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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철학 7편: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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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769회 작성일 10-08-0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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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는 중세를 대표하는 학문 및 문화의 절정기였다. 이러한 13세기는 사실상 교황 인노센트 3세(Innocent Ⅲ 1198~1216)에 의해 기획된 세기이기도 하였다. 그는 목적을 위해 권력을 정력적으로 사용하는 매우 정략적인 황제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는 주어진 모든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였으며, 때로 권모술수는 물론 약속의 폐기를 주저하지 않는, 교황으로서 성스러운 요소가 전혀 없는 최초의 위대한 교황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권한을 사용하여 신권의 지상통치를 완전하게 이루었으며, 이러한 능력으로 중세의 사회 문화 정치적 질서를 최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이렇게 이노센트가 기획한 지점 한 가운데 중세 철학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토마스 아퀴나스가 입지하였다.

중세 철학의 기반을 열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우스의 저서에서 발견한 플라톤 사상을 기독교의 신앙과 결합시켜 철학과 신학을 하나의 줄기로 통합시킨 바 있다. 그의 뒤를 이어 보에티우스는 6세기에 처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여러 철학적 논제를 토론의 논단으로 끌어내었는데, 이로 인해 7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기까지 플라톤주의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간의 대립은 점차 심화되었다. 그들의 논쟁은 점진적으로 종교적 신념이나 철학적 논거의 존립 자체를 거는 매우 중대하고 심각한 논제로 격상되었다. 이러한 대립은 논쟁 참여자들이 그들의 사상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경향은 13세기 이후에도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과 토마스 아퀴나스주의자들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13세기 사상의 전개 과정 가운데 지식 생산자들은 철학과 신학을 연관시키는 문제, 즉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고심하였다. 또한 보편자의 문제에 있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확연히 달라 이것에 의해 기독교 신앙은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문제에 대해 아퀴나스는 관련된 문제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또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여러 해답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이자 기독교적인 해답에 대한 반론들에 결정적이라 할 만큼의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답안’을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아퀴나스는 “스콜라적인 방법”을 완성시킨 인물이었다. 스콜라주의란 용어는 중세 교회의 학교(Schola)에서 이루어지는 지적인 활동에서 유래된 것으로 결국 스콜라주의는 학교에 있는 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지배적인 사상 체계와 그들의 철학을 교육하는 특별한 방법을 지칭하는 것이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새로운 형태의 통찰을 추구하기보다는 전통적인 철학에 대한 일관된 체계를 이룩하는 데 보다 열정적이었으며, 따라서 스콜라 철학은 엄격한 논리적인 연역에 의존하여 복잡한 체계를 이루면서 신학이 철학을 지배하는 변증법적인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A. 아퀴나스의 생애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1225년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퀴나스의 영주였으며 자신의 아들이 언젠가는 고위 성직자에 이르기를 기대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5살 때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에 들어가 9년 동안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학업에 정진하였다. 14세가 되어 나폴리 대학에 입학한 토마스는 근처의 수도원에 있는 도미니크 교단의 탁발 수도승의 생황에 매료되어 그 교단에 입문하기로 결심하였다. 도미니크 교단의 사람들은 특히 가르침에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토마스는 교단에 입문하자마자 종교적인 일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4년 후인 1245년에 그는 파리 대학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당시 “만인의 스승”이라 불리웠던 탁월한 학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파리와 쾰린에서 알베르투스와의 오랜 교분으로 토마스는 알베르투스의 광범위한 학문의 영역과 특정한 문제들에 대한 그의 견해로 말미암아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단층이 되었다.

