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명의 일등항해사 플라톤 (Platon B.C 428 -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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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404회 작성일 10-08-03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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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철학자들인 밀레토스 학파는 주로 물질적인 자연의 구성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도덕의 기초에는 관심이 없었다. 엘레아 학파의 파르메니데스와 제논 역시 실재(實在)란 하나의 변화하지 않고 단일한 실재, 즉 유일자(有一者)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데 전념하였다. 그와는 다르게 피타고라스 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는 실재는 항상 변화하고 유전(流轉)하는 것으로 파악했고, 또한 그 실재가 다양한 사물들로 구성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은 물질적인 자연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그 대신 철학을 도덕의 영역으로 개편하였다. 플라톤의 위대한 바는 그 모든 관심을 하나의 통합된 사상 체계로 포섭했다는 점에 있다.
플라톤은 다양한 사물들에 대한 상식적인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 수많은 사물들의 이치를 파악하기 위해 정신은 우선 이 현상적인 사물들이 움직이는 이유를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이를 위한 시도를 통해 사물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세계를 채택하였다. 그것은 사유(思惟) 및 이데아들의 세계, 즉 과학의 세계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물질적인 사물들은 정신을 물리학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학에 대한 지적 이해가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사물들- 개별적인 사물이 아니라 유사한 상황에 놓여 있는 모든 사물들 -을 이해하기 위해서 정신은 우선 사물들이 그것들의 활동에서 준수하는 원리들과 규칙들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규칙들에 관한 사유의 모델이 수학이었다. 왜냐하면 수학은 개별적인 것과 연결되지 않고도 사유(思惟)할 수 있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수학은 플라톤을 형이상학의 영역에로 이끌 수밖에 없었다. 물리학이 현상(現象)의 세계로부터의, 즉 가시적 사물들의 위에 혹은 배후에 존재하는 이데아의 세계에로의 정신의 유입에 의해 가능한 것이라면, 이 단계에서 또 하나의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것은 이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하는가 혹은 실재하는가의 문제이다. 실로 상식과는 반대로, 플라톤은 가장 실재적인 것이 바로 이 이데아의 세계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두 개의 사과는 사라져도, 사과라는 이데아, 둘이라는 이데아는 초시간적 성질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플라톤은 진리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는 그들이 이 두 세계를 혼동하는 데서 연유한다고 주장했다. 현상계(現象界)가 속견(俗見)만을 낳는다면, 초시간적인 이데아의 세계는 참된 지식을 제기할 수 있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에 대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논박을 계승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참된 지식은 획득될 수 없다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은 학문과 지식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또한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의 도덕적 상대주의를 거부했고, 자신의 인식론은 형이상학에서 윤리학에 이르는 확고한 다리를 놓았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만일 우리가 사물의 참된 본성인 실재(實在)- 인간의 참된 본성을 포함하는 -에 대해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근본 해결책을 동시에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처음에는 한 개인의 문제였다가 그 다음에는 동료들을 포함하는 문제가 되며, 결국에는 인간의 궁극적 운명에 관한 문제를 포함하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러한 인간의 관심의 세 측면은 윤리학, 정치학, 종교라는 세 가지의 분리된, 그러면서도 서로 연관된 분야들에 의해 취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인식론을 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종교 문제, 그리고 예술론과 결합시켜 보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탐구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의 인식론을 그만큼 신중하게 접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서구인의 정신을 기초하였다. 서구 문명의 도덕 철학과 과학적 전통은 본질적으로 플라톤의 사상이 이룩한 업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의 철학은 거대했고 긴 생명력을 발휘하였다.
