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砒礵), 그리고 미수 허목과 우암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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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2,689회 작성일 11-11-1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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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속담에 ‘보약은 건강할 때 먹어야 하고 사약은 앓을 때 먹어야 한다’ 라는 말이 있다. 하품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사연이 있다.
아마 ‘사약’ 이라고 하면 우리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선생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우암은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가요 성리학자요 그리고 또한 노론의 영수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삶으로 볼 때, 《소학》을 그대로 실천한 수신 교과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학자의 사표(師表)였던 그는 제주로 유배당하고 다시 이배되어 가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불행은 핑계거리에 걸려드는 법이고, 권력은 뺏고 빼앗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1689년 6월 8일 아침, 83세의 노인에게 사약이 내려진 죄목은 “죄인들의 수괴”였다.
전설로 남아 떠도는 이야기에는, 우암이 사약을 두 번 마시고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세 번째 사약을 먹고는 바로 뒤를 틀어막았다고 한다. 이렇듯 너무도 강건하였던 우암에게 지옥이었을지 또는 치욕이었을지 알 수는 없으나 눈을 부릅뜨고 당해야 했던 이 이야기 속에서 ‘사약은 앓을 때 먹어야 한다’ 라는 말이 시골 노인네들의 고리타분한 말만은 아닌 듯하다. 우암은 말년에 유배지를 전전하며 보냈지만 비교적 건강하게 지냈고, 실제로 사약을 받았을 때 바로 숨을 다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진 것으로 보아 이와 관련된 민간설화의 신빙성도 어느 정도 있어 보인다.
이 이야기는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채록되어 실려 있는 내용 중 하나이다.
우암이 중년에 병이 났는데 좀처럼 낫질 않고 고통만 더해갔다. 할 수 없이 아들한테 일러 허미수 선생의 처방을 받아오라고 하였다. 하지만 우암의 아들은 아직 어려 우암만큼 세상을 알고 있지 않아 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하필이면 정적(政敵)인 허미수에게 약론을 받아오라고 했는지 그 해답을 찾지 못한 채 허미수를 찾아 갔다.
허미수는 설비상(砒礵) 석 냥쭝을 먹으면 깔끔하게 나을 거라고 화제를 지어주었다. 우암은 그대로 지어갖고 오라고 하였지만, 아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만 눈앞에 보여 설마하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풀 수 없었다. 미수의 처방대로 하면 안된다고 결심하며 비상 한냥 쭝을 뺐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우암은 아들이 준대로 먹었지만 신묘하게 일단 완쾌되었다. 아들이 허미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갔을 때, 미수는 우암이 두냥 쭝만 먹은 것을 알고 앞으로 오사(誤死)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마 ‘사약’ 이라고 하면 우리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선생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우암은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가요 성리학자요 그리고 또한 노론의 영수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삶으로 볼 때, 《소학》을 그대로 실천한 수신 교과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학자의 사표(師表)였던 그는 제주로 유배당하고 다시 이배되어 가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불행은 핑계거리에 걸려드는 법이고, 권력은 뺏고 빼앗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1689년 6월 8일 아침, 83세의 노인에게 사약이 내려진 죄목은 “죄인들의 수괴”였다.
전설로 남아 떠도는 이야기에는, 우암이 사약을 두 번 마시고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세 번째 사약을 먹고는 바로 뒤를 틀어막았다고 한다. 이렇듯 너무도 강건하였던 우암에게 지옥이었을지 또는 치욕이었을지 알 수는 없으나 눈을 부릅뜨고 당해야 했던 이 이야기 속에서 ‘사약은 앓을 때 먹어야 한다’ 라는 말이 시골 노인네들의 고리타분한 말만은 아닌 듯하다. 우암은 말년에 유배지를 전전하며 보냈지만 비교적 건강하게 지냈고, 실제로 사약을 받았을 때 바로 숨을 다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진 것으로 보아 이와 관련된 민간설화의 신빙성도 어느 정도 있어 보인다.
