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철학 암흑시대, 400백년의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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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865회 작성일 10-08-03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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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사(殘渣)처럼 부유하는 중세 철학
476년 로마제국의 멸망은 서구의 예술과 문화, 그리고 학문의 명맥을 끊는 직접적인 사건이 되었다. 지적인 단절과 공백, 혹은 암흑이 도래하여 서구 문명의 정서 및 심리에 침체와 암울한 동면(冬眠)을 강요하였다. 사실상 고대의 학문과 서적이 거의 완전히 폐간되었거나 소실되었으며, 기껏 이슬람의 몇몇 지식인들에 의해 겨우 보존되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철학은 거의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하지 않았다. 5세기에서 9세기의 이 암울한 시대에 몇몇의 철학이 지상을 떠돌아다녔고, 몇몇의 철학자들이 고독한 철학을 손에 쥐고 잔사(殘渣)처럼 간헐적으로 진리를 탐구하였다.
1. 보에티우스(Boetius, 480~524)
5~6세기 암흑기의 철학에 있어 주목할 만한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파비아 최후의 철학자인 보에티우스(Anicicus Manlius Torquatus Severicus Boetius)가 있었다. 그는 기독교도로 데오도리쿠스(Theodoricus) 황제의 궁전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렸을 때 그는 아테네로 보내져 희랍어를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플라톤주의 및 스토아 철학을 익히게 되었다. 510년에 그는 황제의 집정관으로 등용되어 정치적인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학자로 상당한 명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여러 지원에도 불구하고 중대한 반역죄로 기소되어 관직을 박탈당함과 아울러 오랫동안 수감된 후 524년 처형되었다. 파비아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는 유명한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을 저술하였는데 이 저서는 중세 시대에 널리 읽혀지면서 학자들 사이에 지속적인 영향을 발휘하였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의 몇 페이지에서 비유적으로 철학을 기술하였는데, 유럽의 몇몇 성당의 정면 위에는 아직도 그 내용들이 조각되어 있을 정도로 섬세한 반향이었다. 그가 철학을 이러한 비유적인 수법으로 기술하게 된 것은, 그가 감옥에서 시를 씀으로써 그의 비감(悲感)을 극복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는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철학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그의 상상력을 가지고 새로운 관점의 철학을 탐구하게 되었다. 그는 철학이 인간의 본성보다도 더 고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만큼 매우 섬세한 눈을 가진 고상한 여인에 철학을 비유하였다. 그녀는 전혀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 인상을 준다고 이야기하며, 그녀의 헐겁고 긴 옷 위에는 실천적인 철학을 상징하는 그리스 문자 파이(Φ)와 이론적인 철학을 상징하는 쎄타(θ)가 새겨져 있으며, 그것들 사이에 있는 사다리는 계단들을 밟아 올라 지혜로 이르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에서 다음의 사실을 발견하고 위안을 얻은 듯 하다. 즉 속세의 재산이나 쾌락은 참된 행복을 주지 못하며, 인간은 철학이 인도하는 최고선(superemum bonum)에 되돌아가야 인간의 행복이 완성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적인 설명 이외에도 보에티우스는 철학에 대해 좀더 기술적인 정의를 내리며 그것을 지혜의 사랑이라 불렀다. 지혜라는 단어는 그의 정의의 중심을 이루는 핵심이었는데, 그에게 지혜란 실재(實在), 즉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의미하였다. 지혜는 모든 사물을 야기시키는 살아 있는 사유(思惟)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에게 지혜에 대한 사랑은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였다.
