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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훈 박사, 한국최초 초음속 고등훈련비행기 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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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angelica 댓글 0건 조회 3,479회 작성일 11-10-24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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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시절 뽕킴과의 만남
 
 
K.A.I. T-50 고등훈련기 (Golden Eagle)
T-50 개발 의의와 국가 항공산업의 발전방향
전영훈 * 경상대학교 기계항공공학부 교수
 
 
80년대 후반 KTX(Korean Trainer Experimental)-2라는 아명(兒名)을 가졌던 T-50을 개발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공사 18기 전영훈 중령(미국 미시시피주립대학 공학박사, 현 예비역 대령)이었다. 지금도 ‘전영훈’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는 대단한 고집쟁이로 통한다.
 
80년대 후반 한국은 KTX-1으로 불렸던 KT-1을 개발하고 있었다. 89년 국방과학연구소(국과연)에 근무하게 된 전 박사는 기본훈련기에 이어 고등훈련기를 만들자는 안을 만들어 요로에 돌렸다. 이때만 해도 사업비는 생각지 않고 자주국방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많이 강조되던 시절이라 그래도 쉽게 전 박사는 KTX-2 개발안을 만들 수 있었다.
 
그 무렵 공군은 앞으로 30년간 쓸 새 고등훈련기 도입을 검토했다. 이를 안 전 박사는 즉시 한주석 참모차장을 찾아가 “우리 힘으로 고등훈련기를 개발해낼 테니 외국에서 도입하지 말라”고 읍소했다. 개발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고등훈련기를 만들 테니 수입하지 말라는 억지를 부린 것. 그럼에도 한 차장을 비롯한 공군 수뇌부는 이를 받아들여, 고등훈련기는 꼭 필요한 것만 도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90년 공군은 고등훈련기(호크) 20대를 영국의 BAE 사로부터 도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거래가 있기 전 전 박사는 BAE 측과 접촉해 절충교역의 조건으로 ‘BAE는 한국에 고등훈련기 기술을 이전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호크기 도입 계약이 체결되자 즉각 국과연 기술진을 이끌고 영국으로 날아가 설계 기술을 익혔다. 이때 그는 개발할 고등훈련기의 별명을 영어로는 ‘골든 이글’, 우리말로는 ‘황매’로 정했다. 자연 그가 이끈 팀은 ‘황매팀’으로 불리게 되었다.
 
황매팀이 1년 남짓 고등훈련기 설계술을 익히고 돌아온 다음인 93, 공군은 미국의 록히드 마틴(당시는 GD)120대의 KF-16을 도입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이때 절충교역 중의 하나가 록히드마틴은 한국에 고등훈련기 제작기술을 전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황매팀은 다시 미국으로 날아가 더 수준 높은 설계술을 익히게 되었다. 이때 전 박사는 ‘한국형 고등훈련기는 반드시 초음속이 되어야 하고 미국과 공동투자로 공동개발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전 박사는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스타일이다. 그가 초음속기 개발 여론을 일으키자 반대 여론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초음속기를 개발하면 개발비가 높아져 공군은 새 전투기를 도입하는 데 드는 예산이 줄어든다’는 만만찮은 반론이 등장한 것.
 
전 박사는 록히드마틴의 텔업 회장을 만나 “미 공군도 곧 초음속 고등훈련기가 필요해진다. 그러니 한국과 이를 공동개발해 수출하자”라고 설득했다. 이 승부수 덕분에 T-50은 초음속기로 나갈 수 있었다.
 
