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2편: 회의주의의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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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733회 작성일 10-08-0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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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중세철학 1편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일생을 간략히 소개했었다. 2편에서는 그의 인식론을 다룰 생각이며 3편에서는 그의 실천론을 다룰 생각이다. 그의 인식론은 그가 그렇게 붙잡으려 노력하였던 올바른 철학의 성립과 무관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의 인식론은 그가 한 때 의지하였던 “인간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는 진리란 없다”는 회의주의적 입장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1) 회의주의의 극복
아우구스티누스는 전편에 기술한 바와 같이 한동안 회의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에게 인간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진리란 없다는 회의주의적 태도는 그의 방탕한 삶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무의식적 의지와 상립할 수 없는 테제였었다. 그가 극적으로 회심한 후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인간이 확실성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확실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이성이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한 확실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회의주의에 답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이성은 모순율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사물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논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원리를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세계가 하나인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세계가 여러 개로 존재한다면 그 수는 유한하거나 무한하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양자가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직은 어떠한 확고한 지식은 아니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신이 불확실성 속에서 허망하게 헤매지 않게 하리라 생각하였다.
정신은 양자의 선택이 동시에 참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사실이야말로 불변하는 진리라는 것도 또한 알고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가정하였다. 더욱이 그에 의하면 회의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회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회의하는 행위 그 자체가 확실성의 한 형태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확실성 즉 “나는 존재한다”는 확실성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회의한다면 나는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회의하고 있다는 사실은 회의할 수 없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적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잠들어서 꿈속에서 사물을 보거나 자신을 인식할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회의주의자들의 반박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고 있거나 깨어있거나 인간은 살아 있다고 대답하였는데, 이 답변은 그도 인정하듯 별로 신통한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다만 의식 있는 사람이면 그가 존재해 있고, 살아 있으며, 그리고 그가 사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고, 우리의 존재 및 그것에 대한 지식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였다.
그는 이러한 논리를 가지고 회의주의자들에 대해 두려움 없이 맞섰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같은 명제로 유사한 주장을 함으로써 자신의 철학 체계의 정초로 삼은 데카르트와는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지 회의라는 사실로부터 회의주의의 기본 전제를 반박하는 데 만족하였다. 외적 대상의 존재를 증명하는 대신 그는 주로 이들 대상에 언급하여 어떻게 정신이 모든 사물과의 관계에서 지식을 이루고 있는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기술하고 싶어 하였다.
2) 지식과 감각
어떤 사람이 대상을 감각할 때, 그는 이 감각 행위로부터 지식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그러한 감관 지식은 인식의 최하의 단계였다. 그에 의하면 감관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한 종류의 지식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감관 지식은 어느 면에서 확실성의 정도가 가장 낮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감관 지식이 인식의 최하급의 단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감관 지식의 확실성이 감소하는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그 하나는 감각 대상이 항상 변화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감각 기관이 수시로 변한다는 사실에 기인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원인에 의해 감각은 시시각각, 또 사람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달게 느껴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쓰게 느껴지고 차고 더운 것도 마찬가지로 다르게 지각된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관들의 정확도는 기껏해야 정도에 불과하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감관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한다거나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물에 잠겨 있는 노(櫓)가 우리에게 구부러져 보이는 경우 우리의 감관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상황에서 구부러져 보이는 것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그 노가 똑바르게 보인다면 뭔가 이상이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노의 실제적인 조건에 대해서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만일 그 노가 실제로 구부러져 있다고 보이는 그대로 동의한다면 그는 결국 속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피하기 위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상 이외에는 인정을 하지 말라. 그러면 당신은 속지 않을 것이다”라고 충고한다. 이러한 식으로 그는 감관의 신뢰성과 그 한계를 단언하였다. 그는 감각의 본질 및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감관에 의해 지식에 이르는 방법을 밝혀내려 하였다.
