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3편 선(善)과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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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410회 작성일 10-08-0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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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전개된 철학은 인간의 도덕적 문제에 집중된 철학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의 삶이 그러한 문제에 집착한 까닭이기도 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철학이 그에게 무의미와 다를 바 없는 까닭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도덕철학은 철학의 어떤 특별한, 따로 분리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만물은 결국 도덕성에 귀착되며 따라서 만물은 인간 행위의 목적인 행복으로 향하는 길을 밝혀 준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지론이었다. 그는 도덕에 관한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면서 인간의 지식의 본질, 신의 본질, 그리고 창조론에 대한 핵심적인 통찰을 갖게 되었는데, 이러한 관념으로부터 그는 인간의 도덕적 성격 구조의 본질을 분석하고 파악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도덕적 추구 성향은 그의 특별하고 구체적인 조건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인들도 선한 삶의 절정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교의(敎義)는 행복의 구성 요소와 그것이 획득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확장팩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구별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인간이 균형을 잘 이룬 삶을 통해 자신의 자연적인 욕망이나 기능을 충족시킬 때 행복에 도달한다고 한 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의 조건은 인간이 자연적인 것을 넘어 초자연적인, 또는 윤리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종교와 철학의 양측에서 이 견해를 피력하였으며, 특히「고백록」에서 “오, 하나님 당신의 힘으로 저희를 만드셨나니, 저희의 마음은 갈 곳이 없나이다. 당신의 품 안에서 쉬게 하소서”라고 쓸 만큼 창조주에 대한 의존이 깊었다.
그의 철학적인 언어로 이를 표현하면 “인간의 본성이란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그 자체가 선(善)일 수 없으며, 오히려 선에 의해 행복해지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순수하게 “자연적인”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이 사람을 낳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행하도록 정한 신(神)의 의지가 그렇게 작용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항상 신의 피조물의 흔적을 품고 있으며, 그것의 의미는 신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영구적인 관계, 즉 가능태와 현실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게 된 것이 우연은 아니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확신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불완전성, 유한성에 의해 배태된 필연적 결과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신 안에서만 행복을 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사랑이라는 특별한 기능 때문인데,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며, 이 사랑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인간 본성 중 최선의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인간이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논리에 따라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타인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만큼 불행한 조건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고, 이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만인에게 충분히 권고할 수 있었다.
1) 사랑의 역할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라고 믿었다. 인간이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가 불완전한 존재이며, 인간의 불완전성은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광범위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인간은 ① 물질적 대상 ② 타인들 ③ 자기 자신 등을 사랑할 수 있고, 이러한 사랑에서 자신의 욕망과 욕구에 만족을 구할 수 있다. 만물은 선(善) 그 자체인 신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세계의 만물은 모두 선하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강조하였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물은 무엇이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랑하는 모든 대상은 그에게 어느 정도의 만족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없다. 악은 실제적인 사물이 아니라 무언가의 부재(不在), 혹은 결핍인 것이다. 인간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랑이나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애정을 가지는 방식과 사랑의 결과에 대해 가지는 그의 기대감에 있다. 모든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행복과 만족을 성취하려는 기대를 가지지만 그러나 인간은 비참하고 불행하며 불안하다. 왜 그럴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이유를 인간의 “무질서한” 사랑에서 찾아내었다.
2) 악과 무질서한 사랑
사랑의 각 대상이 다르므로 그것들을 사랑하는 방식에서 비롯되는 결과 또한 다를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분석하였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행위를 자극하는 인간의 요구 또한 다를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양한 인간의 요구와 그것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대상들 간에 어떤 상호 관계가 있으리라 추측하였다. 사랑은 이러한 요구와 대상 간에 조화를 이루게 하는 어떤 행위이다. 이 사실의 원인은 인간의 요구의 범위가 대상과 타인, 그리고 자기 자신과 그 영역을 넘어서는 신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은 이 사실을 부인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장하였다.
