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istotelles 5 편 그의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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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823회 작성일 10-08-0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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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론은 그의 신념, 즉 인간을 포함한 자연 안에 있는 만물에게 성취하려는 분명한 ‘목적’과 수행하려는 기능이 존재한다는 그의 믿음에 기초하고 있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는 이렇게 첫 장을 서하였다. “모든 예술과 모든 학문, 또한 모든 행동과 추구는 선(善)을 지향한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윤리학의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이 지향하는 ‘선(善)’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은, 인간이란 선의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선이라는 최고의 원리는 경험 세계나 개인의 감각과는 분리된 것이었고, 정신이 가시계(可視界)로부터 가지계(可知界)로 상승함으로써만 도달될 수 있는 경지였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의 선(善)과 정의(正義)의 원리는 모든 개인들에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 더 나아가 이 원리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발견될 수 있으며 일상생활에서의 현실적인 행동을 통하여 획득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경고하기를, 윤리학의 논의에 있어서는 “그 주제가 허용해 주는 것”보다 더 많은 엄격성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이 주제가 “오류와 잘못”에 감염되기 쉬운 인간을 다룬다고 하여 참과 거짓에 대한 관념이 “사물의 본성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습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술하였던 인간 본성의 구조 속에 존재하는 도덕성의 근거를 [철학과 삶]의 한 편의 철학사 귀퉁이에서 파악하였으면 한다.
1 ) 목적의 종류
아리스토텔레스는 알기 쉬운 실례를 들어 자신의 윤리학을 위한 틀을 마련하였다. 모든 행동은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그는, 목적을 두 종류로 구분하였다. 하나는 ‘도구적’ 목적(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행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본래적’ 목적(그 자체를 위해 수행되는)이었다. “전쟁과 관련되어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은 이 두 종류의 목적을 잘 예증해 준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어떤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을 단계적으로 고려할 때, 우리는 일련의 특수한 행위들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행위들은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지만, 그것들이 완성되어 있을 때에는 결국 다른 목적들을 위한 수단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우선 말고삐 제작자의 기술을 살펴보면, 말고삐가 완성된 것으로 제작자의 목적은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 말고삐는 전투에서 말을 달리는 기마병을 위한 수단이 될 뿐이다. 이와 유사하게 목수도 막사를 건축하는 작업을 끝냈을 때 목수로서의 기능은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그 막사의 경우도 그것이 병사들을 위한 안전한 주거를 제공해 줄 수 있다면, 막사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실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 경우에 목수와 건물에 의해 달성된 목적들은 그 자체로서의 목적이 아니라 도구적인 것이다. 즉 병사들이 그들의 다음 행동 단계로 이동해 갈 때까지 병사들에게 주거를 제공해 주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한편 배의 건조자도 마찬가지로 배를 출항시키는 것으로 건조자의 목적은 실현되지만 이 역시 군인들을 전장으로 수송하거나 전투를 수행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장군들은 전투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하지만 전투는 평화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평화가 전쟁의 진정한 목적일까? 그렇지 않다. 평화란 인간이 ‘인간답게’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목수나 의사나 장군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추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그때 우리는 모든 다른 행동을 수단으로 삼는 데에 도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행동이 “인간이 선(善)임에 틀림없다”고 단언한다.
