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킨슨병과 싸우는 알리를 추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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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3,074회 작성일 11-05-1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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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 알리의 모습이 교황이나 미국의 대통령보다 더 유명했던 시절이 있었다. 알리가 호주를 출발하여 로마의 피우미치노 공항에 아침 7시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그와의 짧은 면담을 위해 기꺼이 새벽을 깨워 공항으로 향했다. 주위의 많은 인파에 시달리지 않을 때는 언제나 친절하고 예의 바른 모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 알리는 토리노에 가기 위해 로마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으며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가 말했다. “제 아내가 콜로세움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로마의 전형적인 관광코스로 안내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으나 로마 시내에는 이미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인 관광객들은 사진 세례를 퍼부었으며 미국인 관광객들은 사인을 받는 데 여념이 없었다’고 신문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자칭 “내가 최고다I am the Greatest” 라는 말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본명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무하마드 알리가 사상 최고의 권투선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운동선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두번째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1978년 2월 15일, 레온 스핑크스에 판정패해 타이틀을 상실했으나 같은 해 9월 15일에 되찾았다) 30세 때부터 스포츠 세계뿐 아니라, 켄터키 출신의 챔피언인 그의 삶을 되짚어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ROUND 1 자신만의 독자적 스타일
1960년 로마 올림픽 대회. 무하마드 알리의 독자적 복싱 스타일을 전세계에 드러낸 순간이었다. 그는 100kg에 이르는 근육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빠르고 가벼운 몸놀림을 지녔다. 재빠른 민첩성으로 ‘가드’를 거의 하지 않는 상태에서 경기를 치렀으며 상체의 몸놀림만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곤 했다. 다리의 몸놀림은 마치 춤을 추는 듯 했는데 이는 신장 191cm 선수에서 보기 힘든 일이다. 당시 세계 챔피언 타이틀 보유자였던 소니 리스턴과 경기 전 알리는 상대 선수를 ‘덩치 크고 못 생긴 곰’이라 호명하며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그의 복싱 스타일은 긴 팔 다리(양쪽 팔을 벌린 길이가 2m에 이른다)와 강한 펀치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펀치의 강도는 주먹에 체중을 실어 전진하며 가해야 하는 복싱의 정석에 반대로 종종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가해야 할 정도였다. 알리는 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그와의 첫 만남(물론 링 위에서의 매치가 아닌)은 1963년 6월 18일, 런던의 웸블리 축구 경기장에 설치된 링에서 열린 영국선수 헨리 쿠퍼와의 경기를 앞 둔 날이었다. 이 날 알리는 헨리 쿠퍼를 상대로 약간의 고전을 치렀다. 3회전 중 쿠퍼의 레프트 훅으로 인해 넉다운되었던 것이다. 당시 매니저였던 던디는 라운드 사이 휴식시간 중 머리를 굴렸다. 가위로 알리의 권투 글러브 한 쪽에 구멍을 낸 후 다른 쪽에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한다는 이유로 몇 분을 지체했다. 경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알리는 힘을 회복했고 이미 상처가 난 쿠퍼의 얼굴에 레프트 잽을 가하여 상대의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5라운드 중 심판은 경기를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으며 알리의 우승기록과 명성에 금이 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경기는 무엇보다 일생일대의 길을 개척한 결과를 가져왔다. 세계 챔피언 대회의 길, 바로 그것이다.
ROUND 2 세계의 정상에 서서
알리는 1964년 2월 25일, 마이애미 링 위에서 찰스 소니 리스턴을 상대로 경기를 치르고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매치는 정치적인 이유로 이뤄지지 못 할 뻔했다. 알리는 말콤 엑스를 알게 되면서 그의 ‘블랙 무슬림Black Muslim’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미국 흑인의 이슬람교도 집단이 그들을 증오의 대상으로 여기는 백인 중심의 미국사회를 고발하고 그에 맞서 대항하는 성격을 지녔다. 알리는 시합 전 자신의 이름을 캐시어스 클레이에서 무하마드 알리로 개칭했다. 이슬람교에 대한 지지와 이슬람교도로의 개종 사실을 공표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결과를 두려워한 경기 기획자 빌 패버가 이 발표 시기를 조금만 더 늦추도록 가까스로 그를 설득했다.
