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렌버핏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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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inceton 댓글 0건 조회 1,909회 작성일 10-08-22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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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9일 출간한 워런 버핏 자서전 ‘The Snowball: Warren Buffett and the Business of Life’. <김석구 기자>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은 한 번도 자기 손으로 자서전을 쓴 일이 없다. 버핏은 대신 “당신이 나보다 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거요”라며 보험업계 애널리스트 출신인 앨리스 슈뢰더에게 자서전 집필을 부탁했다. 지난 9월 29일 출간한 자서전에서 슈뢰더는 버핏의 협조를 받아 ‘투자의 신’이라고까지 불리는 이 거인의 삶을 구석구석 들여다본 후, 그의 삶과 사랑을 ‘스노볼: 워런 버핏과 삶의 경영’이라는 제목의 960쪽짜리 책에 담았다.
여자 앞에서 늘 불안한 버핏
버핏은 얼핏 완벽한 인간처럼 보인다. 그는 우리 돈으로 무려 64조 원이 넘는 재산을 소유한 세계 최고의 재력가다. 그러면서도 허세나 허영은 찾아볼 수 없다. 전 재산의 85%를 ‘빌 앤 멜린다 재단’에 기부하기로 했고, 부시 대통령의 상속세 폐지 움직임에도 반대했다. 그는 세속적으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의 대열에 올랐다. 그러나 자서전에서 슈뢰더가 주목한 것은 그의 냉철한 투자자로서 면모가 아니라 끊임없이 여성의 애정과 정서적 보살핌을 원했던 섬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버핏은 여자 앞에서 늘 불안해했다. 청년 버핏의 대화 주제는 정치 아니면 주식이었다. 여자들은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지루하게 느꼈고,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허둥댔고,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여자 앞에서는 뒤로 물러났다. 버핏은 심각할 정도로 사교성이 부족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네기 재단이 운영하는 스피치 학원에 다닌 적도 있다.
슈뢰더는 자서전에서 버핏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여성은 첫 아내 수잔과 두 번째 아내 아스트리드, 워싱턴 포스트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 포춘 기자 캐롤 루미스, 브리지 게임 선수 샤론 오스버그 등 다섯 명이라고 썼다.
첫 아내 수잔 톰슨을 만난 것은 1950년 여름, 그의 나이 스물이 되던 해다. 노스웨스턴 대학에 다니던 동생 베티가 룸메이트 수잔을 버핏에게 소개했다. 버핏은 같은 고향 출신의 이 갈색 머리 여대생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수잔은 버핏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수잔이 대놓고 지루하다고 불평하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수잔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좋은 여자’라고 판단한 버핏은 나름대로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수잔에게 직접 다가가는 대신 오마하의 지역 유지였던 수잔의 부모에게 접근하기로 한 것이다. 버핏은 이 해 추수감사절 휴가에 수잔의 부모와 함께 풋볼경기를 본 후 밥을 먹었다. 밥 먹는 자리에는 수잔도 있었지만, 그녀는 애인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 무렵 버핏이 만나던 여자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다. 버핏은 수잔을 만나기 전부터 1949년도 미스 네브라스카 바니타 브라운이라는 여성과 교제하고 있었다. 바니타는 “핀업걸의 몸매에 이웃집 소녀의 얼굴”을 가진 매력적인 여자였지만 정서적인 기복이 심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정서 불안으로 여성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던 버핏은 정신적으로 성숙한 수잔에게 더 마음이 끌렸다.
오마하 대학 학장이자 열혈 공화당원으로 지역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수잔의 아버지 윌리엄 톰슨은 인종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전형적인 오마하 사람이었다. 수잔은 고교 시절부터 유대계 러시아인 2세인 밀튼 브라운과 교제했지만, 윌리엄은 이 가난한 이민 노동자의 아들을 싫어했다. 수잔과 브라운의 사랑은 장애물 앞에서 더욱 강하게 타올랐다. 이런 내막을 전혀 몰랐던 버핏은 수잔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수잔에게 버핏은 주식에 미친 공화당 유력 의원의 아들에 불과했다.