우리가 한 대상을 감각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인간에 대한 플라톤적인 해석에 의해 답하고 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라는 것이다. 플라톤(플라톤뿐 아니라 그리스의 전통적 지식인의 대부분)은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고까지 말하였다. 또한 영혼이 어떻게 지식을 획득하는가에 대한 설명에서도 플라톤의 상기론(想起論)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지식은 기억하는 행위가 아니며 영혼의 행위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대상을 감각할 때 영혼(정신)은 그 자신의 실체로부터 대상의 상(像)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대상 스스로 정신에 물질적인 “인상(印象)”을 만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정신적이지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을 만드는 것은 영혼 그 자신이다. 더구나 우리가 대상을 감각할 때 우리는 상을 감각할 뿐만 아니라 판단도 내린다. 우리는 어떤 여자를 보고 그녀가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이러한 판단의 행위에 의해, 나는 감관을 통해 사람을 지각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을 감각하는 영역과는 다른 영역에서 정신이 가지고 있는 기준과 그녀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7명의 소년을 보고 3명의 소년을 본다면 그들 모두는 10명이 된다는 것을 안다. 자연의 모든 사물들이 변하기 마련인 것처럼 필멸의 운명을 가진 10명의 소년 역시 결국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10이라는 숫자를 소년들과 분리하여 7과 3은 그 소년들이나 이외의 어떤 것에도 귀속되지 않으며, 더하여 10이 된다는 사실이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참임을 알 수 있고, 그것이 진실임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감각은 우리에게 가끔 어떤 지식을 주지만, 그것이 갖는 주된 특성은 그것이 반드시 대상 이외의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부러진 노에 대한 감각에서 직선과 굴곡에 대한 사유로,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으로, 소년들로부터 수학의 진리로 옮겨 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에 대한 기술이 명백해지는데, 이는 감각의 구조를 설명함으로써 육체와 정신을 구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감각 기관이 대상들을 감각할 때에만 감각은 육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물을 감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이성적 지식을 가지며 이성적인 판단도 내린다. 동물과 명백히 다른 이와 같은 특성은 인간이 그러한 판단을 내릴 때, 그는 단지 감각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미(美)나 수학의 진리들과 같은 다른 대상들에게 그의 정신을 지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심하게 분석하여 보면 인간의 감각 행위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장하였다. 1) 감각 대상 2) 감각이 의탁하는 육체적인 기관 3) 대상의 상을 형성할 때의 정신의 활동, 그리고 4) 정신이 감각 대상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사용하는 비물질적 대상(예를 들어, 미(美)나 논리). 이러한 분석에서 볼 때 인간이 대하고 있는 대상은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는데, 육체적인 감관의 대상과 정신의 대상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눈으로는 사물을 보며 정신으로는 영원한 진리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대상이 다르므로 지적인 확실성의 정도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조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정신이 감관과는 무관하게 영원한 진리를 주시하고 있을 경우와 비교할 때, 그의 가변적인 감관이 계속 변화하는 물질적 대상들을 감각함으로써 얻는 진리의 신뢰성은 그만큼 감소한다. 한편 감각은 지식의 방향을 외부의 사물이 아닌 인간 내부의 활동에로 지향시킨다. 따라서 지식은 감각 대상의 단계에서 보편적인 진리의 더 높은 단계로 이동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최고의 지식의 단계는 신(神)에 대한 지식이었다. 감각이 이러한 지식의 획득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는 것은 정신을 더 위로 향하게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외부에서 내부로, 낮은 단계에서 더 높은 단계로” 신을 향하여 움직여간다고 말하고 있다.
