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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도덕철학: 善과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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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617회 작성일 10-08-0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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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그의 윤리학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만일 인간이 자연의 물질 세계에 존재하는 현상들에 의해 기만당할 수 있다면, 그러한 가능성은 도덕의 영역에도 동일하게 존재할 것이다. 가시계(可視界)에서 그림자들과 반영(反影)들과 실재적 대상들 사이를 구별해 주던 지식은 또한 선한 삶의 그림자들과 반영 사이를 구분하는 데 필요로 하는 지식과 동일한 진실성을 갖는다. 플라톤은 만일 우리의 지식이 가시적인 사물들로 제한된다면 결코 물리학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만일 우리가 특정한 문화 현상들에 대한 경험에만 우리를 묶어 놓는다면, 선(善)의 보편적 이데아에 대한 지식도 결코 얻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소피스트들의 잘 알려진 회의주의는 이러한 지식과 도덕의 관계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예시해 주고 있었다.

  소피스트들은 그들의 회의주의로 인해 도덕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즉, 1) 도덕률이란 각각의 공동 사회에 의해 임의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그 사회에 내에서만 적합성과 권위를 갖는다. 2) 도덕률은 비자연적인 것이므로 그것들에 복종하는 것은 사회적 압력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행위가 은밀히 이루어질 수 있다면 '선'한 사람들조차도 그 도덕률을 추종하지 않을 것이다. 3) 정의(正義)의 본질은 권력이며 '힘이 곧 정의이다.' 4) '선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그 삶이 즐겁고 유쾌한 삶이라는 제안 외 달리 타당한 설명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 소피스트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플라톤은 '지(知)는 곧 덕(德)'이라고 주장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수용하여 그것을 철학적으로 웅장하고 세련되게 표현하였다. 그 이론은 주로 영혼의 개념과 기능으로서의 덕(德)에 대한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철학과 삶]에서 플라톤의 영혼의 개념과 기능으로서의 덕에 관한 이론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플라톤의 도덕철학에 접근하려 한다.


1. 영혼의 개념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영혼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묘사하였다. 그는 이 부분들을 이성(reason), 기개(spirit), 그리고 욕망(appetite)이라고 불렀다. 그는 모든 인간이 분유(分有)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내적 혼란과 갈등에 대한 공통의 경험으로부터 이러한 영혼의 삼분법을 이끌어내었다. 그는 이 갈등의 본성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대개의 인간에게는 세 종류의 행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류해냈던 것이다. 첫째, 목적이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며 이는 이성의 행위라 할 수 있다. 둘째, 행동을 위한 충동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처음에는 중립적이었다가 곧 이성의 방향을 따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존재하는 것은 육체적 필요에 의해 요구하는 갈망, 즉 흔히 감각하는 욕망이다. 플라톤은 영혼이 삶과 활동의 원리라는 가정하에서 이 모든 활동들을 영혼에 귀속시켰다. 육신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고, 따라서 행동하거나 움직일 경우에 육신은 삶의 원리, 즉 영혼에 의해 조종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영혼이 세 부분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의 내적 갈등이 세 가지 양상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성은 행동을 위해 목적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은 감각적 욕망에 의해서 전도(顚倒)될 수 있다. 따라서 기개의 힘은 이들 감각적 갈망들 때문에 위로도 아래로도 끌려갈 수 있는 것이며, 플라톤은 이러한 인간의 조건을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설명하였다. 그는 두 마리의 말(馬)을 모는 마부의 입장에서, 한 마리는 선하여 "따라서 채찍질할 필요없이 몇 마디의 경고만으로도 몰 수 있다."고 하고 다른 한 마리는 악하여 "건방지고 뻔뻔스러워 채찍질과 박차에도 잘 굴복하지 않는다." 비록 마부가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있고 선한 말이 그 길을 따르고 있다 해도 악한 말은 "이리저리 날뛰고 이탈함으로써 선한 말과 마부를 곤경에 처하게 한다..."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말들, 명령이 이행되지 않아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마부... 이 광경은 질서의 균열을 매우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상황에 있는 마부는 그 말들을 인도하고 통제해야 할 권리와 의무와 직분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고 당시 아테네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영혼의 이성적 부분은 기개의 부분과 욕망의 부분을 지배할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도출되는 것이다.