초기 중세 시대에 그리스 사상,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가 서구로 유입될 수 있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한 것이 보에티우스였다. 희랍어를 완전히 익힌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그 철학이 겉으로 드러난 차이점들을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를 밝혀내려고 계획하였다. 그의 웅대한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와 그에 대한 주석 및 몇몇 독창적인 논문을 비롯한 방대한 철학서를 유산으로 남겼다. 또한 그는 자신이 세 개의 문예 과목, 즉 문법, 논리학, 수사학과 구별하기 위해 “quadrivium"이라고 명명한 4개의 문예 과목(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에 관한 논문들뿐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신학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보에티우스는 분석론 전서와 후서, 변증론, 범주론들을 포함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논문을 번역하였다. 그는 또한 포르피리우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입문」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는 포르피리우스의 여러 저서에 대한 주석을 달았으며, 수학과 음악에 대한 글을 썼을 뿐 아니라 자신과 인격화된 철학과의 대화를 다룬 『철학의 위안』을 통하여 신(神), 운명(運命), 자유(自由), 선악(善惡)의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주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하였다.
보에티우스는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독창적인 논문을 분석하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학파, 플로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및 그 외 많은 철학과 사상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저서는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대표적인 철학자들에 의해 고대의 저자들과 함께 철학의 근본 문제들을 해석하는 권위 있는 지침서로 애용되었다. 특히 보에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대한 중요한 주석가로 인정되었고, 세심하며 기초적인 작업을 해놓은 정교한 철학으로 수용되어 아퀴나스의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신의 존재증명, 보편자 문제, 존재의 본질 등을 다루는 제안이 되었다. 그는 몇 권밖에 안 되는 신학서를 저술하였지만, 그 저술 어디에도 기독교에 관한 언급은 없고 오히려 인간의 이성과 신앙을 구분하여 자연 신학을 구성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보에티우스는 지식의 문제를 고찰하였는데 약간 의외적으로, 지식이란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을 잊지 않고 영혼이 다시 발견해 내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상기설을 수용한 듯 하다. 그는 또한, 우리는 개체들로부터 보편자를 추상할 수 없으며 정신은 보편자를 “육체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 이론도 탈피하였다. 동시에 보에티우스는 악과 인간의 불안의 원인,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신의 섭리와의 관계, 신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인 의식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을 일부 사용함으로써 그의 추종자라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보에티우스는 중세 초에 번역과 주석, 그리고 독자적인 논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 활동을 하면서 그 뒤 몇 세기 동안 아리스토텔레스나 아우구스티누스에 비견될 만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의 중요성은 그 시기에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적인 사상을 가르쳤고, 서구의 지적 활동에 열쇠가 되는 근본적인 철학적 정의와 용어를 홀로 고독하게 체계화했다는 데 있으리라.
2. 무명의 필자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키타(Dionysius Areopagita)
A. D. 500년쯤에 그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방대하고 정교한 체계를 갖춘 신플라톤주의적인 일련의 저서가 있었다. 그 기원은 비잔틴 세계로 올라가며, 한동안 이 저서들이 사도 바울의 제자인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의 저술인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그 내용을 담고 있는 사상이 프로클루스(Proclus 418~485)에 의해 전개된 사실이나 533년 종교 회의에 회부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그것들은 아마도 500년쯤에 시리아에서 저술되었고 저자는 필명을 사용했으리라는 생각이 오늘날 지배적이다. 무명의 필자인 디오니시우스의 논문들은 기독교 사상을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체계적으로 연계시키려 하였다. 그의 저술들은 「신명론(神明論 De divinis nominisus)」, 「천계 위계론(天界位階論 De codesti hierarchia)」과 10개의 서신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들은 종종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그것들에 대한 주석이 붙어졌다. 그의 저서들은 중세 시대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매우 다른 관심사를 논하는 철학자와 신학자들 사이에 자주 인용되었다.
신비주의자들은 그의 정교한 존재의 위계 질서론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그것은 그 이론이 영혼의 신에게로의 상승을 기술하는 풍부한 근거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었다. 아퀴나스는 존재의 거대한 연결 관계 및 인간과 신 사이의 유사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그의 이론들을 사용하였다. 무엇보다도 미지의 필자 디오니시우스는 세계의 기원과, 신에 대한 지식과 악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인 사상에 영향을 준 신플라톤주의의 가장 권위 있는 저서들 가운데 독특한 입지를 가졌다.