3) 계시론
감각과 지식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신이 어떻게 영원하고 필연적인 진리를 포함한 여러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였다. 정신이 처음에 사물과의 관계에서 마주치는 7과 3이 덧셈에 의해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10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실제로 왜 여기에 문제가 있는가? 문제는 인간의 지식에 포함된 제 요소는 가변적이고 불완전하며 유한하다고 하는 인간의 지식에 대한 이제까지의 인간 설명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요소들의 불완전성과 가변성을 넘어서는 정신은 어떠한 회의도 갖지 않은 영원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즉 그는 절대적인 확신을 지닌 진리이며 인간의 정신이 내놓을 수 있는 것보다 우위에 있는 진실일 것이다. 그러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정신은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가? 플라톤의 상기론에 의하면, 영혼은 자신이 육체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상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원한 보편 관념은 지성에 의해 개체로부터 추론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주장 가운데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가시계(可視界)의 태양과 가지계(可知界)의 선의 이데아 사이의 비유 가운데에 포함된 플라톤의 다른 통찰을 수용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어떤 관념들의 확실성에 관한 인식에 관한 사항만큼 그 기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상기(想起) 및 일종의 생득관념(生得觀念)을 거부하는 동시에 추상의 개념을 더욱 가까이하였다. 실제로 인간의 육체의 일부인 눈이 대상을 감각할 때, 그 대상이 빛에 드러나 있는 경우에만 정신은 그것에 대한 상을 형성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대상 역시 그 자신의 고유한 빛에 싸여 있을 경우에만 정신은 그 대상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눈이 이 육체의 빛 속에서 그 주위의 모든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은 이유로, 창조주의 배려에 따라 본래 지성적인 실재에 속하는 정신은 독특한 종류의 어떤 비물질적인 빛 속에서 수학적 진리와 같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지적인 정신의 본질이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요컨대 인간의 정신이 영원하고 필연적인 진리를 “보고자” 원한다면 그것은 계시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태양 빛 없이는 세계 속의 사물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어떤 계시 없이는 지성의 지적인 대상인 진리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불변의 진리를 볼 수 있게 하는 영원한 이성의 빛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고 간결하게 그의 계시론을 언급하였다. 그가 이 이론에 의해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지 않다. 단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분명한 것은 태양으로부터 멀리까지 빛이 비치듯이 계시는 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를 좀 더 고려해 본다면 신성한 빛은 그것이 존재한다면 존재하는 사물, 혹은 관념을 비추어야 한다. 우리는 태양 빛에 의해 나무와 집, 또는 강물 위에 흐르는 나룻배 등을 볼 수 있다. 신성한 빛이 그와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면 이 빛 또한 무엇인가 우리의 관념을 비추어야 한다. 이 빛은 우리가 관념 속에서 진리와 영원의 성질을 인식하는 조건은 되겠지만 관념의 원천은 아니다. 다시 말해 신의 계시는 관념의 내용이 우리의 정신 속에 몰입되는 과정이 아니며 어떤 관념이 필연적이고 영원한 진리를 포함하는가를 구별할 수 있도록 하는 우리의 판단에 대한 계시인 것이다. 이 빛의 원천인 신은 완전하고 영원하며, 인간의 지성은 신의 영원한 관념의 일부로 활동한다.
인간의 정신이 신을 인식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계시론은 물질 대상들의 가변성과 인간 정신의 유한성에 의한 인식의 한계가 신의 계시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이론을 가지고 어떻게 인간의 지성이 감각 대상을 초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어떻게 필연적이고 영원한 진리에 대한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만족할 수 있었다.
4) 신(神)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존재에 관한 사색에만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신에 대한 그의 철학적인 고찰은 지혜와 정신적인 평화에 대한 그의 광범위한 추구의 산물이었다. 한때 그가 감각적인 쾌락 속에 깊이 빠졌던 경험에 의해 영혼은 육체적이거나 감각적인 쾌락 속에서 평화를 찾을 수 없음을 통각하였다. 마찬가지로 지식의 확실성을 추구하던 그는 사물의 세계가 변화와 무상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였다. 또한 정신은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이므로 그것 역시 불완전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돌연 어떤 영원한 진리를 인식하는 경험과 마주하였고, 이 경험을 통하여 그는 진리를 사유하는 경험과 쾌락 및 감각의 기쁨을 얻는 경험을 비교할 수 있었다. 이 두 경험 가운데 그는 정신의 활동이 더욱 지속적이고 심오한 평화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그가 유한한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그것의 능력을 넘어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기술적인 문제를 사유한 후 얻은 결론은, 이러한 지식은 그의 외부에 있는 유한한 사물로부터 얻을 수 없으며, 더욱이 그 자신의 정신에 의해 충분히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원하는 지식은 그의 정신 작용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이 지식은 영원하여 그의 유한한 정신으로부터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불변의 진리는 신에게서 비롯된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그의 지식이 갖고 있는 특성과 신의 속성과의 유사성 즉 양자는 모두 영원하며 참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영원한 진리의 존재는 신의 존재를 의미하였다. 이런 식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단계의 자신의 경험과 정신적인 추구를 통하여 신에 대한 존재 증명에 도달하게 되었다.