그는 이 점을 사실상 양적(量的)인 개념들로 표현하였는데, 사랑의 각 대상(사물 및 타인)은 얼마만큼의 만족을 줄 수 있을 뿐 그 이상을 줄 수 없고, 마찬가지로 각 인간의 요구도 측정 가능한 양을 가질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제에 따르면 분명히 만족과 행복의 조건은, 사랑의 대상이 특별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가지고 있는 무엇이 그 양을 충분하게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 한 예로 우리는 음식을 사랑하고 우리의 굶주림을 채울 만큼의 양을 소비한다. 그러나 원초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요구가 다 물질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예술의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그 대상이 주는 미적인 만족감에 의한 것이다. 더 높은 단계에서 우리는 사람들 상호간의 사랑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애정의 단계는 쾌락과 행복의 방식에 있어 여러 가지 형태의 물질적인 사물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울 훌륭한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어떤 인간의 요구는 대상의 교체에 의해 충족될 수 없는 것임이 명백하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파악하였다. 예를 들면 인간의 유대감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깊은 인간의 요구는 타인과의 관계 이외의 다른 방법에 의해 충족될 수 없다. 사물은 그 내부에 인간의 고유한 인격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므로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적 유대를 형성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사물이 인간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그것에 고유한 본질이 줄 수 있는 것 이외의 다른 것까지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애정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는 사물에 의해 만족될 수 없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명확히 서술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요구에 있어 더욱 그렇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간은 신을 사랑하게끔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무한한 정신인 신에 의해서만 궁극적인 만족이나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정해졌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선(善)의 중간 형태인 의지가 불변의 선을 고착하면, 인간은 그 안에서 축복받은 삶을 발견할 수 있는데, 잘 산다는 것은 곧 신을 사랑하는 것 이외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우에게 신에 대한 사랑은 행복으로 가는 필수 조건인 셈이었다. 왜냐하면 무한한 신만이 인간의 무한한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대상들의 상호 교체가 불가능하고 사물들이 인간을 대신할 수 없다면 어떠한 유한한 대상이나 인간, 또는 그에 대한 사랑도 신을 대신할 수 없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확신하였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대상, 타인 및 자기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행위하고 또 집착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들이 모두 사랑의 대상으로는 적합하지만, 궁극적인 행복을 위한 사랑의 대상이 될 때 그것들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무질서해질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당연한 귀결로 무질서한 사랑은 인간이 행위 속에서 여러 형태의 병적 증상을 야기한다. 평범한 자기애(自己愛)는 교만을 낳고 이 교만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주는 원죄로 작용한다. 교만의 본질은 자만심의 위장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 불변의 사실은 그가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자기 충족적이 아니라는 사실인 것이다. 인간은 교만에 의해 신에게서 멀어지며 여러 가지 형태로 방종한 삶을 살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유한한 실재에게서 무한한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대상이 줄 수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그는 필요 이상의 사랑을 하는 것이다. 나아가 타인에 대한 사랑은 실제로는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사람이 줄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그 관계로부터 얻어내려 하거나 이끌어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탐욕이 번성하고 욕구가 늘어감에 따라 모든 욕망을 만족시킴으로써 평안을 얻으려 하는 헛된 시도를 하게 된다. 영혼은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되고 질투, 탐욕, 물욕, 사기, 공포 등으로 휩싸이게 된다.
결국 인간은 무질서한 사랑에 의해 오래지 않아 불안정하게 되며 불안정한 사람에 의해 무질서한 집단이 형성된다. 각각의 인간을 개조시키지 않고는 질서 있는 혹은 평화로운 사회나 가정을 재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매우 분명한 사실은, 각 개인이 개조되어 구원을 얻으려면 사랑을 재정립하여 적합한 사물을 적합하게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는 먼저 신을 사랑해야만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사랑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사랑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만 그 자체를 제거하는 것 이외에는 교만이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를 극복할 길이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신에게 귀속해야만 우리는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최종적인 결론이었다.