미지의 필자 디오니시우스는 세계와 신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으며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流出說)과 기독교의 창조론을 결합시켰다. 그는 모든 사물들은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라는 그 이론 속에 내재된 범신론을 피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그가 자유의지의 행위로서의 신의 창조 행위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신에게서 비롯된다는 이론을 정립하려고 힘썼다. 세계는 신의 섭리의 대상이며, 신은 인간과 그 자신 사이에 천상의 영혼이라 불리는 존재들의 사다리, 혹은 위계 질서를 놓았다는 것이다. 최하위 존재로부터 최상의 존재인 신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의 존재가 있고, 그가 한 줄기 빛이라 부른 이 연속적인 존재의 위계 질서 때문에 그가 범신론과 일원론에 접근 가능한 사물들에 대해 다원론적인 견해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신은 창조된 만물의 목적이며, 신은 자신의 선(善)과 자신이 뿜어내는 사랑에 의해 만물을 그 자신에게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신에 대한 지식은 두 가지 방법, 즉 긍정적인 방법과 부정적인 방법에 의해 접근 가능하다고 하였다. 정신이 긍정적인 방법을 취할 때 그것은 피조물들의 연구에 의해 발견되는 모든 완전한 속성들을 신에 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신성(神性)에는 선(善), 빛, 존재, 합일(合一), 지혜, 생명과 같은 명칭이 주어질 수 있으며, 이 명칭들은 신에게 귀속되거나 파생되었다는 의미로 본다면 피조물이 그 완전성에 관여한 정도에 따라 인간에 속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는 분명히 신(神)은 선, 생명, 지혜 등등이기 때문에 이 속성들이 현실적으로 신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추론하였다. 이에 비해 인간은 더 낮은 정도에서 이것들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신과 인간의 사이는 신과 돌(石), 또는 보석 사이보다는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돌이나 보석을 가리켜 선하고 현명하며 살아 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미지의 필자 디오니시오스가 프로클루스의 영향을 받아 전개한 부정적인 방법이었다. 그 자신이 긍정적인 방법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으며,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의 이러한 방법을 적지 않게 이용하였는데, 부정적인 방법에 의해 정신은 신과 부합되지 않는 요소, 즉 “술취함, 광폭함”과 같은 요소들을 부정함으로써 신의 본질을 고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정적인 방법 가운데 “제거의 과정(via remotionis)”은 여러 속성의 여러 범주에서 지적인 개념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신에 대한 신인동형(神人同形) 동성론적(同性論的) 개념을 전개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그는 신에게서 피조물의 모든 속성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신을 특징짓는 것은, 신은 유한한 피조물들의 여러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신의 개념으로부터 차례로 우리가 피조물에 대해 언급하는 여러 속성을 제거시켰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피조물의 세계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제거의 과정에 의해 인간의 정신은 신에 대한 명확한 개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은 그와 같지 않다는 사실의 인식을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긍정적인 측면인 “불가해(不可解)의 암흑(tenbrae incognoscibitatis)”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은 여하한의 대상도 아니기 때문에 인식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이와 같은 견해는, 인간은 신에게로 더욱 가까이 올라가기 때문에 일상적인 인간의 지식은 찬란한 신의 빛에 의해 소멸된다고 믿는 후기 신비론자들에게 가장 널리 퍼지게 되었다.