신은 곧 진리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신은 인간 안에 있다. 또한 신은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을 초월한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기술함으로써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신의 존재를 정의하는 것보다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그는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신이 유한한 사물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함은 중요한 진보였다. 모세에게 주어진 신의 이름, “나는 존재하는 그로다(Ego sum quisum)”를 성경에서 발췌하면서 그는 이것을 “신은 곧 존재 그 자체이다”라는 의미로 전의(轉意)시켰다. 마찬가지로 신은 플로티누스의 존재 없는 유일자가 아닌 최고의 존재이며, “어느 것도 그보다 더 훌륭하고, 더 거룩할 수 없는 존재”라고 기술하였다. 안셀무스(Anselmus)는 이 구절에 영향을 받아 그의 유명한 존재론적 증명을 제시했었다. 최고의 존재로서의 신을 곧 완전한 존재라고 하는 것은 그가 자존적이며 불변이고 영원한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에게 속하는 어떠한 복합적인 속성도 모두 동일하다는 점에서 그는 완전하기도 하지만 단순하기도 하다. 그의 지식, 지혜, 선(善), 능력 모두가 하나이며 그러한 것이 그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일상 세계는 신의 존재와 활동을 반영하여준다. 우리가 보는 사물들이 점차 소멸되어 간다는 점에서는 가변적이지만 그것들이 존재하는 한, 정해진 형상을 가지며 이 형상 또한 영원한 신의 반영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렇듯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물들이 그 존재를 가지는 것은 오로지 존재의 근원인 신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의 사물과는 달리 신은 “장소의 어떠한 간격 속에서도, 연장 속에도 있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신은 “시간의 어떠한 간격이나 연장 속에도 있지 않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신을 순수한 혹은 최고의 존재로 기술하며 따라서 신 안에서는 비존재에서 존재로 혹은 존재에서 비존재로의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신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는 “존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념이 가지는 힘은 그것의 철학적인 엄밀성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적인 고민의 해결과 연관시켜 탐구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하였다. 이제 그에게, 존재와 진리와 유일하고 영원한 실재의 근원으로서의 신은 사유와 사랑의 합법적인 대상이 되었다. 신으로부터 정신의 계발과 의지의 힘이 솟아난다. 더구나 신은 진리의 표준이기 때문에 모든 다른 지식이 가능하다. 그의 본질은 존재이며 존재는 곧 행위이고, 행위는 인식하는 것이다. 영원하고 전지전능한 신은 항상 창조 안에서 반영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식을 알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세계의 모습을 이루는 다양한 형상들은 전형(典型)으로서의 신 안에 항상 존재한다. 그러므로 만물은 신의 영원한 사유의 유한한 반영이다. 신의 사유는 “영원”하므로 신은 앞일을 “알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미 우리의 언어가 가지는 한계를 난점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계와 신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선(善)이 세계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초월한다고 하여도 세계는 신의 영원한 사유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불변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었고 이것이 그에게는 중요한 점이었다.
