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열정으로 오른 명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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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inceton 댓글 0건 조회 1,718회 작성일 10-08-22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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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회 이끄는 1.5세 및 2세 재미한인들의 잘나가는 이야기
100년이 넘은 우리의 이민역사가 말해주듯 이제 미국 주류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활동하고 있는 한인들이 적지 않다. 이민 1세대 부모님들은 자녀가 미국에서 성장하고 공부해도, 소수인종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자격증’이 있는 전문기술직만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1.5 또는 2세대 코리안-어메리칸들은 미술, 음악, 영화,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야말로 “지독하게” 노력한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한국이라는 두 개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 1.5세, 2세 한인들이 겪은 갈등과 도전적인 정신과 한국인 특유의 열정과 지치지 않는 노력들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구글(Google)의 인터내셔널 웹마스터 데니스 황(황정목)
구글의 디자이너로 고정관념 깨는 재치와 인간미 넘치는 로고 제작
발문
광복절, 삼일절에는 휘날리는 태극기와 무궁화 꽃으로 장식 추석에는 강강수월래, 송편, 보름달, 단풍잎으로 구글디자인
미국과 유럽의 검색엔진 1위인 구글(Google)의 이용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때에 따라 새로운 디자인을 보여주는 구글의 기념일 로고다. Google Doole
(구글 두들)이라고 불리는 구글 기념일 로고의 디자이너는 바로 한국인 데니스 황이다. 유엔이 정한 기념일이나 각 나라의 국경일과 주요 명절, 화가, 음악가의 생일에도 구글의 첫 화면에는 Google 글자를 응용한 재치 있고 인간미 넘치는 화면이 나타난다. 물론 한국의 광복절, 삼일절, 추석, 설날에도 이를 축하하는 Google 응용 디자인이 걸린다. 데니스 황의 정식 직함은 ‘인터네셔널 웹마스터’이다. 전 세계 100여개 나라에 서비스되는 구글의 검색엔진을 점검하고 웹 페이지의 데이터베이스 및 콘텐츠를 각 나라에 맞게 자동화 시키는 프로그래밍 업무도 맡고 있다. 그러나 그는 회사의 메인 캐릭터이자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회사로고를 각종 이벤트나 기념일에 맞게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로 더욱 유명해졌다. 자신의 창의성과 디자인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400여 개의 구글 기념일 로고를 디자인했다. 또한 전세계 웹페이지 총괄관리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구글 인터내셔널 웹마스터’라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는 1주일에 한 개씩 연간 50여개의 구글 두들(Google Doole)이라고 불리는 구글의 로고를 디자인한다.
데니스 황은 중학교까지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 시절이 자신의 디자인의 밑천이라고 말한다.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경기도 과천의 콩나물시루 같던 초등학교를 다니며 교실 뒷자리에서 공책에 빽빽하게 만화를 그리곤 했다. 그래서 부모님과 선생님이 많이 걱정하셨다. 하지만 그때 그렸던 개구리가 지금 구글 로고에서 뛰어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데니스 황은 스탠포드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컴퓨터사이언스를 공부했다. 미국에서 성장했지만 한국어를 잊지 않고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으며 그가 디자인하는 한국 기념일 로고에서는 조국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는 1998년 구글에 인턴사원으로 입사하여 ‘보조 웹마스터’로 일했는데 창립자 래리와 세르게이가 구글 로고를 디자인
해보라는 제안에 최초의 ‘기념일 로고’를 디자인하게 된다. 이 작품은 7월 14일인 프랑스혁명 기념일 ‘Bastille Day’를 상징하는 로고로, Google의 ‘l’자에 프랑스 국기를 달아놓은 것이었다. ‘브랜드와 로고는 고정된 것이다’라는 마케팅 고장관념에 익숙해진 이용자들은 이런 변화가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그의 디자인도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데니스 황은 “일반적으로 회사 로고는 변형시키면 안 된다고 말한다. 실제 코카콜라, 맥도널드 같은 회사는 절대 자사의 로고 디자인을 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글은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중요한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로고 응용도 가능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데니스 황의 구글 로고 디자인을 보면 귀엽고, 재미있고, 인간미가 넘치며 심지어는 감동적이다. 그는 달력을 수시로 보면서 기념해야 할 날을 챙기고, 그와 관련된 공부도 쉬지 않고 한다. ‘지구의 날’같이 유엔이 정한 기념일이나 각 나라의 국경일, 명절과 모차르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빈센트 반 고호, 가스톨 쥘리아, 아인슈타인, 미켈란젤로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로고를 디자인하기 때문이다. 2001년 8월 15일 광복절에는 구글 첫 화면에 무궁화 꽃이 피었고 태극기가 휘날렸다. 지금은 국경일의 경우, 해당 국가의 구글 웹페이지에만 축하로고가 실리지만 그 당시에는 전세계 2억 명의 이용자들이 한국의 광복절 로고를 접한 것이다. 8월 15일은 인도의 국경일이기 때문에 ‘10억 인구를 무시해도 되느냐?”는 인도 사람들의 적잖은 항의도 있었고,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고 “구글이 해킹당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일본인도 많았다고 한다.
많은 항의도 받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한국인으로서 당당하게 모국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는 그는 한해도 빠짐없이 광복절, 삼일절이 오면 구글 한국 웹사이트에 휘날리는 태극기와 무궁화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추석, 설날과 같은 전통 명절에는 한국의 전통색채를 가미한 로고를 만들고 있다. 2005년 추석에는 Google의 ‘e’자 대신 3개의 귀여운 송편이 그려져 있었고, 2006년에는 Google의 ‘oo’자 부분이 강강수월래로 바뀌어 있었고 로고를 클릭하면 추석에 대한 검색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2005년 한글날에는 Google의 ‘o’ 대신 한글 ‘ㅎ’이 자랑스럽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 외에도 미켈란젤로 생일 때 Google 로고를 모두 대리석으로 변신시키고, 아인슈타인 생일 로고는 아인슈타인의 유머스런 얼굴과 그의 방정식을 조합시켰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일날 로고에는 웃는 얼굴의 모나리자가 나타났다. 특히 ‘지구의 날’에는 빙하로 변신한 Google 글씨가 지구 온난화로 녹아내리는 염려스러운 이미지도 있었지만 Google 글자 사이로 다람쥐가 뛰어 놀고 새가 날아다니거나, 계곡과 푸른 나무에 작은 거북이를 등장시켜 보는 사람들에게 작은 쉼터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참고로 웹사이트 www.google.com/holidaylogos.html에는 데니스 황이 1999년부터 현재까지 디자인한 구글 두들이 실려 있다. 데니스 황은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이용자들은 차가운 컴퓨터에서 사람의 향기가 나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이용자들에게 잔재미와 행복을 주는 게 보람이다”라고 말한다.