알리의 우승에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다. 관중들은 알리가 패한다는 쪽에 7대 1로 내기를 걸 정도였다. 10개월 전 이미 <더 링The Ring>이라는 잡지에서는 알리를 최고의 헤비급 선수 중 하나로 꼽은 적은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알리가 리스턴을 이길 수 있다는 게 사실이지만, 마이애미 경기와 1965년 5월 25일 메인주의 루이스턴에서 벌어진 경기는 사전 조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알리는 백인들에게서도 호감을 사는 선수였으며(적어도 그 당시까지는) 범죄기록 및 여러 차례에 걸쳐 장기간의 복역 사실이 있는 리스턴과는 거리가 멀었다.리스턴과의 첫 시합은 복싱 사상 듣도 보도 못한 판정으로 종료된다. 6라운드 말경 리스턴은 어깨에 통증을 호소하며 기권했던 것이다. 두 번째 시합은 더더욱 의심이 가는 결말이었다. 이유의 첫번째로는 시합 장소의 선택이다. 알리와 리스턴의 매치는 어떠한 대도시의 종합경기장을 채울 정도의 관객 동원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메인주의 소도시 루이스턴의 성 도미니크 유스 센터라는 2천434명만 수용 가능한 협소한 장소를 선택했던 것이다. 심판 또한 경험이 적은 저지 조 월콧이라는 선수로 선정되었다.
1라운드 중반, 상대 선수에게 도달하는 것을 아무도 목격하지 못한 라이트 훅으로 리스턴은 바닥에 쓰러졌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이 경기를 ‘아무도 보지 못한 경기The fight you didn t see’라고 표지에 제목을 붙였다.) 다시 일어났을 때 월콧 심판은 경기를 계속 진행시키려 했지만 리스턴측에서 과장된 표현을 쓰며 이미 경기는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아마 끝끝내 아무도 그 사실을 밝혀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싱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설명한다. 당시 복싱계의 세력가는 무패의 인물 알리 선수를 만들어내길 원했으며 모험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니 리스턴 선수와 사전 협상에 들어갔으며 거액의 보상금 및 알리 선수의 앞으로의 수입 일부를 지속적으로 지불하는 대신 두 차례에 걸친 경기에서 패해줄 것을 약속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거금이 오고 가기 시작했을 때, 1970년 말, 알리와 프레이저의 첫 경기에 대한 계약서(각 선수당 2천5백만 달러, 현재 시세 1,300만 달러에 달함)를 체결한 후 리스턴은 라스베이거스의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1970년 12월 30일이었다. 사인은 헤로인의 과잉투여라고 알려졌으나 리스턴은 주사 공포증이었다. 투명하지 못한 사건이다.
ROUND 3 빛과 그림자의 공존
또 다른 탐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베트남전 병역거부 사건이 그것이다. 1967년 3월부터 1970년 10월까지 알리는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고, 5년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전성기 중 맞게 된 3년간 정지령은 알리의 카리스마를 저하시키기는 커녕 그의 인간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기간이었다. 이 위대한 거부는 반전시위가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에 발표됐다. 그 이유 또한 획기적이었는데 다름 아닌 양심적 거부였다. 다시 말해, 이슬람교의 교리상 ‘백인 이교도’들의 이익을 위한 기독교 전쟁에는 불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 덧붙여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며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였다.이 모든 사건은 ‘이슬람 국가운동Nation of Islam’에 참가하던 알리의 사회의식과 흑인들이 통합될 수 없던 백인 중심의 사회인 미국에 살고 있던 자신의 생각이 함께 드러난 것이다. 그는 말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흑인이라면 그의 자녀들이 백인종의 자녀를 집으로 들이고 그들과 혼인하는 것을 막을 것이다.” 결국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대항과 종교적 적대성이 합쳐져 많은 적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를 스포츠 외의 이유로도 동경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마침내 알리는 링 위로 돌아왔다. 그날은 1970년 10월 26일. 제리 쿼리를 상대로 TKO승을 거두며 재기했고, 같은 해 12월 오스카 보나베나와의 경기에서 이겼다.
