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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검사의 혁명적 결정 - 구자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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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456회 작성일 10-11-21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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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어 청력이 떨어지면 의처증, 의부증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인간은 외부 반응에 의해서 자기를 확인하는데 외부세계 소리가 잘 안들리면 심리상태가 불안정해 지면서 ‘나를 속이고 딴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물리적 청력 저하가 없어도 외부의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심리상태가 반복되면 순환지하철 노선처럼 모든 생각의 앞과 끝이 자기 내부의 회로 속을 반복적으로 돌게될 뿐 객관적 진실과는 거리가 생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러한 인식의 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연히 새로운 인식의 틀을 갖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2004년 1월 그간의 관례를 깨고 ‘성매매를 전제로 한 선불금 빚은 무효’라는 변호인단의 신청을 받아 들인 수원지방 법원의 결정은 놀랍다. 포주가 자기업소의 매춘여성이 선불금을 갚지않는다며 그녀 가족의 집을 경매처리해달라는 신청을 법원이 받아 들이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법리적으로 매춘여성들을 지옥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없게한 ‘선불금‘을 무효로 본다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결정으로 피해 여성들이 얼토당토않은 선불금을 갚기 위해 강제로 성매매를 해야 하는 짐승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이런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수십년이 걸렸다.

나는 이 광경을 보면서 이번 결정에 가장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 30대 중반의 한 사내를 떠올린다. 그는 구자헌이라는 검사다. 2002년 6월 대구지검 상주지청 소속의 구검사가 사법사상 처음으로 ‘윤락업주의 선불금 고소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혁명적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매춘 여성들의 문제는 선불금을 갚지못하면 당연히 형사상 책임을 져야하는, 지독히 원시적인 상태의 법리적 내부회로 안에서만 작동하는 문제였다. 그간 법원과 검찰은 선불금 차용증의 액수와 매춘 여성이 채권자인 포주를 속이려는 행위가 있었는지를 따지는데 골몰했지만 구검사는 매춘 여성들이 그 업소에 자의로 간 것도 아니고 선불금 액수도 자유의사로 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 주목했다. 그 결과 그는 관행적인 법조계 내부회로의 고리를 끊어내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공했다.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문제와는 별개로 젊은 검사의 이런 인식능력은 우리에게 새로운 화두를 제공한다. ‘새로운 인식의 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조삼모사’의 우화처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먹을래?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먹을래?’라는 질문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에 네 개 먹을까, 저녁에 네 개 먹을까라는 선택의 문제에 골몰한다. 이런 상황에서 ‘원래 내 몫이 7개가 아니라 10개인데 이게 무슨 부당한 선택의 강요인가’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자기도 모르게 이미 ‘주어진’ 상황안에 매몰되어 그안에서 사고하기 쉽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에게 심리적 탄성이 있다고 말한다. 물체에 다른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되어 있는 것은 정지 상태로, 움직이는 것은 운동 상태를 그대로 지속하려는 물체의 탄성처럼 인간도 그대로의 상태를 언제까지나 지속하려고 하는 심리상태가 있다는 것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쉽지 않은 심리적 이유인 동시에 많은 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조삼모사’식 사고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이유이다. 새로운 인식의 틀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그래서 심리적으로 위대하다.

2002년 구자헌 검사의 무혐의 결정 이후 한 변호사는 그 사건이 형사상 ‘사기죄 성립 무효’로 그친 것에 아쉬움을 나타내며 “앞으로 아예 윤락업주와 업소여성 사이의 채권.채무 관계는 무효임이 입증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2004년 1월 법원은 ‘성매매를 전제로 한 빚은 무효’라는 결정을 내렸다. 한번 금이 간 그릇은 반드시 깨진다. 새로운 인식의 틀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사회는 조금씩 진보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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