  마부는 두 마리의 말이 없다면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 부분은 함께 결속되어 그들의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해야 하는 것이다. 영혼의 이성적 부분 역시 다른 부분들에 대해 이러한 종류의 관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욕망과 기개와 욕망과 함께 또한 그들 위에 작용하며 기개와 욕망 역시 이성을 움직이게 하며 이성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이성과 기개와 욕망의 관계는 이성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즉, 목적지향적인 기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물론 감정들도 끊임없이 쾌락이라는 목적을 추구하며 쾌락 역시 삶의 필수적인 요소임에 틀림없으나, 감정들은 쾌락을 제공하는 사물들을 향해서만 충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쾌락을 제공하는 대상들과 단지 쾌락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을 구분할 능력이 결여되어 이성의 인도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입장이었다.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의 고유한 기능은, 삶의 참된 목적을 구하는 것이며, 이는 사물들을 그것들의 본성에 맞춰 평가함으로 가능하다. 비록 정열이나 욕망이 우리를 공상의 세계로 안내하여 어떤 종류의 쾌락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믿도록 우리를 기만할 수도 있지만 이성은 그 환상의 세계를 관통해 참된 세계를 발견하여 욕망의 방향을 진정한 대상에로 전환시켜야 할 의무를 지니는 것이다. 그제야 욕망은 참된 쾌락과 참된 행복을 향해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마부는 목적지로 삶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마부가 말들에 대한 통제 능력이 있을 때 질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도 이성이 기개와 욕망을 통제할 수 있을 때에만 질서와 평화가 획득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불행과 인간 영혼의 무질서는 인간이 이데아와 실재를 혼동한 결과이며, 이러한 혼동은 거의 욕망이 이성을 압도할 때 발생한다고 플라톤은 이해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그에게 가르쳤던 것처럼 도덕적인 악을 무지(無知)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도덕적 능력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을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인간의 덕에 대한 잠재 능력을 긍정하면서도 과연 그 잠재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그의 악에 대한 이론에 기인한 것인데, 소크라테스 편에서 말한 것처럼 악행이나 악덕은 잘못된 지식, 혹은 무지에 의해 야기된다고 플라톤 역시 전수하였다. 잘못된 지식은 욕망이 이성에 영향을 미쳐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은데 마치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사유하게 될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욕망이 이성을 제압했을 때 영혼의 조화는 무너지며, 전도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욕망에 굴복했고, 따라서 자신의 올바른 위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무질서한 조화가 발생할 수 있을까? 이 잘못된 지식은 어떻게 발생할까? 간단히 말해 도덕적인 악의 원인은 무엇일까?

 악의 원인은 영혼 그 자체의 본성에서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서 발견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은 육체에 들어가기 전에 선험적 상태를 갖고 있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구성되며, 이 비이성적인 부분도 다시 기개와 욕망으로 구성된다. 영혼의 이성적 부분은 세계의 조물주(Demiurge)에 의해 창조되는 반면에 비이성적인 부분은 육체의 모양을 만들어주는 신들에 의해 창조된다. 이런 식으로 영혼은 육체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두 가지의 다른 성분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이성적 부분은 이데아들에 대해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고, 동시에 기개와 욕망은 그 본성에 의해 하강(下降)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플라톤에게 왜 영혼은 육체로 내려가는가를 묻는다면 그는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이 제멋대로 영혼을 지상에로 끌고 내려가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완전하고 날개 달린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 ... 반면에 날개를 잃은 불완전한 영혼은 아래로 떨어져 결국은 지상에 안주한다. 그곳에서 하나의 고향을 발견한 영혼은 지상의 체질을 받아들인다. ... 이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 하나의 살아 있는, 그러나 죽어야 할 운명의 피조물이라고 불린다."

  영혼은 "떨어지며" 결국 하나의 육체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영혼이 육체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방종과 악의 본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악의 원인은 영혼의 이전 상태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지상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영혼은 이데아들, 혹은 진리들을 바라보는 행위와 이러한 조망을 "망각하는" 행위- 여기에서 영혼의 몰락이 시작된다. -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셈이다. 영혼은 무질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실제로 무질서가 영혼에 발생할 때 악의 원인은 영혼 그 자체 내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은 실재를 파악하는 일에 무지했거나 망각한 데서 온 결과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악이란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며 오히려 영혼의 한 특성, 즉 영혼의 망각 "가능성"인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망각하고 지상의 사물들에 대한 관심에 치중하여 끌려 내려온 것도 바로 영혼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본질상 완전하지만 그것의 한 측면에는 무질서에로 이끌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피조물의 다른 부분들이 그러하듯이 영혼은 완전성과 동시에 불완전성의 원리도 내포하고 있다. 더욱이 영혼이 육체에 들어가게 되면 영혼의 어려움은 더욱 증가된다.

