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kuros.. 실천철학과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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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870회 작성일 10-08-0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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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의 전환 ]
철학의 전환 또는 새로운 흐름은 대부분 역사적인 조건에 의해 야기되거나 조성되곤 하였다. 그리스의 철학은 한 세대의 거대한 발화 이후 급격히 정연한 학문으로부터 이탈하여 역사적 상황에 몸을 맡긴 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는 몰락하였으며 이 몰락은 곧바로 그리스 문명의 쇠퇴를 가져와 그리스의 여러 도시의 분열과 공동체 의식의 해체 및 시민 개개인의 고양된 정서-자신들의 사회 및 정치적인 운명을 조정하고 완성할 능력과 신념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는-의 상실을 가져왔다. 그리스 시민의 화사하고 다채로운 사상과 권리, 그리고 삶에 대한 긍정적이고 활동적인 분량은 거대하고 강력한 로마제국에 흡수되어 철학의 벽면에서 시들어갔다. 그리스가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한 후, 그리스 지식인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들이 추구해야 할 목적이나 꿈을 잃어버렸으며 그들 앞에 놓인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잃어버렸다. 그러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하는 역사 상황 속에서 생존과 삶의 방향을 이끌 실천철학뿐이었으며, 그것이 그들의 삶에 더할 나위 없이 우울하고 슬픈 현실이 되었다. 몇몇의 학자들은 그와 같은 현실로부터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안위와 평온에 대해 깊이 침잠하였으며, 따라서 사건이 엄습해 올 때 역사를 변화시키는 일 따위는 하찮은 일처럼 여기게 되었다. 역사가 인간의 통제 밖에 있을 때 적어도 자신의 삶을 별문제 없이 지속할 수 있는 지식인들은 더욱 직접적인 개인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며 더욱 관념적이고 더욱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기에 이르게 되며, 그것은 이미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이 그만큼 불온하고 부정적이며 실현 불가능한 대상이라는 입증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철학을, 문명을, 현실을 부정하거나 체념하고 싶어 했던 것인지도 모르며,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어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진리나 진실을 다루기보다 구원을 다루기 원했고 도피와 평온과 기쁨과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어느 시대보다 진지하게 진력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아타락시아(ataraxia), 즉 영혼의 평정이라 부르는 무관심으로, 스토아 학파는 필연적인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반응을 조절하는 데 힘쓴 반면, 회의론자들은 현실의 진리가 의심스러운 상황에 구속됨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의 자유를 유지하려 하였고, 플로티누스는 신과의 신비적인 결합 속에서 속죄를 구하였다. 그렇게 이후의 철학이 인간의 충성을 요구하는 종교와 반목하게 되는 과정으로 변이하게 된 것은 결국 이상할 바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서로 친근하지 않고 함정으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각 개인들이 안전하게 행복이나 만족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피쿠로스 (Epikuros BC 341~270)
에피쿠로스(Epikuros)는 플라톤이 죽은 후 약 7~8년 후에 태어났으며 그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나이는 42세였다. BC. 342~341년 에게 해의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기에 데모크리토스의 자연 철학을 접하였으며 그 철학은 일생 동안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아테네 인들이 사모스 섬에서 쫓겨나자 에피쿠로스는 소아시아를 전전하며 여러 학교에서 교육자로 생활하였다. BC. 306년쯤에 그는 아테네로 다시 돌아와 자신의 학원을 설립하였는데 학원의 모임 장소는 그의 정원이었다. 나중에 그곳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 제논의 스토아와 더불어 고대의 명망 있는 학원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었다. 에피쿠로스는 깊은 애정과 존경에 의해서 또는 서로간의 고상한 대화에 의해서 자신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의 많은 저서들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에피쿠로스가 죽은 이후에 계속된 철학은 분명하게 이 학원에서 비롯되었으며, 그의 가르침이나 사상이 지속적으로 반영되었고, 또한 그것이 로마에 전파되어 루크레티우스(BC. 98~55) 같은 시인은 그의 시(자연의 본질에 관하여 De Rerum Natura)에서 에피쿠로스의 주요 사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에피쿠로스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실천적인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의학이 신체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사상은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진정으로 그는 철학을 영혼의 의학이라고 믿었다. 그는 “세계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와 같은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그에게는 원자 혹은 물질의 조각으로 구성된 세계의 상을 전개시킨 데모클레이토스의 이론이 적절한 대답으로 생각되었으며, 더 이상의 논의는 불필요하다고 여긴 듯 하다. 에피쿠로스의 생각으로는,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행동에 대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에피쿠로스에게 인생의 주된 목적은 쾌(快)였다. 그러나 쾌락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세 가지 공식에 있다는 생각 이외에 어떠한 것도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에서 얻어 낼 것은 없다고 하여 오늘날까지도 그를 미식가나 주색가와 결부시키는 것은 그의 철학에 대한 무지의 다름 아닐 것이다. 그는 여러 종류의 쾌락은 구별하기 위해 매우 깊은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강렬하긴 하지만 짧은 쾌락과 은밀하지만 오래 지속되는 쾌락간의 구별 혹은 후에 고통을 주는 쾌락과 안정과 휴식의 감정을 주는 쾌락간의 구별 등이 그것이다. 그는 쾌락설을 행동의 근거로 체계화하는 데 힘썼으며 그에 따라 그의 철학이 쾌락주의로 알려지게 되었다.