▲슈퍼맨 닥터 리, 이승복 박사
올림픽금메달리스트 대신 휠체어 탄 의사
발문:
불꽃 같은 희망과 한국인의 긍지 보여줘
“무엇을 하든 조국의 이름 빛내고 싶었다”
뉴욕타임즈, 볼티모어 선, 폭스 TV, AP 통신 등은 “이승복은 사람들에게 불꽃 같은 희망과 한국인의 긍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전했다. 그의 이야기는 K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인간극장”에서 “슈퍼맨 닥터 리”라는 제목으로도 방영
되었다. 2005년 출판된 저서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에서 슈퍼맨 닥터 리는 “조국과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나를 있게 했다. 무엇을 하든 조국의 이름을 빛내고 싶었다… 모든 꿈에는 대가가 있다. 아픔, 좌절, 분노 이 모든 대가를 치러야 꿈이 이루어진다. 나는 사지마비 장애인의 대가를 치렀지만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고 있는 지금 내 삶은 행복하다. 아직도 조국과 부모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나는 열심히 휠체어 바퀴를 돌릴 것이다. 손에 온통 굳은살이 박여 바위처럼 단단해질 때까지…”라고 말했다. 이승복 박사의 성공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데 그의 저서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에 실린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승복의 아버지는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였는데 미국에 가면 한국보다 더 많은 기회가 있다는 말에 이민을 결심한다. 1973년, 여덟 살의 이승복은 초기 이주자들이 많이 정착했던 뉴욕의 플러싱에 첫발을 딛게 된다. 이민 온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부모님들은 일에만 매달리게 돼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지자 어린 두 동생의 공부를 봐주고 돌보는 것은 자연 이승복의 몫이 되어버렸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부모님이 덜 바쁘고, 덜 피곤하기를,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웃으며 저녁식사를 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그러려면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 부모님 고생을 덜어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돈도 많이 벌고 조국 한국의 이름을 빛낼 수 있는,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실 만한 큰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늘 다니던 한인교회 옆에 있는 YMCA를 가게 됐다. 소년 이승복은 거기서 또래 아이들이 수영복 같은 옷을 입고 마루에서 훈련을 받는 모습을 봤는데 처음 보는 신기한 운동들이었다. 몸을 비틀며 공중회전을 하는 아이, 링에 매달려 천천히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아이, 안장에서 하체를 쉼 없이 돌리고 비트는 아이, 새처럼 비행하여 착지하는 아이… 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체조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날 몰래 체조동작을 따라 하는 그의 모습을 본 코치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코치에게 그는 아직 돈이 없어서 등록을 못했지만 꼭 배울 거라고 말했다. 코치는 한참을 노려보더니 클래스에 나와서 체조를 배우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료 청강생 자격을 인정받은 이승복은 그때부터 체조라는 멋진 운동에 빠져들게 되었다. 뉴욕 Zone 3의 시합에서 마루운동 부분 1, 2등을 했고 평행봉과 링에서도 상위 성적을, 1979년 지역경기에서는 금메달을 딴 이승복은 같은 해 마루운동 부문 뉴욕 주 챔피언이 되었다. 1981년 여름, 10학년 때는 전국연합 챔피언십에 출전해 종합성적 3위를 기록, 그 중 마루와 도마는 각각 1등과 2등을 차지하였다. 11학년 가을에는 국제친선 주니어
대회에 참가해 종합성적 3위, 1982년 전미 대회에서는 마루에서 금메달, 도마에서 금메달을 따서 종합순위 3위를 기록하였다. 코치들 사이에서 이승복을 미국 국가대표팀에 넣어보자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에겐 미국 성조기를 달고 마루에 설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고 오로지 한국 선수이기만을 원했다. 어느 날, 코치가 미국에서 열리는 인터내셔널 대회에 한국대표로 출전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그렇게 되면 1986년 아시안 게임은 물론,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문제없이 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림픽 한국대표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얘기에 그는 기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체조에 대한 지나친 열정이 그의 인생을 한순간에 바꾸어버렸다. 1983년 7월 5일, 코치의 말을 어기고 혼자서 마루를 향해 뛰어오른 그는 목을 쭉 늘인 상태로 턱으로 땅을 박았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었다. 성공이 기다리고 있는 그의 밝은 미래가 그 순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C7-C8이라는 종결선언을 받았는데, 이는 일곱 번째 경추 아래로 끊어진 신경들이 다시 붙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의미했다. 그는 평생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없으며, 잘 구부러지지 않는 손가락, 잘 쥘 수 없는 악력으로 살아야 했다.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야 할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의사들의 종결선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꿈이 깨진 순간, 모든 희망은 일순간에 사라졌고 오직 분노만이 그에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자신의 분노의 열기를 재활훈련에 쏟아 부었다. 물리치료 시간이 되면 다른 환자들과는 달리 일찌감치 먼저 일어나 앉아서 조무사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나자 그는 혼자서 휠체어로 병원 곳곳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덕분에 하루 종일 침대에서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바라거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해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슬픔을 느끼기 전에 튼튼한 두 발이 되어준 휠체어를 타고 먼저 찾아 나섰다. 물리치료를 한 지 4개월에 이르자, 그는 사용 가능한 근육들을 거의 모두 쓸 수 있게 되었다. 의사들과 물리치료사들도
C7-C8 환자 중에서 그처럼 재활속도가 빠른 환자는 처음 보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한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 여러 권의 의학 서적들을 찾아 읽었다. 어느 날 조무사 한 명이 그에게 “하워드 러스크 박사의 자서전”이라는 책을 내밀었다. 전문의학 서적들과는 달리 쉽게 쓰인 그 책을 읽으며 그는 자신이 받은 고통스런 모든 재활훈련이 하나하나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의학의 많은 분야들이 육체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데 반해, 재활의학은 육체의 상처뿐만 아니라 정신적 상처, 생명의 양을 늘리는 문제, 그리고 질을 향상시키는 문제까지 두루 관여하는 학문이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꿈을 잃어버린 텅빈 그의 가슴에 새로운 희망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뉴욕대(NYU)를 목표로 잡았다. 장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고 손으로 글씨조차 쓰기 힘들었지만, 불편한 손으로 아슬아슬 휠체어의 바퀴를 돌리며 체조운동에 쏟던 정열을 고스란히 학업으로 돌렸다. 그리고 5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마침내 뉴욕대에 입학했다. 뉴욕대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았을 때 그는 친구들과 교수들, 가족들에게 메디컬 스쿨에 진학하겠다는 의사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당당히 콜럼비아대학에 입학해 공중보건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명문 다트머스 의대를 거쳐 하버드 의대에 들어가 하버드 의대 인턴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 최고의 병원인 존스 홉킨스 병원의 재활의학 수석 전문의가 되었다.