미지의 필자 디오니시우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용어 중 긍정적인 악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악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실재적인 존재를 소유한다면 모든 존재는 신에게서 비롯되었으므로 그것 또한 그것의 원인으로서 신에게까지 거슬러 올라 가야하며, 사실이 그렇다면 신의 속성 가운데 일부는 악한 성질을 내포한 것으로 이러한 모순을 그는 용인할 수 없었다. 무명의 필자 디오니시우스에게 존재와 선(善)은 동일한 용어였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하며, 선한 것은 확실히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신 안에서 선과 존재는 하나이며, 따라서 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은 모두 선한 것이라는 것이다. 악(惡)은 비존재와 동의적이라는 추론은 항상 참은 아니라는 것을 그도 역시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상 그것이 올바르게 속해 있어야 할 존재의 부재 혹은 “결핍(privatio)”-존재의 부재(不在)가 악이다-이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비존재라는 것이다. 그에게 존재의 부재는 곧 선의 부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이 곧 악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악한 사람은 그가 긍정적인 존재를 소유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 방식이 어떻든 선하지만, 그러나 그가 어떤 형태의 존재를 가지지 못하는 그런 면이 있다면 그 면에 있어서 그의 의지를 작용시키는 경우에는 악하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본성에 있어 추악함이나 질병은 도덕의 영역 안에 있는 행위들과 같다는 이유로, 즉 그것들은 형태가 결여되거나 어떤 존재의 부재에 기인하므로 악이라 불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소경은 어떤 악한 힘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시력의 부재이기 때문에 악이라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를 결합시키기 위해 무명의 필자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키타에 의해 정교해진 이와 같은 교의는 여타의 중세 철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계의 기원과 신의 본질에 대해 인식 가능한 것과 악의 존재에 대한 설명 방식은 이후에도 계속 지식인 사이에서 심각한 지적 담론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3.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J. Scottus Eriugena 810?~877?)
보에티우스와 무명의 필자 디오니시우스의 시대 이후로 철학은 한 편의 망각과 같았다. 철학이 긴 침묵을 깨기까지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의 출현을 기다렸으며, 그렇게 되기까지 3세기가 소비되었다. 300년 동안 철학은 망각과 침묵의 지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다. 810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에리우게나는 당시 실질적으로 그리스 학문을 보존하고 있던 아일랜드 수도원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생애는 중세 시대의 철학 체계를 전면적으로 정립시키는 일에 거의 모두 소모되었으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그리스 어를 완전히 익힌 몇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비범한 학자였을 뿐 아니라 그의 수중에 철학적인 자료가 주어지면, 체계적으로 그 자료를 정리하여 저술하는 재능이 당대 가장 탁월하였기 때문이었다.
에리우게나는 아일랜드를 떠나 851년경에 찰스 1세의 궁정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그는 주로 라틴어 저서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보에티우스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하였으며,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에 대한 주석을 달았다. 찰스 황제의 요청으로 그는 858년에 그리스어로 된 디오니시우스의 위서(僞書)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였으며 부가적으로 그것에 대한 주석을 달았다. 또한 그는 고해 신부 막시무스(Maximus)와 그레고리(Gregory)의 저서들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번역 작업을 마친 후, 그는 864년경에 대화 형식으로 씌어진 「자연 구분론(De Divisione Naturae)」이라는 대작을 내놓았다. 이 저서에서 에리우게나는 미지의 필자 디오니시우스의 신플라톤주의에 의해 기독교의 사상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인 견해를 표현하려는 복잡한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것은 중세 사상의 좌표가 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나중에 여러 학자들은 정통설에 반대되는 범신론 같은 교의를 증명하기 위해 이 책을 고발하였으며, 교황 호노리우스(Honorius) 3세는 1225년 1월 25일 에리우게나의 「자연 구분론」을 기소하여 소각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다행히 몇 권의 필사본이 보존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에리우게나의 자연 구분론
에리우게나의 「자연 구분론」의 복잡한 논거는 그의 저서의 제목에 나오는 두 단어의 이해에 중점을 두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연에 의해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이해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런 노력의 배후에는 자연은 신과 피조물 모두를 포함하는 것임을 은연중에 의도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자연의 구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신과 피조물, 즉 전체의 실재(實在)가 구분되는 방식을 말하는 것으로서 구분이라는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실재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구분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분석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구분은 우리가 실체를 유형적인 것과 무형적인 것으로 구분할 때처럼, 더욱 보편적인 것에서 덜 보편적인 것으로 이행함을 의미한다. 또 무형적인 것은 “생명이 있는 것”과 “무생명적인 것” 등등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분석에 의해서는 구분의 과정이 역전되어 실체로부터 구분된 각 요소들은 합쳐져 단일의 실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에리우게나의 구분과 분석의 방법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신념은 인간의 정신은 형이상학적인 실재들과 일치되어 활동한다는 것이었다. 정신이 “구분”하고 “분석”할 때, 그것은 단지 “개념들”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행동하는가를 기술하는 행위와 닿아 있다는 것이다. 신이 궁극적인 통일체라면 사물과 세계는 이 근본적인 통일체의 구분된 요소들이며 분석은 사물들이 신에게로 회귀(回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에리우게나에 따르면 사유의 법칙은 실재의 법칙과 동일하거나 혹은 평등한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점을 염두에 두고 에리우게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여타의 모든 사물이 그것에 의지하며 그것에로 회귀하는 유일한 참된 실재가 존재하는 바, 이 실재가 곧 신(神)이다. 그는 자연의 모든 실재 내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구분이 가능하다고 하며, 1) 창조할 뿐 창조되지 않는 자연, 2) 창조되며 창조하는 자연, 3) 창조되며 창조되지 않는 자연, 4) 창조하지도 창조되지도 않는 자연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에리우게나는 이 구분들에 대한 그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기 위한 기독교적이고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그리고 특히 신플라톤주의적 개념들을 사용하여 그 각각의 구분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세밀하게 고찰하였다.
