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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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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슬리 댓글 0건 조회 2,246회 작성일 09-12-20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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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을 만나다

플라톤 (Platon ; BC 429?~BC 347)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형이상학의 수립자로서 서양문화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이다. 논리학·인식론·형이상학 등에 걸친 광범위하고 심오한 철학체계를 전개했으며, 특히 그의 모든 사상의 발전에는 윤리적 동기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성이 인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따라야 한다는 이성주의적 입장을 고수했다. 따라서 플라톤 철학의 핵심은 이성주의적 윤리학이다.
  플라톤은 BC 428년경 아테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리스톤은 아테네의 마지막 왕인 코드로스의 후손이며, 외가 쪽으로는 초기 그리스의 입법가인 솔론과 연결된다. 어머니 페릭티오네는 플라톤이 어렸을 때 남편과 사별한 뒤 페리클레스의 지지자였던 그녀의 삼촌 피릴람페스와 재혼했다. 플라톤은 이 페리클레스 시대의 정치가 집에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BC 404년의 과두정권을 이끌었던 외숙인 크리티앗아스와 카르미데스를 통해 어린시절부터 소크라테스를 알게 되었다. 귀족인 플라톤도 청년시절에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었으나, 공직에 들어오라는 보수파의 권유를 그들의 폭력적 행위 때문에 거부했다. 과두정권이 몰락한 뒤 플라톤은 새로 들어선 민주정권에 기대를 걸었지만, 아테네의 정치풍토에는 양식 있는 사람이 일할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BC 399년 민주정권이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하자,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메가라로 잠시 피신한 뒤 몇 년 동안 그리스·이집트·이탈리아를 여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플라톤은 시라쿠사의 통치자인 디오니시오스 1세의 처남 디온을 만나 그와의 정신적 교류를 시작했다.
  BC 387년경 플라톤은 철학과 과학의 교육·연구를 위한 기관으로 아카데메이아를 창설했다. 아카데메이아는 좁은 의미의 철학에만 제한하지 않고, 수학이나 수사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관해 광범위하게 탐구했다. 여기서 그는 제자들에게 풀어야 할 문제를 제시하고, 대중을 상대로 강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플라톤의 만년에 벌어진 사건은 시라쿠사의 정치에 관여한 것이었다. BC 367년 디오니시오스 1세가 죽자, 디온은 왕위를 계승한 디오니시오스 2세가 과학과 철학을 통해 입헌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끔 플라톤을 초빙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정치적 강자인 디온에 대한 왕의 시기심 때문에 무산되었다. 플라톤은 뒷날 시라쿠사에 머물면서(BC 361~360)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디온은 BC 354년 살해당했으며, 플라톤은 BC 348(또는 347)년에 죽었다. "천한 사람들의 입으로는 찬사를 보내는 것조차 그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보고 하나만으로도 그의 고귀한 인품을 엿볼 수 있다.
  원뿔곡선론에 관한 연구와 같은 BC 4세기의 중요한 수학적 작업들은 모두 아카데메이아에서 이루어졌다. 티아이테토스는 입체기하학을 창시했으며, 에우독소스는 비례론과 곡면체의 면적과 부피를 찾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플라톤 부재시에 아카데메이아의 교장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의 친구인 아르키타스는 역학을 창안했다. 플라톤의 조카로서 자연사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긴 스페우시포스와 생물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저술들처럼 수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특히 법학과 실제 법률의 제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아카데메이아는 플라톤이 죽은 뒤에도 2세기 반 동안 지적 삶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청년 플라톤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그러나 〈7번째 편지 Seventh Letter〉에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스승'이 아니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연상의 '친구'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제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죽음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본 뒤 일생을 철학에 바치기로 결심했으며, 그의 합리적 방법과 윤리적 관심을 이어받았다. 그밖에 현상세계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립 상태라고 본 헤라클레이토스와,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적인 피타고라스 학파로부터도 철학적 영향을 받았다. 플라톤은 어린시절에 데켈레이아 전쟁의 참혹함, 아테네 제국의 몰락, 그리고 과두파와 민주파 사이에 벌어진 BC 404~403년의 내란을 경험했다. 이 경험들이 뒷날 대화편 속에서 개진하고 있는 정치적 견해들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중세 그리스도교시대가 시작될 무렵의 〈편지들〉을 1편의 저서로 묶어 9개의 4부작, 합해서 36편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알키비아데스 Ⅰ Alkibiades Ⅰ〉·〈알키비아데스 Ⅱ Alkibiades Ⅱ〉·〈테아게스 Theages〉·〈에라스타이 Erastai〉·〈클리토폰 Clitophon〉·〈히파르코스 Hipparchos〉·〈미노스 Minos〉 등은 위작으로 드러났으며, 대부분의 학자들은 <법률>의 부록인 〈에피노미스 Epinomis〉는 오포스의 수학자인 필리포스가 쓴 것으로 믿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대(大)히피아스 Hippias Meizon〉·〈메넥세노스 Menexenos〉도 의심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13개의 〈편지들〉 대부분은 위작임이 확실하지만, 플라톤의 생애와 철학적 관점에 관해 중요한 정보를 전하는 〈7번째 편지〉에 관한 논란은 아직도 분분하다.