  플라톤이 확신하는 바에 따르면, 육체는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을 자극하여 이성의 지배와 경합하거나 그를 전복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영혼의 육체에로의 유입은 무질서, 즉 영혼의 각 부분간의 부조화를 가중시킨다. 우선 영혼은 이데아의 영역을 떠나 육체에 들어감으로써 일자(一者)의 영역으로부터 다자(多者)의 영역으로 이동한 꼴이 된 것이다. 이제 영혼은 다양한 사물들의 거친 바다에서 표류하면서 이들 사물들이 지니는 기만적인 성질 때문에 많은 오류들을 범하게 된다. 게다가 육체는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에게 쾌락적인 행동들을 무분별하게 자극한다. 육체에게는 배고픔, 갈증, 자손을 낳으려는 갈망 등과 같은 욕망들이 과장되고, 결국은 그 하나하나가 극심한 탐욕으로 변하게 된다. 영혼은 육체 속에서 공포와 근심뿐만 아니라 감각, 갈망, 고통들을 경험한다.


  사랑에도 매우 넓은 영역이 있다. 즉 미각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음식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순수하고 영원한 진리나 미에 대한 사랑까지의 넓은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육체는 영혼에 대한 방해자로 서서히 작용하며 영혼 가운데 기개와 욕망의 부분이 그 육체의 작용에 특히 민감하게 된다. 육체는 영혼의 조화를 방해한다. 왜냐하면 육체는 영혼에 자극을 주어 이성이 참된 지식을 지향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이성이 한때 인식했던 진리를 상기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회가 잘못된 가치 체계를 갖게 된다면 오류는 지속된다. 왜냐하면 개인들은 이 그릇된 가치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는 불가피하게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교사로서 작용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한 사회의 가치는 개인의 가치로 수용될 것이다. 더욱이 모든 사회는 이전 세대들에 의해 이루어진 죄악들과 오류들을 지속하려는 경향이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사실을 중시하면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즉 오류의 사회적 전달과 마찬가지로 영혼들도 전달을 통해 새로운 육체에 그들 이전의 오류들과 가치 판단을 주입함으로써 재생된다는 것이다. 결국 잘못된 지식과 성급함과 욕심을 설명해주는 것은 육체이다. 왜냐하면 육체는 영혼을 감각의 폭로에로 유인함으로써 이성과 기개와 욕망의 정결한 활동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도덕적 조건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그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상태에서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들간의 근본적 조화를 향유하고 있고, 그 조화 속에서 이성은 진리에 대한 지식을 통해 다양한 욕망을 통제하고 있다는 점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은 불완전의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가능성은 욕망에 의해 더 낮은 것들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결국은 이성이 욕망에 끌려다닐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영혼의 각 부분들간의 본래적 조화는 육체에 유입되자마자 더욱더 동요되고 이전의 순수와 자유는 망각되며 육체의 타성은 그 상태에로의 복원을 방해하게 된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플라톤에 있어 도덕(道德)은 인간의 상실된 내적 조화의 회복에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성이 욕망과 육체의 자극에 의해 전도되었던 과정을 다시 역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은 자아의 비이성적인 부분들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회복해야 한다. 악을 낳았던 것이 무지와 잘못된 지식이었기 때문에 단지 지식만이 덕(德)을 다시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는지 간에 그 행위가 그들에게 쾌락과 행복을 줄 것이라고 신념한다. 만약 신념하지 않는 행위가 있다면 그 행위는 육체를 통해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플라톤의 기본 입장이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어느 누구도 그 자신에게 해로운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물론 인간은 살인이나 거짓말과 같은 잘못된 행위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그러한 행위로부터 그 자신이 어느 정도의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이 잘못된 지식이며, 인간은 그것을 극복함으로써만이 도덕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된 골조(骨彫)이었다. 그러므로 "지(知)는 덕(德)이다"라는 명제가 의미하는 바는, 잘못된 지식은 사물 및 행위와 그것들의 가치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 의해 조사(調査)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그릇된 지식으로부터 참된 지식에로 갈 수 있으려면, 그는 우선 자신이 그릇된 지식의 상태에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무지의 잠(睡眠)"으로부터 깨어나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한 어떤 것에 의해, 혹은 그의 외부의 어떤 것이나 다른 어떤 사람에 의해 잠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지식, 특히 도덕적 지식에 있어 인간의 깨어남은 두 가지 방식으로 가능하다. 1) 플라톤이 생각했던 대로, 지식이 정신의 기억 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면 이 잠재된 지식은 때때로 의식의 표층에 나타날 것이다. 영혼이 한때 간직했던 지식은 상기(想起)의 과정에 의해 재인식될 수 있다. 상기는 무엇보다도 정신이 감각적인 경험의 모순들로 곤경에 부딪히게 될 때 시작된다. 누군가 다양한 사물들의 이치를 깨달으려 노력할 때 그는 사물들 그 자체로부터 이데아들에로 "비상(飛上)"하기 시작한다. 정신은 해결할 필요가 있는 난제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각성의 내적 근원 이외에도 다른 각성의 방식도 있다.

