn, Self-Portrait 여자 nude, 그것도 자신의 nude 를 그린다는 것은 프랑스에서는 상상 조차 할수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여자는 미술세계에 들어오지 못하므로 여자 화가는 아예 없었다. 그런데 독일에서 여자 화가가 자기 nude를 그림으로 그렸다. Nude 가 처음으로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었다. 프랑스의 아비뇽의 여자들이나 삶의 기쁨에서는 제3자의 누드로서 직업 모델을 그린 객체 였었다. 여자 화가가 자기 몸을 그린다는 점에서 독보적 위치에 있었다.
Ernst Ludwig Kirchner (1880 – 1938 ), Girl under a Japanese Umbrella 1906
Ernst Ludwig Kirchner , Self-Portrait with Model 1907
Matisse, Reclining Nude 1907 야수파 마티스의 화려한 색깔이다. 일본우산 아래의 창녀와 비슷하며 평면적이나, 얼굴은 African mask 같고, 터키나 북 아프리카의 남의 나라 여자를 그렸다.
Girl under a Japanese Umbrella 프로이드의 핵심인 인간의 성이 주제이며 당시에는 아주 충격적인 그림이었다. Group sex, annul sex 의 장면이 뒤에 있다. 성의 정신적 stress 와 연관지어 불편한 주제를 드러내 놓고 생각해 보자는 의도이다. 이때까지 private 한 영역으로 숨겨왔던 것을 public 의 영역으로 민다. Kirchner는 독일 표현주의의 다리파 화가로서 다리파는1905년에 Dresden 드레스덴에서 형성되었다. 니체의 Zarathustra Said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인간의 Superman 초인 개념을 들고 들어온다. 인간과 초인 간의 다리 bridge 역활을 하는 인간 개념에서 The Bridge 파가 나온다. 다리파는 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했다. 예술가의 의심 그룹으로서 기존 그림 방식과 세상 관점을 의심했다.
니체의 God is Dead 는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모순성을 말하고 있다. 신은 immortal being (영원불멸의 존재) 이므로 죽을 수가 없는데 ‘죽었다’ 한것은 paradox 패라독스이다. 신은 자비의 존재인데 왜 전쟁을 막지 못하나?-- 모순이다. 신은 인간에게 너무나 악 evil 스럽다.—모순이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신을 찾게한다—모순이다. 니체는 신 존재의 모순성을 꼬집었다.
Ernst Ludwig Kirchner, The Street, Dresden, 1908
Ernst Ludwig Kirchner, The Street, Berlin, 1913
도시가 발달하고 homeless, prostitute 계층이 생기고 빈부차가 들어나고 하수구등은 미처 만들지를 못하고 밤문화, 유행들이 생긴다. 산업화 전에는 유행이 없었다. 내가 입는 옷은 선택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주워져 있었다. 이제는 산업화되었으니 돈만 있으면 옷을 산다. 유행하는 같은 옷만 입으면 계급차 빈부차를 덮어준다. 같은 fashion 을 입으면 동등하게 보인다. 그러나 Kirchner 에게는 안타깝게 보였다. 옷사입지 말고 공장 주인과 내 수입과의 차이를 좁히기 위해 system 을 고민해야지. 그래서 그들을 비꼬기 위해 이런 그림을 그렸다. The Street의 사람들은 예쁜 모자, 멋진 코트로 치장했으나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이런게 아니라구요’
Neue Galeries (New Gallery), 1048 Fifth Ave (86th & 5th ) New York
New Gallery 에 가면 양차전 사이의 작품인 키쉬너를 위시한 다리파, 청기사파의 작품등 독일의 movement 의 작품이 다 있다. 고리대금을 해서 돈을 모은 유태인들은 예술의 patron 으로서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그런데 Hitler 가 holocaust 를 통해 유태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소장품을 압수해서 모욕감을 주기 위해1930년에 degenerated art ‘타락한 예술전’을 열었다. 2차 대전 후 유태인들은 이젠 공부로 실력을 쌓기 위해 뉴욕에 와서 학계로 들어가 New York Intellectual 의 99%를 차지했고, 기나긴 소송과 물적 공세를 통해 나치에게 뺏겼던 소장품을 찾아서 New Gallery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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