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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 (Zenon B.C 489 - 43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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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233회 작성일 10-08-03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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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독스를 통하여, 패러독스와 함께

제논은 기원전 489년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스승이었던 파르메니데스가 65세가 되고, 소크라테스가 이제 겨우 청년이 되었을 때, 제논의 나이는 40세였다. 엘레아 학파의 핵심 인물로서의 제논의 활동은 주로 스승에 대한 비판을 논박하는 것이었다. 그의 논조는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비난하는 자들이 지니고 있는 그 논리의 기본적 가정(假定)이 비난하고 있는 엘레아 학파의 이론보다 더 우스꽝스럽고 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는 것으로 그들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 학파는 실재는 유일하다는 가정을 부정하고 대신에 사물의 다수성, 즉 다수의 구체적이고 분리된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따라서 운동과 변화는 보다 실재적이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믿고 있었다. 사실 그들의 주장이 더 상식적이며 감각적 검증에 좀더 밀착되어 있는 듯이 보이나, 제논의 노선은 현상과 실재 사이의 명확한 구분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고찰해야 하는 동시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에 관해 사유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즉, 감각은 우리에게 단지 현상에 관한 모종의 단서만을 제공할 뿐이며, 따라서 믿을 만한 지식이 아닌 오로지 속견(俗見)을 양산하거나 제시한다는 사실은 그는 다음과 같은 추론에 따라 입증하였다. 만일 한 알의 순수의 씨앗을 땅에 떨어뜨리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겠지만, 만일 한 포대의 순수의 씨앗을 지면에 떨어뜨리면 지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게 될 것이다. 제논은 이것을 우리의 감각이 우리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한 알의 순수의 씨앗을 떨어뜨려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한 포대의 순수의 씨앗을 떨어뜨려도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의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감각을 믿기 보다 그 감각을 상위하는 순수한 사유(思惟)에 의해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 더 진리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것이 더 믿을 만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제논은 그들의 이론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답하기 위해 유명한 몇 가지 패러독스를 보여주었는데, 그를 통해 그가 증명하고자 했던 것은 유일자의 세계에서 운동과 변화의 실재를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다양한 사물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운동과 변화의 실재를 증명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하다는 점이었다. 제논에 따르면 각각의 방식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난점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 난점은 다양한 사물이 존재한다는 가정으로 상정된 세계의 운동의 실재를 증명하는 논의가 파르메니데스의 난점보다 훨씬 더 괴이하게 된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건의 단순한 관찰자는 자신이 경험하는 운동과 변화를 실재적으로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어떤 경기의 관찰자나 날아가는 화살을 보고 있는 사람, 또는 실제로 걷거나 뛰어가는 사람 같은 경우가 그와 같다. 그러나 제논은 그것을 단지 환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마치 운동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운동이 실재로 존재하는가에 관해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분절 가능한 시간이나 분할 가능한 실재, 혹은 다수의 단위들로 구성되는 세계 내에 운동이나 변화가 불가능함을 보여 주기 위해 제논은 다음과 같은 논증을 펼쳤다.

   경주의 패러독스 :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실재란 불가분적이며 따라서 유일한 연속임과 아울러 채워진 시공(時空)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피타고라스 학파는 다수의, 개별의 분리 가능한 시공의 세계를 주장하고 있었다. 즉 세계는 몇몇 단위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제논은, 만일 누군가가 피타고라스 학파의 주장처럼 어떤 특정한 경주로를 도는 운동을 고려하는 경우에 있어, 그는 이 운동이 행해지는 거리가 몇 개의 단위 구간으로 나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즉 출발점에서부터 도착점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구간의 반 바퀴, 또는 1/4 바퀴 등으로 분절될 수 있으며 경주하는 사람은 그와 같은 단위로 구성된 거리를 통과한 셈이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가정(假定)이 전제되어 있는 한, 주자(走者)는 무한히 많은 수로 분절된 지점을 통과해야 하며, 그 통과는 무한히 많은 수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한히 많은 시간에 무한히 많은 지점을 통과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주자가 무한히 많은 지점들과 무한히 많은 시간에 직면하게 되는 이유는 만물이 분할 가능하며 따라서 경주로의 출발점과 종착점의 거리가 분절(分節)될 수 있다는 가정(假定)에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자는 일단 중간 지점의 경계선을 넘어야 종착지에 도달할 수 있고, 또 중간 지점까지의 중간 지점까지 도달하려면 또 그 중간 지점까지 도달해야 한다. 이렇게 분절 가능한 과정은 무한히 계속되게 되고 그 주자는 결국 특정한 어느 지점을 통과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또 불할 가능한 지점과 시간이 무한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논은 결코 운동이나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논증하였다. 이 논증에서 제논이 보여 주려고 하였던 것은 그 자신의 체계적인 논거가 아니라 단순히 피타고라스 학파의 다수성에 대한 가정이 초래하는 결과가 얼마나 엉뚱하고 황당한 것인가를 보여주려 하였던 것이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패러독스 : 그와 마찬가지로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사이에 경주가 벌어져 만약 느린 거북이를 먼저 출발하게 했다면 아킬레우스는 결코 먼저 출발한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고 논증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거북이가 지나갔던 지점에 도달해야만 하기 때문이고, 이것은 항상 분절 가능한 경주로의 경우에서처럼 보다 이전의 지점에 먼저 도달하지 않고는 어떠한 지점에도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운동은 일어나지 않으며, 이러한 가정하에서는 어떠한 인물이라도 거북이를 추월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날아가는 화살 패러독스 : 궁수가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았을 때 그것이 과연 움직이는가 하는 질문도 마찬가지로 무한히 나뉘어지는 공간을 가정하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주장을 따른다면 화살은 공간상의 언제나 특수한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화살이 공간상에 그것의 길이만큼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주장은 화살이 정지해 있다고 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화살이 공간상에 그것의 길이만큼의 위치를 차지하려면 화살은 항상 정지해 있어야 한다. 더욱이 모든 사물과 시공(時空)이 분할 가능하다면 화살에 의해 점유된 공간과 날아가야 할 시간도 무한히 분절 가능하기 때문에 화살은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을 점유하거나 통과해야 하며, 그것은 부조리한 결론밖에 도달할 곳이 없다. 그러므로 비록 피타고라스 학파가 운동의 실재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은 세계의 다수성에 대한 그들의 가정과 이론으로 인해 운동의 개념을 타당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낼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만물은 여러 가지의 다수성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일자(一者)가 되어야 하며 따라서 운동은 일종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튼 제논의 논리는 운동이나 변화란 명석하게 정의될 수 없으며, 일종의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패러독스를 통하여 제논은 스승이었던 파르메니데스의 논적(論敵)들에 대해 반격을 가하려 했다. 특히 그는 분절 가능한 다수의 시공(時空)에 대해 격렬히 항의했으며 그들의 가정을 논파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운동이 실재적인가를 증명하는 대신에, 하나의 다수적 세계에 대한 가정이 인간을 구제 불능의 불합리와 모순으로 유도하게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논증을 수행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변화와 운동이란 감각의 기만이며, 유일한 존재는 연속적일 뿐 아니라 운동하지 않는 영원하고 완전한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물이 실재로 운동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경험적 세계의 상식적 견해를 그 혼자의 힘으로 논파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짧고 위태로운 인생을 그 혼자의 힘으로 살았다. 다만 스승의 가르침과 이론을 지키려는 힘겨운 싸움을 수행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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