. 개요
 
현대전의 특성은 항공무기체계가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지난 걸프전이나 중동전을 통하여 여실히 증명된 바 있다. 그러나 이 항공무기체계는 수많은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 조그마한 결함이나 문제가 있어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특징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후속 군수지원능력이 이 무기체계를 실질적인 전투력을 발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자주적인 항공기 개발능력과 후속지원능력이 없으면 항상 무기체계 판매국의 정책이나 의도에 좌우지되기 때문에 사실상 무기체계가 종속되어 독자적인 군사력 운용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항공무기체계 현실은 어떠한가를 살펴보자. 우리의 항공무기체계는 거의 전부를 외국에서 직구매하였기 때문에 판매국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에 전쟁이 발발하여도 판매국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항공전력은 지상에 그대로 세워 놓아야만 되며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것의 좋은 예가 이란-이라크 전쟁이다. 이란은 산유국의 막대한 재원을 바탕으로 미국으로부터 당시 세계 최고의 전투기인 F-14기를 구입하였지만, 팔레비 왕조 붕괴 후 호메이니 정권이 세워진 후 미국과 단교 되었으며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부품공급이 중단되어 그 좋은 항공기를 운용할 수가 없어 막대한 타격을 받은 바가 있다.
 
우리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각국은 보다 성능좋은 항공무기체계를 개발할 뿐만 아니라 이를 개발할 산업기반을 육성하는데 혈안이 되고 있다 T-50 연구개발사업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항공무기체계에 대한 자주능력 향상 그리고 항공산업 육성이란 목표로 출발한 의미있는 사업이다.
 
. 추진경위 및 사업 진행과정
 
. 준비단계
 
초기단계에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직구매를 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되는데 많은 비용으로 왜 개발을 하려고 하느냐? 항공산업이 우리나라에 왜 필요한가 등 무기체계의 독자적 개발필요성이나, 연구개발에 대한 인식부족은 물론이 거니와 우리는 개발할 기술능력이 없다는 등 각종 부정적 인식과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반대의 목소리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개발능력을 쌓는 일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중요했다. 그래서 각종 구매사업의 절충교역으로 기술을 확보하고, 인재양성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하여 영국 BAe(현재 BAE 시스탬즈)로부터 도입한 Hawk기의 절충교역을 통하여 고등훈련기급 설계기술, 시뮬레이터 기술이전과 향후 개발 후 시험비행을 위한 조종사 양성을 추진i.
특히 고등훈련기급 설계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국방과학연구소(이하 국과연) 연구원과 삼성항공(현재 한국항공우주산업주식회사)의 연구원으로 구성된 팀(24)이 영국 BAe사에 파견되어 1월간 고등훈련기 설계기술을 습득하고, 시뮬레이터 기술도 이전받았다. 또한 시험비행 조종사도 양성하여 KT-1 기본훈련기의 시험비행에도 활용하였다.
 
당시 F7X사업(현재에는 KFP사업)의 절충교역을 추진하면서 고등훈련기 겸 경공격기급의 개발기술 이전을 최우선하여 이를 이전받는데 주력하였으며, F-X(KFP)사업이 착수됨에 따라 이에 따른 절충교역으로 고등훈련기 겸 경공격기사업 탐색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 탐색개발단계('92~'95)
 
고등훈련기 겸 경공격기의 탐색개발은 국과연 주도로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 당시의 사업명칭은 황매사업(Golden Eagle Project)으로 국과연, 업체 합동팀(Golden Eagle Team: GET)이 구성되어 미국 텍사스 포트워즈에 있는 록히드사(당시는 제네럴 다이나믹스사)3년간 머물면서 기술을 이전받으며 고등훈련기 겸 경전투기 설계 및 개발을 추진하였다. 황매사업의 개발인력은 초기에 약30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설계가 진척됨에 따라 최고 절정기 때에는 한국 연구원이 약 90, 록히드 기술진이 약 50명 등 총 140여명이 설계에 매진했다.
 
황매사업 착수 후 처음 약 6개월 동안은 소요군의 요구도를 분석하여 정립하는 단계였다. 이때에 고등훈련기를 아음속기로 하느냐, 초음속기로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향후 항공기의 발전추세 및 공군, 그리고 다른 고객의 요구추세등 감안하여 초음속 훈련기로 개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결정이 옳은 방향으로 결정되었다고 본다.요구도 분석 및 정립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그 요구도를 만족시키고 가장 적은 비용으로 성능이 우수하고 효율적인 항공기를 개발하기 위하여 각종 형상에 대하여 성능 및 비용 대 효과를 비교분석하였다.
 