3) 악의 원인으로서의 자유의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원인이 단순히 무지(無知)에 기인한다고 해석한 플라톤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에 의하면 분명이 인간은 궁극적인 선을 인식하지 못하는, 즉 신을 인식할 수 없는 어떤 상황에 처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죄 많은 사람들조차도, 인간의 행위의 대부분을 나무라거나 올바르게 칭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상의 행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칭찬받을 만한 행위를 해야 하며 비난받을 만한 행위는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경우에만 그가 칭찬이나 비난 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곤 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인간을 곤경에 빠지게 하는 것은 인간이 무지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양자택일의 선택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는 신을 향하거나 신에게서 멀어지는 선택의 기로 앞에 서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선택의 자유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어느 쪽을 택하건 그의 의도는 행복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구현하려는 의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신에게서 멀어져 유한한 사물이나 사람 혹은 자기 자신에게 애정을 쏟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것은 단지 자유의지의 행위이다”고 말하며 결국, 악(惡) 또는 죄(罪)는 의지의 산물임을 입증하려 하였다. 플라톤의 말대로 그것은 무지가 아니며, 마니교의 교리처럼 육체에 퍼져 있는 어둠의 원리의 작용도 아닌 것이다. 원죄에도 불구하고 만인은 의지의 자유를 소유하고 있다고 아우는 신념하였다. 더욱이 이 의지의 자유(liberum)는 정신의 자유(libertas)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신념하였는데, 왜냐하면 진정한 정신의 자유는 현세에서 결코 충만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는 동시에 설령 올바르게 선택하여 올바른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택한 선을 행할 온전한 정신의 능력을 지닌 존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의 은총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악은 자유의지의 행위에 의해 야기되는 반면, 덕이나 정의는 인간의 의지가 아닌 신의 은총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도덕적인 법은 인간에게 그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주지만 실제에 있어 그의 행위와 무관한 목록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므로 “은총을 구해야만 법이 존재하며 법이 충족되어야 은총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는 또한 “오직 신만이 줄 수 있는 사랑에 의해 그리고 우리가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 신과 인간의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속죄받을 때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4) 정의(正義)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공적이거나 정치적인 생활은 인간의 사생활과 마찬가지로 도덕법의 규칙이 적용되는 영역이었다. 두 영역에 대한 진리의 원천은 하나로서, 그는 이 진리를 “온전하고 신성하며 인간의 생활 속에서 가변적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모든 사람은 행동의 목적을 위해 자연법 혹은 자연의 정의로서 이 진리를 인정하고 있고 의식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법을 신의 진리 혹은 신의 영원의 법에 대한 인간의 지적인 공유물로 생각하였다. 영원의 법의 개념은 이미 스토아학파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그들의 주장은 전자연에 걸쳐 이성의 원리가 확산되며 만물을 지배하는 역할과 힘의 원인이 곧 이성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이성의 원인인 누스(nus)는 자연 법칙의 구성 요소였다. 스토아학파는 자연 법칙을 우주 안에 있는 합리적인 원리의 비인격적인 힘의 작용으로 본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원한 법을 기독교의 인격적인 신의 이성과 의지라고 봄으로써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되었다.
“영원한 법은 곧 신의 이성이며 사물의 자연적인 질서를 유지시켜 주며 그것의 혼란을 막아 주는 신의 의지이다.” 영원의 법은 질서를 다스리는 신의 이성이므로 영원한 원리에 대한 인간의 지적인 이해가 곧 자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국가가 법을 제정할 때 그러한 일시적인 법은 자연법의 원리에 따라 형성되고 그 자연법은 또다시 영원의 법으로부터 유출된다고 피력하였다.