이제 세계챔피언 타이틀 보유자였던 조 프레이저 차례였다. ‘세기적 매치Fight of the Century’라고 예고된 이 경기는 1971년 3월 8일,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렸으며 최상의 경기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링 주변에서 관람하던 일부 유명인사들 또한 경기 후 신체적인 피로함을 느꼈을 정도이다. 이 경기에서 알리는 판정패 당했는데, 15회, 마지막회에 받은 KO 판정이 큰 역할을 했다. 간단하고 정확하며 강력한 레프트 훅이었다. 알리는 그 후 프레이저를 상대로 두 차례에 걸친 우승을 거두었다. 첫번째는 1974년 1월 28일에 다시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경기에서의 판정승, 두 번째는 1975년 10월 1일 마닐라에서 열린 경기, 15회전에서의 KO승이며 ‘스릴러 인 마닐라Thriller in Manila’라고도 불리는 이 경기는 오늘날까지 복싱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잔인하며 극적인 헤비급 경기다.
그는 1974년 ‘킨샤사 매치’(Rumble in the Jungle이라고 명명)에서 조지 포먼을 상대로 우승하여 세계 챔피언으로 복귀했다. 알리는 이 경기의 8회전에서 KO승을 거두었는데, 특이한 상황 아래 진행되었다. 경기는 TV 중계상 문제로 인하여 새벽 4시에 열렸던 것이다. 링 주변에서 다른 2만 명의 관중과 함께 “알리! 그를 죽여버려Ali Brumaye!” 라고 외치는 당시 유명한 가수 미리암 마케바를 목격할 수 있었다. 이 후 거듭되던 승리 끝에 1978년 2월 15일 레온 스핑크스에 갑작스레 패하고 만다. 그러나 몇 달 후인 9월 15일, 뉴올리언스에서 스핑크스를 상대로 승리하여 타이틀을 되찾는다. 은퇴하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였으나 알리는 링 위를 떠나지 못했다. 1980년, 킨샤사 시절 알리의 스파링 파트너였던 래리 홈즈와의 가망 없던 대결을 받아들여 기권패하고 만다. 그의 실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40세 생일을 얼마 앞두지 않았던 1981년 12월 11일 나소에서 열린 트래버 버빅에 판정패 당한다. 1984년에는 또 다른 대결이 시작된다. 바로 파킨슨병과의 싸움이다.
ROUND 4 또 다른 매치, 파킨슨병과의 대결
1984년 9월. 미국인들은 충격적인 뉴스를 전해 들었다. ‘떠벌이’ 무하마드 알리가 피킨슨 증후군에 시달린다는 소식이었다. 뇌세포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처음 진단받았을 때는 파킨슨병이 아닌 파킨슨 증후군이었다. 전자는 뇌의 상태를 점차 악화시켜 결국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반면 후자는 증상만 나타날 뿐 치료를 받으면 증상이 진행되지 않아 정상인과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는 치료를 거부했다. 베트남전을 거부했듯,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기고 치료를 거부한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자신의 신념을 전면에 내세웠다. 결국엔 말이 어눌해지고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됐다. 주먹보다 빠르고 거친 입과 친근감 넘치는 표정으로 전세계를 사로잡은 알리로서는 가장 중요한 무기를 잃어버린 셈이다. 파킨슨 증후군은 겉으로는 사람을 파괴시키는 병이지만, 그 내면의 의식은 정상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알리 역시 그랬다. 하지만 그는 치료하지 않았고 증세는 점차 악화됐다. 그는 파킨슨 증후군을 신이 자신에게 준 운명으로 생각했다. 이후 알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코란 공부에 매달렸다고 한다.