수잔의 아버지 윌리엄이 반전의 물꼬를 텄다. 윌리엄은 수잔을 오마하로 불러들였고, 노스웨스턴의 비싼 등록금을 감당하지 못했던 브라운은 아이오와 대학으로 떠났다. 1951년 봄학기를 마치고 군 복무를 위해 오마하로 돌아간 버핏은 틈날 때마다 수잔을 찾아갔다. 수잔은 버핏이 자신만만한 특권층의 아들이 아니라 실제로는 소심하고 불안한 소년의 내면을 가진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열었다. 버핏은 ‘주식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단점을 찾을 수 없었던’ 수잔과 1952년 4월 19일에 결혼했다. 버핏이 21살, 수잔은 19살이었다.
결혼 생활은 평탄했다. 수잔은 버핏이 자신에게 엄마 역할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버핏의 원초적인 애정 결핍을 치유하는 데 헌신했다. 수잔이 정서적 버팀목 구실을 해주면서 버핏은 일에 몰두했다. 1953년 첫아이 앨리스가 태어났지만, 가정은 버핏과 그의 업무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버핏은 서른다섯이 되던 1966년에 이미 부자였다. 수잔은 이 무렵부터 버핏이 800만 달러를 벌면 좀 더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버핏에게 주식은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성스러운 숙명이었다.
1977년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있던 수잔이 샌프란시스코로 거처를 옮긴 후, 두 사람은 사실상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이 무렵 버핏은 워싱턴 포스트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버핏보다 13살 연상인 그레이엄은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버핏에게 털어놓을 정도로 버핏을 신뢰했다. 두 사람이 공공장소에서 함께 있는 모습이 종종 사람들의 눈에 띄었고,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는 가십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별거 아내에 “돌아와 달라” 울먹여
버핏과 그레이엄이 처음 만난 것은 1971년의 어느 모임에서였다. 그러나 잠깐 동안 스쳤을 뿐, 버핏은 그레이엄에게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레이엄이 처음으로 버핏을 주목하게 된 계기는 버핏이 1973년 워싱턴 포스트 주식의 약 5%를 매입하면서다. 버핏과 그레이엄은 친밀한 사이를 유지했지만 우정의 선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레이엄은 버핏에게 워싱턴 상류사회의 안내자 구실을 했고, 버핏은 그레이엄에게 사업상 조언자 역할을 했다.
수잔은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면서 아스트리드 멘크스라는 여성에게 버핏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세 아이가 모두 성장한 후 자신의 삶을 찾아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기는 했지만, 버핏이 여성의 보살핌 없이는 제 삶을 지탱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멘크스는 1946년 독일에서 라트비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여섯 살에 오마하로 이주한 여성으로, 1976년 무렵 수잔이 공연했던 오마하의 한 카페에서 요리사 겸 소믈리에로 일하고 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동정심이 많았던 멘크스가 수잔의 거듭된 부탁에 버핏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거의 폐인 상태였다. 수잔을 대신해 버핏을 돌보던 멘크스는 구강암으로 수잔이 사망한 2년 후인 2006년, 버핏의 두 번째 아내가 됐다.
버핏은 투자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저널리스트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았다. 1969년 버핏이 투자자 존 루미스를 만났을 때 그를 부부 동반 식사에 초대한 것도 존의 아내 캐롤이 포춘 기자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캐롤은 이후 버핏이 매년 투자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는 일을 도와준다.
버핏이 컴퓨터를 쓰게 만든 것도 샤론 오스버그라는 여성이다. 브리지 마니아였던 버핏은 1993년 국제 브리지 게임 토너먼트에서 브리지 게임 선수였던 오스버그를 만났다. 오스버그는 버핏에게 인터넷으로 브리지 게임을 해보라고 권유해 버핏이 결국 집에 컴퓨터를 설치하게 만들었다.