법과 정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된 주장은, 국가는 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서도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권력기관을 명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정의의 요구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정의는 국가에 선행하는 표준이며 따라서 영원한 목록인 것이다. 그의 주장이 독특한 이유는 그가 정의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의란 모든 사람이 골고루 가지고 있는 덕이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는 정의가 관습적이라는 생각을 부정하며 또한 사회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부인한다. 그는 정의를 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의 본성의 구조 속에서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정의는 “신의 고귀함을 모든 사람에게 분배하는 정신의 습속이다. 그것의 기원은 본성에서 비롯되며 이 정의의 개념은 인간의 속견의 산물이 아니라, 어떤 본유적인 힘에 의해 주입된 그 무엇이다.”라고 하였다. 국가를 그러한 표준에 따르게 함은 분명히 정치 권력에 대해 도덕적인 제한을 두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국가의 법이 자연법과 정의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법의 성격을 지닐 수도 없고 국가 또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국가가 백성의 소유물이고, 백성들 모두가 법적 동의에 의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정의에 기초하지 않은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정의 없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와 도덕법을 연관시켜 주장하길, 정의는 단지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에만 제한되지 않으며 그 원초적인 관계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이 신을 섬기지 않는다면 도대체 신 안에는 어떤 정의가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만일 인간이 신을 섬기지 않는다면 영혼은 육체를 지배할 적법의 통치권도 갖지 못하며 또한 사랑을 감당할 이성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사회 전체에 유포된 집합적인 정의를 개별적인 정의와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정의가 한 인간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다른 인간들의 집단 전체에서도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집단 사이에서 대다수의 사람을 만족시키는 일치된 법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주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멀리하며 악마를 위해 힘쓰는 그러한 자는 불의(不義)하지 아니한가?” 하나님을 섬김은 곧 그를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같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더욱이 “어떠한 정의 때문에 인간은 신을 믿게 되는가?” 신을 섬기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곧 만인이 신을 섬기고 사랑할 신성한 권리와 기회를 갖게 됨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의 전부는 인간의 신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 위에 기초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사랑은 정의의 근본인 셈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국가는 인간이 죄로 가득 찬 상황에서 나타났으므로 통제의 대리자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힘의 원리가 사랑의 원리보다 더 고귀하다고 인정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한 사회는 신앙과 강한 화합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것에 의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앙과 강한 화합의 품 안에서 사랑의 대상은 곧 보편적인 사랑인바 그것은 최고의 거룩함과 진실함을 갖춘 신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신의 품속에서 완전한 진실을 가지고 서로를 사랑한다. 이러한 상호간의 사랑의 근거는 신에 대한 사랑이고 그 앞에서는 사랑의 마음을 누구도 숨길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지상의 국가의 힘이 사랑의 창조력과 비견될 수 없지만 국가는 하나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의 행위에 의해 적어도 악을 누그러뜨릴 수는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악한 자에게서 이 악한 힘을 빼앗는다면 그들은 스스로 보다 양순한 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러한 이유에서 국가가 “헛되이 계획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었다.
5) 두 개의 나라와 역사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 대한 사랑과 도덕성의 중심 원리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또한 무질서한 사랑으로 악을 설명하려 하였다. 이로부터 인간은 신을 사랑하는 부류와 자기 자신과 세계를 사랑하는 부류로 구분된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이러한 집단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물에 대한 동일한 일치감에 의해 결속된 이성적인 존재들의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그 집단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지며 따라서 서로 상반되는 사회가 존재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사랑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형성한 국가를 신의 나라(civitas Dei)라고 부르고, 자신과 현세를 사랑하는 부류를 지상의 나라(civitas terrena)라 불렀다. 그는 이 두 나라를 각각 교회와 국가로 구별하거나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를 그 구성원들의 지배적인 사랑으로 보고 있으며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교회와 국가 양자 모두에게서 찾아볼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교회가 신의 나라라고 불리우는 사회 전체와 동일한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국가 안에도 신을 사랑하는 자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나라는 교회와 국가 양자 모두를 포함하며 눈에 띄지 않게 자체적인 독립성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신의 나라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지상의 나라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종의 역사 철학에 대한 실마리를 두 나라 사이의 갈등 속에서 찾았다. 