“선(善)”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선”이라는 단어를 어떤 사물의 특수한 기능과 연결시켰다. 망치의 경우, 어떤 망치가 선하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망치들에 대해 기대하는 기능을 그것이 충실히 수행했을 경우이다. 만일 목수가 건축자로서의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면 그 목수는 선하다. 이는 모든 기술들과 직업들에 공히 적용되는 기준이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보편적 사항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인간의 기술이나 직업을 인간으로서의 그의 기능과 구별하였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선을 발견하기 위해 인간 본성의 기능을 판명하게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선한 인간이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2 ) 인간의 기능
아리스토텔레스는 묻기를, “목수나 구두공이 어떤 일거리와 작업 과정들을 갖고 있는 동안에 과연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아무런 일거리도 없으며 어떤 작업도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혹은 “눈과 손과 발과 신체의 각 부분이 명백히 각자의 기능을 갖는다면 과연 인간은 이 모든 부분들 이외에도 다른 어떤 기능을 갖는다고 규정해도 좋을 것인가?” 확실히 인간은 하나의 분명한 행동 양식을 소유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고유한 행동을 발견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목적은 “단순히 생활의 영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식물적인 이성에 의해서조차도 분류되기 때문이다. 또한 “말이나 소들의 모든 동물”에 공통된 감각적인 생활 역시 인간의 목적으로 부당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파악하였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원리를 대표하는 요소의 능동적인 활동만이 남는다‥. 만일 인간의 기능이 하나의 이상적 원리를 추종하거나 내포한 영혼의 활동이라면, 인간의 선은 덕에 수반된 영혼의 활동임이 증명될 것이다.”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기능은 그의 영혼에 고유한 기능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본성을 묘사하려 하였다.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므로 영혼은 인간 전체와 관련된다고 그는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이라는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또 비이성적인 부분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식물적인 부분이요, 다른 하나는 갈망 혹은 욕망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양자는 “이성적인 원리에 대항하거나 반대하는 것이다.” 인간 내부의 이성적 요소와 비이성적 요소간의 투쟁은 도덕에 관한 제반 문제와 주제를 야기한다. 도덕은 행위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기능이 없다면 어떤 행위를 “선하다”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올림픽 경기의 경우 가장 강하고 훌륭한 사람들은 왕관을 쓰고 있는 자들이 아니라 이들로부터 뽑혀서 명부에 올라가는 사람들이다. 삶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가장 명예롭고 선한 자는 올바르게 승리를 얻는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대한 분석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암시되고 있는 인간의 특수한 행동 양식을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비이성적 부분에 대한 이성적인 통제와 인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선한 인간은 선한 행위를 시시각각으로 행하는 자가 아니다. 선한 인간의 모든 생활은 선으로 항상 충만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 마리의 제비나 단 하루의 화창한 날이 봄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하루나 한 순간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3 ) 목적으로서의 행복
인간의 행동은 그것에 적합한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믿었다. 이러한 목적들은 비록 가치는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선을 결코 달성할 수 없다. 궁극적인 목적이 되기 위해서 하나의 행위는 “자족적”이며 “최종적”이어야 하는데, 그러한 행위는 “항상 그 밖의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인간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마도 “행복”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이라는 사실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쾌락이나 부나 명예를 추구할 때 “그것들의 도구성을 통해 우리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행복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과 마찬가지로 행복도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의 수행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행복이란‥ 영혼이 미덕의 실현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떤 방식으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작용하는가? 도덕성의 보편 법칙은 “정의로운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는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비이성적인 부분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영혼의 비이성적 부분이 통제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의 구성 요소와 메커니즘을 살펴볼 때 명백히 드러난다.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으로서의 욕망은 자아의 외부에 있는 사물들, 즉 대상물이나 다른 인간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외적 요소들에 반응하는 욕망의 두 가지 근본적인 형식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증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욕정”과 “격노”는 이러한 형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욕정적 감정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물이나 인간을 갈망하도록 한다면, 격노의 감정은 그것들을 피하거나 파괴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사랑이나 증오, 당기거나 밀어냄, 창조와 파괴, 이 모든 감정이나 능력은 이내 “혼란으로 치닫는다.” 그 감정들 안에는 어떠한 척도나 선택의 규준도 내포되지 않는다. 인간은 무엇을, 얼마나, 어떤 상황에서 갈망하는가?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부나 명예나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관련시켜야 하는가?
올바른 방식의 행위는 결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도덕적 행위는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어떠한 것도 자연적으로 그것의 본성과 대립되는 습관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습관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올바르게 사유하는 습관, 올바르게 선택하는 습관, 올바르게 행동하는 습관이 도덕의 발전과 관계하는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파악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덕은 일시적으로, 혹은 순간적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연마된 이의 행위 그것을 의미하였다.