이 개념설계 과정에서는 요구도를 만족시키면서 어느 형상이 가장 적합한가 즉, 주날개를 고익으로 하느냐. 중익으로 하느냐 아니면 저익으로 하느냐, 수직꼬리날개를 하나로 하느냐, 둘로 하느냐, 공기 흡입구를 하나로 하느냐, 둘로 하느냐, 그리고 어느 곳에 위치하는냐 등 여러 요소를 총망라하여 비교검토를 하였다.
 
결론적으로는 고등 및 전술훈련 그리고 필요시 경전투를 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요구사항을 고려하여 날개위치는 중익, 수직꼬리날개는 하나로 하는 등 고등훈련 및 전술훈련(필요시 경전투기로 사용)에 적합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리고 내부 세부계통도 요구도에 가장 적합하고, 비용 대 효과가 우수한 방안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과정속에 연구원들은 그때까지 배운 것을 바탕으로 능력을 향상할 수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또한 탐색개발이 완료된 후 체계개발과 연재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준비도 필요하였다.
 
제 아무리 탐색개발이 성공적이라 하여도 체계개발에 착수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축적한 개발능력도 사장될 수밖에 없고, 체계개발이 착수되더라도 개발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막대한 국가예산이 낭비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철저한 계획수림과 사전준비가 필요하였다.
 
당시 KF-16 전투기를 면허생산하면서 우리나라의 개발능력이나 자원(개발인력, 관련 소프트웨어 및 데이터 등)을 감안할 때 이 사업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서는 록히드의 적극적인 참여여부가 이 사업의 성공에 관건이라고 생각되어 록히드의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록히드사의 Tellup 회장을 초청하여 초음속 훈련기 시장의 장래성과 사업성을 설명하고, 록히드사의 투자를 요청하였다.
 
군용기의 경우 정부가 개발비 전액을 부담하는 것이 당연한 만큼 록히드 역시 그때까지 군용기 개발에 자체자금을 투자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록히드는 T-50(당시 KTX-2)사업의 미래 사업성을 평가한 후 투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체계개발단계에서 록히드의 한국측 파트너는 업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록히드가 이 사업에 투자하는 목적은, 그들은 이미 기술이 확보되어 있기 때문에 기술축적이 아니라 순전히 사업(Business)차원에서 추진하는 만큼 록히드의 파트너 역시 사업을 같이 할 수 있는 업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 사업은 국과연이 주도하고 있었지만, 국과연은 비즈니스 조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둘째 설계는 국과연이 담당하고, 생산은 업체가 담당하는 이원적인 구조는 최종제품에 대한 책임을 누가 담당하는지 모호하고, 비용이 상승하기 때문에 항공기의 개발과 생산을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없으며 다른 나라도 그렇게 개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과연과 같은 정부연구기관과는 공동개발을 할 수 없고, 만일에 국과연과 함께 해야 된다면 록히드사는 투자를 하지 않고 기술지원비를 받고 기술만 지월해 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록히드는 이런 입장을 국방부에 강력히 전달했으며. 국방부 역시 여러 측면을 감안하여 체계개발은 업체가 주도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 체계개발 전환단계
 
(Bridge Program: 단계이전,'96~'97)
 
록히드에 파견되었던 연구팀(Golden Eagle Team)은 탐색개발을 끝내고 돌아왔지만 탐색개발에 이어 체계개발로 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탐색개발은 KFPP사업의 절충교역으로 시작하였고 적은 비용이 들었지만, 체계개발은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데, 자주적인 항공무기체계의 중요성과 이것이 미치는 파급효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많은 개발비(당시 약 16억달러)를 투입하여 고등훈련기를 개발할 필요가 있느냐는 인식이 상존하고 있어 각 주요 부서가 반대의견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두번째로는 소요군의 예산이 한정되어 개발비를 충당하기에 힘이 겨웠기 때문이며 세번째로는 해외 경쟁업체들과 국내 오퍼상들의 로비활동이었다.
 
