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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락과 리 크레이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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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inceton 댓글 0건 조회 1,848회 작성일 10-08-12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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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추상화의 신기원을 이룩한 세계적인 추상화가 잭슨 폴락(Jackson Pollock). 1912년 미국 출생. 뉴욕에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그는 처음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열등생 취급 받는 미술학도에 불과했다. 그는 데생 실력이 다른 사람들에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았으며, 정신적으로도 미숙한 데가 있어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
잭슨 폴락의 재능을 알아본 것은 같은 작가 지망생 리 크레이스너(Lee Krasner). 둘은 사랑에 빠져 동거에 들어갔고, 크레이스너는 폴락이 미술계를 뒤흔들 엄청난 천재성을 갖고 있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곧 그녀는 폴락을 성공시키기 위한 "작전"에 들어간다. 크레이스너는 폴락이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하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폴락의 그림을 미술계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집요하게 소개하고 다녔다. 그 중 한명이 미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페기 구겐하임. 20세기 초 가장 유명했던 미술 수집가이자 후원자. 엄청난 재산을 지닌 구겐하임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나 뛰어난 미적 감각으로 우수한 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거나, 재능 있는 신인 작가들을 후원해 주었다. 피카소, 막스 에른스트, 마르셀 뒤캄, 마그리트, 달리 등, 20세기 대부분의 거장들은 페기 구겐하임과 어느 정도 연관을 맺고 있었다.
당시 페기 구겐하임은 젊고 유능한 신인 작가들을 엄선해 미술계의 "큰 손"들에게 소개해주는 후원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여성이 주로 남성 작가들에게 관심이 많았으며, 자주 육체적 관계를 맺기도 했다는 점. 그러나 크레이스너는 개의치 않았다. 폴락을 유명하게 만들기 위해선 페기 구겐하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고, 크레이스너는 이후 폴락이 구겐하임과 통정을 하는 것마저 눈감아 주었다.
1943년 페기 구겐하임의 주선으로 폴락은 생애 첫 개인전을 가졌고, 그는 일약 뉴욕 미술시장의 스타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상당한 가격으로 팔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1944년 폴락과 크레이스너는 오랜 동거 생활 끝에 결혼, 이후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창작에 몰두하게 된다. 이 시기에 폴락은 자신의 유명한 “액션 페인팅” 기법을 창안,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온 몸을 움직여 가며 붓에 묻은 물감을 뿌려 대는 스타일로 수많은 유명 작품들을 양산했다.
폴락의 커리어는 성공 가도를 달렸으나, 그의 사생활은 불행했다. 폴락의 성공에 결정적 공헌을 한 아내 크레이스너는 폴락의 집요한 요구에도 그의 아이를 갖지 않았다. 이로 인해 폴락과 크레이스너 지속적인 불화를 겪고, 폴락은 다시 알코올 중독에 빠져들었다. 아내에 대한 불만으로 폴락은 보란 듯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고, 견디다 못한 크레이스너는 유럽으로 도망치듯 떠나 버린다. 폴락의 절제된 “상업적인” 삶을 유지해 주던 아내가 떠난 뒤 폴락은 완전히 폐인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1956년 음주 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폴락은 그의 커리어의 정점에서 사망하고 만다.
폴락의 죽음은 유일한 가족이었던 크레이스너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다 준다. 폴락의 작품에 대한 모든 권리는 크레이스너에게 넘어갔으며, 폴락의 작품들은 미술시장에서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팔려 나갔다.
잭슨 폴락과 그의 아내 크레이스너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폴락(Pollock)"의 한 장면. 일각에선 크레이스너가 폴락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지 않은 것, 별거 중에도 끝까지 폴락의 이혼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 그리고 폴락이 알코올 중독으로 폐인이 되도록 내버려 둔 것은 모두 그녀의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폴락을 통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 위함이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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