4 ) 중용(golden mean)으로서의 덕
감정은 매우 넓은 행동의 영역을 갖기 때문에, 인간은 과다와 과소의 조화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적절한 중용(中庸)을 발견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설하였다. 덕은 우리의 다양한 감정들과 행동들에 관련되는데, 왜냐하면 그 감정들 속에 과다함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공포, 자만, 색욕, 갈망, 연민, 쾌락, 고통과 같은 감정을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느낄 수 있으며 이 두 경우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을 느껴야 할 때 우리는 중용을 취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밝혔다. 이는 인간에게 있어 최상의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는 곧 덕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악덕은 과다나 과소의 극단이며 덕은 그것의 중용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정들이 통제되고 행동들이 인도되는 것은 영혼의 이성적인 힘을 통해서이다. 예를 들면 “용기”의 덕은 두 가지의 악덕, 즉 공포(과소)와 만용(과다)의 중용이다. 그러므로 덕의 상태는 “심사숙고에 의한 선택을 실행하는 상태이며, 상대적인 중용에 머무는 상태이고 이성에 의해 결정되는 상태이며, 실천적이며 지혜로운 인간이 결정하는 상태이다.”
중용은 만인에게 동일하지도 않으며 모든 행동에 대한 하나의 중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중용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각각의 인간에게 상대적이다. 식상의 경우에 있어 성인 운동가와 어린 소녀에게 알맞은 식사량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 양자에 있어서도 적절한 중용이 존재하는바, 그것은 “절제”이다. 여기서 양극단, 즉 포식(과다)와 절식(과소)은 악덕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게 돈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낭비와 인색의 중용으로서 “관대”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인 양이 아니라 사용자의 재산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어떤 행위에는 전혀 중용이 없을 수도 있다. 즉 그 행위들 자체가 악의, 질투, 간통, 절도, 살인과 같이 사악함을 이미 그 본성 속에 내포하고 있는 경우에는 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본질적으로 악하며 과다와 과소를 막론하고 그러한 행동들을 한다는 것은 항상 잘못된 것이다.
5 ) 심사숙고와 선택
이성적 영혼에는 두 종류의 이성적 기능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론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확고한 원리나 철학적 지혜를 제공해 준다. 다른 하나는 실천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 이성적인 지침이 된다. 이는 실천적 지혜이다. 이성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만일 이 이성적 요소가 없다면 인간은 결코 어떠한 이성적인 능력도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강조하였다. 즉 비록 인간은 “올바른” 행동을 위한 생득적인 능력(가능성)을 갖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연적으로” 올바르게 행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무한한 수의 가능성과 흡사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하였다. 선(善)이란 인간 내부의 “가능태”이다. 그러나 도토리가 거의 기계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도토리나무로 되는 것처럼 인간도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그것의 현실태로 계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가 행할 바를 알아야 하고 그것에 관해 심사숙고해야 하며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선택해야 한다. 선을 아는 것만으로도 선을 행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 이외에도 심사숙고에 의한 선택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도덕적 행위의 기원-그것의 목적인(目的因)이 아니라 작용인(作用因)-은 선택이며, 선택의 기원은 갈망과 목적에 대한 견해를 가진 이성적 추리이다.” 이성이 없다면 “선택”도 없다. 따라서 “지성 그 자체는 아무것도 움직이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목적을 지향하는 실천적인 지성만이 어떤 것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할 수 있었고 그것이 전혀 부당한 것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도덕성과 도덕적 선택은 인간의 책임 의식을 전제로 한다. 만일 어떤 행동 양식은 바르고 어떤 행동 양식은 그르다면, 왜 어떤 인간이 올바른 방식 대신에 잘못된 방식으로 행위하는가의 이유를 밝히는 것은 필수적이다. 만일 우리가 칭찬을 하거나 비난한다면, 다시 말해 덕을 찬양하고 악덕을 비난할 수 있다면, 인간은 실로 진실되게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정에 따르면, 어떤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행위는 “자발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비자발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그 정상이 참작되며, 때로는 동정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자발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칭찬과 비난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자발적인 행위와 비자발적인 행위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에 의해 구분된다고 한다. 즉 “비자발적인” 행위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 의해 책임이 없다. ① 그 행위는 특수한 상황들에 대한 무지에서 행해졌다. ② 혹은 외적 강제의 결과이다. ③ 혹은, 더 큰 죄악을 피하기 위해 행해졌다.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발적인” 행위의 경우는 행위자에게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위의 세 가지 조건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6 ) 덕론(德論)
