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istotelles 6편 그의 정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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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723회 작성일 10-08-0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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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학」에서도 목적의 요소를 강조하였다. 자연은 국가에게도 인간과 마찬가지의 하나의 고유한 기능을 부여해 준다고 그는 믿었다. 이 두 가지의 개념을 결합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국가란 자연의 피조물이며 따라서 인간도 자연적으로 정치적인 동물이다.” 그는 인간과 사회를 밀접히 연관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사회 속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이나 스스로 자족적이기 때문에 어떠한 욕구도 갖지 않은 사람은 동물이거나 신(神)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도록 되어 있고, 국가도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어떤 선(善)을 목적으로 성립되며”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고. 이러한 주장은 그의 확신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지만 개인의 단위로는 결국 자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국가가 성립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경제적 목적을 넘어서서 국가는 인간의 최고선(最高善), 즉 도덕적이며 지적인 인간의 생활과 관심을 보증해 주는 영역이 되는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파악하였다.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적인 국가를 위한 청사진을 그리지 않았다. 비록 그가 국가를 인간이 인간 존재로서의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해주는 대행자로 간주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적인 국가 이론은 단지 “어떤 정부 형태가 각각의 국가들에 적용되는가”만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결코 최상의 정부 형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입법가들이 고려해야 할 것은 “여러 환경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최상인 것은 무엇인가. 어떤 주어진 조건하에서 한 국가가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가. 또한 그 국가가 가장 오래 존속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인가.” 등과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결국 “정치학자들이 훌륭한 이상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도 그들은 종종 실천적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급진적인 이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전사(戰士)계급의 가족 폐지 및 그 계급의 어린이에 대한 국가의 양육과 같은 플라톤의 구상을 비웃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 이론에는 소위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형이 동생을, 동생이 형을 염려해 주어야 하는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재산의 공동 소유도 인간의 근본적인 쾌락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비능률과 끊임없는 분쟁을 야기할 뿐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별하였다.
1. 국가의 여러 형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한 사회는 환경에 따라 적어도 세 가지의 정부 형태를 조직화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세 형태의 근본적인 차이는 각각이 지니는 통치자들의 수효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였는데, 한 정부의 통치자는 한 명(monarchy)일 수도 있고, 소수(aristocracy)일 수도 있고, 다수(democracy)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각각의 형태는 각각 정의로운 형태일 수도 있고, 사악한 형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귀족정치(aristocracy)를 선호한 듯 하다. 그 주된 이유는 한 명의 특출한 인재도 이상적으로 가능하지만, 그러한 인물이 충분히 오래도록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귀족정치의 경우에는 소수 집단에 의한 통치가 존재하는바, 그 집단의 구성원은 어느 정도 탁월하며, 업적도 이루고 재산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책임감과 함께 유능하고 정상적인 명령을 내릴 줄 아는 사람들로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거의 사실에 대한 관찰에 의존했기 때문에 몇 가지 오류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러한 오류는 그의 노예관에서 가장 명백히 드러난다. 노예들은 항상 힘이 세고 장대하다는 사실을 관찰한 결과, 그는 노예란 자연의 산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가 된다. 따라서 노예는 수단인 동시에 올바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가 된 사람들과 정복 전쟁에 의해 노예가 된 사람들을 확연히 구분하였다. 그는 전자를 노예로 인정했을 뿐 후자는 노예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힘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그 양자간의 우열이 본성적으로 결정되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힘의 사용은 정당화될 수도 있고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각각의 경우에 노예화란 정의롭지 못한 행위의 산물이며 연장일 뿐이다. 동시에 그는 “노예에 대한 적절한 대우”에 관해 “노예들에게는 그들의 봉사의 대가로서 항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유서에도 몇몇 노예의 해방을 유언으로 남겨 놓았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권의 불평등성을 믿었다. 그에 의하면 시민권이 부여되는 자격은 지배할 수도 있고 지배를 받을 수도 있는 인간의 능력을 의미하였다. 즉 시민은 정의로운 행정에 참여하는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갖는다. 그러므로 시민은 정치 집회와 법정에 출석할 수 있을 정도로 적합한 기질과 인품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여유도 가져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이유에서 노동자들도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간도 없고, 적합한 정신이 계발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들이 정책 과정에 참여한다고 해서 이익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누차 강조한 점은, 국가란 인간의 도덕적이며 지적인 완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에 의하면 “국가는 단순히 삶의 영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을 위해서 존재한다.” 또한 “국가는 가족들과 마을들을 완전하고 자족적인 생활로 일체화시키며 따라서 우리는 국가를 통해 행복하며 명예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다.” 결국 “우리의 결론은... 정치, 사회는 고귀한 행동들을 위해 존재하며 단순히 정치 집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한 국가가 과연 선한 삶을 낳을 수 있는가는 그 국가의 통치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5편에서 이미 정의로운 정부 형태와 사악한 정부 형태를 구분한 바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선한 통치자들이 만민의 선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에 후자의 경우에는 사악한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영리만을 추구한다.