해외 경쟁업체들과 국내 오퍼상들은 T-50 체계개발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 자사 제품의 판로가 막히고, 새로운 경쟁자가 생기는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흠집을 내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여러가지 문제점을 풀면서 해결해 나가기란 보통 어려운 일들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국가적인 합의(Consensus)가 필요했다.
 
탐색개발을 끝내고 체계개발사업이 착수되지 않으니, 연구원들이 해체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사업비가 없으면 팀이 해체되고. 인력과 개발자료 등이 분산되는 만큼 이를 다시 모은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어서 개발능력을 상실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다행히 체계개발사업에 착수할 때까지 팀을 유지하고, 국과연주도 사업에서 업체주도 사업으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인정되어 단계전환사업을 할 수가 있었다. 이 기간동안 T-50 개발사업이 추진되어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정부기관 및 유관부서를 끊임없이 설득하고, 그 결과 T-50 개발사업에 대한 국가적인 합의가 형성되어 마침내는 체계개발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공군의 강력한 항공무기체계에 대한 자주능력 확보의지가 있었기에 사업착수가 가능하게 되었다.
 
. 체계개발('97-'05)
 
체계개발의 개발주도형태는 업체주도로, 관리형태는 소요군 관리, 국과연 기술지원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T-50사업은 국내항공방위산업 역사상 최초의 업체주도 개발사업인 만큼 처음께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전문인력의 확보문제였다. 탐색개발을 끝내고 기술을 전수받아 돌아온 탐색개발팀(Golden Eagle Team)140명중 약 30명이 주계약 업체인 삼성항공 소속이고, 나머지 인력은 국과연 소속으로 삼성항공에는 전문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여서 초기에는 인력수급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록히드의 기술지원 인력도 예산상의 제약과 록히드 내부사정으로 인하여 원활한지원에 시간이 소요되었다.
 
또한 참여업체들의 관리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삼성항공은 전방동체, 대우는 중앙동체, 대한항공은 후방동체를 제작하게 되어있었다. 주계약 업체가 대우, 대한항공 두 업체를 관리하고 이끌어나가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어 업무의 진척도를 감안할 때 계획된 일정을 준수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더욱이 일정을 준수하지 못하거나. 비용이 상승할 경우 모든 책임은 주계약 업체에게 있어 중대한 결심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삼성항공의 사천공장(현재 한국항공우주산업주식회사 사천1공장)에 대우, 대한항공 등의 인력을 모아 설계하도록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속에서도 참여요원들은 성능은 물론 개발일정과 비용을 충족하기 위해 불타는 정열과 피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개발과정에서 컴퓨터 관리체계(PDM: Product Data Management)와 컴퓨터 목업(COMOK: Computer Muek-up)의 활용은 개발과정에서 발생하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시간을 절감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소요군으로 사업관리를 담당한 공군과 관련 참여기관(국과연, 품관소 등)들의 적극적인 지원도 커다란 기여를 하였으며, 설계과정에서 초빙한 전문가들의 자문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T-50 개발사업에 참여한 모든 관련부처와 기관의 지원에 힘입어 기본설계검토(PDR: Preliminarv Design Review), 상세설계검토(Detail Design Review) 등을 끝내고 제작조립에 들어갔고 마침내는 롤아웃(Roll Out)을 하게 되었다.
 
. 출고식(Roll Out)
 
20011031일 역사적인 T-50의 출고식이 한국항공우주산업() 사천1공장에서 대통령과 각계 중요 인사들을 모시고 거행되었다. 그동안의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땀과 정열로 이루어진 T-50이 그 위대한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람들이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그리고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하여 땀과 노력을 들여 염원하고 기도했던가?
 