부모님과 조국을 위해 1등으로 살고 싶어 뭐든지 열심히 했던 이승복은 그의 가족들이 모두 미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88서울올림픽 대한민국 대표로 출전하기 위해 국적조차 바꾸지 않을 정도로 애국심이 강했고 부모에 대한 사랑과 효심이 두터웠다. 지금도 그의 한국어 발음은 조금도 어색함이 없다. 어린 시절 그는 한국말을 잊어가는 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동생들이 “형”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놀아주지도 않았다. 지금도 “Robert Lee”보다는 "이승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달라 아테네 올림픽 때는 한국체조 대표팀을 위한 전담의사로 자원했다.
이제 그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아닌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자신의 환자들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과 용기,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주는 "수퍼맨 닥터 리"이다.
▲USC 건축대학원장 이의성 교수
한인 최초의 USC 건축대학원장
발문
도시미학과 환경에 중점, 도시와 어울리는 친환경 건축설계
“LA 한인타운의 개발계획, 한인정서 및 도시환경 고려해야”
코넬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이의성 교수는 2002년 USC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5년간의 교수직을 역임한 뒤 지난해 한인 최초의 USC 건축대학원장으로 선출됐다. 이 교수는 '한인 건축 전공자들은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거의 모두 졸업과 동시에 대형 전문 건축설계업계로 진출하는데 자신은 건축학도 후배양성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다. 그는 또 “건축은 건물을 만드는 것과 건축 문화를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나는 건축문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리고 건축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초학문과 건축의 상업성을 접목시켜야 건축산업의 미래가 구축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산학협동 프로그램을 강화하기 위해 USC는 세계 각국의 정부 및 우수 건축설계 기업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학생들이 다양한 프로젝트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산학협동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은 단순히 학문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학교에 다니면서 이미 현장감을 익힐 수 있는 전문적인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매년 여러 학생들이 유럽, 아시아, 남미 등 세계 현장에 파견되어 현장 견학을 통한 감각을 익힌 뒤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출하는 과정이 있고, 지난해에는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LA시에서 추진중인 LA강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올해는 영국 런던의 서부지역 도시개발과 LA 디지털 MOCA 전시관을 진행하고 있다.
이 교수가 밝히는 건축설계의 미래향방은 ‘도시미학과 환경에 중점을 둔 것’으로 ‘특히 친환경 건축개발’이라고 한다. 그는 “도시환경과 어울리는 건축 프로젝트 개발이 최근의 건축 트랜드이며 향후 건축설계가 나아갈 방향이다”라며, “최근 모든 건축설계는 도시 전체의 미관과 다른 건물들과의 상호연관성과 역할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이는 새로운 도시 창출과 같은 Urban 프로젝트 방식으로 해당지역의 건물과 역사를 모두 익힌 뒤에야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건축과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교수는 한국에서 발생한 국보 1호 숭례문의 전소에 대해 더욱 가슴 아파하면서, “역사는 미래로 가기 위한 밑거름이며 중요한 교육자료이기 때문에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소중한 문화재산이 파손된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한 이 교수는 빠르게 변화, 발전하고 있는 LA 한인타운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LA 한인타운에 새로운 개발계획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한인 정서 및 도시환경을 크게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정부와 한인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여 도시전체가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친환경적 건축 개발계획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미국 프로풋볼(NFL) 슈퍼볼 이벤트 총감독 최명현
미 언론, ‘Sammy Lee의 머리와 손끝서 빚어진 완벽한 행사’
미국 NFL 경기장에는 하인즈 워드가 MVP로 활약하고, 경기장 밖에서는 최명현이 NFL 행사 전체를 진두지휘
지난 2월3일 애리조나에서 열린 제24회 미국 프로풋볼(NFL) 슈퍼볼 경기는 1억 명의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기록을 세웠다. 이 가운데서도 최대 규모의 이벤트로 알려진 하프타임 쇼의 총감독은 한인 최명현(미국명 새미 최)이다. 그는 슈퍼볼 하프타임 쇼, 시상식과 같은 모든 실황 행사와 팬 서비스 이벤트를 총감독한다. 이벤트의 음악, 조명, 비디오 등을 연출하고, 쇼에 출연할 스타들을 섭외한다. 슈퍼볼의 하프타임 쇼 같은 대형 행사는 그래미상, 아카데미상, 토니상 시상식을 연출한 최고의 프로듀서들을 고용해 함께 일한다. 또한 꼼꼼한 성격의 최명현씨는 행사 총괄뿐만 아니라 TV에 방영될 광고를 선별하고 광고 순서를 정한다. 슈퍼볼의 광고료는 매년 천문학적인 숫자로 올라가고 있는데 올해는 30초짜리 한 편이 250만 달러였다고 한다.