신과 세계 사이에 이러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한쪽을 안다는 것은 곧 다른 한쪽의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과 같다. 신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세계의 참 본질, 그리고 인간의 참 본질과 운명을 가장 심오하게 이해하는 자(者)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확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어느 곳에서나 삼위일체의 증거를 증거할 수 있다고는 하였지만 그가 신에 대해 주로 사용하였던 말은 성부(聖父)였다. 이는 다른 사람들, 세계, 그리고 정신은 하나이며 동일한 존재를 공유한다는 사실에서 정신을 강조하더라도 같은 실체로 된 모두와 연관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5) 창조된 세계
신은 사유와 사랑 모두에 대해 가장 적합한 대상이며, 물질적이고 가변적인 세계는 인간에게 참된 지식 혹은 정신적인 평화를 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우선 인간의 생활은 물질적인 세계 안에서 행해져야만 하고 인간이 그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가 앞서 지식의 본질과 신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부터 그가 세계를 신의 피조물로 보고 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의 「고백론」에 의하면 우리가 어디를 둘러보건 만물, 예를 들어 꽃이나 너도밤나무는 “우리는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이 우리를 창조하여 영원히 살게 하였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한한 사물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영원한 존재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독특한 창조론에서 하나님은 세상과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a)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신이 만물을 무에서(ex nihilo) 창조하였다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독특한 교의(敎義)이다. 세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항상 제각기 존재하는 조물주(Demiurge)의 형상과 그 모사(模寫)와의 결합이라고 본 플라톤의 견해와는 대조를 이룬다. 오히려 그는 세계를 신으로부터의 유출(流出)이라고 설명한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에서 출발하였다.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신 안에는 유출되어야만 하는 본래적인 필연성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선(善)은 필연적으로 그 자체를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이론에 의하면, 신과 세계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하며 세계는 단지 신의 연장(延長)에 불과하다. 이러한 생각에 반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는 신의 자유로운 행위의 산물이며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신은 무(無)로부터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사물에게 존재를 부여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만물은 자신의 존재를 신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과 피조물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플로티누스는 세계를 유출된 것으로서, 신의 연장이라고 본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전에 없었던 것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라고 설명하였다. 물질이란-제 1 형상에서조차도- 이미 어떤 것이었기 때문에 신이 존재하는 물질로부터 창조했을 리는 만무하다. 무형의 물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실제로는 무를 나타내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사실상 물질을 포함하는 만물은 신의 창조적인 행위의 산물이라 지칭되었다. 형태가 갖추어질 수 있는 무형의 물질이 있다 하여도 그것의 기원은 신 안에서 구해지며, 신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물질이 신에 의해 창조된다는 사실은 곧 물질이 선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은 모두 선(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물질이 지닌 본질적인 선이 그의 도덕론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매우 컸다. 왜냐하면 이 교의는 육체는 어둠으로 구성되어 있고 악의 원리로 가득 차 있다는 마니교의 교리와 현격한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만물은 하나님의 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었던 그는 창조된 질서 속에 있는 모든 사물은 존질적으로 악하다는 생각을 반박하고 그 논조를 타파해야 하는 일을 자신의 또 다른 과제로 삼았다.
b) 배아(胚芽)의 이유(rationes seminales)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의 다양한 종(種)들이 결코 새로운 종을 생성할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주목하였다. 강낭콩은 강낭콩을 낳고 엉겅퀴는 엉겅퀴를 낳으며, 당나귀는 당나귀를, 원숭이는 원숭이를 낳는다. 인간에게 있어 부모는 자식을 낳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사실에 매료된 이유는 이러한 사실과 인과율에 대한 일반적인 몰이해의 관련성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부모는 자식의 원인이고 꽃은 새로운 꽃의 원인이라 하더라도 어느 것도 자연 속에 새로운 형태의 종을 발아(發芽)시키지 못한다. 창조된 질서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들은 이미 존재하는 형태를 진작시켜 향상된 존재로 변환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종의 창조에 간여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사물이 형성된 배후에 있는 인과율(그는 이 사실에 대한 결정적인 경험적 정보를 갖지 못한 시대의 사람이었다)은 곧 신의 지성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사물 내에 새로운 형태를 창출할 수 있는 원초적인 인과적 능력이 없다면 사물이나 동물,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그 자손을 낳을 수 있는가?