알리가 다시 대중들의 관심 속으로 돌아온 건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의 최종 점화자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를 기억하는 전 세계 사람들은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사마란치 올림픽 위원장은 알리가 잃어버린 1960년 로마 올림픽의 금메달을 대신해 다시 그에게 새로운 메달을 제작해 목에 걸어주었다. 금메달을 잃어버린 경위는 이미 전설이 되어 감동적인 스토리로 윤색이 돼 있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식당에 쫓겨난 금메달리스트는 그 길로 금메달을 강물에 던져버렸다는 것. “인간으로서 존중 받지 못하는 한 영광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도 함께 전해진다. 알리는 “사람들은 내가 고통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고 있으며 다른 사람과 똑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건강의 문제를 겪지 않았으면 나는 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예전처럼 말하고 예전처럼 광고하고 예전처럼 연설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나는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는 1986년 이혼 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짝사랑해온 로니 윌리엄스와 네번째 결혼을 했다. 윌리엄스는 알리의 아내이자 간병인이자 비서의 역할도 했다. 둘은 1991년에는 갓난아이를 입양했으며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인생의 마지막 라운드를 보내고 있다.
ROUND 1 자신만의 독자적 스타일
1960년 로마 올림픽 대회. 무하마드 알리의 독자적 복싱 스타일을 전세계에 드러낸 순간이었다. 그는 100kg에 이르는 근육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빠르고 가벼운 몸놀림을 지녔다. 재빠른 민첩성으로 ‘가드’를 거의 하지 않는 상태에서 경기를 치렀으며 상체의 몸놀림만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곤 했다. 다리의 몸놀림은 마치 춤을 추는 듯 했는데 이는 신장 191cm 선수에서 보기 힘든 일이다. 당시 세계 챔피언 타이틀 보유자였던 소니 리스턴과 경기 전 알리는 상대 선수를 ‘덩치 크고 못 생긴 곰’이라 호명하며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그의 복싱 스타일은 긴 팔 다리(양쪽 팔을 벌린 길이가 2m에 이른다)와 강한 펀치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펀치의 강도는 주먹에 체중을 실어 전진하며 가해야 하는 복싱의 정석에 반대로 종종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가해야 할 정도였다. 알리는 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그와의 첫 만남(물론 링 위에서의 매치가 아닌)은 1963년 6월 18일, 런던의 웸블리 축구 경기장에 설치된 링에서 열린 영국선수 헨리 쿠퍼와의 경기를 앞 둔 날이었다. 이 날 알리는 헨리 쿠퍼를 상대로 약간의 고전을 치렀다. 3회전 중 쿠퍼의 레프트 훅으로 인해 넉다운되었던 것이다. 당시 매니저였던 던디는 라운드 사이 휴식시간 중 머리를 굴렸다. 가위로 알리의 권투 글러브 한 쪽에 구멍을 낸 후 다른 쪽에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한다는 이유로 몇 분을 지체했다. 경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알리는 힘을 회복했고 이미 상처가 난 쿠퍼의 얼굴에 레프트 잽을 가하여 상대의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5라운드 중 심판은 경기를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으며 알리의 우승기록과 명성에 금이 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경기는 무엇보다 일생일대의 길을 개척한 결과를 가져왔다. 세계 챔피언 대회의 길,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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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ND 2 세계의 정상에 서서
알리는 1964년 2월 25일, 마이애미 링 위에서 찰스 소니 리스턴을 상대로 경기를 치르고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매치는 정치적인 이유로 이뤄지지 못 할 뻔했다. 알리는 말콤 엑스를 알게 되면서 그의 ‘블랙 무슬림Black Muslim’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미국 흑인의 이슬람교도 집단이 그들을 증오의 대상으로 여기는 백인 중심의 미국사회를 고발하고 그에 맞서 대항하는 성격을 지녔다. 알리는 시합 전 자신의 이름을 캐시어스 클레이에서 무하마드 알리로 개칭했다. 이슬람교에 대한 지지와 이슬람교도로의 개종 사실을 공표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결과를 두려워한 경기 기획자 빌 패버가 이 발표 시기를 조금만 더 늦추도록 가까스로 그를 설득했다.