알베르투스는 기독교의 신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의 정신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철학과 과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다른 철학자들은 비종교적인 학문은 거의 관심을 갖지 않은 반면 알베르투스는 기독교 사상가들이 철학이나 과학의 모든 방면을 완전히 익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모든 지적인 활동을 중시하였으며, 그의 저서들은 이러한 경향을 다양하고 방대한 학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모든 고대학자들은 물론 기독교, 유태교, 아랍의 철학자들을 섭렵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지식은 창조적이라기보다 백과사전적이었다. 알베르투스는 선대의 철학자들이 해 놓은 것보다도 더 날카롭게 철학과 신학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파악하였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안셀무스나 아베라르두스와 같은 학자들은 너무 이성에 치중하였으나, 엄격하게 본다면 그것은 사실상 신앙의 문제이었다는 것이다. 알베르투스가 특별히 의도했던 목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유럽에 아리스토텔레스를 분명하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였으며,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것은 그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안에서 기독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이 저서에서 인용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은 알베르투스와는 달리 토마스는 더욱 창조적이고 체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의도하였다. 그는 1259년에서 1268년까지 로마 교황청에서 신학 교육에 힘쓰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와 아베로에스주의자들과 유명한 논쟁을 펼치게 된다. 127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의 요청으로 리용에서의 제 2공의회에 참석하러 가던 중 나폴리와 로마의 중간에 있는 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49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실로 많은 업적과 저서를 남겼다. 그 방대한 저서를 20년 동안에 모두 저술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을 뿐더러 그의 저서들 대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면밀한 주석과 그리스 철학과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엄정한 논증, 본질과 존재를 논하는 초기의 훌륭한 논제들, 통치자에 대한 정치적인 논문들과 아울러 13세기 명저로 꼽히는 「이교도에 대한 전서(Summacontra Gentiles)」와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과 같은 훌륭한 저서들이었다는 사실 또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B. 파리 대학

대학의 초기 형태는 “수도원 학교”였다. 파리 대학은 노트르담 대사원의 학교에서 발전된 것이며, 그 기구와 이수 과정의 규칙들이 1215년 교회 대사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초기의 대학과 마찬가지로 파리 대학은 특별한 건물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오늘날의 대학을 연상시키는 도서관이나 기념관 같은 특징들도 없이 단지 교사와 학생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대개 14, 15세기에 가서야 생겨났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인 교사와 학생들만은 학문에 대한 정열은 대단하였다. 원래 공회의 부속 기구인 대학들은 공통적인 신학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곧 신학, 법학, 의학, 예술 중에서 신학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파리 대학은 신학적인 경향 이외에 일반적인 지식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것은 파리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점차 수용되고 그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 과정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유입이 정통성의 문제를 야기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기독교의 사상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랍인들에 의해 과연 믿을 수 있고 정확하게 해석되었는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플라톤주의가 옥스퍼드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반면 파리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이 아퀴나스와 동시대 인물인 보나벤투라에 의해 그 시기에 강하게 표현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보나벤투라의 주장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부정함으로써 신학에 결부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류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이데아를 부정하게 되면 신은 그 자신 속에 모든 사물들의 이데아들을 소유하지 않게 되고 구체적이고 특별한 세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신의 섭리나 우주에 대한 신의 통제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들은 우연에 의해서도, 기계적인 필연에 의해서도 발생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신이 세계의 이데아들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는 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보나벤투라의 주장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이 점에 대해 아퀴나스는 후에 교회 당국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른다면, 세계가 시간 속의 어느 한 지점에서 창조되는 대신 세계는 항상 존재해 있다는 주장을 부정할 명확한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나벤투라에 의하면, 세계가 항상 존재해 있다면 무한히 많은 인간이 존재했음에 틀림없고 그러한 경우에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무한히 많은 영혼이 존재하거나, 아베로에스주의자들 주장대로 단 하나의 영혼 혹은 지성이 있어야 한다. 만일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인간의 불멸론은 폐기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13세기의 대표적인 아베로에스주의자인 시게를 폰 보라반트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단지 유일하고 영원한 지성만이 존재할 뿐, 개개의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다. 그러나 이 지성, 혹은 영혼은 살아 남아 또 다른 인간 안에서 육체를 이루고 사유 행위를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유일한 지성이 있다는 것이다.

보나벤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범하고 있는 오류 때문에 그것이 기독교의 신앙에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 플라톤주의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매우 지배적이고 체계적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수용되었고 그의 승리는 필연적이었다. 파리 대학의 대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으로 향해 있었다면 신학자들은 이 불후의 사상가에 친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용된다면 신학자들이 특별히 해야 할 일은 그의 철학을 기독교와 조화시키는 일, 즉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화”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아퀴나스가 하고자 했던 일이며 한 일이다. 그는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 보나벤투라의 아우구스티누스 사상과 시게를 폰 브라반트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동시에 비난하였다.