  플라톤에게 필로소피아란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이며 소크라테스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였다. 전기에서 중기에 걸친 대화편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의 추억을 간직하고, 소크라테스 속에 구현(具現)되는 ‘철학자’를 변호 ·찬양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재판 장면을 적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죽음에 직면한 철학자의 태도를 묘사한 《파이돈》은 말할 나위도 없고, 《향연》이나 《국가론》도 또한 그와 같은 뜻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필로소피아란,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른다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깨닫는 데 있었다. 이 ‘무지를 깨닫는 일’ 속에 머물며 아포리아 속에 있으면서 근원으로부터의 물음에 스스로를 맡기는 일이 바로 필로소피아이다. 전기 대화론에서, 대화가 항시 아포리아에 수렴(收斂)되고 무지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아포리아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포리아에 머물기 위한 필로소피아의 술책이 미토스와 디알렉티케(dialektike:問答法)이다.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서 머무는 영원불변한 것을 플라톤은 이데아(idea:形相)라 불렀다. 이데아는 생성(生成)에 대한 존재, 다(多)에 대한 하나, 타(他)에 대한 동(同)이며, 육체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고, 영혼의 눈[目]인 이성에 의해서만 관찰할 수 있다. 생성의 세계 가시계(可視界)는 존재의 세계(불가시계)를 분유(分有)하며, 모방하는 데에서만 이에 입각하여 존재하고, 두 세계 사이에는 실물과 그림자, 실물과 모상(模像)의 비례가 있다(《국가론》의 선분(線分) ·동굴 ·태양의 비유, 《티마이오스》의 우주창성론(宇宙創成論) 등).
  인간이 탄생과 죽음에 의해서 한계지어진 ‘이 세상(여기)’과 ‘저 세상(저기)’의 구별을 플라톤은 이 두 세계를 따로 상대하는 것으로 구상하였고(《파이돈》 《파이드로스》 등), 이 양계(兩界)를 편력하는 불멸의 영혼에 관한 광채육리(光彩陸離)한 미토스로써 이를 장식하였다. 영혼은 원래 천상(天上)에 있으면서 참 실재(實在)의 관조(觀照)를 즐겼으나 사악한 생각 때문에 지상에 전락하고 땅(육체) 속에 매몰되어 생물이 되었다(‘육체=묘표(墓標)’설). 애지는 영혼이 지상의 사물 속에서 천상의 사물과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참 실재를 상기하여(‘상기설(想起說)’), 이를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다(‘에로스설’)라고 설명할 수 있다(《파이드로스》 《향연》 《메논》). 그러나 미토스를 도그마로 하고 거기에서 고정된 철학설을 구성하는 일은 플라톤이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미토스는 오히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자기가 놓여 있는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아포리아 밖에 내던진 자기 존재의 겨냥도이며, 아포리아로서 응축된 ‘근원에의 관련’을 형상으로 하여 우주론적인 규모 속에 틀을 만들고 투영하는 것이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미토스의 형상을 거부 배척하고, 아포리아에서 묻고 있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그 ‘무엇인가’를 ‘말’속에서 질문하는 데에 디알렉티케가 성립된다.
  아포리아 속에 있는 자는 질문 속에 놓이게 된다. 질문은 사물이 ‘무엇(A)인가, 아닌가’를 질문하나, 그것은 그 무엇인가(A)를 그것과 다른 것(A가 아닌 것)으로부터 분리하게 됨으로써 가능하며, 이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인간은 이 양자(A와 A가 아닌 것)를 포괄하는 전체와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전체와 부분과의 뒤얽힘에서 다(多)를 꿰뚫는 하나를 보는 것이 애지자(愛知者)이다(《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플라톤은 지식을 고정된 체계로서 문자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근원을 묻는 애지의 진행에서 이 물음을 묻게 하고, 이 진행을 배후에서 떠받치는 것이 이데아이다. 이데아는 애지의 진행(흐름) 속에 어느 때 갑자기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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