1. 창조할 뿐 창조되지 않는 자연
에리우게나는 이것이 만물의 원인이지만 자신은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신(神)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신은 무(無)로부터 모든 피조물을 존재하게 한다. 무명의 필자 디오니시우스가 했던 구별에 의하면 신에 대한 지식은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대상들로부터 이끌어내는 속성들은 자신의 무한성 안에 모든 완전성을 소유하고 있는 신에 대해서만은 어떤 의미에서든 적용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지혜나 진리와 같이 있을 법한 속성들도 무조건 신의 속성으로 돌릴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에리우게나는 그러한 속성에 초월적이라는 단어를 첨가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신에 대해 초월적 진리니 초월적 지혜니 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술어 혹은 범주 또한 신에게 적용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범주는 어떤 형태의 실체를 가정하고 있지만-예를 들면 “양”은 크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과 같이- 신은 정의 가능한 영역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에리우게나가 신의 본질과 “무(無)로부터의” 창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내용의 대부분은 기독교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신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다루는 경우에는 신플라톤주의가 지배적이어서 그는 신과 피조물 사이에 현전한 구별이 없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려웠다. “신이 만물을 만들었다는 말을 우리가 듣는 경우, 우리는 신이 만물 속에 내재한다는 의미 이외에 어떠한 것으로도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에리우게나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것은 신만이 “진실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결국 모든 사물 속에 내재하는 것은 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창조되며 창조하는 자연
이것은 모든 피조물의 각 원형(原型)인 신의 형상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모든 창조된 종들의 “원초적인 원인들”이다. 에리우게나에 의하면, 그것들이 “창조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은 시간의 어떤 지점에서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는 통시적(通時的) 계열이 아닌 논리적인 계열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신 안에는 만물의 창조적 원인들을 포함하여 만물에 대한 모든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창조적 원인은 신의 형상이자 사물의 원형이며, 인간의 지혜가 초월적 지혜와 연관되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적 원인들과 연관된다는 의미에서 그 창조적 원인들이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여기에서 창조란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그에게 창조란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형상과 피조물간의 영원한 관계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이 지대하였다.