C. 철학과 신학

아퀴나스는 기독교인으로 사유하며 글을 썼다. 무엇보다도 그는 신학자였으며 자신도 그렇게 믿었다. 동시에 그는 신학적인 저서를 저술함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깊이 의존하였으며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믿었다. 그가 철학과 신학을 동시에 취하였다고 하여 그가 그 두 원리를 혼동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이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철학과 신학은 상보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그는 스승인 알베르투스와 마찬가지로 철학과 신학이 각각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타내면서 신앙과 이성간의 경계를 구분 짓기 위하여 심한 고뇌를 해야 했다. 그가 이 두 입장을 결합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은 13세기 사상에 있어 종교적 성향이 지배적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 시기에는 신학에 대한 중요성이 결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신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것은, 이러한 지식에 대한 약간의 오류로 인해 인간의 삶의 방향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신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고 그에게로 향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대다수의 지식 생산자들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목적과 결부되어 고찰되었으며, 그것들은 인간에게 신에 대한 지식을 주는 방식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었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발견된 원리에서 출발하는 반면, 신학은 무조건의 계시로부터 신앙의 문제로 돌리는 원리들을 이성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아퀴나스의 철학은 대부분 자연 신학의 영역에 속하며, 아퀴나스도 자신의 신학을 이성적으로 논증 가능한 것으로 신념하였다.

아퀴나스는 철학과 신학, 즉 이성과 신앙 간에 특별한 차이점이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철학은 감각 지각의 직접적인 대상에서 시작하여 더 일반적인 개념으로 추론해 나가며 결국 존재의 최고 원리나 제 1원리들이나 신의 개념에 이르는 통로이며, 반면에 신학은 신에 대한 신앙에서 시작하여 모든 사물을 신의 피조물이라고 일반화하여 생각하는 통로로 여기에는 분명한 방법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는 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에서 결론을 끌어내는 반면, 신학자들은 계시적인 지식의 권위에 기반을 두고 자신들의 결론을 논증한다. 철학과 신학은 상호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철학의 대상이 모두 인간의 종교적인 목적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동안 철학과 신학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고 그는 믿었다.

신학이 다루고 있는 것은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 알아야만 하는 것과 그 지식을 확신시켜 주는 내용이며, 이러한 지식은 계시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계시적인 진리 가운데 어떤 것은 자연적 이성에 의해 발견될 수 없는 반면, 계시적인 진리의 어떤 요소들은 이성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데, 그것들은 이미 계시된 것이며, 우리는 그것들이 인식된다는 사실을 확신할 뿐이다. 이 때문에 철학과 신학 사이에는 어떤 중복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과 신학은 대부분 서로 분리된 독립적인 두 개의 주제이라는 것을 아퀴나스는 인정하였다. 엄격히 말해 이성이 어떤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곳에서는 신앙이 불필요하며, 신앙만이 특별하게 계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성으로는 인식될 수 없다는 것이다. 13세기에는 철학과 신학 모두가 신을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철학자는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을 뿐이며, 감각 대상에 대한 고찰에 의해 신의 근원적인 본질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과 신학은 진리에 관계하므로 양자의 대상은 일치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대상을 제 1원리와 원인에 대한 연구, 즉 존재와 그 원인에 대한 연구하고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에 의해 우주 안에 있는 진리의 근거로서 제 1 동자(第一動者)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신학자들이 자신의 지식으로 간주한 신의 존재 및 창조된 세계를 설명해 주는 진리에 대한 철학적인 표현 방식이었다. 아퀴나스 철학의 중요한 사상들을 발견하려면 그가 전적으로 이성적인 방법에 의해 진리를 논증하려는 부분들을 그의 신학적인 저서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 편에 그의 철학적 서술이 특히 분명하게 나타나는, 그 유명한 아퀴나스의 신의 존재 증명을 다룰 생각이며 그 때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마무리

5월의 태양이 자오선 근처를 배회한다. 들녘에는 키다리 엉겅퀴와 쑥부쟁이들이 무지한 정성으로 자라고 어느새 백색의 비름나물 겨드랑이에 잔꽃이 모여 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들이 숙명을 기도하는 소녀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하나의 진리를 얻는 방식에는 여러 통로가 있으며 철학과 신학은 그 여러 통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우리의 지각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지식이 따르고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신념이 따른다. 누가 누구의 잘못을 말할 수 있겠는가. 또 누가 누구의 잘못을 심판할 수 있겠는가. 사물은 사물의 법칙에 종사하며 인간은 그들의 질서에 위배되지 않는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한다. 키다리 엉겅퀴나 쑥부쟁이, 혹은 비름나물 몇 포기에도 자연의 질서가 스며 있고, 인간의 내면과 지각에도 신의 여러 지침이 깃들어 있는 법이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의 견해는 다분히 범신론적 입장에 서 있다고 지적했었다. 그것이 인간과 사물의 간극이 우리의 생각처럼 그렇게 명확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 지적을 수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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