우리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을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의 수행으로서 또한 극단간의 중용으로서 대체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의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각각의 덕목을 여러 감정들에 대한 이성적 통제의 산물로 고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인간 행동의 모든 측면들을 결합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인간의 본성은 이성적인 측면만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식물적인 면과 감각적인 면도 포함된다. 덕은 이러한 본성상의 여러 능력들에 대한 거부나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인간은 자신의 모든 능력들, 즉 육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 모두를 사용한다. 하나는 “지적(知的)” 기능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 기능으로서 그 각각은 나름대로의 덕을 가진다. 따라서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
지적인 덕은 철학적 지혜와 오성인데 그 덕의 발생과 성장은 교육과 학습에 기인한다. 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며 여기서 윤리학(ethike)이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이 명칭은 “습관(ethos)이라는 단어의 파생어이다.” 모든 도덕적 덕들은 학습되어야 하며 또한 실천되어야 한다. 그 덕들은 행동을 통해서만 덕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의로운 행위들에 의해 정의롭게 되며 질서 있는 행위에 의해 절제를 실현하고, 용기 있는 행위에 의해 용기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덕들 중에서 “기본적”인 것들은 용기와 절제와 정의와 지혜이다. 이 덕들 이외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분수에 맞는 재물의 사용, 관용, 우정, 자중과 같은 덕을 고려하였던 흔적이 있다. 비록 그는 이성의 중심 기능을 실천적이며 도덕적인 행동에 대한 지침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결론적으로는 철학적 지혜가 실천적 지혜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명상(contemplation)은 인간을 보다 깊게 행복으로 안내한다는 것이다.
7 ) 명상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처럼, 행복이 우리에게 고유한 본성에 따라 행동할 때 생겨나는 것이라 한다면, 행복은 우리의 최고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처럼 이러한 행위는 명상적인 것이다.” 이 행위가 최상의 것인 이유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이성은 우리의 내면에서 최상의 것일 뿐 아니라, 이성의 대상도 인식 가능한 대상 중에서 최성의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명상은 “가장 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보다도 더 연속적으로 진리에 관해 명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행복이 그것과 결부된 쾌락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적 지혜의 행위들은 가장 환희에 찬 덕행임에 틀림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생각을 철학적으로 신념하였다.
설을 맞아 혼자 내버려진 느낌이다. 종일 서양철학사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주석서를 뒤적였다. 책에 흩어진 활자 인쇄체가 머리 속에 틀어박혀 나를 노려보았다. 오랫동안 서양철학사를 정리할 시간이 없었던 것에 대한 자책이랄까 하는 감정이 뒤섞인 상태에서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렸다. 예전의 어떤 지인(知人)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를 좋아한다고 했었다. 집사람이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 있는 지금 나는 new trolls의 아다지오를 듣는다. 집에서 이 곡은 금지곡 중 하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나름의 무게를 지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 그는 현실에 집착한 시선을 지녔고, 그것이 그의 탁월함이자 한계인 듯 하다. 나는 거의 인간의 이성을 믿지 않는다. 이성은 실제로 인간 감성을 그 원류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감성의 지원 없이 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행위가 이성적일 수는 있지만 행위를 만들어내는 것은 보다 거칠고 야만적이며 부단하고 광막한 정서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인간을 신뢰하는 것은 그가 이성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단순히 인간이기 때문이며 살아 있기 때문이고, 생명을 지니고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고독에 지쳐보라. 삶에 지쳐보라. 잔인에 지쳐보라. 그 때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선과 악을 떠나, 또는 이성이나 도덕을 떠나, 결과나 의미를 떠나 우리가 이 현실 가운데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인간 외에 많지 않음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인간이 가능했고, 사회가 가능했고 또 문명과 질서와 가치가 나름의 격조를 지니고 조형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인간을 떠나 숲으로, 바다로, 대륙으로, 고도로 도시와 촌락, 그리고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를 버리고 떠나버렸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논단은 어떤 정의에 이르기 어렵다. 인간은, 혹은 그 행위는 악덕도 아니고 지선도 아니며 다만 존재이며 삶일 뿐이라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알았다면 어떠하였을까 생각한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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