한인 2세인 그는 뉴욕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볼티모어 타우손주립대학에서 TV 프로덕션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볼티모어에서 유명한 록밴드 ‘크러싱 데이’의 리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그 뒤 음반회사에 취직했으나 1997년 회사가 문 닫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레인저스 게임을 보러 메디슨 스퀘어가든에 갔는데 하프타임에 경기장 중앙에 매달린 초대형 멀티비전에 자신의 얼굴이 잠깐 비쳐졌다. 자신을 찍어준 카메라맨이 누군지 궁금하고 인사도 하고 싶어 카메라 팀이 있는 곳을 찾아간 그는 '폴'이라는 카메라 감독을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폴로부터 MSG에서 사람을 뽑는다며 응시해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최명현은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며칠 뒤 면접을 보러 갔고 면접관에게 '첫 달 봉급은 안 받을 테니 일을 한번 시켜봐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함께 일해보자'며 내게 이벤트 프로덕션 보조를 제안했다. 알고 보니 그는 MSG의 '넘버 2'였던 바비 골드워터 수석 부사장(이벤트 총괄)이었다. 좋아하는 스포츠와 이벤트를 함께할 수 있게 됐으니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보니 인정도 받고 기회가 왔다. 1년 만에 점보트론 제작 책임자로 승진했고 닉스와 레인저스 테니스 경기, 콘서트 등 다양한 행사를 연출했다. 그 뒤 레인저스 이벤트 총감독으로 자리를 옮겨 2년 반 동안 있었다. 레인저스와 닉스는 MSG와 모회사가 같다. 그런데 미 프로 하키리그(NHL)에서 모든 이벤트를 총괄 감독하는 자리를 제안했다. 그 뒤 NHL 주요 경기와 행사를 연출했다.”
NHL의 행사 감독으로 활약하던 그는 NHL 선수들이 노사문제로 파업을 하면서 리그 자체가 무산돼 1년간 경기가 열리지 못했고 일자리를 잃을 처지에 놓였다. 이벤트 기획자로서의 꿈이 꺾일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기회는 시련 뒤에 다시 찾아왔다. 그것도 2004년 슈퍼볼 하프타임쇼에서 자넷 잭슨이 공연 중 상반신 노출사건이 발생한 해프닝이 그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이 사건으로 행사 관련자와 책임자가 문책을 받고 물러났는데 자신을 NHL로 끌어준 골드워터 부사장이 NHL 이벤트 총괄 부사장으로 옮긴 것이다. 그는 이번 슈퍼볼 행사준비를 위해 6개월 이상의 고난도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런 지상 최대의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손발을 맞춰야 하는 ‘팀워크’가 가장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런 노력과 팀워크로 하프타임 쇼에 필요한 3,200스퀘어피트의 무대를 자원봉사자 350명이 6분 만에 만들 수 있는 노하우도 개발했다고 한다. 미국 언론은 경기 킥오프 4시간 전부터 시작된 프리게임 쇼, ‘롤링스톤스’의 하프타임 쇼, 시상식을 ‘Sammy Lee의 머리와 손끝에서 빚어진 완벽한 행사’였다는 찬사를 보냈다.
미국 NFL 경기장에는 하인즈 워드가 MVP로 활약하고 경기장 밖에서는 최명현이 NFL 행사 전체를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에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외과의사인 아버지 최지원씨는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 클래식 기타 등 음악에 소질을 보이더니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며 기뻐했다.
▲X-맨, 배트맨, 허쉬, 슈퍼맨 “For Tomorrow” 만화가 짐 리
거친 명암과 강한 인체구도로 미국 만화계에 새로운 바람
발문
붓으로 그리던 만화, 펜과 잉크로 그리는 새로운 트랜드 만든 장본인 1991년 발매된 “X-Men” 8백만부 판매, 미 만화책 역사상 최고기록
1964년 8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한 짐 리(Jim Lee)는 미국 만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한인 만화가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성장하고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했다. 어린 시절 그가 St Louis Country Day School에 다닐 때부터 친구들은 그가 언젠가는 유명한 만화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기 위해 프린스턴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부전공으로 미술을 공부하면서 어려서부터의 꿈인 만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결국 그는 1986년 졸업하면서 의사의 길을 접고 만화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학 때 심리학을 전공한 것이 후에 아티스트뿐 아니라 스토리라인의 설정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F 펜슬을 이용하여 만화를 그린다는 짐 리는 독특하고 거친 명암과 강한 인체구도를 선보이며 X-men, Superman, Batman과 같은 슈퍼히어로 만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또한 붓으로 그리던 만화를 펜과 잉크로 그리는 새로운 트랜드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그는 미국 만화계에서 주목할 만한 인정을 받기 시작했으며 1990년에는 “Harvey Special Award for New Talent 상”을 받았다. 그의 첫 코믹북 작업은 소규모 만화사에서 출판한 “사무라이 산타”의 표지를 스케치 위에 잉크로 그리는 일이었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마블 코믹스사의 “Alpha Flight”와 “Punisher War Journal” 때문이다. 1989년에는 Uncanny C-Men의 256편의 고정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 당시 미국 만화계의 그림 스타일은 예쁘거나 섬세하기보다는 액션에 치중했는데 짐 리의 등장은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그림이 월트 디즈니의 감성과 기존 만화의 액션이 잘 혼합되었다고 평했다. 즉 멋지고 섬세한 캐릭터의 그림과 다이내믹한 액션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만화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된, 그는 새로운 시리즈 “X-Men”을 크리스 클레어몬트와 함께 작업하게 된다. 1991년 발매된 이 첫 이슈는 8백만 부가 팔렸는데 미국 만화책 역사상 최고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이 후로도 X-Men은 울버린, 매그니토를 포함한 여러 주인공을 표지로 세워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후 짐 리는 이미지 코믹이라는 회사로 옮겨 그의 독창적인 만화 “Wild C.A.T.s”를 발표했는데, 이 시리즈는 폭력성, 선전성에 대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성공을 거두었다. 2003년 DC 코믹사에서 발표한 “Batman: Hush와 Superman”은 다시 한번 빅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짐 리는 만화 매니아는 물론 미국 만화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중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주요 대표작으로는 Alpha Flight, Punisher, War Journal, Uncanny, X-Men, X-Men (vol. 2, ) Wild C.A.T.s, Fantastic Four, Divine Right, Batman #608?619, Superman(vol. 2), All-Star Batman and Robin 등이 있다. 