  2) 동굴의 비유에서 플라톤은 어떻게 인간이 어둠으로부터 밝음에로, 무지로부터 지식에로 이동하는가를 묘사한 바 있다. 거기에서 그는 죄수들이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분위기를 그리고 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죄수라는 사실도, 그들이 그릇된 지식에 속박되어 무지한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들의 각성을 위해서는 어떤 외적 요인이 필요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죄수가 사슬로부터 풀려나 자신의 무지를 치료하려면 그를 누군가 우선 강제적으로 일으켜 뒤로 돌려서 눈을 쳐들고 빛을 향해 걷게 해야 한다." 즉 누군가 죄수의 사슬을 풀고 그를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제로 끌려난 다음에야 그는 동굴 밖의 세계로 인도될 수 있는 것이다. 사슬에서 억지로 풀려난 죄수는 그림자로부터 현실의 실재 대상물에로, 선(善)의 이데아에로 조금씩 이동하는 것이다. 이 고행을 통해 그는 상상(想像)과 신념이 지식을 구성하는 속견의 영역을 통과하여 결국 가지계(可知界)의 경계선을 넘어선다. 여기에서 그는 사유와 참된 지식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도덕적 발전은 그의 지적 상승과 평행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점증하는 지식은 진·선·미의 이데아에 대한 그의 사랑을 보다 깊게 해준다는 견해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행위가 그의 확장된 지식에 부응하는 것, 혹은 지배되는 일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해방된 죄수가 이전의 동굴에서 그림자가 어떤 모습으로 동굴의 벽에 나타날까를 예측하면서 서로 상(賞)을 주고받았던 때를 회상할 때, 이제 그는 자신이 이전에는 그것들이 그림자였음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더욱이 그의 새로운 지식에 입각하여 볼 때 그러한 내기나 상(賞)들은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될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참된 지식은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사소한 것과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구분해준다. 사소한 추구는 행복감을 낳을 수 없는 반면 가치 있는 행위는 그러한 행복과 덕으로 인도된다. 다시 말해 덕(德)은 지식, 즉 모든 행위의 참된 결과에 대한 참된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知)는 곧 덕(德)"이라는 명제는, 덕이 단순히 진리의 목록에 대한 지식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플라톤에 있어 덕이란 하나의 독특한 기능의 완전한 실현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를 내포한다.


2. 기능의 실현으로서의 덕(德)

