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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의약문화의 지문(指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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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1,787회 작성일 11-11-15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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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랫동안 진행해온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단순히 고대사의 영유권 문제에서 나아가 고구려, 발해지역을 중심으로 요동지역과 만주일대에 자리 잡았던 고대문명의 원조 논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한국도 여러 측면에서 대응하고 있지만 학술연구의 범위나 규모에 있어 역부족으로 보인다. 특히 전통과학이나 의약문화에 있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어 고대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토나 국경의 차원에서만 접근해서는 문제의 핵심을 놓치기 쉽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로 의약문화의 계통성을 들 수 있다. 음식이나 의복 못지 않게 의약 역시 강한 전통성을 담지(擔持)하고 있다. 특히 경험적인 요소가 강조되는 전통의약은 삼국시대에 이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고려, 조선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향약의학’으로 꽃을 피우게 된다. 역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향약의 원류를 소급해 나가면 고대의약문화의 뿌리에 닿게 될 것이다. 오늘은 그 가운데 하나의 단초로 고구려 의약의 잔영을 쫒아가 보자.
향약(鄕藥) 안에 민족문화의 유전자(遺傳子) 담겨
아주 오래 전의 본초서로 6세기 초엽 도홍경(陶弘景, 451~536)이 지은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注)'나 '명의별록(名醫別錄)'은 현재 저자가 알려진 본초서 가운데서는 가장 오래된 것인데, 여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약물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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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들은 세상에 나온 이후 100여 년간 의가들의 지남서(指南書) 역할을 하다가 당대(唐代)에 이르러 소경(蘇敬) 등에 의해 편찬된 '신수본초(新修本草)'에 그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신수본초'가 나온 659년경에는 당 고종(唐 高宗) 때로 정벌전쟁이 끝나고 한참 당왕조(唐王朝)가 성세(盛世)를 이어갈 때이며, 한반도에서는 통일전쟁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면서 삼국시대가 끝나가던 시기였다.
전54권이나 되는 '신수본초'는 도홍경의 '신농본초경집주'에 114종의 새로운 약물을 더하여 도합 850종의 약재가 실려 있다. 본초 20권과 목록 1권, 그리고 당시 실제 약물의 형상을 묘사한 25권 분량의 약도(藥圖)가 그려져 있었고 도경(圖經)이 7권이 있었다고 하니 분량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공력을 기울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내용면에 있어서도 해외의 여러 주변국과의 무역을 통해 얻은 다양한 약물들이 수재되었는데, 특히 멀리 이슬람국가인 아라비아로부터 여러 가지 종류의 향약(香藥)이 도입되었다. 예컨대 아편(雅片)[阿片, opium]은 이 책에서 처음 기록된 것이다.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테리아카(theriaca)에서 유래된 이 약은 당시 짐승의 쓸개즙으로 만들었다는 대상(隊商)들의 말을 듣고 수류(獸類) 약품으로 분류했는데, 이러한 오류는 곧바로 이시진(李時珍)의 '本草綱目'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이 책은 처음 나온 이후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는데, 한반도와 일본뿐 만아니라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돈황(敦煌) 같은 곳에서도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어 당대(當代)에 매우 영향력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에 이 책이 전해졌다는 기록은 없으나 751년 일본에서 작성된 사본이 현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연히 이에 앞서 신라에 전해져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기는 것이 홍이섭이 '조선과학사'에서 주장한 이래 김두종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通說이다.
잔편(殘片)으로 흩어진 당본초(唐本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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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 오랫동안 약국방(藥局方)으로 널리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송대에 이미 이 책은 망실되어 당신미(唐愼微)가 '증류본초(證類本草)'를 집필할 때 이미 이 책을 볼 수 없었다. 다만 完本은 아니나 돈황의 석굴에서 찾은 殘卷과 일본에 전해진 사본이 남아 근세에 이 사본이 영인되어 유통하게 된 것인데, 무려 1300여 년 전 삼국시대의 약물학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희귀자료이다. 최근 돈황사본 가운데 원효의 '金剛三昧經論疏'가 발견되어 화제이다.
'신수본초' 잔본(殘本) 가운데도 삼국시대 본초학의 잔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예컨대 대표적인 것으로 무이(蕪夷) 조[木部中品卷第13]에는 “今唯出高麗, 狀如楡莢, 氣臭如犭迅, 彼人皆以作醬食之, ……”라 하여 약초의 특성은 물론 이것으로 장을 담가 먹는 고구려인의 관습까지 소개해 놓아 당시 고구려의 음식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또 금설(金屑)[玉石等部中品卷第4]조에는 “又高麗扶南, 及西域外國成器, 金皆煉熟可服.”이라 하여 고구려에서 복용이 가능한 금설을 제조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은설(銀屑)[玉石等部中品卷第4]에도 역시 “…… 高麗作帖者, 云非銀鑛所出, (云云)…….”한 언급이 있어 고구려에서 금설이나 은설을 대량 생산해 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원문 가운데 고려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다. 
고구려 특산약초(特産藥草)를 찾아서
다만 현전본에는 결실되어 찾아볼 수 없으나 당신미(唐愼微)의『증류본초』(證類本草)에는 또 다른 고구려 약재가 본서를 인용하여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백부자(白附子)[草部下品之下卷第11]로 “此物本出高麗, 今出諒州巴西, 形似天雄, …….”이라 하여 백부자는 고래로 고구려가 원산지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증류본초』안에는 세신(細辛)이나 오미자(五味子), 관동화(款冬花), 곤포(昆布), 여여(䕡茹), 오공(蜈蚣) 같은 약재가 고려(高麗) 즉, 고구려의 특산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몇 가지 고대 본초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고구려 의약과 본초학의 면모는 다소 단편적인 사실에 불과해 보이지만 분명 독자적인 의약경험을 축적하고 있었으며 자생약초가 해외로 수출되는 등 동아시아 의약교류에 있어서도 매우 비중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북공정을 단순히 압록강 이북, 만주지역의 영토문제라는 편협한 시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잃어버린 고대사의 복원은 오늘로 이어지는 전통문화와 의약경험 속에서도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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