참고로 인터넷 http://groups.msn.com/artofjimlee/gallery.msnw에 들어가면 Jim Lee의 주요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100년이 넘은 우리의 이민역사가 말해주듯 이제 미국 주류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활동하고 있는 한인들이 적지 않다. 이민 1세대 부모님들은 자녀가 미국에서 성장하고 공부해도, 소수인종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자격증’이 있는 전문기술직만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1.5 또는 2세대 코리안-어메리칸들은 미술, 음악, 영화,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야말로 “지독하게” 노력한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한국이라는 두 개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 1.5세, 2세 한인들이 겪은 갈등과 도전적인 정신과 한국인 특유의 열정과 지치지 않는 노력들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구글(Google)의 인터내셔널 웹마스터 데니스 황(황정목)
구글의 디자이너로 고정관념 깨는 재치와 인간미 넘치는 로고 제작
발문
광복절, 삼일절에는 휘날리는 태극기와 무궁화 꽃으로 장식 추석에는 강강수월래, 송편, 보름달, 단풍잎으로 구글디자인
미국과 유럽의 검색엔진 1위인 구글(Google)의 이용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때에 따라 새로운 디자인을 보여주는 구글의 기념일 로고다. Google Doole
(구글 두들)이라고 불리는 구글 기념일 로고의 디자이너는 바로 한국인 데니스 황이다. 유엔이 정한 기념일이나 각 나라의 국경일과 주요 명절, 화가, 음악가의 생일에도 구글의 첫 화면에는 Google 글자를 응용한 재치 있고 인간미 넘치는 화면이 나타난다. 물론 한국의 광복절, 삼일절, 추석, 설날에도 이를 축하하는 Google 응용 디자인이 걸린다. 데니스 황의 정식 직함은 ‘인터네셔널 웹마스터’이다. 전 세계 100여개 나라에 서비스되는 구글의 검색엔진을 점검하고 웹 페이지의 데이터베이스 및 콘텐츠를 각 나라에 맞게 자동화 시키는 프로그래밍 업무도 맡고 있다. 그러나 그는 회사의 메인 캐릭터이자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회사로고를 각종 이벤트나 기념일에 맞게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로 더욱 유명해졌다. 자신의 창의성과 디자인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400여 개의 구글 기념일 로고를 디자인했다. 또한 전세계 웹페이지 총괄관리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구글 인터내셔널 웹마스터’라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는 1주일에 한 개씩 연간 50여개의 구글 두들(Google Doole)이라고 불리는 구글의 로고를 디자인한다.
데니스 황은 중학교까지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 시절이 자신의 디자인의 밑천이라고 말한다.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경기도 과천의 콩나물시루 같던 초등학교를 다니며 교실 뒷자리에서 공책에 빽빽하게 만화를 그리곤 했다. 그래서 부모님과 선생님이 많이 걱정하셨다. 하지만 그때 그렸던 개구리가 지금 구글 로고에서 뛰어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데니스 황은 스탠포드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컴퓨터사이언스를 공부했다. 미국에서 성장했지만 한국어를 잊지 않고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으며 그가 디자인하는 한국 기념일 로고에서는 조국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는 1998년 구글에 인턴사원으로 입사하여 ‘보조 웹마스터’로 일했는데 창립자 래리와 세르게이가 구글 로고를 디자인
해보라는 제안에 최초의 ‘기념일 로고’를 디자인하게 된다. 이 작품은 7월 14일인 프랑스혁명 기념일 ‘Bastille Day’를 상징하는 로고로, Google의 ‘l’자에 프랑스 국기를 달아놓은 것이었다. ‘브랜드와 로고는 고정된 것이다’라는 마케팅 고장관념에 익숙해진 이용자들은 이런 변화가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그의 디자인도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데니스 황은 “일반적으로 회사 로고는 변형시키면 안 된다고 말한다. 실제 코카콜라, 맥도널드 같은 회사는 절대 자사의 로고 디자인을 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글은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중요한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로고 응용도 가능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데니스 황의 구글 로고 디자인을 보면 귀엽고, 재미있고, 인간미가 넘치며 심지어는 감동적이다. 그는 달력을 수시로 보면서 기념해야 할 날을 챙기고, 그와 관련된 공부도 쉬지 않고 한다. ‘지구의 날’같이 유엔이 정한 기념일이나 각 나라의 국경일, 명절과 모차르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빈센트 반 고호, 가스톨 쥘리아, 아인슈타인, 미켈란젤로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로고를 디자인하기 때문이다. 2001년 8월 15일 광복절에는 구글 첫 화면에 무궁화 꽃이 피었고 태극기가 휘날렸다. 지금은 국경일의 경우, 해당 국가의 구글 웹페이지에만 축하로고가 실리지만 그 당시에는 전세계 2억 명의 이용자들이 한국의 광복절 로고를 접한 것이다. 8월 15일은 인도의 국경일이기 때문에 ‘10억 인구를 무시해도 되느냐?”는 인도 사람들의 적잖은 항의도 있었고,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고 “구글이 해킹당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일본인도 많았다고 한다.
많은 항의도 받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한국인으로서 당당하게 모국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는 그는 한해도 빠짐없이 광복절, 삼일절이 오면 구글 한국 웹사이트에 휘날리는 태극기와 무궁화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추석, 설날과 같은 전통 명절에는 한국의 전통색채를 가미한 로고를 만들고 있다. 2005년 추석에는 Google의 ‘e’자 대신 3개의 귀여운 송편이 그려져 있었고, 2006년에는 Google의 ‘oo’자 부분이 강강수월래로 바뀌어 있었고 로고를 클릭하면 추석에 대한 검색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2005년 한글날에는 Google의 ‘o’ 대신 한글 ‘ㅎ’이 자랑스럽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 외에도 미켈란젤로 생일 때 Google 로고를 모두 대리석으로 변신시키고, 아인슈타인 생일 로고는 아인슈타인의 유머스런 얼굴과 그의 방정식을 조합시켰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일날 로고에는 웃는 얼굴의 모나리자가 나타났다. 특히 ‘지구의 날’에는 빙하로 변신한 Google 글씨가 지구 온난화로 녹아내리는 염려스러운 이미지도 있었지만 Google 글자 사이로 다람쥐가 뛰어 놀고 새가 날아다니거나, 계곡과 푸른 나무에 작은 거북이를 등장시켜 보는 사람들에게 작은 쉼터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참고로 웹사이트 www.google.com/holidaylogos.html에는 데니스 황이 1999년부터 현재까지 디자인한 구글 두들이 실려 있다. 데니스 황은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이용자들은 차가운 컴퓨터에서 사람의 향기가 나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이용자들에게 잔재미와 행복을 주는 게 보람이다”라고 말한다.