아름다운 황금 색깔로 도장이 된 T-50의 멋있고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났을 때 그동안 이를 위하여 노력한 많은 사람들은 남다른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대통령이 축사로 치하를 하셨고 항공산업의 의지를 다시 한 번 천명하셨다.
 
Golden Eagle의 명명식이 함께 이루어졌는데 이는 정말로 뜻깊었다. Golden Eagle이라는 이름은 이 사업이 출발할 때부터 갖고 있던 이름이다.
 
당시 Golden Eagle은 황매로 번역되여 사업명도 황매사업(Golden Eagle Project)이었고 조직의 이름도 황매체계부였다.
 
그리고 탐색개발때 설계를 하기 위하여 록히드사에 파견나간 팀을 Golden Eagle Team이라고 불렀다. 이 사업이 체계개발을 진행해오는 도중 국가적으로 이름을 명명하고자 공군이 전국적으로 공모한 결과, 그때에도 또 다시 Golden Eagle이 당선되었다. KTX-2의 이름은 앞으로 국내수요 뿐만 아니라 국제시장을 고려하여, 그리고 공군의 50년 역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고등훈련기는T-50, 전술입문기와 경공격기는 A-50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 초도비행(First Flight)
 
T-50의 초도비행은 여러 사항을 고려하여 한국항공우주산업()내부행사로 사장. 공군의 항공사업단장과 실무관련자들만 참석하는 행사로 진행되었다. 초도비행 준비는 끝났지만 게릴라성 폭우로 몇 주를 연기해오다 2002820일 오전 10시에 초도비행을 하는 것으로 정했다. 당일 구름이 낮게 깔린 날씨상태로 초도비행을 할 수가 없었다. 초도비행을 할려면 적어도 구름의 높이가 15,000피트이상이어야 한다. 그래서 구름이 벗겨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으며 오후 2시로 연기되었고 그 시각이 되었어도 날씨가 좋지 않아 다시 오후4시로 연기되었고 다시 오후420분으로 역사적인 초도비행이 연기되었다.
 
오후 420T-50 1호기는 활주로 끝으로 서서히 지상활주를 하기 시작하였다. 초도비행의 안전을 위하여 F-16기 두 대가 활주로 끝에 이미 이륙준비중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첫번째 F-16기는 T-50 1호기가 초도비행시 임무수행을 조언하는 것이고 두번째 F-l6기는 초도비행 전 과정을 촬영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T-50 1호기의 호출명은 Frontier 11, 추적기인 F-16기는 각각 Frontier 12, Frontier 13이었다.
 
드디어 Golden Eagle 1호기(Frontier 11)가 최종 점검장소(Last Inspection Area)에서 이륙점검을 끝내고 이륙허가를 받은 후 활주로에 정대한 후 브레이크를 놓고 활주하기 시작하였다.
1호기는 이륙속도가 되자 안정된 자세로 사뿐히 이륙하였다. 이를 보고 있던 모든 참석자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를 치기 시작하였다.
 
정말로 역사적이고 감동스러운 순간이었다.
 
항공기가 그렇게 아름답게 창공을 향해 치솟을 수가 없었다. 초도비행이라 착륙장치는 접지하지 않고 그대로 비행했다.
 
고도 15,000피트 상공으로 올라가 기본적인 조타성 점검, 안정성 점검 및 기타 계통들에 대한 점검을 하기 시작하였다. 시험비행 조종사와 추적기 조종사 그리고 지상통제소의 엔지니어들과의 교신내용을 실시간으로 그대로 지상통제소에서 듣고 화면으로 비행자세를 볼 수가 있었다.
 