역사 철학에서 나타내는 바는 역사는 하나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리스 초기의 역사가들은 왕국의 흥망하고 반복하여 순환한다는 사실 이외 인간사에서 어떠한 유형도 밝혀내지 못하였다. 연극은 보편적인 조건과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반면에, 역사는 개인, 국가 또는 사건들을 취급한다는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에 의해서는 인간성에 대한 어떠한 중요한 지식도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은 인간의 역사야말로 가장 원대한 연극이라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그것의 각색자는 신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창조와 더불어 시작하며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현현(顯現)과 같은 결정적인 사건에 의해 극적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재의 역사의 순간은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간의 어떤 긴장 속에 연루되어 있다고 보았다. 더욱이 신의 궁극적인 섭리에 의하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는 일은 인간의 행위, 특히 죄악의 행위에서 비롯되는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야만족인 고트족이 410년에 로마를 점령하였을 때 이교도들은 기독교도들을 원망하여 말하길, 기독교도들은 신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만 열중한 나머지 애국심이 감소하고 국방력이 침체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비난과 많은 다른 비난들에 대해 변호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413년에 「신국론(De civitas Dei)」을 저술하였다. 그 저술에서 그는 로마의 멸망은 기독교도들의 파괴적인 활동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도의 신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저해한 로마 제국 전체에 만연된 악덕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에게 로마 제국의 멸망은 신의 섭리가 역사 속에 계시되는 또 다른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멸망을 신이 지상의 나라를 없애고 그곳에 신의 나라를 세우고자 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 극적인 사건은 보편적인 의미나 관련성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만인은 그들 사회의 운명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운명도 필연적으로 두 나라와 연계되어 있고 신의 섭리와 연계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간과 세계를 모두 포괄하는 운명이 있는 바, 그것은 신이 마음 먹은 시기에 그리고 신의 사랑이 군림하는 시기에 이룩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그렇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임의적으로 생각하였을지도 모를 인물이나 사건들에게 “역사 철학”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마무리
며칠 동안 마이크로 소프트의 게임 age of mythology에 심취해 있었다. 신화시대를 테마로 하는 이 전략게임은 살육과 전쟁이 보다 원대하고 웅장한 스케일의 진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임을 시뮬레이션해 주었다. 다만 age of mythology에는 정의도 때론 불의보다 저열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선악이나 윤리 또는 연민이나 사랑 대신 효율과 스피드가 얼마나 생존이나 승패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명령이 내려진 유닛은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않는다. 자신의 목숨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군사유닛은 칼을 휘두르거나 화살을 발사하거나 적의 머리에 도끼를 내리친다. 불안한 전선(戰線)이 깔린 안개 속으로 군사 유닛은 달려가고 자원을 채취하는 일꾼 유닛은 폭풍이 부는 들판에서 자신의 할 일을 꾸준히 무심하게 진행한다.
문제는 프로그램이다. 각각의 유닛이나 소스가 전체 프로그램을 장악할 여분의 역량은 많지 않다. 프로그램은 하나의 의식이나 사유, 행위를 조합하는 텍스트이며 아우구스티누스는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텍스트를 통하여 그가 확신하는 진리에 도달하였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가 그렇게 확신한 진리의 원인인 신의 본성이나 존재에 대해 보다 명민한 입증자료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못하였다는 것뿐이다. 문제는 프로그램이다. 만약 그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독립된 지대에 태어나 성장하였다면 그는 어떤 진리를 습득할 수 있었을까?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개인의 의식이나 지적 능력이 아니라 세계의 이러저러한 사건이나 현상을 이러저러하게 해석하도록 작용하는 사회와 문화의 암묵적 제시어이며, 이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통제와 제어의 기능을 실현한다. 과학이나 이성, 또는 신학은 그것이 아무리 오류와 모순을 극복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언어나 문자, 혹은 지식이나 정서를 낳은 오류와 모순을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age of mythology의 한 종족이 패배하였다. 승리한 종족은 패배한 종족의 마을회관을 점령하고 학살의 잔해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문득 승리한 유닛들을 바라보며 유한한 것이 무한을 어떻게 이해하며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어쩌면 무한이란 우리의 관념이 만들어낸 우리 자신의 상상은 아닐까? 상상은 물질적이다. 상상은 언제나 우리가 경험한 내용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며 우리가 이리저리 편집한 표상의 기이하고 슬픈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승리한 유닛이나 패배한 유닛에게 기쁨이나 슬픔은 어떻게 전달될까? 그에게 불운이나 행운은 어떤 의미일까? 그들에게도 진리나 앎이 필요할까? 어떤 이유로 필요할까? 구원은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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