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왜 그는? (Sokrates B.C 470 -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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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슬리 댓글 0건 조회 3,176회 작성일 10-08-03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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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철학자들은 사물의 궁극적 원리에 관해 광범위하며 우주적인 의문들을 제기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은 헤시오도스에 의해 제시된 통용 가능한 언어에 의해 설명 가능한 세계에 대한 논리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되었고, 그것은 인간과 삶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입안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소크라테스는 그 흐름의 연속선상에 있으면서 철학의 물결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노력이 가능했던 것은 자연철학적 논의가 일치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것에 어느 정도의 이유가 있었다. 철학자들의 자연에 관한 해석들은 너무나 다양하여 일관성 있게 제기되지 못했으며, 그 해석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권위 있는 방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이 다수적인 실체들로 구성되며, 만물은 지속적인 변화 혹은 유전(流轉 : Panta rei)의 과정 속에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파르메니데스는 실재란 유일하며 정체적인 실체, 즉 유일자(有一者)이며, 운동이나 변화는 사물의 현상이 우리의 감관에 제공된 거짓된 환상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연과 사물의 비밀을 간파하는 데 따르는 난점들을 해결할 수 없는 철학적 논의에 대한 초조와 무관심은 결국 지적인 권태를 낳았으며, 철학은 오히려 이쯤에서 멈추는 편이 더 낫다는 풍조가 팽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성의 능력에 대한, 또는 사물의 궁극적 원리에 대한 회의주의적 분위기가 초래되어 세속적이며 현실적인 실용성이 강조되는 결과들이 창궐하는 시대로 떨어질 무렵, 그 회의주의가 던진 씨앗으로 인해 철학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철학자들은 이제 자연과 사물과 우주에 관한 이론을 제기하는 대신에 인간의 지식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과연 인간의 정신이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묻기 시작했고, 이러한 의문은 다양한 종족들과 시민들간의 문화적 차이들에 관한 논의에 의해 더욱 가열될 수 있었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질문은 점차 선(善)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갖게 되었으며, 만약 인간이 어떤 보편적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면, 선(善)에 대한 보편적 개념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과 그 질문의 종단을 향해 달려가는 무대 가운데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분명 소피스트에 의해 교육받고 자라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에 대해 가장 준엄하게 비판하는 편에 서 있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아테네인들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를 동일한 부류로 취급했던 이유는 어떠한 문제든지 그 논제를 냉정하게 분석한다는 면에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하나의 적극적인 차이점이 있었는데, 소피스트들이 극도로 면밀하게 어떠한 주제이든지 그 주제에 대해 또 다른 측면에서도 훌륭한 논지를 전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었다. 또한 그들은 확실하고 믿을 만한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회의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허무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도덕적 이념들과 가치, 이성에 의한 판단과 그 의미까지도 상대적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확고부동한 지식을 위한 기초의 정립이 그의 임무라고 믿었다. 또한 그는 선한 삶을 위한 기초를 발견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노력의 일환으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상호 관련시켜 선(善)을 아는 것이 곧 선(善)을 행하는 것이라고 계몽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지식은 덕(德)"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변호사나 법률가들의 실용적 기능을 발전시키거나 진리를 오염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진리와 선(善)의 창조적인 개념을 수립하기 위해 요청되는 논법, 즉 변증술(dialectic : 근대의 변증법과 구별하기 위해 변증술이라 함)을 입안하여 적극적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거류하던 시대에는 소위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였던 인물이 그 어느 시대보다 많았다. 아이스퀼로스(Aeschylos)를 비롯하여 위대한 희곡을 발표하였던 유리피데스(Euripides)와 소포클레스(Sophocles), 그리고 민주주의 시대의 정점에서 예술과 문화의 정화를 이룩하였던 페리클레스가 함께 거류하였으며, 피디아스(Phidias)의 조각품과 파르테논 신전이 완성되는 것을 보았고, 아테네가 에게 해의 대부분을 장악하여 거의 모든 무역에 독점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아테네는 전대 미문의 세력과 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며, 지상 최대의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크세노폰에 의해 전해진 것이며, 그 기록에 의한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의 진정한 천재였을 뿐 아니라 비상한 이성의 엄격성과 인간적인 따뜻함과 유머 감각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강인한 힘을 가진 건장한 정신의 소유자로,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희극 「군중」에서 소크라테스의 눈을 굴리는 습관을 놀리고, 장난스럽게 그의 제자들과 '생각하는 상점'에 관해 언급하면서 소크라테스를 점잔을 빼며 걷는 물새에 비유하며 코믹하게 묘사하였다. 플라톤은 그러한 면모의 소크라테스를 수긍하면서, 그 위에 책임감이 강하고 도덕적으로 결벽한 그의 성격을 첨부하였다.