플라톤의 삶 개요(槪要) -
플라톤은 페리클레스가 죽은 지 1년 뒤인 기원전 428, 혹은 427년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소크라테스는 이미 마흔 한 살의 나이에 있었고, 아테네는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플라톤의 가계(家系)는 아테네의 저명한 가문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그는 당시의 그리스 문화를 주도하던 아테네의 예술, 정치, 경제, 철학 등과 관련된 거의 대부분의 문화와 그 정신을 두루 섭렵했으리라는 점은 거의 분명하다. 그의 부친은 자신의 혈통을 고대 아테네의 왕들에게까지 소급시켰고, 더 거슬러 올라가 포세이돈(Poseidon)에 이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한편 그의 모친인 페릭티오네(Perictione)는 카르미데스(Charmides)의 여동생이었고, 크리티아스(Critias)의 사촌이었는데, 그 두 사람은 펠로폰네소스 전쟁(431 - 404 B. C.)시 아테네가 몰락한 후 생겨난 과두 체제에서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이렇게 저명한 인사들, 또는 위대한 입법가, 또는 집정관이나 최고 행정관을 배출한 가계(家系)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플라톤의 가문은 오랫동안 영예를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플라톤이 상류계급이 지녀야 할 예절과 학식, 품위, 상식, 그리고 윤리적 의무 등에 관한 사항을 배웠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정치적 사명감을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플라톤의 아테네 민주정(民主政)에 대한 태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막바지에서 그 자신이 경험했던 것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아테네의 민주정치에 의해 소크라테스와 같은 인물이 합법적으로 처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목도하면서부터, 민주제란 우민정치(愚民政治)의 하나라는 것을 체득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자신이 품었던 정치적 사명감, 혹은 포부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처단하기 위해 마련된 부정한 재판(자세한 것은 소크라테스 최후편에 기술되었음)에서 그를 구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 그의 보석금을 낼 의향을 표시하기도 했음 - 아테네의 민주적 법정에서 그를 구해낼 수 없었다. 아테네의 붕괴와 소크라테스의 사형은 민주제에 대한 절망감을 플라톤에게 안겨 주었고, 따라서 그는 권위와 지식이 적절히 함유된 정치제를 구상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플라톤은 배(船)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선원의 권위가 그의 항해에 대한 지식에 의존해야 하는 것과 같이 국가라는 배는 적합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에 의해 운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제는 [국가론]에서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플라톤은 아테네에 팽배했던 다양한 형태의 철학을 두루 깊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그 가르침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와의 우정을 통해 철학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였다. 플라톤에게 있어 철학이란,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전문화된 기술적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 방식이었다. 철학은 과학과 인간 행동의 영역에 공히 적용되기 때문에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지적 능력뿐만 아니라 도덕적 품격도 요구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플라톤에게 있어 모든 지식의 분과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이 우주의 전체계와 조화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인간은 철학적 활동 즉, 정신의 부단하고 정열적인 활동을 통하여 그 자신을 세계에 관련시킬 수 있고 전인적(全人的)인 힘과 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였다.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플라톤 역시 완전한 지식이나 절대적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식에로 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변증법(dialectics)이라는 확신만을 갖고 있었다. 변증법이란 대화의 기술로서, 한 가정(假定)이나 가설을 끊임없이 반대 주장과 대비시키는 기술이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기술인 동시에 그의 삶이었다. 겸허하고 포용력 있게 소크라테스는, 선한 삶을 이룰 수 있는 조건들을 이해하고 그에 순응하는 올바른 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비록 그가 실제로 "제자"들을 거느린 적은 없고 작품을 남긴 적도 없었지만, 그는 바로 플라톤의 철학적 삶을 위한 지표가 되었으며, 플라톤의 저술에 의해 거의 완전한 결실을 이룰 수 있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술들을 대화의 형식으로 서술함으로써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을 보존했고,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와 자연 및 실재론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관심을 승화시켰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들을 거의 완성하던 시기, 즉 기원전 387년경에 아테네 근교에 아카데미아 학원을 세웠다. 그때 그의 명망은 정점(頂點)에 있었고 그의 나이도 마흔에 이르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 학원은 서구의 역사상 최초로 출현한 대학이었다. 플라톤은 20년 동안 그 곳의 학장으로 여러 가지 일을 관장했다. 아카데미아의 주요 목적은 본원적인 탐구를 통해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 플라톤의 주요 관심은 정치가들의 교육에 있었지만, 정치가들의 교육은 엄격한 지적 훈련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그들에게 수학, 천문학, 화성학(和聲學) 등을 포함한 과학적 탐구 방식을 교육하였다.