그의 대답은, 신은 창조의 과정에서 물질 속에 배아(胚芽)의 이유를 주입시켜 주었기 때문에 자연은 모든 종이 나타날 수 있는 가능태를 지녔다는 것이다. 이 배아의 이유가 곧 사물의 종자(種子)인 것이다. 그것은 비가시적이며 인과적인 힘을 지니고 있으므로 모든 종은 현재의 상태에 이르기 위한 비가시적이고 잠재적인 힘을 소유한다. 종이 존재하기 시작하면그것의 배아의 이유, 즉 그 가능태가 실현되며 이어서 실제의 씨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정해진 종을 이어 받게 된다는 것이다. 원래 단 한 번의 행위에 의해 완전한 창조를 이룬 신은 모든 종에게 생성의 원리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의에 힘입어 아우구스티누스는 배아의 이유가 비롯된 신의 정신 내에 종의 원인을 위치시킴으로써 종의 기원을 설명하였다. 이 배아 이유설에 의해 그는 성서에 관한 난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내용은 창세기에 나오는 것으로써 신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구절이었다. 왜냐하면 신이 왜 점차적으로 창조해야만 했는가의 논제가 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의문과 닿아 있었고 전지전능한 신관(神觀)에도 모순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6일이라는, 특히 “4일째까지도 태양이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에”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의문도 상당하였다. 마침내 그가 배아 이유설을 가지고 결론에 이른 것은 다음과 같았다.
신은 한 번에 세상을 창조했으며 그것은 곧 그가 모든 종에게 동시에 종의 원리를 부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종자들은 가능태의 원리이므로 아직 발아된 것은 아니며 곧 존재하게 될 사물들의 운반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모든 종이 한꺼번에 창조되었다고 해도 그것들 모두가 동시에 완전한 형태로 존재할 수는 없었다. 그것들 각각은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그들의 가능태를 실현시켜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배아 이유설은 종의 진화론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고, 직간접으로 그 길을 열어놓고 있었던 셈이 되었다.
마무리
시간이 날 때에야 겨우 움직여 서양철학사를 정리하고 있다. 설날 아침 강한 바람과 매서운 추위가 찾아왔다. 차례를 지내고 아이들의 세배를 받으며 내가 지닌 책임의 영역과 결심의 영역을 드나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소개하면서 그가 왜 그처럼 신(神)에 대해 집착하며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를 생각하였다. 그에게나 우리에게 삶은 여전히 기쁨이나 평화보다는 혼란과 고달픔의 역사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리는 여전히 평화를 강구하고 변하지 않을 인식의 지평을 원하고 있다. 한 번도 도달해 본 적이 없고 다만 신화처럼 전해오는 이러한 영원의 지평은 철학하는 사람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전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평화와 안식의 진실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한 평온을 전력으로 간구하고 일생을 다해 추구하는 사람이 지금도 존재할까? 과거의 사람들에게 신은 구원의 대상이며 사랑의 권화였다. 그러나 오늘날 신은 필요의 대상이 되었으며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보다는 인간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또 그 행위로 비롯된 죄의식의 정화를 위해 요청될 뿐이라는 사실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눈으로 응시할까? 방황이나 타락의 지대에서 그는 신을 발견하였으며 그 신은 그에게 영혼의 구원자이었다. 신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진실한 맹목을 요구하고 맹목을 삶의 목표로 삼기에는 오늘의 시대는 너무나 영악해졌다. 연말정산을 위해 제출한 기부금 영수증에서 자신의 연봉 절반을 교회에 기부한 가난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행동을 정신 나갔다고 비난하는 사람에게 나는 정색을 하고 당신이라면 그와 같이 순수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기부금을 헌금하도록 종용한 교회의 성직자는 어떤 마음으로 그 친구의 기부를 받아들였을까. 혹여 신의 이름을 빌려 강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아 있다면 우리의 신앙 어디에 어떤 잘못이 있다고 지적할까? 신은 아직도 우리에게 추구할 목록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열처럼 남아 있는가 하는 의문을 손에서 놓지 못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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