알리의 우승에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다. 관중들은 알리가 패한다는 쪽에 7대 1로 내기를 걸 정도였다. 10개월 전 이미 <더 링The Ring>이라는 잡지에서는 알리를 최고의 헤비급 선수 중 하나로 꼽은 적은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알리가 리스턴을 이길 수 있다는 게 사실이지만, 마이애미 경기와 1965년 5월 25일 메인주의 루이스턴에서 벌어진 경기는 사전 조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알리는 백인들에게서도 호감을 사는 선수였으며(적어도 그 당시까지는) 범죄기록 및 여러 차례에 걸쳐 장기간의 복역 사실이 있는 리스턴과는 거리가 멀었다.리스턴과의 첫 시합은 복싱 사상 듣도 보도 못한 판정으로 종료된다. 6라운드 말경 리스턴은 어깨에 통증을 호소하며 기권했던 것이다. 두 번째 시합은 더더욱 의심이 가는 결말이었다. 이유의 첫번째로는 시합 장소의 선택이다. 알리와 리스턴의 매치는 어떠한 대도시의 종합경기장을 채울 정도의 관객 동원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메인주의 소도시 루이스턴의 성 도미니크 유스 센터라는 2천434명만 수용 가능한 협소한 장소를 선택했던 것이다. 심판 또한 경험이 적은 저지 조 월콧이라는 선수로 선정되었다.
1라운드 중반, 상대 선수에게 도달하는 것을 아무도 목격하지 못한 라이트 훅으로 리스턴은 바닥에 쓰러졌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이 경기를 ‘아무도 보지 못한 경기The fight you didn t see’라고 표지에 제목을 붙였다.) 다시 일어났을 때 월콧 심판은 경기를 계속 진행시키려 했지만 리스턴측에서 과장된 표현을 쓰며 이미 경기는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아마 끝끝내 아무도 그 사실을 밝혀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싱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설명한다. 당시 복싱계의 세력가는 무패의 인물 알리 선수를 만들어내길 원했으며 모험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니 리스턴 선수와 사전 협상에 들어갔으며 거액의 보상금 및 알리 선수의 앞으로의 수입 일부를 지속적으로 지불하는 대신 두 차례에 걸친 경기에서 패해줄 것을 약속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거금이 오고 가기 시작했을 때, 1970년 말, 알리와 프레이저의 첫 경기에 대한 계약서(각 선수당 2천5백만 달러, 현재 시세 1,300만 달러에 달함)를 체결한 후 리스턴은 라스베이거스의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1970년 12월 30일이었다. 사인은 헤로인의 과잉투여라고 알려졌으나 리스턴은 주사 공포증이었다. 투명하지 못한 사건이다.
ROUND 3 빛과 그림자의 공존
또 다른 탐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베트남전 병역거부 사건이 그것이다. 1967년 3월부터 1970년 10월까지 알리는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고, 5년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전성기 중 맞게 된 3년간 정지령은 알리의 카리스마를 저하시키기는 커녕 그의 인간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기간이었다. 이 위대한 거부는 반전시위가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에 발표됐다. 그 이유 또한 획기적이었는데 다름 아닌 양심적 거부였다. 다시 말해, 이슬람교의 교리상 ‘백인 이교도’들의 이익을 위한 기독교 전쟁에는 불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 덧붙여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며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였다.이 모든 사건은 ‘이슬람 국가운동Nation of Islam’에 참가하던 알리의 사회의식과 흑인들이 통합될 수 없던 백인 중심의 사회인 미국에 살고 있던 자신의 생각이 함께 드러난 것이다. 그는 말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흑인이라면 그의 자녀들이 백인종의 자녀를 집으로 들이고 그들과 혼인하는 것을 막을 것이다.” 결국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대항과 종교적 적대성이 합쳐져 많은 적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를 스포츠 외의 이유로도 동경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마침내 알리는 링 위로 돌아왔다. 그날은 1970년 10월 26일. 제리 쿼리를 상대로 TKO승을 거두며 재기했고, 같은 해 12월 오스카 보나베나와의 경기에서 이겼다.
이제 세계챔피언 타이틀 보유자였던 조 프레이저 차례였다. ‘세기적 매치Fight of the Century’라고 예고된 이 경기는 1971년 3월 8일,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렸으며 최상의 경기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링 주변에서 관람하던 일부 유명인사들 또한 경기 후 신체적인 피로함을 느꼈을 정도이다. 이 경기에서 알리는 판정패 당했는데, 15회, 마지막회에 받은 KO 판정이 큰 역할을 했다. 간단하고 정확하며 강력한 레프트 훅이었다. 알리는 그 후 프레이저를 상대로 두 차례에 걸친 우승을 거두었다. 첫번째는 1974년 1월 28일에 다시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경기에서의 판정승, 두 번째는 1975년 10월 1일 마닐라에서 열린 경기, 15회전에서의 KO승이며 ‘스릴러 인 마닐라Thriller in Manila’라고도 불리는 이 경기는 오늘날까지 복싱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잔인하며 극적인 헤비급 경기다.