▲슈퍼맨 닥터 리, 이승복 박사
올림픽금메달리스트 대신 휠체어 탄 의사
발문:
불꽃 같은 희망과 한국인의 긍지 보여줘
“무엇을 하든 조국의 이름 빛내고 싶었다”
뉴욕타임즈, 볼티모어 선, 폭스 TV, AP 통신 등은 “이승복은 사람들에게 불꽃 같은 희망과 한국인의 긍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전했다. 그의 이야기는 K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인간극장”에서 “슈퍼맨 닥터 리”라는 제목으로도 방영
되었다. 2005년 출판된 저서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에서 슈퍼맨 닥터 리는 “조국과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나를 있게 했다. 무엇을 하든 조국의 이름을 빛내고 싶었다… 모든 꿈에는 대가가 있다. 아픔, 좌절, 분노 이 모든 대가를 치러야 꿈이 이루어진다. 나는 사지마비 장애인의 대가를 치렀지만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고 있는 지금 내 삶은 행복하다. 아직도 조국과 부모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나는 열심히 휠체어 바퀴를 돌릴 것이다. 손에 온통 굳은살이 박여 바위처럼 단단해질 때까지…”라고 말했다. 이승복 박사의 성공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데 그의 저서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에 실린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승복의 아버지는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였는데 미국에 가면 한국보다 더 많은 기회가 있다는 말에 이민을 결심한다. 1973년, 여덟 살의 이승복은 초기 이주자들이 많이 정착했던 뉴욕의 플러싱에 첫발을 딛게 된다. 이민 온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부모님들은 일에만 매달리게 돼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지자 어린 두 동생의 공부를 봐주고 돌보는 것은 자연 이승복의 몫이 되어버렸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부모님이 덜 바쁘고, 덜 피곤하기를,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웃으며 저녁식사를 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그러려면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 부모님 고생을 덜어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돈도 많이 벌고 조국 한국의 이름을 빛낼 수 있는,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실 만한 큰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늘 다니던 한인교회 옆에 있는 YMCA를 가게 됐다. 소년 이승복은 거기서 또래 아이들이 수영복 같은 옷을 입고 마루에서 훈련을 받는 모습을 봤는데 처음 보는 신기한 운동들이었다. 몸을 비틀며 공중회전을 하는 아이, 링에 매달려 천천히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아이, 안장에서 하체를 쉼 없이 돌리고 비트는 아이, 새처럼 비행하여 착지하는 아이… 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체조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날 몰래 체조동작을 따라 하는 그의 모습을 본 코치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코치에게 그는 아직 돈이 없어서 등록을 못했지만 꼭 배울 거라고 말했다. 코치는 한참을 노려보더니 클래스에 나와서 체조를 배우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료 청강생 자격을 인정받은 이승복은 그때부터 체조라는 멋진 운동에 빠져들게 되었다. 뉴욕 Zone 3의 시합에서 마루운동 부분 1, 2등을 했고 평행봉과 링에서도 상위 성적을, 1979년 지역경기에서는 금메달을 딴 이승복은 같은 해 마루운동 부문 뉴욕 주 챔피언이 되었다. 1981년 여름, 10학년 때는 전국연합 챔피언십에 출전해 종합성적 3위를 기록, 그 중 마루와 도마는 각각 1등과 2등을 차지하였다. 11학년 가을에는 국제친선 주니어
대회에 참가해 종합성적 3위, 1982년 전미 대회에서는 마루에서 금메달, 도마에서 금메달을 따서 종합순위 3위를 기록하였다. 코치들 사이에서 이승복을 미국 국가대표팀에 넣어보자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에겐 미국 성조기를 달고 마루에 설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고 오로지 한국 선수이기만을 원했다. 어느 날, 코치가 미국에서 열리는 인터내셔널 대회에 한국대표로 출전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그렇게 되면 1986년 아시안 게임은 물론,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문제없이 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림픽 한국대표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얘기에 그는 기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체조에 대한 지나친 열정이 그의 인생을 한순간에 바꾸어버렸다. 1983년 7월 5일, 코치의 말을 어기고 혼자서 마루를 향해 뛰어오른 그는 목을 쭉 늘인 상태로 턱으로 땅을 박았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었다. 성공이 기다리고 있는 그의 밝은 미래가 그 순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C7-C8이라는 종결선언을 받았는데, 이는 일곱 번째 경추 아래로 끊어진 신경들이 다시 붙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의미했다. 그는 평생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없으며, 잘 구부러지지 않는 손가락, 잘 쥘 수 없는 악력으로 살아야 했다.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야 할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의사들의 종결선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꿈이 깨진 순간, 모든 희망은 일순간에 사라졌고 오직 분노만이 그에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자신의 분노의 열기를 재활훈련에 쏟아 부었다. 물리치료 시간이 되면 다른 환자들과는 달리 일찌감치 먼저 일어나 앉아서 조무사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나자 그는 혼자서 휠체어로 병원 곳곳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덕분에 하루 종일 침대에서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바라거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해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슬픔을 느끼기 전에 튼튼한 두 발이 되어준 휠체어를 타고 먼저 찾아 나섰다. 물리치료를 한 지 4개월에 이르자, 그는 사용 가능한 근육들을 거의 모두 쓸 수 있게 되었다. 의사들과 물리치료사들도
C7-C8 환자 중에서 그처럼 재활속도가 빠른 환자는 처음 보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한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 여러 권의 의학 서적들을 찾아 읽었다. 어느 날 조무사 한 명이 그에게 “하워드 러스크 박사의 자서전”이라는 책을 내밀었다. 전문의학 서적들과는 달리 쉽게 쓰인 그 책을 읽으며 그는 자신이 받은 고통스런 모든 재활훈련이 하나하나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의학의 많은 분야들이 육체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데 반해, 재활의학은 육체의 상처뿐만 아니라 정신적 상처, 생명의 양을 늘리는 문제, 그리고 질을 향상시키는 문제까지 두루 관여하는 학문이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꿈을 잃어버린 텅빈 그의 가슴에 새로운 희망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뉴욕대(NYU)를 목표로 잡았다. 장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고 손으로 글씨조차 쓰기 힘들었지만, 불편한 손으로 아슬아슬 휠체어의 바퀴를 돌리며 체조운동에 쏟던 정열을 고스란히 학업으로 돌렸다. 그리고 5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마침내 뉴욕대에 입학했다. 뉴욕대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았을 때 그는 친구들과 교수들, 가족들에게 메디컬 스쿨에 진학하겠다는 의사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당당히 콜럼비아대학에 입학해 공중보건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명문 다트머스 의대를 거쳐 하버드 의대에 들어가 하버드 의대 인턴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 최고의 병원인 존스 홉킨스 병원의 재활의학 수석 전문의가 되었다.