아카데미아의 과학에 대한 강조는 동시대의 이소크라테스(Isocrates)의 활동과 날카롭게 구별된다. 그 역시 젊은이들에게 공공 생활에 대해 교육하였지만, 그는 과학의 유용성을 거의 부정했다. 즉, 그는 순수한 학문적 탐구욕은 실용적 가치나 인문주의적 관심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대신에 그는 명확하고 효과적인 표현과 설득의 기술을 교육함으로써,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지배적인 의견들이나 특수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수학을 교과 과목의 중심에 위치시켰고,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준비는 진리나 과학적 지식의 사심 없는 추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정신은 속견(俗見)과 감정을 배제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하며, 엄격한 사유를 통해 실재를 직시하고 지식에 입각하여 판단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수학과 과학적 연구에 대한 플라톤의 엄격한 강조로 인해, 소피스트들의 허구적인 접근 방식은 이미 논박되었고 몇몇 유능한 사상가들이 아카데미아로 찾아오게 되었다. 아카데미아에 참여했던 뛰어난 학자 집단은 이전의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적 지식을 능가하는 훌륭한 진보를 이룩하엿다. 또한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저명한 수학자 유독소스(Eudoxos)와 같은 이는 자신의 학파로부터 아테네로 건너와 아카데미아에 합류하였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20편이 넘으며, 이는 하나의 광대한 저작이었다. 초기 저작 중 대부분은 윤리학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통상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이라 불린다. [변명], [크리톰], [카르미데스], [라케스], [유티프론], [유티데무스], [크리틸루스],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로 구성되어 있다. 이데아론과 형이상학 이론이 제시되고 있는 두 번째 시기의 대화편에는, [메논], [향연], [파에돈], [국가론], [파에드로스]가 포함된다. 플라톤은 생의 후반에 자연의 구조를 다룬 기술적인 대화편을 저술했다. 그것은 어떤 문제들에 대해 많은 시간을 사색했던 사람들의 견해와 종교적 신념을 심화시킨 하나의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는 [데아이테토스],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트], [정치가], [필레부스], [티마이오스], [법률론]이 포함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정치에 대해 좌절하게 했고,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어떠한 정치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엄밀한 지식이야말로 지도자의 훈련을 위해 가장 적절한 것임을 누차 강조하였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커다란 명성을 획득했으며, 시라쿠스(Syracuse)로 초빙되어 젊은 전제 군주였던 디오니시우스 2세를 교육하기도 하였으나, 그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디오니시우스에 대한 교육이 너무 늦게 시작된 데다 플라톤의 성격 또한 모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플라톤은 만년에도 끊임없이 저술 활동을 지속했고, 아카데이아에서 뛰어난 명민성을 보이던 청년, 아리스토텔레스를 주목하면서 여든 살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플라톤의 전작품은 하나의 철학 체계를 구성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플라톤 자신은 그의 사상을 그렇게 명료한 체계로 조직화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체계의 수립이란 인위적인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의 많은 대화편은 하나의 충실한 철학 체계의 요소들을 내포함에 틀림없지만, 우리가 그의 사상에 대해 체계적인 정리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은 하나도 없다. 플라톤은 정신의 자유가 보존되기를 원했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그에게 새로운 생각이 찾아들면 자신의 개념들을 수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어떠한 주제에 관해 서술했었다고 해서 그 주제에 관한 그 이후의 논의의 여지를 폐쇄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대화편들은 그의 지적 발전 과정을 반영하고 있으며, 강조와 통찰력에 있어서의 변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작품들에는 명확한 주제들과 그 주제들을 취급한 독특한 방식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하고 접수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주요한 주제들 중 몇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 주요한 몇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인식과 이데아 및 도덕과 정치 목록에서 살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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