그는 1974년 ‘킨샤사 매치’(Rumble in the Jungle이라고 명명)에서 조지 포먼을 상대로 우승하여 세계 챔피언으로 복귀했다. 알리는 이 경기의 8회전에서 KO승을 거두었는데, 특이한 상황 아래 진행되었다. 경기는 TV 중계상 문제로 인하여 새벽 4시에 열렸던 것이다. 링 주변에서 다른 2만 명의 관중과 함께 “알리! 그를 죽여버려Ali Brumaye!” 라고 외치는 당시 유명한 가수 미리암 마케바를 목격할 수 있었다. 이 후 거듭되던 승리 끝에 1978년 2월 15일 레온 스핑크스에 갑작스레 패하고 만다. 그러나 몇 달 후인 9월 15일, 뉴올리언스에서 스핑크스를 상대로 승리하여 타이틀을 되찾는다. 은퇴하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였으나 알리는 링 위를 떠나지 못했다. 1980년, 킨샤사 시절 알리의 스파링 파트너였던 래리 홈즈와의 가망 없던 대결을 받아들여 기권패하고 만다. 그의 실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40세 생일을 얼마 앞두지 않았던 1981년 12월 11일 나소에서 열린 트래버 버빅에 판정패 당한다. 1984년에는 또 다른 대결이 시작된다. 바로 파킨슨병과의 싸움이다.
ROUND 4 또 다른 매치, 파킨슨병과의 대결
1984년 9월. 미국인들은 충격적인 뉴스를 전해 들었다. ‘떠벌이’ 무하마드 알리가 피킨슨 증후군에 시달린다는 소식이었다. 뇌세포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처음 진단받았을 때는 파킨슨병이 아닌 파킨슨 증후군이었다. 전자는 뇌의 상태를 점차 악화시켜 결국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반면 후자는 증상만 나타날 뿐 치료를 받으면 증상이 진행되지 않아 정상인과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는 치료를 거부했다. 베트남전을 거부했듯,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기고 치료를 거부한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자신의 신념을 전면에 내세웠다. 결국엔 말이 어눌해지고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됐다. 주먹보다 빠르고 거친 입과 친근감 넘치는 표정으로 전세계를 사로잡은 알리로서는 가장 중요한 무기를 잃어버린 셈이다. 파킨슨 증후군은 겉으로는 사람을 파괴시키는 병이지만, 그 내면의 의식은 정상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알리 역시 그랬다. 하지만 그는 치료하지 않았고 증세는 점차 악화됐다. 그는 파킨슨 증후군을 신이 자신에게 준 운명으로 생각했다. 이후 알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코란 공부에 매달렸다고 한다.
알리가 다시 대중들의 관심 속으로 돌아온 건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의 최종 점화자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를 기억하는 전 세계 사람들은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사마란치 올림픽 위원장은 알리가 잃어버린 1960년 로마 올림픽의 금메달을 대신해 다시 그에게 새로운 메달을 제작해 목에 걸어주었다. 금메달을 잃어버린 경위는 이미 전설이 되어 감동적인 스토리로 윤색이 돼 있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식당에 쫓겨난 금메달리스트는 그 길로 금메달을 강물에 던져버렸다는 것. “인간으로서 존중 받지 못하는 한 영광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도 함께 전해진다. 알리는 “사람들은 내가 고통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고 있으며 다른 사람과 똑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건강의 문제를 겪지 않았으면 나는 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예전처럼 말하고 예전처럼 광고하고 예전처럼 연설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나는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는 1986년 이혼 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짝사랑해온 로니 윌리엄스와 네번째 결혼을 했다. 윌리엄스는 알리의 아내이자 간병인이자 비서의 역할도 했다. 둘은 1991년에는 갓난아이를 입양했으며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인생의 마지막 라운드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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