항공기의 기본적인 점검을 실시하고 아무 이상이 없자, 착륙패턴으로 돌아와 활주로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활주로에 접근하는 T-50 1호기를 보니 한편으로는 감개무량하고, 한편으로는 무사히 착륙하기를 바라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교차했다. 항공기가 점점 선명해지고 활주로에 접근하기 시작했고 자세는 안정되게 접근을 하였다. 드디어 T-50 1호기가 사뿐히 내려앉자 우뢰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떠나갈듯 했다. 이 순간은 항공산업 역사의 한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이 항공기를 띄우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나? 이 사업초기부터 진행되어온 과정의 힘들었던 일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갔다. 이제는 남은 시험비행을 무사히 잘 끝내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 T-50 개발의 의미
 
. 군사적 의미
 
1990년대 초반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햇볕정책의 영향으로 남북간의 긴장이 완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북한의 미사일, 핵문제와 주변 강국들의 밀집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은 불안한 형편이다.
 
따라서 우리의 자주적인 방위능력 확보는 시급한 과제가 될 것이며, 현대전에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항공무기체계의 독자적인 확보는 국가 자주국방과 직결되는 중대한 과제이다.
 
물론 T-50을 개발했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당장 자주국방이 되고 항공무기체계가 바로자주능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요한다. 그러나 T-50 개발사업은 적어도 자주국방과 항공무기체계의 자주능력을 갖는데 하나의 이정표이며, 우리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업을 기반으로 기술능력을 쌓아 올리고, 부품을 국산화하고. 후속 항공무기체계 연구개발사업을 연계한다면, 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항공무기체계 자주능력과 자주국방을 이를 수 있기 때문에 T-50 연구개발사업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하여 타 무기체계 구매협상시 유리한 조건을제시할 수가 있는 것이다.
 
. 기술적 의미
 
T-50개발의 기술적 의미는 대단하다. 이것을 개발해 봄으로써 그 기술력과 경험을 토대로 더 어려운 무기체계, 즉 한 단계 높은 전투기급의 무기체계도 개발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T-50을 운영해 나가면서 각종수리 및 업그레이드 등을 스스로 할수 있는 것은 물론 타 항공기의 수리, 업그레이드와 수명예측 등을 할 수 있어 항공기 수명을 최대로 할 수 있고 이를 개선할 수가 있으며. 이에 따른 비용절감과 전력증강 효과는 대단하다고할 수 있다.
 
우리의 능력이 없이 모든 것을 판매국에 의존하였을 때는 추리 스스로가 항공기에 구멍 하나, 나사 하나 사용하지 못했지만 우리의 기술력이 향상된 후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개선할 수가 있다. T-50을 한 번 개발했다고 해서 모든 기술능력이 한꺼번에 쌓아지는 것은 아니다. T-50을 통해 개발한 능력을 후속사업으로 발전시켜 개발능력을 함양하고, 체계설계개발에서 구성품 설계개발, 부품 설계개발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국산화율을 높인다면 자주적인 무계를 확보할 수 있다.
 
혹자는 T-50 개발을 통하여 부품의 국산화가 미흠하다는 말도 하는데, 국방부의 예산도 한정되어 있고, 당시 국내 부품산업의상 다수의 부품을 일시에 국산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만큼은 너무 과대한 성급함이라 생각한다. 여기에는 모두 돈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예를 보자. 1960년대 처음 시작할 단순히 외형만을 만들고, 그 안의 핵심부품은 모두 수입하여 조산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후 핵심부품을 개발하고. 점점 국산화율을 높여 경쟁력을 제고하여 이제 우리의 자동차는 국제시장에서도 조금도 뒤지지 않는 우수한자동차로 인정받아 수출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항공기 뿐만 아니라 모든 제품들의 개발도 이러한 순서를 밟는 것이다. 따라서 우선 전 기체 수준의 개발능력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산화율을 점차 높여 나가야 하는 만큼 T-50 개발의 기술적 의미는 우러나라 항공산업의 한 획을 긋는 의미있는 사업이라 할 것이다.
 
. 산업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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