  도덕에 관한 논의 전체를 통해 플라톤이 선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적 조화와 지식이 행복과 융합되는 삶이었다. 도덕의 핵심 용어인 덕(德)과 선(善)의 개념은 소피스트들에 의해 불투명해졌었다.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각각의 문화는 이 용어들에 그것이 원하는 모든 의미를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플라톤에 있어서 선(善)과 덕(德)은 행복과 조화를 낳는 행동 양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그에 의하면 조화는 영혼의 각 부분이 그 각각의 본성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고 있을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영혼의 각 부분은 각각 특수한 기능을 갖는다. 플라톤은 "한 사물의 기능이란 그것만이 할 수 있는, 따라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훌륭히 할 수 있는 활동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플라톤은 덕이란 관습이나 속견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본질 자체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욕망을 인식하고 인도하는 것이 바로 이성의 본질이다. 이성은 하나의 기능을 가지며 따라서 이성은 그 기능을 발휘할 때만이 선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성이 욕망에 의해 밀려난다면, 이성은 자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기개와 욕망도 각각의 기능을 갖는다. 따라서 선한 삶은 모든 부분이 각자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을 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종종 선한 삶을 사물들의 효과적인 기능의 발휘와 비교하였다. 그에 의하면 칼은 무엇인가를 잘 자를 수 있을 때, 즉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 때 선한 것이다. 의사의 경우에는 그가 의료행위를 실행하고 있을 때에만 선한 의사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플라톤은 이렇게 묻는다. "영혼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는 수행될 수 있는 하나의 기능을 갖는가?" 의사의 기능은 의료의 기술이며, 음악가는 나름대로 하나의 기술에 종사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삶도 하나의 기술과 같은 것이며, 영혼의 특수한 기능은 삶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음악과 삶의 기술을 비교하면서 그 양자의 기술은 한계와 정도를 인식하며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음악가는 악기를 조율할 때, 각각의 현(鉉)이 알맞게 조여졌는가를 확인한다. 왜냐하면 각 현은 특수한 음조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악가의 기술은 현이 조여져야 하는 한계를 인식하는 것과 음정간의 정도를 관찰하는 데 있다. 이와 유사하게 조각가도 정도와 한계에 대한 생생한 인식에 의해 조각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망치와 끌로 작업할 때, 그는 그가 완성하려 하는 형상에 맞춰 두드리는 강도를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삶의 기술도 비슷한 종류의 한계와 분수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영혼은 다양한 기능을 갖지만, 이 기능들은 지식이나 지성에 의해 규정된 한계 내에서 작용해야 한다. 영혼은 다양한 부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각각의 부분도 저마다 특수한 기능들을 가질 것이다. 또한 덕(德)은 기능의 실현이기 때문에 기능들의 수만큼 많은 덕목들이 존재할 것이다. 영혼의 세 부분에 대응하는 세 가지 덕은, 이 부분들이 각각의 기능을 실현할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욕망이 한계와 분수를 지켜서 영혼의 다른 부분을 침해하지 않을 때 쾌락과 갈망에 대한 이러한 조절은 절제의 덕을 낳는다. 또한 영혼의 기개 부분에서 나오는 의지력이 한계를 지킴으로써 성급한 행동을 피하고 믿을 만한 힘을 발휘할 때 용기의 덕이 이루어진다. 이성이 욕망의 공격에 동요되지 않고 일상 생활에서의 끊임없는 변화를 무시한 채 참된 이상들을 계속 지켜 나간다면, 그때 지혜의 덕이 성취된다. 한편 영혼의 각 부분이 자신의 특수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때, 덕인 정의가 이루어진다. 정의는 그 각 부분에 각각의 고유한 의무를 부과하므로 보편적인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는 한 인간의 행복 및 내적 조화의 성취를 반영하여 영혼의 모든 부분이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시현하고 있을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플라톤은 도덕을 영혼의 다양한 기능들에 근거하게 함으로써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와 상대주의가 극복되었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에 의하면 도덕이란 사회적 역학의 산물도, 단순한 힘의 문제도 아니었다. 확실히 어떤 문화나 어떤 사람들은 도덕을 사회적 정서와 힘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만 플라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즉 망치의 고유한 기능이 사회적 여론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망치의 본질과 능력들을 분석함으로써 발견되는 것처럼, 인간에게 적합한 행동도 여론에 의해 제시될 수는 없으며, 영혼의 각 부분들의 성격에 의해 밝혀진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영혼의 각 부분이 복종해야 하는 명백한 한계와 분수를 피하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자신들의 행위의 결과를 모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행복의 성취를 원하며 하나의 행동 양식을 선택할 때에도 그 행위가 그러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가정하거나 기대한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행복은 오직 영혼의 각 부분의 내적 조화와 균형이나 질서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욕망과 기개는 이성의 권위하에 복종해야 한다. 플라톤은 이성이야말로 인간의 행동 능력들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과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참된 삶이란 현세의 온갖 갈망과 애증의 관계항을 영혼의 기능으로 선도하여 그것들을 영원하고 완전한 질서 속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플라톤의 도덕철학은 서양의 도덕체계의 근간이 되었으며, 서양의 도덕관념이란 어쩌면 플라톤의 도덕관념에 대한 주석(註釋)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향이 지대하였다. 막대한 양의 원류는 비록 많은 해석을 요구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다음 편에는 그의 정치철학과 우주론에 대해 알아보는 것으로 [철학과 삶]의 서양철학사 플라톤 편을 마무리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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