버핏은 아내 수잔이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날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 돌아와달라고 울먹였다. 그는 이 일을 두고 “내 평생 가장 큰 실수였다”고 회고했다. ‘오마하의 현인’도 사랑 앞에서는 현명하지 못했던 셈이다.
여자 앞에서 늘 불안한 버핏
버핏은 얼핏 완벽한 인간처럼 보인다. 그는 우리 돈으로 무려 64조 원이 넘는 재산을 소유한 세계 최고의 재력가다. 그러면서도 허세나 허영은 찾아볼 수 없다. 전 재산의 85%를 ‘빌 앤 멜린다 재단’에 기부하기로 했고, 부시 대통령의 상속세 폐지 움직임에도 반대했다. 그는 세속적으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의 대열에 올랐다. 그러나 자서전에서 슈뢰더가 주목한 것은 그의 냉철한 투자자로서 면모가 아니라 끊임없이 여성의 애정과 정서적 보살핌을 원했던 섬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버핏은 여자 앞에서 늘 불안해했다. 청년 버핏의 대화 주제는 정치 아니면 주식이었다. 여자들은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지루하게 느꼈고,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허둥댔고,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여자 앞에서는 뒤로 물러났다. 버핏은 심각할 정도로 사교성이 부족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네기 재단이 운영하는 스피치 학원에 다닌 적도 있다.
슈뢰더는 자서전에서 버핏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여성은 첫 아내 수잔과 두 번째 아내 아스트리드, 워싱턴 포스트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 포춘 기자 캐롤 루미스, 브리지 게임 선수 샤론 오스버그 등 다섯 명이라고 썼다.
첫 아내 수잔 톰슨을 만난 것은 1950년 여름, 그의 나이 스물이 되던 해다. 노스웨스턴 대학에 다니던 동생 베티가 룸메이트 수잔을 버핏에게 소개했다. 버핏은 같은 고향 출신의 이 갈색 머리 여대생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수잔은 버핏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수잔이 대놓고 지루하다고 불평하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수잔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좋은 여자’라고 판단한 버핏은 나름대로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수잔에게 직접 다가가는 대신 오마하의 지역 유지였던 수잔의 부모에게 접근하기로 한 것이다. 버핏은 이 해 추수감사절 휴가에 수잔의 부모와 함께 풋볼경기를 본 후 밥을 먹었다. 밥 먹는 자리에는 수잔도 있었지만, 그녀는 애인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 무렵 버핏이 만나던 여자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다. 버핏은 수잔을 만나기 전부터 1949년도 미스 네브라스카 바니타 브라운이라는 여성과 교제하고 있었다. 바니타는 “핀업걸의 몸매에 이웃집 소녀의 얼굴”을 가진 매력적인 여자였지만 정서적인 기복이 심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정서 불안으로 여성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던 버핏은 정신적으로 성숙한 수잔에게 더 마음이 끌렸다.
오마하 대학 학장이자 열혈 공화당원으로 지역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수잔의 아버지 윌리엄 톰슨은 인종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전형적인 오마하 사람이었다. 수잔은 고교 시절부터 유대계 러시아인 2세인 밀튼 브라운과 교제했지만, 윌리엄은 이 가난한 이민 노동자의 아들을 싫어했다. 수잔과 브라운의 사랑은 장애물 앞에서 더욱 강하게 타올랐다. 이런 내막을 전혀 몰랐던 버핏은 수잔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수잔에게 버핏은 주식에 미친 공화당 유력 의원의 아들에 불과했다.