1 ) 물리학과 윤리학
에피쿠로스가 쾌락설을 택하게 된 것은 데모크리토스에게서 물려 받은 물리학 때문이었다. 그의 [원자론] 위에 기반을 둔 에피쿠로스는 존재하는 사물은 단단한 물질로 작고 부서지지 않는 조각, 즉 영원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 원자들의 덩어리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단정하였다. 이것은 곧, 유일신 혹은 여러 신들이 존재한다면 그들도 역시 물질적인 존재이어야 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이 모든 사물의 원천이거나 창조주도 아니며, 그 스스로는 목적도 의지도 없는 임의적인 사건의 결과라는 사실이었다.
원자에게는 여하한의 시초도 없다는 개념에 의해 만물의 기원이 설명된다. 원자는 항상 공간 안에서 존재한다. 빗방울처럼 원자들은 한꺼번에 제각기 공간 속에 떨어지며, 그것들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으므로 항상 서로 같은 간격을 유지한다. 수직으로 낙하할 동안에 한 원자는 완전히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고 한쪽으로 약간 벗어나, 즉 측면으로 기울게 된다. 그래서 이 원자가 가까이 있는 원자의 경로로 움직여 충돌을 일으키면 이들 양원자는 서로 힘을 받아 또 다른 원자들에게 충격을 줌으로써 연쇄적인 충돌이 일어나며 결국 모든 원자들이 여러 덩어리로 뭉칠 때까지 이 충돌은 계속된다. 이러한 원자들의 덩어리 혹은 배열이 우리가 지금 보는 바위, 꽃, 동물, 인간, 강, 바다, 다시 말해 세계 내의 모든 사물들이라고 그는 설명하였다. 원자는 무한히 많으므로 세계 또한 무한하게 많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에게 지배를 받거나 신에 의해 비롯된 목적성이 있는 질서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원자들의 충돌에 의한 우연적인 산물이라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결론이었다.
2 ) 신(神)과 죽음
인간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설명과 “신성한 존재들”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들의 근본이 되는 물질에 대한 설명에 의해 에피쿠로스는 자신이 인간을 신에 대한 공포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켰다고 생각하였다. 신은 자연 혹은 인간의 운명을 조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신은 인간의 삶에 개입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만이 고통이나 쾌락을 느낄 수 있으므로 죽음이 어느 누구도 괴롭힌다고 할 수도 없었다. 사후에는 어떠한 감각도 있을 수 없다고 그는 확신하였는데, 육체와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는 따로따로 오기 때문에 정신이나 육체가 특별히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많은 분명한 원자들만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새로운 배열에 필요한 순환 과정을 지속하기 위하여 원래의 물질 창고로 되돌아간다. 물질만이 존재하며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이 육체와 경험하는 현재의 순간뿐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의 구성 요소는 다른 크기와 모양을 가진 원자들이다. 더 큰 원자는 우리의 육체로 만들며, 더 작고 부드러우며 빠른 원자들에 의해 감각과 사유가 만들어진다. 이 원자들에 의해 인간의 정신활동이 설명 가능한 것으로 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신도, 사후의 세계도, 그밖의 어떠한 원리도 필요치 않게 되는 것이다. 신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다면 인간은 자신의 통제하에서 삶의 방식을 전개하기 위한 무대를 마련할 수 있고 이 무대에서는 오직 실천적인 면만이 강조될 수 있을 뿐이었다. 이것이 철학에 있어서의 새로운 흐름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의 명령에 따르는 추상적인 행동 원리 대신에 육체와 정신의 쾌락을 위한 개인의 직접적인 욕망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자연론이 개개의 원자를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근거로 삼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개인을 자신의 도덕 체계에 대한 활동 무대로 삼았다.