어떤 형태를 취하든지 간에 정부는 정의와 적절한 평등의 개념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정의의 개념들은 궁극적으로는 혁명을 낳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민주제가 기초하는 가정은 어떤 면에서 평등한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도 평등해야 한다는 가정이다. 즉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낫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반면에 “과두제”는 “한 가지 측면에서 불평등한 모든 사람은 모든 면에서도 불평등하다고 가정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민주론자들이나 과두론자들이 수적으로 열세를 차지하게 되면 그 시대의 통치 철학도 “그들의 이상과 불일치하게 되며, 따라서 혁명을 자극하게 된다. ... 여기서 바로 ... 혁명의 샘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 혁명적 감정의 보편적이며 주된 원인은 평등에 대한 갈망이다. 즉 그때 사람들은 그들 이상이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오만과 탐욕”이나 공포와 소심 같은 다른 원인들도 간과하지 않았다. 이러한 혁명의 원인들을 제시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정부 형태는 혁명을 적절히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면 왕은 무자비한 행위를 피해야 하며 귀족제는 부유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에 의한 통치를 피해야 한다. 또한 귀족정과 민주정을 혼합하여 중간 계급이 국체의 중심을 이루는 정치 형태는 좀더 유능한 사람들이 좀더 많은 시간을 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법률에 대한 복종심보다 더 엄중하게 주장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 만일 국가가 백성으로 하여금 훌륭한 삶이라고 여길 만한 행복을 성취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활 조건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면 그들은 항상 국가를 비판할 수 있다.
2. 예술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플라톤보다 훨씬 더 긍정적이었다. 플라톤에 있어서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모방 즉 자연에 대한 모방의 문제였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동일하게 이러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플라톤이 몇 가지 형태의 예술에 대해 그토록 경멸적이었던 이유는 예술 작품이란 진리로부터 적어도 세 단계 떨어져 있다는 그의 주장에 연유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참된 실재는 인간의 영원한 이데아이며, 이 이데아의 모방이 주체적인 인간(예를 들면, 소크라테스)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초상화는 모방의 모방이 될 것이다. 결국 플라톤의 예술관은 예술의 인식적 측면에 집중되어 있었고, 따라서 그는 실재로부터 몇 단계 떨어진 예술은 지식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인 형상이 구체적인 사물들 속에만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술가는 보편적인 것들을 직접적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예술가는 사물들을 연구하면서 그것들을 예술의 형식으로 바꾸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인식적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와 역사를 비교하면서 시의 인식론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단지 특수한 인간들과 사건들을 취급하는 역사가와는 달리, 시인은 인간의 근본을 다루며 따라서 보편적이며 경험적이다. 그 양자의 진정한 차이는 역사가 이미 일어났던 것에 관심을 갖는 반면에, 시는 일어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시는 역사보다 더욱 철학적이며 보다 높은 수준에 있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려 하며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표현하려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의 보편성이 의미하는 것은 “어떤 형태의 사람이 어떤 경우에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말하고 행위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시가 지향하는 것은 이러한 필연성”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예술은 인식론적 가치 이외에도 매우 중요한 심리학적 의미를 갖는다. 우선 예술은 인간 본성의 심층 구조를 반영하기 때문이며, 바로 이러한 점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며 모방에 대한 본능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사실상 유년 시절부터 인간의 학습은 모방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본능 이외에도 인간은 예술을 통하여 쾌락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의 유사함을 발견하면서 즐거워하는 이유는, 인간은 그것을 정관함으로써 학습할 수 있고 ... 아, 그것이 바로 저것이구나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사시와 비극과 희극에 대해 자세히 분석하고 있으며 그 각각의 구성 요소와 기능을 제시하고 있지만, 후세에 가장 영향력을 미친 것은 그의 비극에 대한 언급이다. 그는 특히 비극의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하였고,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개념에 집중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길이를 가진 완결된 행위를 모방하며 듣기 좋게 다듬어진 언어를 사용하되 이를 개별적으로 작품의 각부분에 삽입하며 서술 형식이 아니라 드라마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서, 비극은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야기함으로써 “바로 이러한 감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이룩한다.”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은 비극을 통하여 우리가 우리의 감정들을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우리의 심층적 감정들을 대행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발산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의미하는가? 이 두 경우에 모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심층적이며 거대한 고통에 대한 예술가들의 모방은 청중의 가슴에 공포나 연민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러한 감정을 추방하고 더 나아가서 관객의 영혼을 정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비극은 어떤 행동의 모방이다. 공포나 연민을 통하여 이러한 감정들을 적절히 추방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으로 지루하고 힘들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거대한 철학이야기를 마치게 되었다. 며칠째 간헐적인 통증을 느끼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의 완전한 철학체계가 완성된 후 철학을 지향하는 후대의 사람들은 매우 무력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몇몇의 사건이 그러한 무기력을 조장하기도 하였거니와 철학이 과연 인간의 삶에 직접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조명 또한 깊어지게 되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 편에서부터 얼마간 다룰 생각이다. 에피큐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그리고 플로티누스를 다루게 될 것인데 특히 플로티누스(Plotinus 204 ~ 270 A. D.)에 좀더 관심을 가지게 될 듯 하다. 개인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좋아하고 스피노자의 철학은 플로티누스 철학으로부터 일정량의 원액을 제공받은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철학과 삶]이 언제까지 인터넷에 간판을 걸어두고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철학과 삶]을 어렵게 찾아준 분들의 노고에 보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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