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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미남’그레고리 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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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미 댓글 0건 조회 529회 작성일 15-07-15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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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에 한 번 나온다는 ‘세기의 미남’으로 불리며 전세계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배우 그레고리 펙. 영화 속 이미지대로 실제 생활 역시 ‘바른생활 사나이’로 정평이 나 있던  그는, 47년 동안 한 여자만을 진실하게 사랑했던 순애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여인 품에서 행복하게 숨 거둔 남자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의 상대역인 미국인 기자로 열연하며 전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레고리 펙이 지난 6월 1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의 그는 프랑스 출신의 부인 베로니크 파사니(71)의 손을 꼭 잡은 채 마치 잠들 듯 숨을 거뒀다고 전해졌다. 사망 소식을 들은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가 이룩한 전설은 단지 영화 때문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도 매우 도덕적이고 위엄 있으며 고상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1916년 캘리포니아주에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UC버클리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연극에 심취하면서 전공을 문학과 연극으로 바꿨다. 1944년 영화 ‘영광의 날들’로 영화계에 데뷔한 그는 ‘왕국의 열쇠’ ‘백경’ ‘케이프피어’ 등 영화사에 길이 남을 수십 편의 명작에 출연하며 당대 최고의 스타 자리에 올랐다. 특히 ‘로마의 휴일’에선 공주로 분한 오드리 헵번과 로맨스를 꽃피우는 멋쟁이 기자로 출연해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아카데미상에 네 차례나 후보에 올랐고, 1962년에는 ‘앵무새 죽이기’로 영예를 얻었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인종차별에 맞서는 정의로운 변호사를 연기한 그는, 베트남전 당시 반전시위에 앞장서는 등 인도주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실제로도 정의로운 삶을 살았다. 
몇 번의 이혼이 예삿일처럼 받아들여지는 할리우드에서 그는 사생활 깨끗하기로도 유명한 배우였다. 1942년 결혼한 그레타 라이스와 1955년 이혼했을 뿐 스캔들 한 번 내지 않았다. 이혼 직후 재혼한 아내 베로니크 파사니(71)와의 러브 스토리는 그 자체가 한 편의 영화다. 그가 4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일편단심으로 사랑했던 아내 베로니크는 지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용모를 지닌 프랑스 태생의 잡지기자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52년 파리에서였다. 베로니크는 파리를 방문한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 펙을 인터뷰하기 위해 그를 만났고, 두 사람은 서로의 매력에 이끌렸다. 당시 펙은 아내와의 결혼생활이 이미 행복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아직 이혼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느낀 채 아쉽게 헤어진 두 사람은 베로니크의 적극적인 구애로 애정을 확인한 뒤, 미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사랑을 키웠다. 그레타와의 결혼생활이 파경에 이르자 펙은 곧바로 베로니크를 만나기 위해 파리로 날아갔다. 펙과 만나기로 한 날 베로니크는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와의 인터뷰가 잡혀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인터뷰가 끝난 후 만나기로 돼 있었지만 슈바이처 박사가 약속된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베로니크는 펙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슈바이처 박사와의 인터뷰를 포기하고 그에게 달려갔다. 펙은 이혼한 바로 다음날 베로니크와 결혼했고 그 뒤로 47년 동안 두 사람은 평생의 동반자로 무한한 신뢰와 사랑 속에 결혼생활을 지속했다. 베로니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앤서니와 시실리아는 모두 배우로 활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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