3 ) 쾌락주의(hedonism)
에피쿠로스가 만물의 기원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했고 쾌락 추구를 본질로 하는 인간을 또 하나의 작은 메커니즘으로 사물의 본질 속에 위치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에게 자신의 욕망을 규제하는 힘과 의무를 부과하였다. 그는 인간을 신의 섭리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시켜주었지만 그렇다고 정욕과 방종의 수문을 개방할 의사는 없었다. 그는 쾌락을 선(善)의 척도라고 확신하였지만, 쾌락이라고 하여 모두가 똑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누군가가 에피쿠로스에게 쾌락이 선의 척도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단순히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쾌락과 고통의 차이를, 다시 말해 고통보다는 쾌락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쉽게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는 쾌락을 우리 안에 본유하는 제 1의 선으로 인식하여 쾌락으로부터 선택 및 금지의 행위를 결정하고 우리는 다시 쾌락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말에 의하면, 감각이 진리에 대한 시금석이 되듯이 감정은 선악에 대해 직접적인 척도가 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에피쿠로스는 인간을 가장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종류의 쾌락을 구별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음식의 경우처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욕망이 있는가 하면, 성의 쾌락에서처럼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이 아닌 욕망도 있으며 또한 사치나 인기처럼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연적이지도 않은 욕망도 있다. 그는 그것들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기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쾌락이 곧 목적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방탕한 자의 쾌락도 아니며 무지하거나 우리와 의견을 달리하는 또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상상되는 성의 쾌락도 아니다. 그것은 육체의 고통과 정신의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것은 연일 음주와 연희를 벌이는 것도 아니고 또 정욕의 충족, 평안한 생활을 하는, 즉 생선을 즐기고 호화로운 식탁을 소유하는 것과 같은 사치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취할 것을 취하고 금할 것을 금하는 동기를 탐구하거나, 정신이 매우 혼란할 때 생기는 잘못된 의견을 떨쳐 버리는 건전한 사유이다.”
에피쿠로스는 육체의 쾌락을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러한 괘락에 너무 관심을 두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불행과 고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밝히고자 한 것뿐이었다. 어떤 육체적인 쾌락은 결코 완전하게 만족되지 않는다. 만일 그러한 쾌락에 계속 빠지게 된다면 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항상 불만족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항상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더욱 많은 돈이나 대중의 인기, 혹은 외국산 음식이나 고관직을 원하게 된다면 그는 항상 현재의 상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늘 고통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그의 본성을 최소로 억제할 수 있고, 쉽고 빠르게 필요한 만큼 만족시킬 수 있다. 적절한 욕구가 만족될 때 인간의 본성은 균형을 이룬다. 식도락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과식할 때보다는 현명한 사람이 적절한 빵과 물을 먹을 때 행복을 더 쉽게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현명한 사람은 음식을 조금만 먹도록 익혔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먹어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쾌락은 마음의 평정이다. 에피쿠로스는 그것을 육체적인 고통이 없고 정신의 평온한 안정 상태라고 말한다. 평정의 느낌을 얻으려 한다면 욕망을 점차 줄여 가며 불필요한 근심을 극복하고 가장 온전하게 지속되는 정신의 쾌락에 의지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정신의 쾌락은 육체적인 일에 깊게 빠지는 일과 그것에 수반하는 고통을 방지해 주는 효과를 지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육체적인 쾌락과 다름없는 것이기도 하다고 그는 믿었다.
4 ) 개인의 쾌락과 사회적인 의무
에피쿠로스는 결국 자기 중심적인 도덕 철학을 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 사회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개인의 쾌락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학자의 삶마저도 고통을 피하는 수단으로 파악하였지, 선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으로 여기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고급 음식을 멀리했을 뿐 아니라, 타인들 특히 요구나 문제가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멀리하였다. 그에 의하면, 선한 삶이란 자기의 동료를 도와 주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매력을 지닌 친구들과 즐겁고 유쾌하게 교제하는 가운데 발견할 수 있었다. 에피쿠로스가 인정하는 시민 사회의 유일한 기능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을 막아 주는 정도였다. 모든 목적과 이성적인 질서의 어떠한 영역도 거부하는 그의 자연론은 정의의 개념을 허용할 여지가 없었다. 에피쿠로스에게는 고통의 부재와 정신에 의한 욕망의 절제보다 더 높은 가치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에피쿠로스의 이 도덕 철학이 도덕적인 삶에 대한 선택적인 개념들을 반박하였고 또한 그것들에 의해 도전받는 것을 목격하였고 또 오늘의 상황 아래 우리의 실존과 명백히 닿아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가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우리 가운데 위치시킬 때 그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각박하거나 격렬하다는 뜻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철학의 개인적인 사용으로의 전환 또는 새로운 종류의 평안을 강조하는 흐름은 대부분 시대의 열악한 조건에 의해 야기되거나 조성되기 때문에..
[철학과 삶]의 서양철학사를 애독하는 분들과 독촉한 분께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에피쿠로스 철학을 마감한다. 어둠 속에서 여름이 깊어가고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선 공원 산책 길에 가로등 불빛으로 날아드는 밤벌레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삶은 저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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