3. 창조되나 창조하지 않는 자연
이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의 세계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그것은 창조적 원인의 집합적인 외적 결과를 가리킨다. 무형적(無形的)이건(예로 천사나 지성, 영혼 등) 유형적(有形的)이건(예를 들어 인간과 사물들), 이들 결과는 신의 형상의 참여인 것이다. 특별한 사물들이 개별적인 존재의 상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이들 존재의 전체적인 위계 질서의 근본은 신이라고 에리우게나는 강조하였다. 그는 사물들의 이러한 위계적 조명을 공작의 깃털 위에서 반사되는 다양한 색깔에 비유하였다. 각각의 색은 실재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깃털에 따라 다른 것처럼 색은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된 세계에서 각 개체는 신의 정신 속에 내재하는 자신의 창조적 원인에 의해 실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통일체이므로, 그의 정신 안에 있는 이데아나 원형에 대해 말하는 것은 비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들 모두가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세계도 또한 공작처럼 하나의 통일체이며, 신은 만물 속에 내재하기 때문에 신과 세계 사이에는 마침내 포괄적인 통일체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초감각자에게 귀속되고 또 그것과 융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지 신의 형상의 반영이나 “회귀하는” 일련의 유(類)와 종(種)으로서 “표출되는” 하나의 패턴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에리우게나의 의도는, 신의 형상은 신과 피조물의 중간에 서서 마치 신의 형상이 신을 향해 “올려다”보기도 하고 외적으로 표출된 형상들을 “내려다”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신플라톤주의에 의해 형상과 신과 피조물간의 “간격”을 없애고,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통일체로 흡수시켜 범신론으로 이끌게 되었다.
4. 창조하지도 창조되지도 않는 자연
이 마지막의 것은 창조된 질서의 목적으로서의 신을 가리킨다. 만물은 신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신에게로 회귀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유를 사용하여 신을 움직이지도 않고 사랑에 빠진 자를 견인하는 연인에 비유하였다. 한 원리에서 출발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시 그 원리로 회귀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편적인 원인은 자신에게서 생겨난 많은 사물들을 다시 자신에게로 끌어들인다. 이러한 회귀와 더불어 모든 악에 대해서도 하나의 목적이 존재하며 인간은 이러한 관계로부터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신과의 결속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에리우게나는 그의 「자연 구분론」에서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뿐 아니라 필연적인 범신론을 보여 주었다. 그의 저서는 즉각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지만 중세 철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무명의 필자 디오니시우스, 막시무스, 그레고리의 저서들에 대한 번역본과 더불어 에리우게나의 저서 또한 철학과 신학의 전통에 실질적인 기여를 한 것은 침묵과 망각의 지대에서 방황하던 철학에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마무리
기상 관측 이래 처음 엄청난 3월 폭설이 내렸다. 축사와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고 교통이 마비되는 현상이 뉴스프로그램을 통하여 중계하듯 쏟아졌다. 천년의 중세 철학을 소개하면서 5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4백년의 공백을 그냥 뛰어넘어갈 수는 없었다. 중세 철학을 이해하기 위하여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젤무스, 아퀴나스의 철학만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키타로 알려진 무명의 철학자와 에리우게나, 보에티우스의 철학은 중세 철학의 근간을 마련한 보이지 않는 축적이었다. 우리의 생활이 성향과 오랜 습관의 누적이듯 철학도 그와 같은 길을 걸어왔고, 이러저러한 누적이 쌓여 비로소 철학이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을 중세 철학은 실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고한 희생은 없다는 논제는 거의 언제나 진실한 것처럼 보인다.
신은 중세 철학자에게 있어 논외의 서술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이 모든 사물과 사건의 목적임과 아울러 중심이라는 논제에 무조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신이 선(善)한 존재라는 확신을 어떻게든 손에 쥐어야 했으며, 동시에 모든 사물이 신의 능력에 의해 창조된 것임과 그 사물과 사건 속에 신의 의지, 또는 신 그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신념을 필요로 하였다. 때로 그러한 철학적 견해가 신학과 충돌하여 배척되거나 비난을 당한 철학자도 있었으며, 불필요한 오해를 양산한 철학도 있었다. 중세의 철학은 침묵과 망각의 4백년 지대를 지나 가까스로 목숨을 보존하여 중흥의 지대를 앞두고 있었다. 언젠가 눈이 세차게 내리는 골목에서 나를 사랑한 소녀로부터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그녀에게 필요 이상으로 화를 냈고, 그것은 서로의 내면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비록 우리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것 자체가 진실하지 않은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나에게 정직했고 소녀는 그녀의 감성에 정직했던 것처럼.. 5세기와 9세기로부터 400백년에 이르는 암흑의 중세 철학은 잔사(殘渣)처럼 떠돌며 누군가의 손과 지성에 의해 복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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