「향연」에서 플라톤은, 멋진 청년이었던 알키비아데스(Alcibiades)가 소크라테스의 관심과 애정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으며, 그와 단 둘이 있고 싶어 얼마나 많은 음모를 꾸몄던가를 보여주었다.①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나와 대화했고, 그가 나와 함께 소일할 때도 나를 혼자 놔두고 나가곤 했다"고 하였다. 알키비아데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군복무 시절에도 아무 것도 먹지 않고도 누구보다 오래 걸을 수 있었으며, 추운 겨울에도 다른 사람들은 '놀랍도록' 많은 옷을 껴입고 털모자를 쓰고, 신발에 양털을 덮었지만 소크라테스는 "평상시 입던 외투를 그대로 입고 나갔으며 신발을 신은 우리들보다도 더 쉽게 빙판 위를 맨발로 걸어갔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오랫동안 긴장하며 집중하곤 하였다. 그는 군복무 시절에도 하루 종일 깊은 명상에 감겨 있을 때도 있었고, "새벽부터 해가 뜰 때까지" 명상에 잠겼고, "그런 다음 태양을 향해 기도하면서 계속 걸었다."고 하였다. 이 때가 그에게 도덕적 생활에 대한 예언자적 배려를 임무로 삼게 된 시기인 듯 하다. 그는 종종 자신의 내부로부터 울리는 [음성] 또는 다이몬(daimon)으로 명명된 존재로부터 전달되는 경고를 듣곤 했다고 실토하였는데, 비록 이 초자연적인 음성이 그의 유아 시절부터 그의 생각에 찾아드는 소크라테스 자신의 환청이나 특수한 감수성으로 추측되지만, 그는 최후의 재판에서 "오, 아테네 인들이여, 진리는 오직 하나, 즉 내가 물질적인 것에 대해 전혀 사색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라고 강조 할 때조차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준거로 작용했음에 틀림이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도덕 철학가로 일생을 보내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델포이 신탁(The Delphic Oracle)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카에로폰(Chaerophon)이 델포이 신에게, 지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물었을 때, 그 응답은 지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며, 그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 후, 그는 철학자로서, 또는 한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에 삶을 모두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듯 하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소크라테스는 상당한 명성과 함께 아테네 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그러한 가운데 그는 신탁의 의미를 자신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현명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었으리라 믿었으며, 그 일이 일어난 후 소크라테스는 더욱 진리와 지혜의 문제에 몰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노력이 가능했던 것은 자연철학적 논의가 일치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것에 어느 정도의 이유가 있었다. 철학자들의 자연에 관한 해석들은 너무나 다양하여 일관성 있게 제기되지 못했으며, 그 해석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권위 있는 방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이 다수적인 실체들로 구성되며, 만물은 지속적인 변화 혹은 유전(流轉 : Panta rei)의 과정 속에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파르메니데스는 실재란 유일하며 정체적인 실체, 즉 유일자(有一者)이며, 운동이나 변화는 사물의 현상이 우리의 감관에 제공된 거짓된 환상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연과 사물의 비밀을 간파하는 데 따르는 난점들을 해결할 수 없는 철학적 논의에 대한 초조와 무관심은 결국 지적인 권태를 낳았으며, 철학은 오히려 이쯤에서 멈추는 편이 더 낫다는 풍조가 팽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성의 능력에 대한, 또는 사물의 궁극적 원리에 대한 회의주의적 분위기가 초래되어 세속적이며 현실적인 실용성이 강조되는 결과들이 창궐하는 시대로 떨어질 무렵, 그 회의주의가 던진 씨앗으로 인해 철학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철학자들은 이제 자연과 사물과 우주에 관한 이론을 제기하는 대신에 인간의 지식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과연 인간의 정신이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묻기 시작했고, 이러한 의문은 다양한 종족들과 시민들간의 문화적 차이들에 관한 논의에 의해 더욱 가열될 수 