수잔의 아버지 윌리엄이 반전의 물꼬를 텄다. 윌리엄은 수잔을 오마하로 불러들였고, 노스웨스턴의 비싼 등록금을 감당하지 못했던 브라운은 아이오와 대학으로 떠났다. 1951년 봄학기를 마치고 군 복무를 위해 오마하로 돌아간 버핏은 틈날 때마다 수잔을 찾아갔다. 수잔은 버핏이 자신만만한 특권층의 아들이 아니라 실제로는 소심하고 불안한 소년의 내면을 가진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열었다. 버핏은 ‘주식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단점을 찾을 수 없었던’ 수잔과 1952년 4월 19일에 결혼했다. 버핏이 21살, 수잔은 19살이었다.
결혼 생활은 평탄했다. 수잔은 버핏이 자신에게 엄마 역할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버핏의 원초적인 애정 결핍을 치유하는 데 헌신했다. 수잔이 정서적 버팀목 구실을 해주면서 버핏은 일에 몰두했다. 1953년 첫아이 앨리스가 태어났지만, 가정은 버핏과 그의 업무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버핏은 서른다섯이 되던 1966년에 이미 부자였다. 수잔은 이 무렵부터 버핏이 800만 달러를 벌면 좀 더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버핏에게 주식은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성스러운 숙명이었다.
1977년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있던 수잔이 샌프란시스코로 거처를 옮긴 후, 두 사람은 사실상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이 무렵 버핏은 워싱턴 포스트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버핏보다 13살 연상인 그레이엄은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버핏에게 털어놓을 정도로 버핏을 신뢰했다. 두 사람이 공공장소에서 함께 있는 모습이 종종 사람들의 눈에 띄었고,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는 가십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별거 아내에 “돌아와 달라” 울먹여
버핏과 그레이엄이 처음 만난 것은 1971년의 어느 모임에서였다. 그러나 잠깐 동안 스쳤을 뿐, 버핏은 그레이엄에게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레이엄이 처음으로 버핏을 주목하게 된 계기는 버핏이 1973년 워싱턴 포스트 주식의 약 5%를 매입하면서다. 버핏과 그레이엄은 친밀한 사이를 유지했지만 우정의 선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레이엄은 버핏에게 워싱턴 상류사회의 안내자 구실을 했고, 버핏은 그레이엄에게 사업상 조언자 역할을 했다.
수잔은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면서 아스트리드 멘크스라는 여성에게 버핏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세 아이가 모두 성장한 후 자신의 삶을 찾아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기는 했지만, 버핏이 여성의 보살핌 없이는 제 삶을 지탱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멘크스는 1946년 독일에서 라트비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여섯 살에 오마하로 이주한 여성으로, 1976년 무렵 수잔이 공연했던 오마하의 한 카페에서 요리사 겸 소믈리에로 일하고 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동정심이 많았던 멘크스가 수잔의 거듭된 부탁에 버핏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거의 폐인 상태였다. 수잔을 대신해 버핏을 돌보던 멘크스는 구강암으로 수잔이 사망한 2년 후인 2006년, 버핏의 두 번째 아내가 됐다.
버핏은 투자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저널리스트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았다. 1969년 버핏이 투자자 존 루미스를 만났을 때 그를 부부 동반 식사에 초대한 것도 존의 아내 캐롤이 포춘 기자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캐롤은 이후 버핏이 매년 투자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는 일을 도와준다.
버핏이 컴퓨터를 쓰게 만든 것도 샤론 오스버그라는 여성이다. 브리지 마니아였던 버핏은 1993년 국제 브리지 게임 토너먼트에서 브리지 게임 선수였던 오스버그를 만났다. 오스버그는 버핏에게 인터넷으로 브리지 게임을 해보라고 권유해 버핏이 결국 집에 컴퓨터를 설치하게 만들었다.
버핏은 아내 수잔이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날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 돌아와달라고 울먹였다. 그는 이 일을 두고 “내 평생 가장 큰 실수였다”고 회고했다. ‘오마하의 현인’도 사랑 앞에서는 현명하지 못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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