부모님과 조국을 위해 1등으로 살고 싶어 뭐든지 열심히 했던 이승복은 그의 가족들이 모두 미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88서울올림픽 대한민국 대표로 출전하기 위해 국적조차 바꾸지 않을 정도로 애국심이 강했고 부모에 대한 사랑과 효심이 두터웠다. 지금도 그의 한국어 발음은 조금도 어색함이 없다. 어린 시절 그는 한국말을 잊어가는 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동생들이 “형”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놀아주지도 않았다. 지금도 “Robert Lee”보다는 "이승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달라 아테네 올림픽 때는 한국체조 대표팀을 위한 전담의사로 자원했다.
이제 그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아닌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자신의 환자들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과 용기,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주는 "수퍼맨 닥터 리"이다.
▲USC 건축대학원장 이의성 교수
한인 최초의 USC 건축대학원장
발문
도시미학과 환경에 중점, 도시와 어울리는 친환경 건축설계
“LA 한인타운의 개발계획, 한인정서 및 도시환경 고려해야”
코넬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이의성 교수는 2002년 USC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5년간의 교수직을 역임한 뒤 지난해 한인 최초의 USC 건축대학원장으로 선출됐다. 이 교수는 '한인 건축 전공자들은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거의 모두 졸업과 동시에 대형 전문 건축설계업계로 진출하는데 자신은 건축학도 후배양성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다. 그는 또 “건축은 건물을 만드는 것과 건축 문화를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나는 건축문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리고 건축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초학문과 건축의 상업성을 접목시켜야 건축산업의 미래가 구축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산학협동 프로그램을 강화하기 위해 USC는 세계 각국의 정부 및 우수 건축설계 기업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학생들이 다양한 프로젝트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산학협동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은 단순히 학문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학교에 다니면서 이미 현장감을 익힐 수 있는 전문적인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매년 여러 학생들이 유럽, 아시아, 남미 등 세계 현장에 파견되어 현장 견학을 통한 감각을 익힌 뒤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출하는 과정이 있고, 지난해에는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LA시에서 추진중인 LA강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올해는 영국 런던의 서부지역 도시개발과 LA 디지털 MOCA 전시관을 진행하고 있다.
이 교수가 밝히는 건축설계의 미래향방은 ‘도시미학과 환경에 중점을 둔 것’으로 ‘특히 친환경 건축개발’이라고 한다. 그는 “도시환경과 어울리는 건축 프로젝트 개발이 최근의 건축 트랜드이며 향후 건축설계가 나아갈 방향이다”라며, “최근 모든 건축설계는 도시 전체의 미관과 다른 건물들과의 상호연관성과 역할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이는 새로운 도시 창출과 같은 Urban 프로젝트 방식으로 해당지역의 건물과 역사를 모두 익힌 뒤에야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건축과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교수는 한국에서 발생한 국보 1호 숭례문의 전소에 대해 더욱 가슴 아파하면서, “역사는 미래로 가기 위한 밑거름이며 중요한 교육자료이기 때문에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소중한 문화재산이 파손된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한 이 교수는 빠르게 변화, 발전하고 있는 LA 한인타운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LA 한인타운에 새로운 개발계획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한인 정서 및 도시환경을 크게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정부와 한인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여 도시전체가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친환경적 건축 개발계획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미국 프로풋볼(NFL) 슈퍼볼 이벤트 총감독 최명현
미 언론, ‘Sammy Lee의 머리와 손끝서 빚어진 완벽한 행사’
미국 NFL 경기장에는 하인즈 워드가 MVP로 활약하고, 경기장 밖에서는 최명현이 NFL 행사 전체를 진두지휘
지난 2월3일 애리조나에서 열린 제24회 미국 프로풋볼(NFL) 슈퍼볼 경기는 1억 명의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기록을 세웠다. 이 가운데서도 최대 규모의 이벤트로 알려진 하프타임 쇼의 총감독은 한인 최명현(미국명 새미 최)이다. 그는 슈퍼볼 하프타임 쇼, 시상식과 같은 모든 실황 행사와 팬 서비스 이벤트를 총감독한다. 이벤트의 음악, 조명, 비디오 등을 연출하고, 쇼에 출연할 스타들을 섭외한다. 슈퍼볼의 하프타임 쇼 같은 대형 행사는 그래미상, 아카데미상, 토니상 시상식을 연출한 최고의 프로듀서들을 고용해 함께 일한다. 또한 꼼꼼한 성격의 최명현씨는 행사 총괄뿐만 아니라 TV에 방영될 광고를 선별하고 광고 순서를 정한다. 슈퍼볼의 광고료는 매년 천문학적인 숫자로 올라가고 있는데 올해는 30초짜리 한 편이 250만 달러였다고 한다.