있었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질문은 점차 선(善)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갖게 되었으며, 만약 인간이 어떤 보편적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면, 선(善)에 대한 보편적 개념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과 그 질문의 종단을 향해 달려가는 무대 가운데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분명 소피스트에 의해 교육받고 자라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에 대해 가장 준엄하게 비판하는 편에 서 있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아테네인들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를 동일한 부류로 취급했던 이유는 어떠한 문제든지 그 논제를 냉정하게 분석한다는 면에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하나의 적극적인 차이점이 있었는데, 소피스트들이 극도로 면밀하게 어떠한 주제이든지 그 주제에 대해 또 다른 측면에서도 훌륭한 논지를 전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었다. 또한 그들은 확실하고 믿을 만한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회의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허무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도덕적 이념들과 가치, 이성에 의한 판단과 그 의미까지도 상대적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확고부동한 지식을 위한 기초의 정립이 그의 임무라고 믿었다. 또한 그는 선한 삶을 위한 기초를 발견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노력의 일환으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상호 관련시켜 선(善)을 아는 것이 곧 선(善)을 행하는 것이라고 계몽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지식은 덕(德)"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변호사나 법률가들의 실용적 기능을 발전시키거나 진리를 오염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진리와 선(善)의 창조적인 개념을 수립하기 위해 요청되는 논법, 즉 변증술(dialectic : 근대의 변증법과 구별하기 위해 변증술이라 함)을 입안하여 적극적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거류하던 시대에는 소위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였던 인물이 그 어느 시대보다 많았다. 아이스퀼로스(Aeschylos)를 비롯하여 위대한 희곡을 발표하였던 유리피데스(Euripides)와 소포클레스(Sophocles), 그리고 민주주의 시대의 정점에서 예술과 문화의 정화를 이룩하였던 페리클레스가 함께 거류하였으며, 피디아스(Phidias)의 조각품과 파르테논 신전이 완성되는 것을 보았고, 아테네가 에게 해의 대부분을 장악하여 거의 모든 무역에 독점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아테네는 전대 미문의 세력과 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며, 지상 최대의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크세노폰에 의해 전해진 것이며, 그 기록에 의한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의 진정한 천재였을 뿐 아니라 비상한 이성의 엄격성과 인간적인 따뜻함과 유머 감각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강인한 힘을 가진 건장한 정신의 소유자로,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희극 「군중」에서 소크라테스의 눈을 굴리는 습관을 놀리고, 장난스럽게 그의 제자들과 '생각하는 상점'에 관해 언급하면서 소크라테스를 점잔을 빼며 걷는 물새에 비유하며 코믹하게 묘사하였다. 플라톤은 그러한 면모의 소크라테스를 수긍하면서, 그 위에 책임감이 강하고 도덕적으로 결벽한 그의 성격을 첨부하였다.
「향연」에서 플라톤은, 멋진 청년이었던 알키비아데스(Alcibiades)가 소크라테스의 관심과 애정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으며, 그와 단 둘이 있고 싶어 얼마나 많은 음모를 꾸몄던가를 보여주었다.①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나와 대화했고, 그가 나와 함께 소일할 때도 나를 혼자 놔두고 나가곤 했다"고 하였다. 알키비아데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군복무 시절에도 아무 것도 먹지 않고도 누구보다 오래 걸을 수 있었으며, 추운 겨울에도 다른 사람들은 '놀랍도록' 많은 옷을 껴입고 털모자를 쓰고, 신발에 양털을 덮었지만 소크라테스는 "평상시 입던 외투를 그대로 입고 나갔으며 신발을 신은 우리들보다도 더 쉽게 빙판 위를 맨발로 걸어갔다."고 하였다.