이 이야기는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채록되어 실려 있는 내용 중 하나이다.
우암이 중년에 병이 났는데 좀처럼 낫질 않고 고통만 더해갔다. 할 수 없이 아들한테 일러 허미수 선생의 처방을 받아오라고 하였다. 하지만 우암의 아들은 아직 어려 우암만큼 세상을 알고 있지 않아 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하필이면 정적(政敵)인 허미수에게 약론을 받아오라고 했는지 그 해답을 찾지 못한 채 허미수를 찾아 갔다.
허미수는 설비상(砒礵) 석 냥쭝을 먹으면 깔끔하게 나을 거라고 화제를 지어주었다. 우암은 그대로 지어갖고 오라고 하였지만, 아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만 눈앞에 보여 설마하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풀 수 없었다. 미수의 처방대로 하면 안된다고 결심하며 비상 한냥 쭝을 뺐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우암은 아들이 준대로 먹었지만 신묘하게 일단 완쾌되었다. 아들이 허미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갔을 때, 미수는 우암이 두냥 쭝만 먹은 것을 알고 앞으로 오사(誤死)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짧은 이야기는 미수와 우암의 뛰어난 의학적 지식과 당시의 대인배들의 정치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우암이 사약을 받은 죄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쟁이 세상을 뒤덮고 있던 시기에 자신의 병을 치료할 사람으로서 왜 하필 우암은 미수 허목(1595-1682)을 지목하였을까. 더구나 미수 허목은 쫓고 쫒기던 당파인 남인의 영수이었는데 말이다.
우선 그 이유를 들여다 보자. 미수 허목은 나이 50이 넘도록 초야에 묻혀 의학은 물론 제자백가와 예학에 몰두하여 다방면에 일가를 이룬 뒤 63살의 나이에 처음 조정에 나와 재상까지 지낸 인물이다. 두 사람은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제(服制, 상복을 입는 기간)문제로 격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수가 자신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넓은 안목과 깊은 통찰력을 가진 것은 물론, 신묘한 의술을 발휘하여 자신을 완쾌시켜줄 것임을 우암은 이미 알고 있었다. 따라서 창창한 중년인 송시열에게 허목의 의학적 지식은 귀찮은 고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호기였고, 허목에게 송시열은 정치적 사상과 의학적 기지를 펼칠 수 있는 기회였다.
미수는 우암의 질병을 비롯한 의학적 지식수준의 습관까지 파악하고 있었고, 우암 또한 흥미롭게도 미수에 대해 익히 명성을 듣고 있었기에 그 처방을 믿었던 것이다. 허미수는 해박한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송시열의 증세를 ‘동뇨(童尿)로 인한 탈’로 판단하고 서늘해진 사기 기운을 따뜻한 열을 가하여 중화작용을 하도록 설비상 3냥쭝으로 처방을 해주었던 것이다.
우암은 평생 오줌을 먹었다고 한다. 요즘 말하는 요료법을 실행한 것이다. 의서에 따르면, 어린아이의 오줌을 마시게 되면 만 명에 한명도 죽지 않는다고 나와 있다. 오줌은 화(火)를 내리게 함으로써, 오래된 기침, 천식, 폐위를 치료하며, 노채로 갈증이 나는 것을 멎게 하고, 목소리에 힘을 더해준다고 한다. 거기에 비상(砒礵)은 일명 신석(信石)이라고도 하는데 성질은 더우며 맛은 쓰고 시며 독이 있다. 토하게 하는 약으로 쓸 수 있으며 담학을 치료한다. 약으로 쓰는 데는 반드시 식초에 끓여 독을 빼내고 쓴다고 되어 있다.
미수는 우암의 미래에 불어 닥칠 불행도 예지하고, 동뇨와 비상이 성석을 이루어 어떠한 독약에도 끄떡없게 하는 신묘한 의술의 경지를 펼쳤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한 냥 쭝의 비상이 모자랐던 것이다. 따라서 사약을 받았을 때 오래는 버틸 수 있었지만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숙종과의 관계만 악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한 것이다. 송시열의 아들이 어려 그랬겠지만, 아무리 정적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질병으로 찾아간 자를 대놓고 죽이려고 비상을 넣었겠는가.