한인 2세인 그는 뉴욕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볼티모어 타우손주립대학에서 TV 프로덕션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볼티모어에서 유명한 록밴드 ‘크러싱 데이’의 리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그 뒤 음반회사에 취직했으나 1997년 회사가 문 닫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레인저스 게임을 보러 메디슨 스퀘어가든에 갔는데 하프타임에 경기장 중앙에 매달린 초대형 멀티비전에 자신의 얼굴이 잠깐 비쳐졌다. 자신을 찍어준 카메라맨이 누군지 궁금하고 인사도 하고 싶어 카메라 팀이 있는 곳을 찾아간 그는 '폴'이라는 카메라 감독을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폴로부터 MSG에서 사람을 뽑는다며 응시해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최명현은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며칠 뒤 면접을 보러 갔고 면접관에게 '첫 달 봉급은 안 받을 테니 일을 한번 시켜봐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함께 일해보자'며 내게 이벤트 프로덕션 보조를 제안했다. 알고 보니 그는 MSG의 '넘버 2'였던 바비 골드워터 수석 부사장(이벤트 총괄)이었다. 좋아하는 스포츠와 이벤트를 함께할 수 있게 됐으니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보니 인정도 받고 기회가 왔다. 1년 만에 점보트론 제작 책임자로 승진했고 닉스와 레인저스 테니스 경기, 콘서트 등 다양한 행사를 연출했다. 그 뒤 레인저스 이벤트 총감독으로 자리를 옮겨 2년 반 동안 있었다. 레인저스와 닉스는 MSG와 모회사가 같다. 그런데 미 프로 하키리그(NHL)에서 모든 이벤트를 총괄 감독하는 자리를 제안했다. 그 뒤 NHL 주요 경기와 행사를 연출했다.”
NHL의 행사 감독으로 활약하던 그는 NHL 선수들이 노사문제로 파업을 하면서 리그 자체가 무산돼 1년간 경기가 열리지 못했고 일자리를 잃을 처지에 놓였다. 이벤트 기획자로서의 꿈이 꺾일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기회는 시련 뒤에 다시 찾아왔다. 그것도 2004년 슈퍼볼 하프타임쇼에서 자넷 잭슨이 공연 중 상반신 노출사건이 발생한 해프닝이 그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이 사건으로 행사 관련자와 책임자가 문책을 받고 물러났는데 자신을 NHL로 끌어준 골드워터 부사장이 NHL 이벤트 총괄 부사장으로 옮긴 것이다. 그는 이번 슈퍼볼 행사준비를 위해 6개월 이상의 고난도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런 지상 최대의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손발을 맞춰야 하는 ‘팀워크’가 가장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런 노력과 팀워크로 하프타임 쇼에 필요한 3,200스퀘어피트의 무대를 자원봉사자 350명이 6분 만에 만들 수 있는 노하우도 개발했다고 한다. 미국 언론은 경기 킥오프 4시간 전부터 시작된 프리게임 쇼, ‘롤링스톤스’의 하프타임 쇼, 시상식을 ‘Sammy Lee의 머리와 손끝에서 빚어진 완벽한 행사’였다는 찬사를 보냈다.
미국 NFL 경기장에는 하인즈 워드가 MVP로 활약하고 경기장 밖에서는 최명현이 NFL 행사 전체를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에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외과의사인 아버지 최지원씨는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 클래식 기타 등 음악에 소질을 보이더니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며 기뻐했다.
▲X-맨, 배트맨, 허쉬, 슈퍼맨 “For Tomorrow” 만화가 짐 리
거친 명암과 강한 인체구도로 미국 만화계에 새로운 바람
발문
붓으로 그리던 만화, 펜과 잉크로 그리는 새로운 트랜드 만든 장본인 1991년 발매된 “X-Men” 8백만부 판매, 미 만화책 역사상 최고기록
1964년 8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한 짐 리(Jim Lee)는 미국 만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한인 만화가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성장하고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했다. 어린 시절 그가 St Louis Country Day School에 다닐 때부터 친구들은 그가 언젠가는 유명한 만화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기 위해 프린스턴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부전공으로 미술을 공부하면서 어려서부터의 꿈인 만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결국 그는 1986년 졸업하면서 의사의 길을 접고 만화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학 때 심리학을 전공한 것이 후에 아티스트뿐 아니라 스토리라인의 설정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F 펜슬을 이용하여 만화를 그린다는 짐 리는 독특하고 거친 명암과 강한 인체구도를 선보이며 X-men, Superman, Batman과 같은 슈퍼히어로 만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또한 붓으로 그리던 만화를 펜과 잉크로 그리는 새로운 트랜드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그는 미국 만화계에서 주목할 만한 인정을 받기 시작했으며 1990년에는 “Harvey Special Award for New Talent 상”을 받았다. 그의 첫 코믹북 작업은 소규모 만화사에서 출판한 “사무라이 산타”의 표지를 스케치 위에 잉크로 그리는 일이었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마블 코믹스사의 “Alpha Flight”와 “Punisher War Journal” 때문이다. 1989년에는 Uncanny C-Men의 256편의 고정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 당시 미국 만화계의 그림 스타일은 예쁘거나 섬세하기보다는 액션에 치중했는데 짐 리의 등장은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그림이 월트 디즈니의 감성과 기존 만화의 액션이 잘 혼합되었다고 평했다. 즉 멋지고 섬세한 캐릭터의 그림과 다이내믹한 액션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만화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된, 그는 새로운 시리즈 “X-Men”을 크리스 클레어몬트와 함께 작업하게 된다. 1991년 발매된 이 첫 이슈는 8백만 부가 팔렸는데 미국 만화책 역사상 최고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이 후로도 X-Men은 울버린, 매그니토를 포함한 여러 주인공을 표지로 세워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후 짐 리는 이미지 코믹이라는 회사로 옮겨 그의 독창적인 만화 “Wild C.A.T.s”를 발표했는데, 이 시리즈는 폭력성, 선전성에 대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성공을 거두었다. 2003년 DC 코믹사에서 발표한 “Batman: Hush와 Superman”은 다시 한번 빅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짐 리는 만화 매니아는 물론 미국 만화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중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주요 대표작으로는 Alpha Flight, Punisher, War Journal, Uncanny, X-Men, X-Men (vol. 2, ) Wild C.A.T.s, Fantastic Four, Divine Right, Batman #608?619, Superman(vol. 2), All-Star Batman and Robin 등이 있다. 참고로 인터넷 http://groups.msn.com/artofjimlee/gallery.msnw에 들어가면 Jim Lee의 주요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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