① 당시는 동성연애가 사회적인 보편성으로 인정되던 시대였으며, 권장되던 시기였다. 그것은 오히려 신분을 중시하는 사회에서의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기도 하였다. 이성(異性)과의 사랑이 단지 육욕적인 사랑으로 비하되어, 고귀한 직분에 종사하는 사람은 마땅히 고귀한 신분을 지닌 사람이나 그 신분으로 태어난 미소년, 또는 청년과 정신적, 육체적 유대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아테네적 정서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그 정서는 당시에 깊이 일반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오랫동안 긴장하며 집중하곤 하였다. 그는 군복무 시절에도 하루 종일 깊은 명상에 감겨 있을 때도 있었고, "새벽부터 해가 뜰 때까지" 명상에 잠겼고, "그런 다음 태양을 향해 기도하면서 계속 걸었다."고 하였다. 이 때가 그에게 도덕적 생활에 대한 예언자적 배려를 임무로 삼게 된 시기인 듯 하다. 그는 종종 자신의 내부로부터 울리는 [음성] 또는 다이몬(daimon)으로 명명된 존재로부터 전달되는 경고를 듣곤 했다고 실토하였는데, 비록 이 초자연적인 음성이 그의 유아 시절부터 그의 생각에 찾아드는 소크라테스 자신의 환청이나 특수한 감수성으로 추측되지만, 그는 최후의 재판에서 "오, 아테네 인들이여, 진리는 오직 하나, 즉 내가 물질적인 것에 대해 전혀 사색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라고 강조 할 때조차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준거로 작용했음에 틀림이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도덕 철학가로 일생을 보내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델포이 신탁(The Delphic Oracle)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카에로폰(Chaerophon)이 델포이 신에게, 지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물었을 때, 그 응답은 지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며, 그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 후, 그는 철학자로서, 또는 한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에 삶을 모두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듯 하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소크라테스는 상당한 명성과 함께 아테네 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그러한 가운데 그는 신탁의 의미를 자신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현명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었으리라 믿었으며, 그 일이 일어난 후 소크라테스는 더욱 진리와 지혜의 문제에 몰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선대(先代)의 철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밀레토스 학파나 피타고라스 학파, 또는 엘레아 학파의 물질적인 실재에 대한 논의보다는 인간의 본성과 진리와 선(善)에 대한 문제가 보다 다급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식이라는 건축물의 확고한 기초를 발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그러한 기초를 인간의 외부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서 발견하였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인간의 내부는 인식 행위를 실천적인 행위로 인도하는 독특한 활동 무대였다. 이 활동을 묘사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영혼(psyche)라는 개념을 만들어내었다. 그에게 있어 영혼은 어떤 특수한 기능도 아니고 특수한 종류의 실체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지성과 인격의 능력, 즉 인간의 의식적인 퍼스낼리티를 의미했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의미를 두고 말하기를,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것을 통해 현명한가 아니면 어리석은가, 선한가 악한가를 판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묘사함으로써 영혼을 어떤 유령이나 신(神)과 같은 실체로서가 아니라 지성과 인격의 정상적인 능력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영혼은 사물은 아니었지만, 인간의 가장 큰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 "가능한 한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과업을 실현해야 하는 하나의 임무가 되었다. 인간은 언제 자신의 영혼을 가장 훌륭하게 배려하는가 라는 질문에, 사실과 환상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간 생활의 실재(實在)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 자신의 사상을 형성할 때가 바로 그 때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지식을 획득하고 자신의 영혼을 잘 돌보는 사람은, 참된 도덕적 가치들에 대한 그의 지식에 따라 행동할 것이며, 그 가치를 잃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우선 선한 생활이 중시되어 있으며, 그것은 참여와 실천으로서의 삶을 위한 적극적인 개념으로 단순한 명상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영혼은 사물은 아니었지만, 인간의 가장 큰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 "가능한 한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과업을 실현해야 하는 하나의 임무가 되었다. 인간은 언제 자신의 영혼을 가장 훌륭하게 배려하는가 라는 질문에, 사실과 환상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간 생활의 실재(實在)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 자신의 사상을 형성할 때가 바로 그 때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지식을 획득하고 자신의 영혼을 잘 돌보는 사람은, 참된 도덕적 가치들에 대한 그의 지식에 따라 행동할 것이며, 그 가치를 잃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우선 선한 생활이 중시되어 있으며, 그것은 참여와 실천으로서의 삶을 위한 적극적인 개념으로 단순한 명상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개념에 있어서 확고 부동한 문제는 인간은 언어가 의미하는 바를 의식적으로 알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것이 다른 것과 모순된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 - 정의(正義)는 남을 해치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 - 이러한 것들은 영혼이 인식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지식의 전형적 예가 되는 것들이었다. 남을 해치는 어떤 행위가 자신의 정의에 대한 지식과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을 해치는 경우처럼, 지식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본성에 반(反)하는 것이며, 스스로를 해치는 행위가 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확고 부동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으며, 그러한 지식만이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이고 믿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과업은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에게 어떻게 인간이 확고 부동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가를 제시하거나 권고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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