이 이야기는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에 산 두 학자간의 인간적 아름다움과 신묘한 예지력, 그리고 뛰어난 의학적 경험을 보여준 미담이라 할 수 있겠다. 의가들 처지에서 들으면 배꼽이 빠질 만큼 웃기면서 말도 안되는 얘기라 할 수도 있으리라.
옛 선조들은 선무당처럼 의학을 섣불리 알고 아는 체 한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진단하고 그 흐름을 얼마나 적확하게 알았는지 재상 허미수의 신묘한 의학의 경지위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우선 그 이유를 들여다 보자. 미수 허목은 나이 50이 넘도록 초야에 묻혀 의학은 물론 제자백가와 예학에 몰두하여 다방면에 일가를 이룬 뒤 63살의 나이에 처음 조정에 나와 재상까지 지낸 인물이다. 두 사람은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제(服制, 상복을 입는 기간)문제로 격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수가 자신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넓은 안목과 깊은 통찰력을 가진 것은 물론, 신묘한 의술을 발휘하여 자신을 완쾌시켜줄 것임을 우암은 이미 알고 있었다. 따라서 창창한 중년인 송시열에게 허목의 의학적 지식은 귀찮은 고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호기였고, 허목에게 송시열은 정치적 사상과 의학적 기지를 펼칠 수 있는 기회였다.
미수는 우암의 질병을 비롯한 의학적 지식수준의 습관까지 파악하고 있었고, 우암 또한 흥미롭게도 미수에 대해 익히 명성을 듣고 있었기에 그 처방을 믿었던 것이다. 허미수는 해박한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송시열의 증세를 ‘동뇨(童尿)로 인한 탈’로 판단하고 서늘해진 사기 기운을 따뜻한 열을 가하여 중화작용을 하도록 설비상 3냥쭝으로 처방을 해주었던 것이다.
우암은 평생 오줌을 먹었다고 한다. 요즘 말하는 요료법을 실행한 것이다. 의서에 따르면, 어린아이의 오줌을 마시게 되면 만 명에 한명도 죽지 않는다고 나와 있다. 오줌은 화(火)를 내리게 함으로써, 오래된 기침, 천식, 폐위를 치료하며, 노채로 갈증이 나는 것을 멎게 하고, 목소리에 힘을 더해준다고 한다. 거기에 비상(砒礵)은 일명 신석(信石)이라고도 하는데 성질은 더우며 맛은 쓰고 시며 독이 있다. 토하게 하는 약으로 쓸 수 있으며 담학을 치료한다. 약으로 쓰는 데는 반드시 식초에 끓여 독을 빼내고 쓴다고 되어 있다.
미수는 우암의 미래에 불어 닥칠 불행도 예지하고, 동뇨와 비상이 성석을 이루어 어떠한 독약에도 끄떡없게 하는 신묘한 의술의 경지를 펼쳤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한 냥 쭝의 비상이 모자랐던 것이다. 따라서 사약을 받았을 때 오래는 버틸 수 있었지만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숙종과의 관계만 악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한 것이다. 송시열의 아들이 어려 그랬겠지만, 아무리 정적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질병으로 찾아간 자를 대놓고 죽이려고 비상을 넣었겠는가.
이 이야기는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에 산 두 학자간의 인간적 아름다움과 신묘한 예지력, 그리고 뛰어난 의학적 경험을 보여준 미담이라 할 수 있겠다. 의가들 처지에서 들으면 배꼽이 빠질 만큼 웃기면서 말도 안되는 얘기라 할 수도 있으리라.
옛 선조들은 선무당처럼 의학을 섣불리 알고 아는 체 한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진단하고 그 흐름을 얼마나 적확하게 알았는지 재상 허미수의 신묘한 의학의 경지위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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